낸시 린디스판(Nancy Lindisfarne), 조나선 닐(Jonathan Neale)
번역: 윤미래, 강준희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서방 강대국들과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서방언론, 그들을 받아쓰는 대부분의 언론들이 말하지 않는 새로운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분석하는 중요한 글이다. 이 글의 필자인 미국의 독립적 사회주의자인 낸시 린디스판과 조나선 닐은 인류학자로서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직접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었고 그 이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인들과 교류하고 연대해 오면서 수많은 글을 써 왔다. 조나선 닐은 생태사회주의자로서 작가이며, 기후 활동가이고, 인류학자, 동화 작가, 등산가, 에이즈 환자들의 조력자 등의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제국주의, 기후정의, 젠더 억압과 젠더 정의 등에 대한 많은 책과 글을 써왔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두 개의 미국>, <기후변화와 자본주의> 등은 국내에도 출판돼 있다. 매우 긴 글이어서 불가피하게 일부 부분은 생략했다. 긴급하게 번역해 준 두 분에게 매우 감사드린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영국과 미국에서 틀린 글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이 글들의 대부분은 몇 가지의 중요한 진실들을 은폐한다.
첫째, 탈레반이 미국을 이겼다.
둘째, 탈레반이 이긴 것은 인민의 지지를 더 많이 얻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탈레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점령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넷째, ‘테러에 대한 전쟁’은 미국에서도 정치적으로 패배했다. 이제 미국인들의 다수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에 찬성하고 외국에서의 또다른 전쟁에 반대한다.
다섯째, 이것은 세계사적 전환점이다. 세계 최강대국이 절망적으로 가난한 소국의 인민에게 패배한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에서 미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여섯째,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구하자는 미사여구는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점령의 편을 들었다. 그 결과는 페미니즘에 있어 비극이다.
이 글에서는 위의 사항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지면의 한계상 주장에 대한 근거를 상술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거의 50년 전에 그 곳에서 인류학자로서 현장 답사를 했던 이래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의 젠더, 정치, 전쟁에 대해 많은 글을 써왔다. 우리는 이 글들 중 많은 수를 말미에 링크로 첨부하여 우리의 주장을 더 상세히 찾아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군사적 승리
이것은 탈레반의 군사적, 정치적 승리이다. 군사적 승리인 이유는 탈레반이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최소한 지난 2년간 아프가니스탄 정부 세력(정부군과 경찰)은 매달 신규 모집자보다 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세가 줄어들어 왔다.
지난 10년간 탈레반은 점점 더 많은 마을을 장악해 왔다. 그리고 지난 12일 동안 그들은 모든 도시를 접수했다. 도시들을 통과해서 카불까지 가는 전격전이 아니었다. 도시를 접수한 이들은 그 순간을 기다리며 인근의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북부 전역에서 탈레반은 꾸준히 타지크인과 우즈베크인, 아랍인을 대원으로 모집해 왔다.
이것은 또한 탈레반의 정치적 승리이기도 하다. 지상의 어떤 게릴라 반군도 인민의 지지 없이 이러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지지’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선택을 해야 했고 점령하고 있는 미군보다는 탈레반을 고른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더 많았다는 말이 맞다. 전부가 그랬다는 말이 아니다. 더 많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다 많은 사람이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의 정부보다 탈레반을 골랐다. 다시 말하건대 전부가 그랬다는 말이 아니다. 가니를 지지하는 사람보다는 많은 사람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 군벌세력보다 탈레반을 고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더 많았다. 셰베르간의 도스툼과 헤라트의 이스마일 칸의 패배는 그 충격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탈레반은 압도 다수가 파쉬툰족이었고 그들의 정책은 배외주의적이었다. 2021년 탈레반은 민족 구성이 다양하며 우즈베크인과 타지크인들이 지배적인 지역에서 세를 잡고 있다. 중요한 예외는 중앙 산맥의 하즈라인 지역인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모든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탈레반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전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나 정부, 혹은 군벌들의 편에서 싸웠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양편 모두와 타협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느 쪽을 골라야 할지 몰라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미국 세력의 군사적 패배이기 때문에 바이든에게 감놔라 배놔라 요구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계속 머물렀더라면 항복하거나 죽어야 했다. 이것은 지금의 참사 이상으로 미국에 굴욕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전임자 트럼프가 그랬듯이 바이든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왜 그렇게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탈레반을 선택하였는가
탈레반을 선택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 꼭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대부분 탈레반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주어진 선택이 한정된 상황에서 그들이 내린 선택이 그랬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짧게 말하면 탈레반이 미 점령에 대항하는 하나뿐인 유의미한 정치 조직이고 아프가니스탄 사람의 대부분이 미국의 점령을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9/11 한 달 후에 처음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폭격기와 약간의 보병 부대를 보냈다. 미국을 지지하는 것은 북부 지역의 비파쉬툰족 군벌 연합인 북부 동맹 세력이었다. 하지만 북부 동맹의 병사들과 지도자들은 미국과 함께 싸우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외세의 침략에 오랫동안 저항해온 (특히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러시아의 점령에 저항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집권한 탈레반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북부동맹군과 탈레반군은 전쟁을 하는 시늉만 했다. 미국, 영국 및 외국 동맹국이 폭격을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과 정보 기관의 협상이 이 교착 상태를 끝냈다. 미국은 카불에서 권력을 잡고 자신이 선택한 대통령을 앉히는 대신 탈레반 지도자들과 말단 대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망명하도록 허용했다. 너무나 알 만한 이유에서, 이 합의는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도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 합의가 널리 알려졌다.
바로 직후에 일어난 일이 이 합의의 가장 강력한 증거다. 뒤따르는 2년 동안 미국의 점령에 대해 어떤 저항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어떤 마을에서도, 한 건도 말이다. 이 마을들에는 수천 명의 전직 탈레반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2003년 점령 첫날부터 광범위한 저항이 일어났던 이라크나, 1979년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점령과 비교해보라.
단지 탈레반들이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남부 지역에 있는 탈레반의 심장부에서조차 평범한 사람들이 미국의 점령이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오고 경제를 성장시켜 극빈을 종식시킬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평화가 중요했다. 2001년 시점에서 아프가니스탄은 23년이나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의 내전, 그 다음에는 이슬람주의자들과 소비에트 침략자들 간의 전쟁, 그 다음에는 이슬람주의 군벌들 간의 전쟁, 그 다음엔 이슬람주의 군벌들과 탈레반의 전쟁이 이어졌다.
23년간의 전쟁이란 죽음, 불구, 망명, 난민, 빈곤, 수많은 종류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을 뜻했다. … 사람들은 절박하게 평화를 원했다. 2001년이 되면 심지어 탈레반 지지자들조차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엄청나게 부유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미국의 점령이 경제 개발로 이어져 그들을 빈곤에서 구하리라 믿었다. 그들은 기다렸다. 미국은 그들에게 평화가 아닌 전쟁을 가져다주었다.
미국과 영국은 탈레반의 심장부인 남쪽과 동쪽의 파쉬툰 지역에서 온갖 마을에 군사 기지를 점령했다. 이 부대들은 미국과 탈레반 사이의 비공식적 합의에 대해 듣지 못했다. 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시 행정부에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 부대들은 마을에 남아있는 것이 명백했던 (탈레반) “나쁜 놈”들을 마저 찾아 소탕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알았다.
그들은 야간에 마을을 습격해 문짝을 부수고, 가족들을 놀라게 하거나 모욕하고, 다른 나쁜 놈들에 대한 정보를 불라고 고문할 목적으로 남자들을 끌고 갔다. 이 곳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의 블랙 사이트[미국의 숨겨진 감금 시설들을 이르는 말: 옮긴이]들에서 미국 군대와 정보국은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세계가 잠깐 엿보게 될 새로운 고문 기법들을 개발했다. 감금된 남자들 일부는 싸우지 않고 있던 탈레반이었다. 일부는 땅 욕심이나 사적인 원한으로 이웃에게 고발당한 사람들이었다.
미군 병사 조니 리코의 회고록 <풀은 피를 머금고 푸르고 Blood Makes the Grass Grow Green>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 유용한 기록을 제공해준다. 분개한 친척과 이웃들이 야음을 틈타 미군에 총을 몇 발 쏘았다. 미군은 더 많은 문짝을 부수고 더 많은 남자들을 고문했다. 마을 사람들은 더 많은 총탄을 쏘았다. 미군은 지역을 공습했고 집집이 연이어 폭탄에 맞아 죽었다.
남쪽과 동쪽 전역에서 전쟁이 돌아왔다. 불평등과 부패는 하늘로 치솟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모두를 부양할 수 있는 개발을 희망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대외 정책을, 그리고 자국에서조차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미국의 상위 1%의 집착을 모르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자금이 아프가니스탄에 흘러갔다. 그러나 그것은 하미드 카르자이가 이끄는 새 정부의 사람들에게, 미국이나 다른 외국의 점령군과 협력하는 사람들에게, CIA와 파키스탄 군대에 의해 촉진된 국제 아편과 헤로인 거래에 깊이 관여한 군벌과 그 측근들에게 돌아갔다. 그것은 카불에서 호화롭고 잘 보호된 주택을 소유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 돌아가 그들이 외국인에게 집을 임대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것은 외국 자금을 받는 NGO에서 일하는 남녀에게 갔다. 이 집단들의 인적 구성은 당연하게도 서로 겹쳤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부패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부정부패를 예상하면서도 증오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부정부패는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규모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중하층의 사람들에게 이 가공할 새로운 부는 어떻게 윤색하든 부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탈레반은 전국적으로 두 가지를 제공했다. 첫 번째는 2001년 이전에 공직에서 부패하지 않았듯이 그들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세력이었다.
특히나, 탈레반은 그들이 통제하는 농촌 지역에서 정직한 사법 시스템을 운영해 왔다. 그들의 명성은 너무 높아서 도시의 민사 소송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양 당사자가 시골에 있는 탈레반 판사에게 갈 것이라는 데 동의할 정도였다. 이를 통해 대규모 뇌물 없이 신속하고 저렴하며 공정한 판단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판단이 공평했기 때문에 양 당사자 모두가 수긍할 수 있었다.
탈레반이 통제하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공정한 사법은 불평등에 대한 보호이기도 했다. 부자들이 재판관들을 매수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땅이 특히 중요했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 군벌, 정부 관리들은 소작농의 땅을 탈취하거나 훔치거나 속이고 더 가난한 소작인들을 압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탈레반 재판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판결을 내릴 의사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여겼다. 부정부패, 불평등, 점령에 대한 증오가 한데 뒤섞여 결합되었다.
20년 후
9·11 테러 이후 탈레반이 미군에게 넘어간 2001년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전쟁과 위기로 점철된 20년은 정치적 대중 운동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기 충분한 시간이다. 탈레반은 배우고 변화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인과 많은 외국 전문가들이 이에 대해 논평한 바가 있다. Giustozzi는 ‘네오 탈레반’이라는 유용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공개적으로 드러난 이 변화들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탈레반은 파쉬툰의 우월주의가 큰 약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제 자신이 무슬림이며 다른 모든 무슬림의 형제이며 많은 민족의 무슬림들을 원하며 또 그들의 지지를 얻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에는 탈레반 세력에 쓰라린 분열도 있었다. 소수의 탈레반 전사와 지지자들은 ISIS와 동맹을 맺었다. 이들 간의 차이는 ISIS가 시아파, 시크교도 및 기독교인에 대한 테러 공격을 벌인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탈레반이나 파키스탄 정보부가 후원하는 소규모 하콰니 점조직도 이런 짓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탈레반은 대체로 그러한 모든 공격을 진심으로 규탄해왔다.
…
새로운 탈레반은 또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자신들의 공감을 강조해왔다. 그들은 음악과 비디오를 환영한다고 밝히고 예전의 가장 전투적이고 청교도적인 측면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그들은 구질서의 사람들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으며 평화롭게 통치하고 싶다고 거듭하고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
이 중 어느 정도가 선전이고 어느 정도가 진실인지는 가리기 어렵다. 더욱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아주 많은 부분 경제가 어떻게 되는지나 외세의 행동에 달려 있다. …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미국인, 군벌, 아쉬라프 가니 정부보다 탈레반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어떻게 하죠?
많은 독자들이 지금쯤 마음이 조급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어떻게 해요? 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197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여러 특정한 젠더 불평등 시스템들이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계급 불평등 시스템과 얽혀 있다. 아프가니스탄도 다르지 않았다.
낸시는 1970년대 초반에 북부 파쉬툰족 여성과 남성과 함께 인류학적 현장 답사를 했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 Nancy는 이 조사 후 <물물교환된 신부: 부족 사회의 정치와 결혼 Bartered Brides: Politics and Marriage in a Tribal Society>를 냈는데 이 책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계급, 성별, 인종 구분 사이의 연결을 설명하고 있다. 이 여성들이 자신의 삶, 문제, 기쁨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싶다면, 낸시와 그녀의 전 배우자인 리처드 태퍼가 낸 <아프가니스탄 마을의 목소리 Afghan Village Voices>라는 책이 있다. 이것은 현지 조사에서 채록한 많은 남녀의 육성을 옮겨 쓴 것이다.
그 현실은 복잡하고, 쓰라리고, 억압적이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미국의 성차별과 계급 문제의 복잡한 현실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반세기의 비극은 많은 것을 바꿀 것이었다. 그 오랜 고통은 탈레반의 특정한 성차별을 낳았는데, 이는 아프가니스탄 전통에서 자동으로 도출된 결과가 아니다.
이 전환은 1978년에 시작되었다. 이 때 공산주의 정부와 이슬람주의 무자헤딘 반군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승세를 잡자 1979년 소련이 침공해 공산주의 정부를 뒷받침했다. 7년간 소련군과 무자헤딘의 유혈낭자한 싸움이 따랐다. 1987년 소련 군대는 패배하여 떠났다.
1970년대 초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살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좋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세 가지 열정을 품고 있었다.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 대지주들의 권력을 타도하고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것, 그리고 여성의 평등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8년에 공산주의자들은 진보적인 관료들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그들은 대부분이 시골 지역인 나라에서 촌락민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은 시골 지역의 이슬람주의 반군들을 구속하고 고문하고 폭격하는 방식으로밖에 대응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군대가 이런 잔인한 일을 자행하면 할수록 저항은 더 커졌다.
그런 다음 소련이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침략했다. 그들의 주요 무기는 공중 폭격이었고, 국가의 많은 부분이 자유폭격 지역이 되었다. 50만에서 100만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죽었고 적어도 백만 명이 평생 불구가 되었습니다. 600만~800만 명이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망명했으며 수백만 명이 역내 난민이 됐다. 이 모든 것이 고작 2천 5백만의 인구를 가진 나라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집권 후에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토지 개혁과 여성의 권리를 위한 입법이었다. 러시아인들이 침략했을 때,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 편에 섰다. 그 중 많은 사람이 여성이었다. 그 결과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은 고문과 학살에 대한 지지로 더러워졌다.
미국이 1,200만에서 2,400만 명의 미국인을 죽이고 모든 도시에서 사람들을 고문하고 1억 명의 미국인을 망명하게 한 외세의 침공을 받았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미국의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이 침략자들을 지지했다고 상상해 보자.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또 다른 외세의 침략이나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겠는가?
이번에는 [소련이 아닌] 미국이 아프간 여성들을 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침공해 왔을 때,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겠는가? 소련 점령 하에서의 사망자, 불구자, 난민에 대한 통계는 추상적인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은 살아 있는 여자들이었고, 그들의 아들과 딸들, 남편들, 형제 자매들,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었다.
그래서 소련이 패배하고 떠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 침략자들에 대한 무자헤딘 저항의 주도했던 지역 지도자들은 지역 군벌이 되어 승리의 전리품을 놓고 서로 싸웠다. 대다수의 아프간인들은 무자헤딘을 지지했었지만 이제는 탐욕, 부패, 끝없는 무익한 전쟁에 신물이 났다.
탈레반의 계급적, 난민적 배경
1994년 가을, 탈레반은 대부분이 파쉬툰 도시이자 남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큰 칸다하르에 도착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20세기에 일어난 두 가지 변화, 즉 공중 폭격과 파키스탄의 난민 수용소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던 엘리트들과는 다른 사회 계급에 속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도시 중산층이나 자기 소유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한 토지가 있는 시골의 중농 집안의 아들딸이었다. 카불에 있는 국가의 유일한 대학에 다녔던 사람들이 그들을 주도했다. 그들은 대지주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국가를 현대화하기를 원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이슬람주의자들은 주로 비슷한 계급 배경을 가진 남성들이었고 대부분 같은 대학의 학생 출신이었다. 그들도 나라를 현대화하기를 원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러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카이로에 있는 무슬림 형제단과 Al-Alzhar 대학의 이상에 기대를 걸었다.
탈레반이라는 단어는 공립학교나 대학교가 아닌 이슬람 학교의 학생을 의미한다. 1994년에 칸다하르에 입성한 탈레반의 전사들은 파키스탄의 난민 수용소에 있는 자유 이슬람 학교에서 공부한 젊은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무산자의 아이들이었다. 탈레반의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마을 물라들이었다. 그들은 도시 모스크의 많은 이맘들이 가진 엘리트들과의 인맥을 갖지 못했다. 마을의 물라들은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다소간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주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부 관료들에 한참 못 미쳤다.
탈레반은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이끌었는데 12명 모두가 전쟁에서 소련의 폭탄에 한쪽 손, 발, 또는 눈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탈레반은 또한 무엇보다도 중하위층 파쉬툰 시골 남성들의 정당이었다. 20년 간의 전쟁은 칸다하르를 무법 상태로 만들고 서로 싸우는 군벌들의 손에 떨어뜨렸다.
전환점은 탈레반이 소년과 2명(3명일 수도 있다) 여성을 강간한 지역 사령관을 붙잡아 교수형에 처했을 때 찾아왔다. 그들의 개입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 이유는 살인적인 내분을 종식시키고 사람들의 존엄과 안전을 회복하려는 의지만이 아니라 다른 이슬람주의자들의 위선에 대한 혐오 때문이기도 했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사우디, 미국, 파키스탄의 군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중앙 아시아의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을 수용할 수 있는 평화로운 나라를 원했다. 탈레반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그들이 부과하려는 금지 명령과 규칙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데 예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질서와 약간의 안전이 돌아온 데 감사했지만 탈레반은 종파적이었고 국가를 통제할 수 없었다. 1996년 미국인들은 지원을 철회했으며 이 때 그들은 탈레반에게 새로운, 그리고 아주 지독한 이슬람 혐오를 분출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거의 하루아침에 갑자기 무력하고 억압받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남성(일명 탈레반)은 광신적인 야만인, 소아성애자, 가학적인 가부장, 그러니까 거의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간주되었다.
9/11 이전 4년 동안 탈레반은 미국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을 위시하여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보호하라는 아우성이 빗발쳤다. 미국의 폭격이 시작될 즈음에는 아프간 여성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잘못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9/11과 미국 전쟁
폭격은 10월 7일에 시작되었다. 며칠 만에 탈레반은 숨어야 했거나 (데일리 메일 1면에 실린 사진에서처럼) 말 그대로 거세되었다. 이 당시 공개된 전쟁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폭력성과 가학성을 드러냈고 많은 유럽인들이 폭격의 규모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미군의] 극도의 경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미국에서는 복수와 애국심이 뒤섞여 반대 목소리는 희소하고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사바 마흐무드가 당시에 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 '왜 서양의 미디어에서는 전쟁, (이주, 군사화), 굶주림(무자헤딘 하의)이 교육, 고용 부족, 그리고 가장 놀랍게도 (탈리반 하의) 서양식 복식보다 여성에게 덜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었을까?’
그리고 조금 더 강하게 물어보자. 어떻게 여성들 자신은 물론 그들의 아이, 남편, 아버지와 형제들을 포함해 민간인들을 폭격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 하나로 그 주장을 일축하기엔 충분했어야 할 터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성주의적 이슬람 혐오의 가장 지독한 표출은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서 일어났다. 극도로 불공정한 보복 전쟁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으므로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하여 2001년 11월 17일 미국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는 베일을 쓴 아프간 여성들의 곤경을 크게 한탄했고 영국 총리의 부인인 체리 블레어(Cherie Blair)는 며칠 후 이 감정에 소리내 공명했다.
이 부유한 전쟁광의 부인들은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리엔탈리즘 패러다임을 총동원했고, '아프간 여성을 구하라'는 미국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많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끈질긴 외침이 되었다.
2008년 오바마가 당선되면서 이슬람 혐오의 합창은 미국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잡았다. 그 해에 미국의 반전 동맹은 오바마의 선거 운동을 돕기 위해 실질적으로 청산되었다. 오바마의 전쟁 매파인 국무 장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던 민주당원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둘 다 석유를 위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끝없는 석유 전쟁을 정당화해줄 단 하나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고통이었다. 여성주의적 전회는 영리한 책략이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탈레반의 성차별적인 통치와 미국의 성차별 양상들 사이의 비교를 논의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더 충격적이게도, 지독하게 불공정한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순화하고 사실상 대체해 버렸다. 이 여성주의적 전회가 상정하는 이른바 '구원해야 할 여성'들은 미국의 폭탄에 의해 죽거나, 부상당하고, 고아가 되거나, 집을 잃거나, 기아에 시달리는 수만 명의 실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과 남성과 아이들과는 완전히 별개로 취급됐다.
미국에 있는 우리의 많은 친구와 가족들이 페미니스트이다. 그들은 선량한 마음으로 이 선전을 많은 부분 믿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지를 구해온 담론은 허위 사실로 쌓은 구조물이며 페미니즘의 왜곡이었다. 그것은 침략자와 부패한 엘리트 지배층의 페미니즘, 고문과 드론 폭격의 페미니즘이었다. 우리는 다른 페미니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탈레반이 매우 성차별적이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여성혐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것이 필연은 아니었다. 소련 침략자들의 잔인한 폭력을 거들었던 공산주의자들은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페미니즘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 때 미국이 침공했고, 새로운 세대의 아프가니스탄 전문직 여성들이 여성의 권리를 얻기 위해 새로운 침략자들의 편에 섰다. 그들의 꿈 또한 부역, 수치심, 유혈로 끝났다. 물론 일부는 자금을 얻으려고 진부한 빈말을 지껄이는 출세주의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정직하고 헌신적인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실패는 비극적이다.
고정 관념과 혼란
아프가니스탄 밖에서는 지난 25년 동안 발달해온 탈레반에 대한 고정 관념을 둘러싸고 많은 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봉건적이고 잔인하며 원시적이라는 고정 관념을 들을 때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들은 노트북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14년 동안 카타르에서 미국인들과 협상을 해온 사람들이다.
탈레반은 중세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최악의 시기가 낳은 산물이다. 그들이 더 나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시대에 비해 퇴보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중 폭격, 난민 수용소, 공산주의, 테러 전쟁, 고문, 기후 변화, 인터넷 정치,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치솟는 불평등 아래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이들 역시 현재에 살고 있다.
그들이 부족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도 혼란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리처드 태퍼가 말하듯이 부족 또한 진공 상태에 존재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이 부분에 살고 있는 농민들이 국가와의 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단순히 경쟁하는 인종 그룹의 문제였던 적이 없다. 오히려 그룹 간의 복잡한 동맹과 그룹 내의 분열의 문제였다.
좌파 가운데서 퍼져 있는 일련의 편견은 몇몇 사람들에게 탈레반이 "진보적"이 아닌데 어떻게 가난한 사람의 편이고 반제국주의적일 수 있는지 묻게 한다. “진보적”이라는 단어에는 거의 아무런 [구체적인] 의미가 없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탈레반은 당연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다. 그들은 자신이나 부모, 조부모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하고 고문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20년에 걸친 게릴라전을 벌이고 대제국을 패퇴시킨 운동이 반제국주의적이지 않다는 건 형용모순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탈레반은 제국주의 점령에 맞선 빈농들의 운동이고, 뿌리깊게 여성혐오적이면서, 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어떤 때는 인종주의적이고 종파주의적이며 어떤 때는 그렇지 않다. 역사가 만들어낸 모순의 덩어리다.
탈레반의 계급 정치 역시 혼란스럽게 여겨지곤 한다. 어떻게 그토록 명백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섰으면서도 사회주의에 그렇게 심하게 반대할 수 있는가? 대답은 러시아 점령의 경험이 사회주의적 계급 형성의 가능성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계급의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빈농 기반의 어떤 대중운동도 가난한 농민의 편에 선 것으로 사람들에게 여겨지지 않고서 권력을 장악한 적은 없다.
탈레반은 계급의 언어가 아니라 정의와 부패의 언어로 말하지만, 어느 편이라는 것인지 그것이 가리키는 함의는 같다. 이 중 어느 것도 탈레반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통치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100년이나 그보다 더 오랫 동안 농민 반란이 집권 후에 도시 엘리트 통치로 전락해버린 사례를 충분히 많이 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탈레반이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를 의도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선 안 된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난민을 환영하자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때때로 이 질문은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탈레반을 반대하고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남성이 탈레반을 지지한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말이 사실인 사회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인 질문도 있다. 아프가니스탄 페미니스트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이것은 타당하고 적절한 질문이다. 답은 그들에게 비행기표를 사서 유럽과 북미로 피난처를 제공하도록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망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만이 아니다. 점령을 위해 일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망명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위해 일한 사람들의 수는 더 많다.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존경할 만하고 일부는 부패한 괴물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 어딘가에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냥 어린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도덕적 당위가 있다. 미국과 나토 국가들은 20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냈으니, 자신들로 인해 삶을 망쳐버린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은 최소한의 최소한이라 할 만한 의무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도덕적 문제도 있다. 지난 40년 동안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배운 것은 지난 10년 동안의 시리아가 겪은 고통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는 일을 하도록 이끄는 배경과 개인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겸손이 있다면 젊은 공산주의자 여성, NGO에서 일하는 교육받은 페미니스트, 자살 폭탄 테러범, 미국 해병대, 마을 물라, 탈레반 전사, 미국 폭탄으로 사망한 아이의 유가족, 시크교 환전사, 경찰, 아편을 재배하는 가난한 농부를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미국과 영국 정부가 그들을 위해 일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것은 수치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사실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이민에 대한 인종주의는 인류 전체보다도 존슨과 바이든의 행동을 특히 더 많이 제약하고 있다.
아프간인을 환영하는 캠페인 역시 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강력한 도덕적 논증은 인종주의와 이슬람 혐오에 판판이 맞닥뜨릴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 독일과 네덜란드 정부는 아프간인에 대한 모든 추방을 중단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지지하는 모든 곳의 모든 정치인에게 모든 아프가니스탄인에게 국경을 개방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밖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처럼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국경 개방을 위한 시위에 참여하자.
마지막으로 그레이엄 나이트의 말을 인용하겠다. 그의 아들인 영국 공군의 벤 나이트 상사는 2006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했다. 이번 주에 그레이엄 나이트는 언론 협회에 영국 정부가 민간인을 구조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영국이 떠날 것이라고 말하자마자 탈레반이 탈레반을 장악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습니다. 탈레반은 우리가 나가자마자 들어가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승산이 없는 전쟁으로 우리가 무고한 목숨을 잃었는가의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우리가 그 나라 토착민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 살면서 우리가 거기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기사 등록 20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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