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지구적 기후 위기의 상황 속에서 지구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10년 안에 탄소 배출을 절반 이상 줄여야 한다. 이를 통해 산업혁명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하는 데 실패한다면 기후 변화는 임계점(티핑 포인트)을 넘어설 것이다.
상황이 워낙 심각하다 보니, 현재 일부 선진국들은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석탄발전소들을 폐쇄하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기후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국제사회와 주요 정부들의 시도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왔다.
1992년 리우 기후정상회담부터 2019년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회의COP까지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정상회의만 26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탄소 배출량은 실질적으로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 왔다.
이것은 주로 자본주의적 논리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적 축적과 성장은 주변 환경과 인간 존재의 생태학적 조건을 파괴하면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는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을 핵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반생태적이다.
어디서나 언제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시공간적 제약이 있는 재생 에너지가 아니라 화석연료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에 대한 수탈과 파괴는 자본주의 시초축적의 핵심 기둥이었다. 그리고 두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자본주의와 탄소경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 버렸다.
이제 탄소경제에서 벗어난다는 것과 자본주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구분하기 어렵게 돼 있다. 오늘날 기후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화석연료 복합체를 거스르며 자본주의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되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적 자본주의 분석은 기후 위기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의 등장과 후퇴
오늘날 진지한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생태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안 앵거스는 생태사회주의가 그것의 목표, 사상, 운동으로 구성돼 있다고 지적한다.
“생태사회주의는 3가지 다른 것으로 구성돼있다. 첫째, 그것은 목표이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사회이고, 지금까지 벌어져 온 생태적 파괴를 복원하며 더 이상 파괴하지 않는 것에 높은 우선순위를 둔 사회이다. 둘째, 그것은 사상들 그 자체이다. 그 점에 있어서, 존 벨라미 포스터는 1단계와 2단계의 생태사회주의에 대해 말했다. … 셋째는 생태사회주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상당한 범위의 견해들을 포함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 없는 생태 혁명도, 생태 혁명 없는 사회주의 혁명도 없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마르크스 자신이 생태사회주의와 어떤 관련성이 있고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들이 존재한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이것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재평가한 여러 저들의 논지는 네 부류로 나누어진다 : (1) 마르크스의 사상은 시종일관 반생태적이었다는 주장 (2) 마르크스는 생태에 관해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나 마지막에는 ‘프로메테우스주의’(친기술적이며 반생태적인 관점)에 굴복했다는 주장, 다시 말해 그는 탈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풍요로움’의 결과로 환경문제는 해소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평가 (3) 마르크스는 농업분야의 생태 악화를 분석했으나 이것은 그가 주력한 사회에 대한 분석과는 별개라는 주장 (4) 마르크스는 자연과 환경의 악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특히 토양의 비옥도에 대해) 접근했으며, 이것은 그의 다른 사상과 내면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평가들 중에서 가장 타당하지 않은 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은 시종일관 반생태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정말로 반생태적인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적으로 해부했던 사상가였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또는 물질대사)에 주목했고, 거기서 노동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시초축적 과정에서부터 직접생산자를 토지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하고, 공유지를 강탈해서 사적 소유로 전환하며 임노동 착취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신진대사에 균열을 일으키고 파괴한다.
인클로저에 대한 분석과 마르크스의 ‘지대’ 이론은 또한 자연과 자연이 만들어낸 가치를 누군가 독점적으로 사적 소유해서 수익을 거둬가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분석적 도구를 제공한다.
이것은 오늘날 생물, 유전자 등에 지적재산권과 특허권을 부여해서 그것을 상품화하고 사적 소유하는 것을 통해 초과이윤이나 특별잉여가치를 얻는 일이 만연한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도 유용하다. 마르크스의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자연 통제와 지배는 재앙을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가 행한 정복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복수할 것이다. … 우리가 외국인의 정복자인 듯, 우리 자신은 자연의 영역 밖에 있는 듯 그렇게 자연을 지배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을, 살과 피와 뇌를 가진 우리는 자연에 속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의 자연에 대한 조종은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알고 그것을 올바르게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존재 중의 존재라는 이 점에서 나온 것임을 한순간이라도 잊지 말자.”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런 분석과 주장들은 그 의미뿐 아니라 한계도 담고 있었다고 보는 다양한 지적들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오직 인간의 노동력만이 가치를 직접 생산한다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이론과 가치법칙 자체가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가치 생산에 기여하고도 외면당하는 자연(과 동물)의 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연이 엄청난 부와 ‘사용가치’의 원천이라는 점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어떠한 ‘교환가치’도 덧붙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구분에 따르면, 주로 국가가 고용해서 공공적으로 수행되는 자연에 대한 보존·관리·개선을 위한 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으로 분류되게 된다. 이런 분석들은 결국 자연을 자본에 주어진 “공짜 선물”로 인식하는 자본주의적 논리와 묘하게 공명하게 된다.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 균열에 대한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분석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과 위기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지 않다. 마르크스는 생태적 파괴가 축적의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을 정교하게 이론화하지 못했고, 그 점에서 불완전성과 비체계성이 있는 것이다.
150여 년 전의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나 과잉생산이 아니라 기후위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붕괴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왜 미리 예측하지 못 했냐고 따질 수는 없지만, 그런 위기를 분석할 정교한 도구를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대적 한계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남겨놓은 흔적을 지적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대부분의 사상가가 자연과 인간은 대립적이라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수용하고 있던 시기에 저술 활동을 했”고, “대부분의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사상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여러 차례 자연의 ‘지배’, ‘정복’, ‘복속’, ‘통치’ 등의 표현”을 썼다.(포스터). 마르크스는 자연을 더 나은 상태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하는 “선량한 가장”으로서 인간사회의 의무에 관해서 썼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 또는 특정 시기의 사회가 자연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전체로서의 인간사회는 자연을 점유하면서 그것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의무가 있다는 관점을 볼 수 있다. 엥겔스는 훨씬 더 노골적이다. 그는 지금까지는 자연이 인간을 지배했지만, 미래에는 “풍부한 전문지식을 가진 인간에 의해 이용될 것이며 그리하여 인간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고 했다.
경쟁의 압력 속에서 단기적 수익만을 추구하는 자본과 국가의 자연 통제 시도는 재앙을 부를 것이지만, 사회주의적 미래에는 인류가 의식적으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나쁜 가장’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지만, 사회주의적 ‘선한 가장’의 시도는 성공할 것이라는, 이런 논리를 20세기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자연에 대한 지배 시도와 연결하지 않기는 어렵다. 이처럼 그 출발점에서부터 내포된 가능성과 결함의 모순된 결합 때문인지 마르크스의 생태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후에 더 발전하기보다는 난관에 부닥치게 된다.
먼저 러시아 혁명 이후에 등장한 스탈린 정권은 1930년대에 ‘사회주의적 원시축적’에 반대한 정치지도자와 과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와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생태주의적 요소는 제거된다.
한편 서방의 사회주의적 좌파와 지식인들 속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을 자연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관점이 퍼져갔다. 주체도 역사도 없는 자연에 변증법을 적용한 것은 엥겔스가 헤겔을 오해한 결과였다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은 죄르지 루카치에서부터 서구의 사회주의 좌파들에게 번져갔다.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이 가진 기계적 결함과 스탈린주의적인 조악한 유물론 모두와 선을 그으려는 이런 시도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찰 대상에서 자연을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생태사회주의 재부상의 1단계와 2단계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 생태적 모순이 심화하고 환경운동과 생태사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마르크스의 사상은 생태학적으로 결함이 많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마르크스주의는 자연을 도구적 가치로만 인식하는 인간 중심주의, 자연의 한계를 무시한 기술 중심주의, 환경 문제의 보편성을 무시한 계급 환원주의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적 생태학과 생태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재부상하는 데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다. 먼저 등장한 것은 마르크스의 결함을 인정하며 그것의 보완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제임스 오코너 등의 1단계 생태사회주의자였다.
“1단계의 생태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녹색 사상을, 또는 때로는 녹색 이론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접목하며 복합적인 분석을 만들었다. 테드 벤튼, 앙드레 고르즈, 제임스 오코너같은 선구적인 사상가들은 생태에 무관심한, 또는 심지어 반생태학적 기반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의 탓으로 돌렸다.”(포스터)
제임스 오코너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자연적 환경과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모순, 위기, 투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그 한계를 지적했다. 이런 비판은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1차 모순과 더불어 ‘생산력/생산관계와 생산조건’의 모순이라는 2차 모순이 존재하고 중요하다는 새로운 이론적 혁신으로 나아간다.
2차 모순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에너지 비용 상승 등의 부담을 불러오고 이것이 이윤을 압박하면서 잉여가치 생산에 문제가 일어나서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코너는 높은 석유가격에 의한 오일 쇼크 등을 그 구체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위기는 ‘전통적인 노동계급 기반의 투쟁을 넘어선, 생산조건 재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신사회운동’이 등장해서 국가에 맞서는 계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제임스 오코너의 2차 모순론과 신사회운동론은 분명 기존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이 간과해 왔던 부분을 지적하며 그 한계를 보완하며 의미 있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다양한 반론과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먼저 이런 분석은 경제 위기 이론으로서는 취약하다. 비용 상승은 축적의 여러 조건 중의 하나일 수는 있어도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위기로 향하는 경향 자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이론적 측면에서도, 에너지 비용 등의 상승은 역사적으로 일시적이었고 상쇄 요인이 등장했었다는 실증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제기돼 왔다.
더불어 오코너의 2차 모순론은 이것이 두 가지 분리된 모순인지, 하나의 모순이 가진 두 가지 측면인지 분명히 규정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노동계급 기반의 투쟁과 신사회운동과의 불명확한 관계 설정으로도 이어진다. 물론 오코너는 두 투쟁의 ‘동맹’을 이야기하지만, 존 벨라미 포스터는 ‘오코너의 분석과 전략에 따르면 신사회운동이 중심이고 노동계급의 투쟁은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결국 2차 모순론은 마치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가부장제의 모순,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가부장제에 맞선 투쟁을 이원론적으로 병렬하여 후자를 더 강조하듯이, 생태주의를 매개로 또 다른 형태의 이원론으로 발전할 여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그것에 대한 반발과 또 다른 역편향으로서, 임노동 착취와 그에 맞선 노동계급 투쟁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다시 불러내기 마련이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바로 이런 비판을 하면서 제임스 오코너의 주장을 이원론이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이런 비판은 오코너 등이 마르크스가 말년에 자연과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남긴 방대한 발췌와 논평으로 구성된 노트를 간과했다는 비판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발췌와 논평, 미완성 노트 등에 관한 치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생태학과 생태사회주의를 훨씬 더 체계적인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2단계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출현하는 배경이 됐다.
“2단계 생태사회주의는 대개 폴 버켓Paul Burkett의 『마르크스와 자연 』(1999년)과 나의 『마르크스의 생태학』(2000년)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는데 곧 브렛 클라크, 한나 홀레만, 스테파노 롱고, 사이토 고헤이, 리처드 요크같은 인물들을 포함한 수많은 다른 분석가들이 합류했다. … 여기서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깊은 구조에서 생태학적 분석의 구실을 검토하기 위해 고전적 역사유물론의 근간으로 돌아왔다.”(포스터)
2단계 생태사회주의를 가장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며 대변해 온 것은 존 벨라미 포스터이다. 포스터는 마르크스가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생태학적 분석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에서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를 매개하는 것은 노동과 생산과정인데, 자본주의의 모순은 그 속에서 신진대사의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키게 되고, 인간과 자연 모두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의 순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 조건까지 뿌리째 뒤흔들게 된다.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를 약탈하는 방식상의 진보일 뿐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는 방식상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는 모든 진보는 생산력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마르크스)
마르크스가 제시한 대안은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을 통해 이러한 신진대사의 균열과 훼손을 극복하고 그것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의 결합한 생산자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집단적 방식으로 합리적·이성적으로 통제하며 ‘자유의 왕국’으로 나갈 것이다. 포스터는 이렇게 마르크스가 이미 시대를 앞선 생태학을 발전시켰다고 강조하며 마르크스의 생태학적 해석 가능성을 복원시킨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마르크스의 연구노트가 출간되고 생태와 관련한 마르크스의 여러 주장들을 수십 년 동안 연구한 결과 마르크스가 평생 동안 자연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했고, 자본주의 사회의 생태위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출발점이 되는 자연과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음이 분명히 밝혀졌다.”
그런데 포스터와 2단계 생태사회주의의 이러한 주장은 마르크스 자신이 보여 준 생태학적 문제의식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서 너무 과도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마르크스에게 시대를 초월하는 능력과 예지력을 부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과도할 뿐 아니라, 근거로 뒷받침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포스터 등이 제시하는 것은 대부분 단편적인 문구, 발췌, 미완성 노트, 편지 등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생태학 사상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논문이나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의 생태학을 이미 정립된 이론처럼 취급하는 것은, 마치 미완성 노트와 편지 등에 자주 나오는 표현을 바탕으로 마르크스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단정하는 것만큼 섣부를 것이다.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단편적인 언급과 통찰 등을 실마리삼아 더 체계적이고 완성된 생태학과 생태사회주의 이론을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이미 마르크스에 게서 그런 종합이 이뤄졌다고 강조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포스터의 논의에서는 후자가 두드러지고, 그러다보니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나는 한계가 포스터의 논의에서도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포스터에게서 자본주의 사회와 경제 위기를 분석하는 노동가치 이론과 자연과 생태적 위기를 분석하는 신진대사 균열 이론은 유기적으로 통일돼지 못하고, 포스터가 1단계 생태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추방하려고 했던 이원론이 뒷문으로 일부 다시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은 1단계 생태사회주의와 2단계 생태사회주의가 보여준 한계와 결함을 뛰어넘으며, 그 두 가지의 가능성과 장점을 결합할 필요를 제기한다.
제이슨 무어와 세계생태론
제이슨 무어는 존 벨라미 포스터의 동료이자 제자로서 신진대사 균열 이론을 지지하면서 출발했던 생태사회주의자이다. 그러나 그는 포스터의 입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 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포스터의 이론은 ‘사회’와 ‘자연’을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이고, 이러한 “양면적인 이원론은 변증법적 종합의 가능성을 약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포스터가 자본주의적 축적을 ‘경제적’ 과정으로만 여기는 “부당하게 협소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어의 문제의식이다. 이에 따라서 무어는 ‘세계생태론’을 발전 시켜 나갔다. “세계생태”로서의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적 체계’나 ‘사회적 체계’가 아니라 ‘생명의 그물’ 속에 존재하는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고, 자본-권력-자연을 역동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 게 자본주의라는 관점이다.
따라서 무어는 자본주의를 단지 생산 현장에서의 경제적 착취와 임노동 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임금노동으로 규정된다고 여기는 것은, 자본주의가 세계시장으로 규정된다고 여기는 것에 못지않게 잘못된 생각”이고 “오히려, 중요한 물음은 임금노동과 임금노동 확대재생산의 필요조건을 연결하는 역사 지리적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생태주의의 통찰을 수용하여 자본주의는 유급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만이 아니라, 무급 가사·돌봄노동에 대한 강탈, 식민지 민중과 농민에 대한 수탈, 비인간 자연이 만들어낸 가치에 대한 약탈을 통해 축적을 수행한다는 분석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계급, 젠더, 인종의 출현은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연결된 과정이다.
이 과정에 대한 더 적합한 분석을 위해 무어는 마르크스주의 가치 법칙과 이론을 재해석한다. ‘가치 법칙’은 “자본 축적의 국면”과 “윤리정치적 프로젝트”로서 두 가지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후자에 따르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식민주의가 해당하는 노동자의 일을 저평가함으로써 필요노동시간을 더 줄이고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여성, 자연, 식민지를 무상 일/에너지의 원천인 “저렴한 자연 프런티어”로 삼는 자본주의는 가부장제, 개발주의, 제국주의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것이 다양한 통찰을 받아들여 재구성된 무어의 ‘확장된 마르크스주의 가치 이론’이다.
자본주의는 유상 일의 착취뿐만 아니라 무상 일의 전유를 수반한다는 이론에 따라서 무어는 자본주의의 시초축적 과정, 축적 위기 해소 과정, 신자유주의적 축적과 새로운 위기 등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에 따르면 ‘저렴한 자연’ 덕분에 생산비가 하락하면서 이윤율이 상승하고 “세계생태잉여”가 증가하면 축적이 순조롭게 이뤄지지만, 생태잉여는 결국 장기적으로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 무어는 ‘역사적 자연의 마모, 축적된 자본 규모의 증가, 자본의 재생산 시간과 자연의 재생산 시간 사이의 모순, 자본축적의 낭비와 비효율 경향’을 그 요인들로 지목한다. 투자의 확대와 축적의 성공은 투자의 축소와 축적의 실패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1970년대부터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면서 ‘저렴한 자연’을 재건하려는 자본주의와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다.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저렴한 자연을 재건하면서 생태잉여를 다시 증가시켰지만, 그러나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 무어는,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농업과 추출 산업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비가 상승하고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정체되고 있다며, 이것은 생태잉여가 영속적으로 저하하면서 노동생산성을 충분히 개선하기 어려워진 시대로 다시 진입한 증거라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경우에, 이런 징후적 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보다 앞서서 “2003년 무렵에 개시”되었고, 그때 시작된 생태잉여의 저하가 “임박한 시기에 반전될 기미는 거의 없다”는 게 무어의 분석이다.
나아가 무어는 ‘저렴한 자연’의 종언은 전유된 자연의 반격인 ‘기후 위기’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무상 일/에너지를 전유’하면서 “잉여가치”를 축적하지만, 동시에 자연을 파괴하고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 “부정적 가치”를 축적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부담(“쓰레기 비용”)을 외부화하거나 ‘저렴한 자연’ 전략을 강화하면서 부담을 상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상쇄가 불가능한 한계점에 도달했고, 그것이 오늘날 기후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무어에게 오늘날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는 경제 위기와 기후 위기와 감염병 위기라는 여러 가지가 합쳐진 복수의 위기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세계생태의 모순이 한계점에 도달하면서 나타나는 다면적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단일한 위기이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볼 때 제이슨 무어의 세계생태론은 1단계 생태사회주의와 2단계 생태사회주의가 보여준 장점과 가능성을 계승하면서 한계와 결함을 뛰어넘으려는 종합의 시도이다.
그는 1단계 생태사회주의처럼 마르크스가 생태주의에 무관심하거나 반생태주의적 요소가 있었다는 일면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2단계 생태사회주의처럼 마르크스의 단편적 언급과 불완전한 통찰을 그 자체로 체계적 생태학인 듯이 포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등의 문제의식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여 더 체계적인 생태학과 생태사회주의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또 그것을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분석에 적용하려 한다. 물론 이것이 충분히 성공적이었는지는 더 검증이 필요하고, 몇 가지 비판적 평가도 가능하다.
먼저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생태가 직면한 위기를 ‘저렴한 자연의 소멸에 의해서 그 한계점에 도달한 해결될 수 없는’ 위기로 설명하는 것은 파국론적 문제 설정으로 보인다. 이런 파국론은 주체적 개입의 여지를 축소하기가 쉬운데, 실제로 무어의 세계생태론에서는 사회변혁의 주체가 누구이고 그들에게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찾을 수 없다. 사이토 코헤이도 “주체적인 저항에 대한 이론화는 주변적인 것에 머무르”고 있다고 무어를 비판하고 있다.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대한 과도한 규정과 거부도 ‘무어가 동의하지 않은 이론과 이론가는 전부 이원론이라는 것이냐’는 반발을 낳고 있다. 물론 인간사회와 자연을 따로 존재하고 작동하는 것처럼 보고,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해야 한다고 본 ‘기계적 이원론’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와 자연을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보면서, 효과적인 분석을 위한 추상 수준에서의 개념 구분마저 이원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식이면 무어가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을 구분하는 것도 이원론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무어가 이원론적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고자 “자연-속-자본주의”, “자본주의-속-자연”처럼 계속해서 개념(용어)적 다발 짓기를 사용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인상을 준다. 존 벨라미 포스터도 “당신의 심장이 당신 육체의 중추적인 부분인 동시에 독특한 특징과 기능들을 갖춘 별개의 기관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과 비슷하다며 무어의 주장을 반박한다. 결국 제이슨 무어의 세계생태론에 담긴 대담한 문제의식과 혁신적 방법론은 이러한 비판들에 대응하면서 더욱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이론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1, 2단계 생태사회주의의 약점을 넘어서면서 그 합리적 핵심을 더 효과적으로 종합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잠정적 마무리
나오미 클라인은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기후위기의 상황을 검토하며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시간은 촉박하다. 우리로서는 단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더불어,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를 자처한 체제에서도 지속된 ‘자연계는 무한할 뿐 아니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며 인류는 자연계를 지배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오만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문제의 뿌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주의를 자처한 체제에서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적이고 생산력주의적인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문제는 오늘날의 노동운동과 좌파적 사회운동 진영도 기후위기 문제에 소극적이었고 얼마 전까지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해 왔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는데, 평범한 노동자들을 환경파괴의 공범으로 취급하고 정부·기업과 협조에 주력하는 주류 환경 NGO들에 대한 거부감과 반작용이 존재했다.
이것은 환경파괴와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보다는 환경 NGO의 한계와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을 우선하는 반응으로 나타났다. 생산현장에서의 착취가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이고, 따라서 그것에 맞선 조직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중심성’이고 여전히 반자본주의적 좌파의 우선적 과제라는 전통적 사회주의 관점이 그것을 강화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뤄진 노동운동의 후퇴와 침체가 작용했다.
많은 급진좌파 또한 이 시기를 거치며 정치적 확장과 성장보다는 침체와 정체를 겪었다. 살아남은 좌파들은 갈수록 얼마나 자신들이 혁명적 원칙과 이론의 순수성을 고수하고 있는지 과시하고 거기에서 존재 이유와 위안을 찾는 경향이 생겨났다.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차이를 부각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일부는 고립에 익숙해졌고, 거기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오늘날 급진좌파는 이런 약점을 솔직하게 직시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기후위기에 맞서서 인류와 지구를 구하려는 운동에서 사회주의적 좌파가 매우 소수이고 우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그 압도적 다수와 함께 활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밖에서 비판만 하기보다는 그 운동에 개입하고 참여하면서 함께 더 큰 운동을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마주한 거대한 위기에 걸 맞는 거대한 운동과 대안을 건설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과 생태사회주의 전통에서 찾아낸 통찰을 이어가면서 이론적 혁신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종합을 이루려는 시도는 이런 과제를 위한 중요한 무기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생태사회주의 이론을 재구성하고 확장하려는 여러 시도들을 검토했다. 그러면서 생태사회적 변혁이론의 재구성을 위한 몇 가지 요소들을 짚어볼 수 있었다.
그것은 첫째,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를 파괴하고 자연이 만들어낸 가치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독점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반대에 기초해야 한다. 동시에 러시아와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난 반생태적 결과를 규명하고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뿐만 아니라 생산력/생산관계와 생산조건의 모순까지도 시야를 확장하면서 그것을 통합적으로 이론화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 균열에 대한 분석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과 위기에 대한 분석과 연결시켜야 한다.
셋째,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생태주의의 통찰을 수용하여 유급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만이 아니라, 무급 가사·돌봄노동에 대한 강탈, 식민지 민중과 농민에 대한 수탈, 비인간 자연이 만들어낸 가치에 대한 약탈을 통한 자본 축적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켜야 한다. 넷째, 오늘날 자본주의가 직면한 경제 위기, 기후 위기, 감염병 위기를 단순히 여러 가지가 합쳐진 복수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모순이 한계점에 도달하면서 나타나는 다면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단일한 위기로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발전시켜야 한다.
다섯째, 생산현장의 임노동 착취와 그에 맞선 노동계급 투쟁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전통적 입장을 넘어서, 계급투쟁과 사회변혁의 주체와 영역을 확장하고 어떠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지를 구체화시켜야 한다. 이런 모색과 검토가 생태사회적 변혁이론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하나의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기사 등록 202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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