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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새로운 혁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7. 30.

닐 포크너Neil Faulkner/ 필 허스Phil Hearse

번역: 두견

 

오늘날의 세계를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혁신을 시도하는 글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세계 남반구로의 생산의 이전, 소비의 시점으로 착취의 이전, 금융-자본의 지배, 영구적인 부채 경제라는 4가지 양상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경험적 근거들로 입증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명확하게 분석하려면 마르크스의 시대적 한계와 이론적 혼동을 넘어서 노동 가치 이론과 자본 축적의 운동 법칙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치 창출과 잉여 전유는 서로 다른 수준의 추상화에서 일어나는 별개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혁신에 입각할 때 오래동안 논쟁이 되어 온 '생산적'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 '전형' 문제, '이윤의 균등화' 등의 문제들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초기 단계로서 이러한 주장들은 몇 가지 허점과 한계들도 보이지만, 변화되는 새로운 현실을 설명하려는 흥미롭고 혁신적인 시도로서 의미가 있고, 앞으로 더 많은 고민과 토론을 자극할 것이다. 글이 워낙 길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경험적 현실을 보여주는 부분은 생략하고, 주로 이론적 논리 전개 부분을 중심으로 번역했다.

 

이 글의 공동 필자인 닐 포크너Neil Faulkner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민중사, 그리고 <조여오는 파시즘: 그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싸울 것인가>의 저자이다. 한국에서도 그의 책이 <좌파 세계사>로 번역돼 있다. 필 허스Phil Hearse는 닐 포크너와 함께 ‘반자본주의 저항’Anti* Capitalist Resistance 단체의 주도적 회원이며 <조여오는 파시즘>Creeping Fasism과 <추락하는 체제>System Crash의 공동 저자이다.

 

출처: https://www.anticapitalistresistance.org/post/value-and-surplus-through-a-neoliberal-lens-notes-towards-a-new-understanding-of-marxist-economics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변모해 왔다. 1975년 이후 45년 동안, 세계 자본의 축적 과정은 네 가지 근본적인 방식으로 바뀌었다. 첫째, 대량생산이 세계북반구에서 세계남반구의 슬럼 메가시티로 대규모적으로 이동했다. 둘째, 착취의 중심이 생산지점에서 소비지점과 사회적 재생산의 지점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독점적이지는 않지만, 특별히 북반구에서 더 그렇다.

 

셋째, 세계적인 축적 과정에서 금융화된 초국적 기업들의 헤게모니가 철저했다. 넷째, 자본주의의 장기간의 과잉축적·과소소비 위기는 '영구 부채경제'에 이르는 전례 없는 수준의 정부, 기업, 가계 부채로 나타났고, 다양하고 예외적인 기생적 형태의 축적을 찾아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경험적 현실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적 신조 중 하나인 잉여가치는 생산과정 자체에서 생성되고 따라서 그것은 새로 창조된 가치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몫을 나타낸다는, 또한 세금, 임대료, 이자, 독점 가격 등과 같은 다른 형태의 지출은 이미 존재하는 잉여가치의 배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자본의 전체 순환의 수많은 지점에서 잉여가 충당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21세기 초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관점은 유지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이 두 가지 이론적 오류로부터 발생한다고 믿는다: a) 마르크스가 가치 이론과 운동의 법칙을 섞어버린 것(두 가지 다른 활동 기록과 추상화 수준의 혼동) 그리고 b) 마르크스가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인 프롤레타리아를 적절히 분석하지 못한 것.

 

본 논문은 이 두 가지 오류를 시정하기 위한 시도이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다. 마르크스는 산업 자본주의가 초창기 단계에 있을 때, 공장 시스템이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글을 쓰고 있었고, 고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후기에 그들을 속류화한 사람들과 격렬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통찰력과 선견지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쟁이가 아니었다. 그의 이론적인 결론은 필연적으로 빅토리아 시대 중반의 영국 자본주의의 작동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 기초했다. 그는 동향을 파악하고 예측했는데, 그 중 많은 것이 그 이후에 확인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관측을 낳는 새로운 현실들은, 우리의 관점에서, 기존의 이론적 패러다임이 해체되고 대안적인 설명 모델로 대체되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도달했다. 따라서 잉여가치 창출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제공한다면 말이다: a)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 그리고 b) 21세기 초의 혁명적 주체에 대한 이해.

 

이것은 두 개의 계획된 논문 중 첫 번째이다. 준비 중에 있는 두 번째 논문은 혁명적 주체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첫 번째인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경제 이론을 제시한다. 이 논문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우리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주장을 침식시키고 있는 경험적 증거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두 번째, 우리는 기본적인 이론적 비평과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의 이론적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가치와 가치 창출은 개념적으로 잉여와 잉여 전유Appropriation와 구분된다. 가치는 집단적 인간 노동에 의해 창출되고 전체 사회적 생산의 형태를 띤다.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모든 인간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인류 종種, 호모사피엔스에 대한 정의의 일부로서, 우리는 가치를 창출하는 집단적 사회적 노동에 관여한다.

 

반면에, 잉여는 창출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가치의 배분일 뿐이고 따라서 오직 전유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라는 용어는 잘못된 융합을 내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단순히 '가치'를 의미했다면 그것은 무의미하거나 단순한 동어반복이고, 혹은 그가 생산 과정에서 '가치'와 '잉여가치'라는 두 개의 별개의 요소가 동시에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핵심 포인트는 분명히 강조되어야 한다. 가치는 집단적 인간 노동에 의해 창출되고 전체 사회적 생산의 형태를 띤다. 잉여는 생산, 분배 및 교환을 통해 자본 순환의 서로 다른 지점에서 전유된다(창출되는 게 아니라). 가치 창출은 가치 이론에 의해 설명된다. 잉여 전유는 자본 축적의 운동 법칙에 의해 설명된다. 이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이유를 설명한다.

 

------ 중략 --------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

 

가치 창출이 없는 잉여의 전유

 

우리는 자본주의의 장기적 과잉축적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의 핵심으로 본다. 생산적 투자에서 수익성 있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자본으로 과부하가 걸린 이 시스템은 다양한 병리적, 기생적 형태의 축적에 의존한다. 다음과 같은 (중복된) 형태가 포함된다.

 

* 금융, 기술, 지식, 공급망 및 시장들에 대한 통제를 통해 잉여의 대부분을 전유하는 '껍데기만 있는' 초국적 기업에 의한, 특히 세계 남반구에서 저임금 공장시설에 대한 생산의 재배치 및 아웃소싱을 통한 축적.

 

* 부채를 통한 축적. 신자유주의 시대에 부채와 투기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는 정부, 기업, 가계 등 경제 전반을 포함하지만, 대부분은 부동산 시장들에 묶여 있다.

 

* 임대료를 통한 축적 – 특히 주택 임대료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 공공재의 민영화를 통한 축적. 이것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하였다 a) 기존 공공 자산이 매각될 때 사적 자본에 대한 '횡재' 이득 b) 국가가 지불하는 형태의 공공 서비스 제공에 대한 사적 자본으로의 지속적 흐름들. 그리고 c) 이전에 무료 또는 보조금을 지급하던 공공 서비스에 대한 요금 인상 형태로 사적 자본으로의 지속적 흐름들.

 

* 국가 조세를 통한 축적. 이것은 공공재의 민영화와 겹치지만, 그것을 훨씬 더 확장한다; 특히, 군대, 경찰, 감옥, 국경, 보안, 감시 등에 대한 막대한 그리고 증가하는 국가적 지출과 함께 군국화된 축적의 형태를 취한다.

 

* 독점 가격을 통한 축적. 소수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각각의 시장을 장악하고 관리하는 독점 형태의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본이 '가격 수신자'보다는 '가격 설정자'가 되도록 했다. 소비자들은 바나나부터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과도한 요금을 부과받는다.

 

* 소외된 소비를 통한 축적. 노동자/소비자는 온라인 통신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는 대규모적이고, 집요하고, 그리고 훨씬 더 표적화되고 침략적인 '판매 노력'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에는 온라인 가입/스트리밍 서비스 또는 과도한 가격의 라이브 이벤트를 통한 '체험형' 상품의 소비 수준 증가가 포함된다.

 

'유명인사'와 '볼거리'에 의해 촉진되는 '디자이너'와 기타 상품들의 소비 수준 상승. 그리고 온라인 소매업 독점자들이 게시물을 통해 전달하는 상품의 소비 수준 상승. 이것은 엄청난 수준의 가계 부채에 의해 유지된다. 물론 그 자체가 상품화된 것이다. 원자화와 소외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회의 공동화는 신경증적인 소비주의, 엄청난 낭비, 그리고 생태학적 재앙의 대유행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 디지털화digitalisation를 통한 축적. 디지털화의 첫 번째 단계(‘3차 산업혁명’)에 줄줄이 이어지는 디지털화의 두 번째 단계(‘4차 산업혁명’)는 세계 노동자들에게 기술적 실업에 대한 또 다른 거대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미 최소한의 노동력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거대 기술 기업들은 모든 형태의 현대적 축적에 고정돼 있으며, 점점 더 최소 노동력을 통한 생산으로의 변형적 전환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금융화된 자본주의와 영구적 부채 경제의 현대적 형태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a) 오늘날 생산에서가 아니라 유통에서 발생하는 잉여 전유의 규모이고 b) 착취의 중심이 노동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서 소비자/채무자로서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는 정도이고, c) 산더미 같은 부채('가공fictitious 자본')의 축적에 대한 체제의 의존성, 그리고 d) 투기적인 거품 및 파산에 대한 체제의 만성적 취약성이다. 실질적 가치와 화폐적 가치 사이의 파열은 천문학적 수준에 도달했다. 윌리엄 로빈슨William I Robinson의 설명과 같이:

 

“주식과 파생상품 시장의 관계를 살펴보면, 2008년 말까지 세계 주식 시장의 규모는 약 37조 달러로 추산되는 반면, 세계 파생상품 시장은 세계 경제 전체 규모의 11배인 791조 달러라는 헤아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2017년까지 빠르게 나가면, 그리고 세계 총생산 또는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총 가치는 약 75조 달러에 달했고, 그에 반하여 그 해 통화 추산은 하루에 5조 3천억 달러에 달했는데, 세계 파생상품 시장은 너무나 놀랍게도 약 1천2백 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로 우려하는 측면은 생산에서 가치 창출과 대립되는 것으로 잉여 전유의 과정을 배치하려는 어떤 시도도 이론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잉여 전유와 가치 창출이라는 이 두 과정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져서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접근 방식은 붕괴했다. 그러한 패러다임은 더 이상 반대되는 경험적 증거의 엄청난 비중을 지탱할 수 없다.

 

생산 없는 이윤 획득: 초국가적 금융-자본의 헤게모니

 

도입부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 동안 세계 경제의 네 가지 주요한 발전을 확인했다. 이러한 발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 대량생산이 세계 남반구로 이동하고, 소비/사회적 재생산으로의 착취 지점의 상대적 전환 - 를 자세히 논의하면서 우리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즉 초국가적 금융-자본의 지배와 영구적 부채 경제 및 기생적 형태의 축적의 부상에 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금융화'로서 후자의 두 과정을 간략히 요약한다.

 

금융화는 크게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

 

*현재 금융 기업들과 '금융 서비스 산업'은 전체 자본 투자와 수익에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산업 기업들은 (생산적인 투자를 희생하면서) 금융 투자에 대한 참여를 크게 늘렸다.

 

*금융 기업(및 '금융화된' 산업 기업)들은 생산적 자산들의 소유 및 관리에 훨씬 더 많이 관여하고 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금융 거래와 가공 자본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에 대한 통계적인 증거를 앞부분에서 제시했다. 이것은 전체 경제활동에서 금융 비중의 엄청난 성장으로 반영된다. 예를 들어, 미국 금융은 1950년에서 2010년 사이에 국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대략 세 배로 증가시켰고, 전체 기업 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15%에서 약 50%로 증가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듀란드Durand[OECD 통계국장]는 관련 주식 시장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11개 부유한 국가에서 1979년과 2014년 사이에 국가 GDP에서 가공 자본의 비율이 2.5배 증가했다고 추산한다. 금융 부문의 이러한 성장은 정부, 기업, 가계 부채의 증가 수준에 연동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총 부채는 1980년대 초 국가 생산량의 1.5배에서 2007년 거의 3.5배로 증가했다. 2008년 금융 붕괴 이후 파산한 은행을 재자본화하기 위한 대규모 국가 구제금융 덕분에, 그 이후 부채 수준은 훨씬 더 높아졌다.

 

총 세계 부채는 붕괴 당시 약 173조 달러(세계 GDP의 280%)로 추산되었다. 현재는 약 250조 달러(세계 GDP의 320%)이다. 우리는 투기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들고 부채의 토대 위에 놓여 있는 가공 자본의 축적을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이 기생적인 금융 자본의 촉수는 이제 실물 경제의 모든 틈새로 확장된다.

 

마르크스의 주장

 

마르크스는 잉여가치가 생산 과정 자체에서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자본>의 첫째 권에서 자본가들이 노동력(‘가변 자본’)을 구매하고, 그것에 생산수단(‘불변 자본’)을 공급하며, (임금으로 지급된) 노동력의 비용과 실제 수행되는 새로운/살아있는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 사이의 차이에서 이윤(‘잉여가치’)을 도출하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 주장이 부정확하다고 본다.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 마르크스는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 초기, 대부분의 기업이 상대적으로 작은 시기, 각각의 시장에서 많은 자본가들이 활기있고, 따라서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글을 쓰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이윤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기업에 재투자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들 자신의 잉여가치가 그들의 주요 투자 자금이었다.

 

둘째, (그리고 앞선 내용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잉여 전유가 생산 과정뿐만 아니라 더 넓은 유통 과정에서도 발생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알고 있었다. 그의 작업에는 토지 임대료, 대출 이자, 국가 조세 등에 대한 언급, 그리고 생산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가 아마도 토지 소유자, 은행가, 국가 공무원 등과 배분된 방식에 대한 설명이 산재해 있다.

 

셋째, 1850년부터의 마르크스의 작업은 고전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지속적인 지적 교류 속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법칙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그들의 통찰력에 기반을 두면서 그들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노동이 모든 가치의 근원이다; 그 가치는 교환으로 만들 수 없다; 이윤은 '기업가 정신'의 정당한 보상이 될 수 없다; 이윤, 임대료, 임금은 서로 다른 '생산 요소'들에 대한 각각의 보상이 아니다 등의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우리는 - 지난 150년간의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 제공된 더 유리한 입장에 서서 - 그가 사실상 가치와 잉여,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 가치 이론과 자본주의 체제의 운동 법칙을 혼동했을 때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잉여-가치'라는 용어는 이 혼동을 고착화하고 가치 창출과 잉여 전유가 이론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장부에서, 다시 말해서, 다른 수준의 추상화에서 일어나는 별개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모호하게 한다.

 

요컨대, 노동 가치 이론(그것은 옳다: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창조된다)은 자본 축적의 운동 법칙(즉, 자본의 순환을 지배하는 법칙, 그 순환이 임금, 가격, 이윤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서 사회적 계급 내부와 사이에서 가치를 배분하는 방식)과 분리되어야 한다.

 

생산 과정에서만 잉여가 발생한다고 고집하면서 그 둘을 분리하지 않는 것의 결과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고수하려는 노력 이후부터 일부 지독한 이론적 뒤틀림을 낳았다. '생산적'과 '비생산적' 노동의 차이, (가치와 가격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이른바 '전형' 문제, 그리고 (더 많거나 더 적게 수익성 있는 투자 형태들 사이에서 자본의 흐름에 관계된) '이윤의 균등화' 문제는 우리가 그 근원적 오류를 수정하면 대체로 사라진다라고만 말해도 충분할 것이다.

 

가치의 이론과 운동의 법칙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적 교리는 사회적 현실 전체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왜냐하면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하나의 모순된 전체이기 때문이고, 세계적인 노동 분업과 세계적인 상품 이동, 그리고 자본의 세계적 순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경제는 수십억 개의 노동 부문을 가진 영구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하나의 공장에서 무엇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로 잉여 전유의 문제를 축소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종종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 '전체 사회적 자본', '과정에서의 총 자본 가치', '연간 총 상품 생산', '총 유통 과정', '사회적 자본 및 잉여가치 또는 이것이 만들어내는 잉여 생산물'과 같은 공식을 사용한다. 그는 가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업자본은 스스로 움직이는 총체'이다. '유통과 생산의 통합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 자본은 오로지 총 사회적 자본의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요소들'이다. '사회적 자본의 전체적 운동은 개별 자본의 운동의 대수적 총합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 안에서 가치 창출에 대한 '미시-경제'와 '거시-경제' 이론 사이의 모순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것은 아니다. 위에서 요약한 모든 경험적 데이터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느끼고, 노동 가치 이론이 집단적 인간 노동에 의해 창출된 총 사회적 생산물의 가치만큼 개별 기업의 산출물의 가치를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가치의 기원과 성질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가치의 배분,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적 계급들과 그리고 특히 자본의 서로 다른 단위들 내부나 사이에서의 그 가치의 몫에 대한 소유권 배분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가치는 자본주의보다 앞서서 존재한다. 가치는 태초부터 인간의 집단 노동에 의해 창조되어 왔다. 가치는 수렵채집 무리, 최초의 농경 정착지들, 고대 로마 도시들, 중세의 봉건 마을들의 존재의 기반이었다.

 

이것은 물론, (모든 사회에서 존재하는) '사용가치'와 상품 속에 내재된 (자본주의 특유의) '교환가치'를 구별하는 마르크스에 의해서 잘 이해되었다. 마르크스의 실수는 자본주의(이것은 이제 사용가치뿐 아니라 교환가치도 포함하기 때문에 자본 축적의 운동 법칙을 따라야 한다) 하에서 그것이 가정하는 모순된 상품 형태로 가치(모든 형태의 집단적 노동으로 창출된 부)의 개념을 주저앉힌 것이었다.

 

자본가들이 그들 자신의 작업장에서 가변 자본/ 살아있는 노동력/ 새롭게 창출된 가치로만 이윤을 만들어낸다는 마르크스가 작업하는 가정은, 전체 체제에서 모든 교환이 동일하다고 즉 등가물의 동등한 교환이라고 가정할 수 없는 한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자본 간의 분리는 말하자면 생산 과정에서 '자연적 경계'과 어떠한 직접적인 방식으로도 부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애플이 아이폰의 부품 제조를 위해 수많은 하청업체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 다음에 다른 하청업체들에게 이들 아이폰의 조립, 포장, 운송, 보관에 대해서 지불할 때, 우리는 자본의 단일한 순환 또는 수많은 순환을 다루면서, 잉여가 순수하고 단순하게 전유되는 지점과는 반대로 잉여가치가 실제로 창출되는 지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이것은 생산과 분배의 과정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교환을 고려하는 즉시,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착취의 지점이 생산에서 소비로 상대적으로 이동하는 것의 영향을 검토할 때, 복잡성의 추가 층위가 발생한다.

 

우리는 여기서 일반적인 관찰로 시작할지 모른다. 자본은 사유재산이 없는 노동계급의 존재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에서 강조되는 것은 보통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계수단을 얻기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한다는 점이며, 이는 임금을 대가로 자본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본이 또한 노동자들에게 시장에서 소비재를 사기 위해 임금을 사용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자로서나 소비자로서나 자본주의에 필수적이다. 자본주의는 a)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는 강탈당한 농민/재산 없는 노동자의 계급과 b)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에 접근할 수 없기에 상업시장에서 그들의 필수품을 구입해야만 하는 소비자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한마디로 노동자이며 소비자인 계급이다. 노동자 소비자는 이중적 의무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생산수단과 자신의 생계수단이 모두 결여돼있기 때문에 자본에게 노동력을 판매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노동력 실현을 위한 조건, 즉 생계수단과 생산수단은 노동력의 소유자와 분리되어서 다른 이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두 가지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만들어낸 것에 의존한다. 그들은 생산을 위한 노동력과 실현을 위한 대량소비를 모두 제공한다.

 

이러한 관찰은 현재의 경제 및 사회적 위기에 대한 어떤 진지한 개입을 위해서도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화의 세계적인 과정은 약 250년 동안 진행되어 왔다. 기업형 농업, 농촌의 임금 노동, 그리고 마이크 데이비스가 '슬럼의 행성'이라고 부르는 거대 도시화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농민 공동체의 최종적 소멸과 함께, 이제 겨우 완성에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국제 노동계급의 상태를 고려할 때,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주요 범주로 나눈다. 보다 영구적이고 안정적인 3분의 1의 일자리들, 보다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3분의 1의 일자리들, 그리고 '잉여 인류'로 분류될 수 있는 3분의 1은 체제의 가장자리의 비공식적 경제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는데, 그 대부분은(그러나 결코 전부는 아니다) 세계 남반구의 빈민가에 있다. 이 세 그룹을 이렇게 불러보자. 중심적 노동자들, 불안정한 노동자들, 그리고 잉여 노동자들. 각 그룹은 가족을 포함해 20억 명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실존적 비극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규모의 고통의 덩어리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과잉축적과 과소소비라는 즉, 자본축적의 필요와 인간적 요구 사이에서 점점 더 분열되어 영구적이고 깊어지고 풀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우리의 중심적 주장의 살아있는 근거이다. 이러한 파열은 본 논문의 첫머리에서 확인한 네 가지 주요 발전에서 명백하다: 세계 남반구로의 생산의 이전, 소비의 시점으로 착취의 이전, 금융-자본의 지배, 그리고 영구적인 부채 경제.

 

과잉축적과 과소소비

 

우리 주장의 직접적 뿌리는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해 온 독점자본주의 이론이다. 이 주장은 루돌프 힐퍼딩의 <금융 자본>(1910),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1913),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1915), 블라디미르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1916)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론가들은 1873년에서 1914년 사이에 세계 자본주의의 성격에 심대한 변화가 낳은 영향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독점과 카르텔의 부상, 국가와 거대은행과 거대 기업들 사이의 긴밀한 결합, 자본의 수출, 제국주의적 팽창, 무기 생산의 증가, 그리고 결국은 세계적 전쟁이 포함된다. 한 세대 후에는 더 완전하게 짜여진 경제 이론이 나왔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케인즈주의 경제학자 모두 고전경제학의 주류와 결별하여 독점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주목할 만한 기여는 에드워드 챔블린Edward Chamberlin의 <독점적 경쟁 이론>(1933), 조안 로빈슨Joan Robinson의 <불완전한 경쟁의 경제학>(1933), 마이클 칼레키Michal Kalecki의 <경제적 동역학의 이론>(1952), 조지프 슈틴들Joseph Steindl의 <미국 자본주의의 성숙과 침체>(1952)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폴 스위지Paul Sweezy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1942), 그와 폴 바란Paul Baran의 <독점 자본론>(1966), 마지막으로 그와 해리 맥도프Harry Magdoff의 <경기침체와 금융 폭발>(1987) 등의 작업이었다.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와 관련된 동료들의 최근 연구와 윌리엄 로빈슨William I Robinson의 연구를 포함한 이런한 작업들과 다른 작업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기에 위치 짓는 것을 기쁘게 하는 발전적 연구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주장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집중과 집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장기적인 과정은 '독점 자본주의'(그리고 오늘날 '세계화, 금융화된 독점 자본주의')를 낳는데, 이 과정에서 경제의 각 부문은 시장을 관리하기 위해 공모하는 소수의 거대 기업들에 의해 지배된다.

 

독점은 a) 투자의 규모와 경쟁의 압력 감소로 인한 위험을 회피하게 하고 b) 가격, 생산 및 투자를 관리하기 위한 협업/공모를 가능하게 하고 c) '판매상의 노력'을 통해 요구/수요를 창출하게 하고 d) 시장의 공급 과잉 및 가격 하락을 피하기 위해 팽창을 제한하고 e) 신규 진입자/경쟁업체들을 가로막고 f) 가격이 아닌 판매상의 노력을 통해 경쟁하게 하고 g) (저임금을 통해서) 부품 단가를 낮추어 이윤을 올리려고 한다.

 

그들은 시장에 대응하기보다는 시장/독점적인 힘을 사용하여 시장을 관리한다. 이것의 효과는 (자본에 의한) 과잉 축적과 (노동에 의한) 과소 소비라는 자본주의 고유의 경향을 고착시키는 것이다. 스위지는 마르크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위기에 대한 한 가지 이상의 설명은 마르크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완전히 발전된 이론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제공하겠다는 마르크스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이윤율 하락의 경향'이라는 위기 이론과 관련하여 이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기에 대한 과잉축적/ 과소소비 이론의 버전이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두 가지 명확한 예를 제시하겠다. 첫 번째는 <자본> 2권, 두 번째는 <자본> 3권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모든 힘을 발휘하는 시대는 항상 과잉생산의 시기이다. 생산력은 잉여가치가 생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현될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서는 결코 활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품 자본의 실현과 잉여가치의 실현인 상품 판매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소비 요구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가난하고 항상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소비 요구에 의해 제한된다.”

 

“모든 진정한 위기의 마지막 원인은 항상 대중의 빈곤과 제한된 소비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경향은 사회 전체의 절대적 소비 능력만이 그들의 한계가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스위지의 이론적 성과는 이러한 내재적 경향과 관련하여 독점 자본주의의 함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그 후에 <먼슬리 리뷰> 전통에서 다른 이론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 효과는 과잉 축적/ 과소 소비의 위기를 영구적인 조건으로 만들고, 체제를 만성적 정체와 점점 더 기생적이고, 반사회적이고, 고장난 형태의 자본 축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한 가지 중요한 이론적 혁신은 가격이 상승만 하고 하락은 하지 않는 내재된 독점 경향을 보여주는 그의 '뒤틀린 수요 곡선'이었다. 독점의 정도에 대한 핵심적 척도로서, 한 가지 추정치는 단위 노동비용 대비 가격 인상 비율이 1940년대 후반에는 1.5, 2010년대 초반에는 1.75였다. 이와 같은 또 다른 광범위한 측정에 따르면 디플레이션이 19세기의 규범이었던 반면, 특히 위기 시기에 인플레이션은 20세기의 규범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스위지는 독점 이론에 기초하여, 가격이 상승할 때처럼 순조롭게 떨어질 수 있는 경쟁 자본주의에만 적용되는 위기에 대한 설명적 대안이라며 '이윤율 하락 경향'(TRPF)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이것은 잉여의 대규모 증가라는 장기적인 경향으로 대체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는데, 이는 우리가 본 논문에서 논의해 온 모든 것의 결과이다.

 

TRPF의 주장은 마르크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주요 논의는 <자본> 3권에 나타나는데, 그는 여기서 '법칙 그 자체'와 다양한 '상쇄 요인'을 개괄한다. 이 논의는 그 이후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위기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끝내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가 죽은 후 엥겔스가 출판할 수 있는 텍스트로 편집한 <자본> 3권에 대한 그의 노트는 현재 진행 중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승한다. 즉, 각 노동자(‘가변 자본’)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류의 질량(‘불변 자본’)은 점차 증가한다. 따라서 잉여를 생산하는 투자의 구성요소(기계로 대표되는 ‘죽은 노동’과는 반대인 ‘살아있는 노동’)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총 투자에 비해서 감소한다. 따라서 이윤율은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실제의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하다. 마르크스는 실행에서 TRPF를 상쇄하는 많은 '반작용 요인'을 찾아냈다. 노동을 더 강하게 착취하기, 임금을 그 가치 이하로 낮추기, 불변자본의 요소를 더 값싸게 하기, 상대적 과잉 인구, 대외 무역, 자본의 몫을 늘리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의 노트에 나온 그 기원을 반영하여) 포괄적이거나 완전히 일관된 목록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목록에서 작동하는 요소들과 함께 덩어리진 뒤범벅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또한 종속된 지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의 완전한 '경향'의 과정을 '반작용 요인'으로 강등시킨다. 간단히 말해서,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이론적 혼란을 안겨주었고, 그의 오랜 협력자이자 사후 편집자인 엥겔스는 <자본> 3권을 출판하려는 그의 이해할만한 열망이 앞서서 그것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실제로 기본적 오류가 발생했다. 물리적 측면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기계류의 대량 증가)이 증대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경험적 사실이지만, 가치 및 가격 면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증가하는 것과 융합되는 것은 완전히 불확정적 문제이다. 다른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확정될 수 없다.

 

첫째,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있다. 새로운 투자 회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생산은 더욱 기계화되기 때문에, 각 노동자들은 결국 더 많은 것을 생산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재 산업과 소비재 산업 모두에서 생산성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재의 바구니가 저렴해짐에 따라 노동력의 상대적 비용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가치와 가격 면에서 상승해야 할 아무런 내재적 이유가 없다. 오늘날 자동차 조립라인에 있는 로봇이 1840년대의 다축 방적기보다 상대적으로 - 노동의 비용에서 상대적으로 - 더 비싼가? 현대 세계의 노동 집약적 산업 - 영국 글래스고의 콜센터, 인도 다카의 의류 착취공장과 중국 선천의 전자공장을 생각해보라 - 은 '살아있는 노동'에 지출되는 '가변 자본'의 축소된 비율을 의미할까?

 

둘째로, 착취율은 상승할 수 있다. 실제로, 생산성의 증가와 함께, 심지어 임금의 구매력이 절대적으로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윤이 증가하는 것은 완벽하게 가능하다. 노동자가 예외적으로 잘 조직되고 전투적인 경우에만(오로지 그들이 실질적으로 공세적인 경우에만) 노동 생산성의 증가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상승한다.

 

이럴 경우 – 임금 청구서의 상응하는 인상에 의해 모든 생산성 이득이 즉시 무효화된다면 - 노동절약적인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의 유인은 약화될 것이다. 이것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가치와 가격 면에서 상승해야 할 어떤 내재적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자본가들은 정확하게 임금이 그것과 같은 정도로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을 때 노동절약적 기계류에 투자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 노동의 생산성 증가, 착취율 증가 등 세 가지 요소는 모두 동일한 영역, 즉 가치가 창출되는 생산 과정에서 작동한다. 이윤율이 떨어지는 일반적인 장기적 경향은 없다. 대신에, 자본가들이 새로운 기계에 투자할 때, 세 가지 일이 일어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상승하고, 노동 생산성은 상승하고, 착취율은 상승한다. 이 세 가지 요인 중 어느 것도 다른 요인보다 우선하지 않으며, 어떤 요인만 경향으로 간주하면서 다른 요인을 단순히 '반작용 요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스위지에서 파생된 이 주장은, 이제 생산 과정에서 가치가 창출되는 동안 잉여(자본가 계급에게 누적되는 가치의 몫)는 생산과 유통/소비, 그리고 전 세계적인 축적 순환의 수없이 많은 다른 지점에서 (창출이 아니라) 전유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은 전체 TRPF 주장이 생산 과정의 각각의 분리된 순간에 자본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잉여를 전유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훨씬 더 완전히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물론 실현 - 시장에서의 가치로 판매 - 이 뒤따른다고 가정할 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잉여가 세금, 임대료, 담보대출, 독점 가격, 부채의 이자, 저임금 노동자의 초착취 등의 형태로 전유될 수 있다는 것이 인식되는 순간, 모든 주장은 무너진다. 다시 말해서, TRFP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 마르크스의 기본 이론의 주요한 오류였다고 주장하는 것에 연결돼 있었다. 노동 가치 이론(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총체적 체제로 생각할 때, 가장 높은 수준의 추상화에서만 작동한다)과 자본 축적의 운동 법칙(이것은 사회적 상품/총적 가치의 몫이 계급들 간에 그리고 계급 내부에서 분배되는 메커니즘이다)을 혼동하는 것이다.

 

결론: 열 가지 테제들

 

노동 가치 이론은 매우 높은 일반적인 추상 수준에서만 적절하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일부에서 잘못 사용한 것이 자본의 순환을 이해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결과는 상당한 혼란이다. 그것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 전형 문제, 그리고 [이윤율] 균등화 문제에 낭비되는 노력만이 아니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는 장기적인 경향에 의해 파멸한다는 반신비주의적, 결정론적/목적론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잉여가 전유되고 생산, 유통, 교환을 통한 자본의 연속적인 순환에서 여러 다른 지점에 축적된다는 것을 파악하는데 실패하는 것을 포함한다.

 

세계화되고, 금융화된 독점 자본주의는 (주로 세계 남반구에서는) 생산자로서 그리고 (주로 세계북반구에서는) 소비자로서 노동자를 초착취한다.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저임금을 지급하거나,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지우는 것 둘 다를 통해서 잉여를 전유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계급투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두 번째 논문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I.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창출된다.

 

II. 가치는 국제적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총계이다.

 

III. 사회계급들 사이에서와 내부에서의 가치 배분은 생산, 분배 및 교환 속에서 자본의 순환에 의해 결정된다.

 

IV. 잉여는 생산 지점과 소비/사회적 재생산 지점 모두에서 전유될 수 있다.

 

V. 노동자는 생산자(지출된 노동의 가치 이하로 노동력에 대해서 지불받는 경우)와 소비자(세금, 임대료, 이자, 가격 등의 형태로 잉여 전유에 의해 임금이 감소하는 경우) 모두로서 착취당한다.

 

VI. 생산 지점에서 노동자를 집중적으로 착취하는 것(즉, 주로 세계 남반구에서 금융화된 자본과 초국가적인 '유령'[비생산] 기업에 의한 초과이윤의 전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VII. 소비/사회적 재생산의 지점에서 노동자를 집중적으로 착취하는 것, 즉 주로 세계 북반구에서 생산과 대조되는 유통에서 잉여를 전유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VIII. 독점은 과잉축적/과소소비 및 커지는 장기 침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a) 생산성과 생산량이 임금보다 더 빨리 증가하기 때문이다. b) 수요를 창출하고 판매를 증가시키며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이 관리된다. 그리고 c) 자본의 국제적 기동성은(노동의 상대적 비기동성과는 대조적으로) 자본이 불안정하고 저비용인 노동자들에게 접근하고, 노동 예비군을 확장하고, 고비용 노동의 임금을 삭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IX. 금융화된 초국가적 기업은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패권적 분파로서, 전형적으로 미로와도 같은 하청업체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운영되는 금융, 기술, 지식, 시장, 브랜드화 등의 통제를 통해서 자본의 국제적 순환의 수많은 지점에서 잉여를 전유할 수 있다.

 

X. 착취/축적의 균형에서 이러한 역사적 변화는 과잉축적과 과소소비의 만성적이고 심도 깊고 해결하기 어려운 위기의 맥락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전례 없는 규모로 노동력에서 자본으로 부를 빼돌리는 그것들의 효과는 이러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킨다.

 

(기사 등록 202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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