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이것은 폭동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향한 분노의 폭발이다
“여러분은, 자유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적들에게 알림으로써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태도를 취하면 저들은 여러분에게 ‘미친 흑인’이라는 딱지를 붙일 것입니다. 아니 ‘미친 깜둥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 아니 극단주의자나 전복세력, 선동분자, 빨갱이, 급진파라고 부를 것입니다.”(맬컴 X)
맬컴 X는 ‘국가 폭력에 맞선 자기방어는 폭력이 아니라 지성’이라고 했다. 마틴 루터 킹은 ‘폭동’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의 목소리”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폭력과 약탈’만을 부각해서 호들갑 떠는 미국의 주류언론들을 보면서 한 랩퍼가 말한 것은 지금 거리에 나선 흑인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대변하는 것 같다. ‘드디어! 드디어! 저 개자식들이 우리 말을 듣고 있어’
억압받고 착취받는 사람들이 분노와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 다양했다. 청원, 소송, 선거, 직접행동, 시민불복종, 집회, 행진, 파업, 그리고 폭동. 물론 지금 투쟁의 주된 양상은 평화 시위와 행진인데 언론인 선정적, 의도적으로 ‘폭력과 약탈’만을 부각하고 있다는 말은 타당하다. 또 시위대 속에서 서로를 돕고 위하는 감동적인 장면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데, 백인 극우단체들이 일부러 폭력과 약탈을 저지르면서 카오스를 조장하려고 한다는 소식도 일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폭력은 잘못이다’는 관점에서, 지금 투쟁이 파괴적 방식과 격한 충돌로 나타나는 이유를 음모와 수상한 배후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항상 폭력에 대해서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였는지와 선후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흑인들의 ‘폭동’과 시위대의 ‘약탈’이 있기 전에, 트럼프와 기득권 세력의 ‘약탈’과 경찰들의 ‘폭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00명의 억만장자들이 미국 인구 하위 60%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게 트럼프의 미국이다. 코로나 재앙 속에 4명 중 1명이 실업자가 됐고, 세입자의 3분의 1은 집세를 낼 수 없는 처지이고, 푸드뱅크 앞에 줄 선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게 소수인종이나 미등록 이주민들에게는 몇 배로 힘겨운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조직 플로이드가 숨막혀 죽은 것이고, 그는 경찰 폭력으로 매해 1000여 명씩 죽어가는 희생자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추모와 항의에 나선 사람들이 직면한 것도 경찰 폭력이다. 최루탄, 고무탄, 섬광 수류탄이 발사됐고 경찰차로 밀어버렸다. 미국 정부는 코로나 보호장비들은 비축하고 있지 않았지만, 최루탄과 고무총탄은 충분히 비축해 두고 있었다는 것이, 감염병 극복이 아니라 시위대 진압만 준비해 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금 트럼프는 이 투쟁에 대한 폭력 진압을 주도할뿐 아니라 폭력적 충돌을 더욱 부추기면서 군대 투입까지 추진하고 있다. 또 ‘외부세력 개입’론을 펴면서 ‘안티파’와 무정부주의자 등을 비난하며 ‘테러단체로 지정해서 불법화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안티파(ANTIFA) 등이 폭력과 약탈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이다.
‘안티파’는 현재 미국에서 하나의 단일한 조직도 아니고, 느슨한 대중적 경향과 분위기이다. 그리고 안티파가 이처럼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 이유가 궁금하면 트럼프를 보면 된다. 대통령이 백인우월적 인종주의자이고 파시스트적 선동을 하고 있으니 반(ANTI)파시즘 경향이 호소력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과도하게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안티파는 문제가 많고 어느 정도 조치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것처럼 큰 실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진짜 위험한 테러단체는 바로 트럼프 행정부이고, 트럼프의 주요 지지그룹인 대안우파, 신나치, KKK 등이다. ‘깡패국가’에 대한 국제적 제재가 정당하다면 지금 제재 받아야 할 것은 바로 코로나 사망자 10만명을 낳고도 경찰폭력에 매달리는 트럼프 정부다.
결국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하나의 방아쇠였을 뿐이다. 모든 소식들은 지금 미국 전역의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인종과 연령과 성별의 사람들이 비조직적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64%가 이 시위에 공감한다고 답했다. 버스 노동자들이 경찰병력 이송을 거부했고, 페이스북 직원들이 트럼프의 헛소리를 게재하는 데 항의하는 온라인 작업중단을 준비한다고 한다. 경찰과 군대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불거져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 중요한 것은 폭력/ 비폭력이 아니다. 이 불의하고 폭력적이고 약탈적인 제국을 바꾸기 위해서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고 정의로운 수단과 방법이냐가 핵심 문제다. 소수가 앞장서고 나머지는 구경하고 응원하는 게 아니라 다수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가 문제이다. 92년 LA폭동 때처럼 저들의 이간질에 말려들지 말고, 어떻게 하면 지금 등장하는 다인종적 민중 저항을 더욱 더 발전시킬 것인가가 문제이다.
특히 얼마 전까지 버니 샌더스 선거운동에 앞장섰던 활동가들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그들이 선거운동과 교사파업 연대 속에서 보여 준 의지와 열정은 지금 더욱 더 필요하다. 지금이 훨씬 더 판돈이 큰 싸움이며, 우리가 촛불을 들고 박근혜를 임기 전에 끌어내리면서 ‘다음은 트럼프’라고 했던 말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5년 전에 자넬 모네 등 미국의 유명 흑인 가수들은 경찰 총격으로 죽어간 수많은 흑인들의 이름을 담은 노래를 함께 부르며 잊지 말자고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YHIUve8V2zo&feature=youtu.be 이제 그 명단은 훨씬 더 늘어났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살아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워야 할 시간이다.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 “제발, 제발, 제발, 숨을 쉴 수 없다”
“제발, 제발, 제발, 숨을 쉴 수 없다. 배가 아프다. 목이 아프다. 온 몸이 아프다. 나를 죽이지 말아달라”
덩치가 커서 ‘빅’ 플로이드라는 애칭으로 불렸다는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무릎에 깔려서 지른 비명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르다가 숨졌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비극이 벌어진 미니애폴리스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으로 ‘시위, 행진, 방화, 약탈, 폭동’이 번져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언론들은 '방화,약탈'만 부각하고 있다.
(그것은 이 투쟁의 주된 측면이 아니다. 이 영상을 보면 2016년의 한국 촛불시위가 떠오를 것이다. 또 흑인만이 아니라 정의를 요구하는 백인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약탈, 폭동’이라며 흑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경찰 폭력으로 흑인들이 계속 죽어나갈 때, 흑인을 죽인 경찰들이 제대로 기소나 처벌도 안될 때, 코로나 사망자의 압도 다수가 흑인으로 드러날 때, 강도로 오해받을까봐 마스크를 쓰기 어려운 흑인들이 많을 때, 오바마도 그런 현실을 바꾸지 못했을 때, 백인 우월주의자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그 인종주의자가 맨날 트위터로 가짜 뉴스나 올리고 있을 때, ‘내가 아니었으면 200만명이 죽었을 것’이라며 코로나 사망자 10만명을 눙칠 때, 버니 샌더스의 도전은 실패했을 때, 조 바이든에게는 희망을 느낄 수 없을 때... 이럴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놀라운 것은 가난한 흑인들의 분노의 크기가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참아왔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진정한 ‘약탈’은 가난한 흑인들이 아니라 트럼프, 부동산 재벌들, 억만장자, 다국적 자본, 민간병원, 제약회사, 교도소 등이 저질러 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다. 이들을 보호해 온 트럼프와 경찰이 지금 흑인들을 ‘약탈’, ‘폭동’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웃기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난한 흑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희망없는 것인지는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넷플릭스 영화 <올 데이 앤 어 나이트>는 흑인들의 삶 속에 가난, 범죄, 마약, 감옥이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러나 역시 최고는 미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었다. 특히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오뉴블>에서 너무나 사랑스러운 영혼이었던 흑인 성소수자 푸세 워싱턴의 죽음과 거의 똑같다.
드라마 속에서 푸세를 위한 정의도 물론 실현되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벌어진 푸세의 죽음에 분노한 친구들은 교도소 폭동까지 벌였지만 결국 진압 당했고, 오히려 이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서로를 고발하도록 강요당한다. 푸세의 가장 친한 동료였던 테이스티는 살인혐의 누명까지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래도 테이스티는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에 다시 푸세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기억 속에서 푸세는 말한다. ‘나도 감옥 안에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적이 많았지. 그러나 결국 그 시간을 견뎌내고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일이 다가왔어. 바로 너를 만난 것이야.’ 테이스티와 감옥 안의 친구들은 비록 가해자를 처벌하지도 진실을 밝혀내지도 못하지만 ‘푸세 워싱턴 기금’을 만들어서 그 뜻을 기리기로 한다.
지금 이 투쟁이 ‘폭동’으로 발전할 일부 조짐을, 지속적이지 못하고 거대한 연대를 건설하거나 진정한 정치적 대안으로 나가기에는 어려운 방법이라고 우려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분노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결국 길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흑인해방 운동의 탁월한 투사였던 맬컴X는 ‘무엇도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 나는 앉아있는 사람의 편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일어서 싸우는 사람의 편’이라고 했다. 지금, 미국의 거리에서 정말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다.
● 홍콩 국가보안법에 절대 반대한다
홍콩 국가보안법이 결국 중국 전인대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표결 통과됐다. ‘국가 안전을 위해하는 행위와 행동을 예방, 금지, 처벌한다’는 이 법은 홍콩민중의 사상, 표현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를 파괴할 것이다. 연설했다고 9년 동안 투옥하고, 민중가요 불렀다고 처벌하는 한국 국가보안법에 비추어 볼 때 그 야만적 위험성은 명백하다.
더구나 중국정부는 이번에 ‘일국양제’라는 마스크도 벗어버리고 홍콩을 직접 폭압통치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일부 친중국 좌파는 ‘국가 안보를 위한 법을 갖지 않은 나라나 외세와 결탁해 안보를 해치도록 내버려 둘 나라가 어디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억지 논리라면 한국의 독재정부나 국가보안법도 정당화될 수 있다.
물론 트럼프가 ‘대 중국 전략 보고서’를 발표하며 중국 봉쇄와 전면대결로 나가고, 코로나19 책임을 떠넘기려 중국인 혐오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상황을 봐야 한다. 코로나 초기에 홍콩 노동조합들이 중국 국경 봉쇄를 요구하며 파업한 것은 노동자들의 힘을 보여준 것이지만, 동시에 중국인 혐오로 연결될 가능성도 보여 줬다.
홍콩의 반중국 진영 속에는 친서방적 우익포퓰리즘 세력도 섞여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지금 홍콩 국가보안법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트럼프, 마이크 폼페이오, 크리스 패튼(영국식민지 시절의 홍콩 총독)과 같은 편처럼 보인다면 너무나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홍콩 국가보안법 반대 편에 서야 한다. 중국 정부의 독재와 권위주의에 맞서서 민주주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은 미국을 편드는 게 아니며, 오히려 좌파가 중국 정부와 국가보안법을 지지할수록 트럼프나 한국의 보수세력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수호자인척 위선을 떨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중국에게 뭐라 하기 전에 “제발, 숨을 쉴 수 없다”“배가 아프다. 목이 아프다”고 절규하던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부터 해명해야한다. 미국에서 가난한 흑인들의 처지가 홍콩인들과 뭐가 다른지 답해야 한다. 한국의 우파는 이석기 의원의 석방과 한국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밝혀야 한다.
중국정부가 직접 나서서 홍콩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조종하기 시작하면서, 중국본토와 홍콩지역 모두에서 민중들의 삶과 민주주의의 조건은 더욱 더 밀접해졌고, 연대의 필요성도 더욱 분명해졌다.
● 닐 데이비슨을 추모하며
얼마전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사회주의 활동가인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닐 데이비슨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고 책이 출판된 적도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에 관심을 가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분이기에 조의를 표하고 싶다. 그는 트로츠키주의 전통에서 글을 쓰고 활동해온 역사학자이며 사회주의자로서 연속혁명 이론이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해서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기존의 전통적 해석에 가두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변화하는 현실에 맞지 않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상적 권위가 있는 사람의 주장과 분석이든 과감히 거부하고 새로운 혁신적 접근을 추구했다. 그의 분석과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그러한 비교조적인 태도에 큰 인상을 받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이제는 옛 사람들의 이름을 늘어놓으며 사상적 전통을 따지는 것에도, 특정한 사람의 이름으로 사상적 전통을 말하는 것도 달갑지 않고 후지다고 여기게 됐다. 하지만 닐 데이비슨이 가장 중요했던 것은 2013~14년에 오랜 동지들과 격렬한 논쟁 속에서 분리해 나올 때 그의 글을 읽고서 얻었던 도움 때문이다.
앞서서 영국에서 비슷한 논쟁과 분리를 겪었던 그의 글은 문제의 본질이 몇가지 쟁점들에 대한 이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얼마든지 어느 쪽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었다. 문제의 본질은 이견을 존중하면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함께 답을 찾아갈 수 있느냐였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선택도 분명해졌다. 직접 만나본 적도 없지만 그 시절에 봤던 그의 글과 고마움을 떠올리며 닐 데이비슨을 추모한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이다. … 문제는 비민주적 구조가 옳은 관점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민주적 구조가 틀린 관점을 낳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구조만이 ‘최상의 경험들을 일반화’하면서 …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의 어려움들이 우리의 내부적 문화와 구조가 아니라 단지 잘못된 관점들에 의해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동지들은, 옳은 관점들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게 된다. …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논쟁을 하는 것만이 …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이것이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
(기사 등록 202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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