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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팔레스타인의 참극은 유대인들 때문일까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5. 16.

윤미래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에서 벌어지는 민간인 학살과 이를 축소하거나 양자간 대등한 분쟁처럼 묘사하는 주류 언론의 왜곡 보도에 대해 사회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고 있다. 사태를 드러내고 비판해야 할 기구들이 오히려 사태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데에 급급한 와중에서, 이런 목소리들은 그나마 우리에게 조금의 희망을 준다.

 

그런데 이런 목소리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교리나 이스라엘 사회의 군사주의적인 분위기, 유대인들의 끔찍한 인식 수준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희망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까지도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문제의 근원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문제의 해결책 역시 유대인들을 개조하거나 강제하는 데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선민 의식에 집중하는 관점은 나에게 마치 미국 본토에서 평생을 살아온 백인들이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전시강간이나 학살을 한국 남성성이나 한국 사회의 반공국가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인종이나 종교, 문화가 핵심적인 매개로서 수행하는 역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역할에 대해 그 가해당사자들이, 가령 베트남전의 경우에 한국인들이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는 책임을 흐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현상적인 원인에만 주목할 때 그 매개를 애초에 필요하게 만드는 상황은 불문에 부쳐지고 만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불교도든 이스라엘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이스라엘인들처럼 행동할 것이다. 박해받는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 집단을 집단 학살하고 트라우마를 안긴 다음 종교적 이상향을 약속해보라. 그리고 그들을 살던 곳에서 이주시켜 다른 인종적, 종교적 집단들 사이에 놓고 그 모든 집단들을 군사적으로 적대하도록 몰아가보라. 인간의 보편적 악성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에 쌓아온 이해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어떤 이념적 가르침도 그 상황에서 다른 결과를 낳지 못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종교의 교리를 어떤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배후로 지목할 때 우리가 늘 잊어버리는 것은 교리를 비롯한 모든 문화적 규칙은 그 정의상 필연적으로 애매하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해석들 가운데서 ‘정론’을 채택하는 것은 경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이다. 유대교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범죄 행각을 비판하는 양심적 유대 학자들이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해석이 아니라 시온주의의 해석이 채택된 것은 이스라엘이 그런 방식으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이지 토라가 사람들의 정신에 행사하는 어떤 신비한 마취 작용의 효과가 아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런 방식으로 건국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유럽인들이 자기 것이 아닌 남의 땅을 내놓는 것으로 해야 할 배상을 갈음했으며, 신흥 제국으로 떠오르던 미국이 이스라엘을 중동 수탈의 전초 기지로 활용해서 이웃 국가들과 원수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시온주의는 확실히 이스라엘의 이념적, 종교적 구심이자 이념적 매개로서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대교의 가장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해석에서 종교적 정당성을 찾게 한 상황을 만든 책임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선량한 얼굴로 곤란한 듯 사태를 토론하고 있는 서구의 백인 지배자들과 제국주의 강대국들에게 있다.

 

‘인도주의적 개입’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문제를 만들고 지속시켜온 당사자에게 해결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적이고, 침략 전쟁의 빌미를 만들기 좋다는 점에서 실천적으로 위험하다. 종교와 인종으로 문제를 환원하는 것은 '계몽된 서구가 개입해줘야 할 후진적 상태에 빠져 있는 미개인들'이라는 오래된 식민주의의 도식을 반복하면서, 문제의 근원이 바로 그 식민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가해의 장본인을 구원자로 둔갑시키고 만다.

 

유대인은 어쨌든 인종적 소수자고 한국은 인종주의 문제에서 번번이 낙제점을 받는 나라라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다. 아프리카계나 동남아인에 대한 차별 못지않게 유대인에 대한 대상화, 타자화 역시 한국 사회에는 만연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직선적으로 홀로코스트와 통한다.

 

비록 우리 자신 인종차별의 대상이기도 할지언정, 경제적, 지정학적, 문화적으로 범1세계에 속한 우리는 이미 그에 기반하여 무슬림과 유대인 양쪽을 차별하고 있는 가해자다. 사태의 근원에 있는 바로 그 문제에 우리 또한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무결한 제3자의 위치에서 누구를 규탄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며, 우리가 이 참사를 정말 원치 않는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이런 일을 낳는 식민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우리 자신 거기에 가담하는 걸 그만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이란에 대한 미국의 지정학적인 위협에서 전선에 해당하는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의 동의 없는 군사 작전을 시행 중이다. 국방부는 호르무즈 해협이 “원유 수송 70% 이상을 차지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이 작전의 목적을 상당히 숨김없이 요약했다. (https://www.bbc.com/korean/news-51187146) 이런 짓을 하면서 중동에서 미국의 동맹군이 이웃의 환대와 호의를 받기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한국은 또한 고도성장중인 방산 분야 수출국이기도 한데 (https://www.news2day.co.kr/article/20210122500074) 한국이 수출하는 무기의 상당수는 중동으로 흘러들고 있다. 한쪽에서는 무기를 팔아놓고 다른 쪽에서는 비난한다면 이것은 앞뒤도 맞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듯이 실효가 전혀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들이 잠자는 집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농부가 탄 차에 총을 쏘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탱크로 밀어버리는 짓을 우리가 정말로 막고 싶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기에 흘러가고 있는 우리 총과 폭탄을 물리는 것이다. 이 사태에 대해 1세계가 받아야 할 비난은 것은 '분쟁 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군비를 지원하고 적대적인 근린관계를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1세계의 임무 또한 3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제3세계를 그만 망치는 것이다.

 

(기사 등록 20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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