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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전략: 더 나은 어딘가로 가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7. 4.

레오 파니치Leo Panitch, 샘 긴딘Sam Gindin

번역: 두견

 

아래 내용은 레오 파니치Leo Panitch, 샘 긴딘Sam Gindin이 2014년 11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역사유물론’ 컨퍼런스에서 2013년 ‘아이작 도이처상’ 수상자로서 했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두 사람은 공저한 <글로벌 자본주의 만들기>로 2013년에 아이작 도이처상을 받은 바 있다. 레오 파니치(Leo Panitch: 1945 ~ 2020)는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 교수였고, 25년 동안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의 편집자로서 국제적 좌파의 이론과 실천에 많은 기여를 해 왔다. <위기 속의 노동계급 정치>, <의회 사회주의 종말>, <사회주의를 찾아서: 벤에서 코빈으로 가는 노동당 신좌파의 프로젝트> 등의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지난해 연말에 코로나19로 인한 갑작스러운 그의 사망으로 많은 좌파 활동가들의 추모가 이어졌는데, 우리는 파니치의 주요 글들을 다시 소개하는 기획 연재를 지속하고 있다.

 

출처: https://doi.org/10.1163/1569206X-12341407

 

 

우리는 <글로벌 자본주의 만들기>의 기여가 '현재 존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를 냉정한 관점에서 보고, 더 나은 곳으로 가는 데 관련된 과제의 성격과 규모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는 언급으로 결론 내렸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이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전략적으로 더 나은 곳에 도달하기 위한 핵심 조건 중 하나는 더 나은 역사유물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가 항상 인간 존재의 영구적인 특징인 사물의 자연적 질서인 것은 아니라는 이해를 발전시킨다.

 

이것은 이전 생산 방식에서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자본주의로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문제 삼으며, 근본적으로 다르고 더 나은 사회 질서로 자본주의를 대체하기 위한 숙고와 투쟁을 장려한다. 그러나 일단 자본주의 체제가 출현하면, 역사유물론을 전개해 온 많은 사람들이 그 자체를 몰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종종 추상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논리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관점에서 그것의 기능과 모순을 모두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역사유물론이 전개되었을 때에도, 이것은 종종 논리적으로 파생된 단계들의 관점에서 제시되어 왔고, 자본주의 종말을 재촉하는 목적론적인 용어로 던져졌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인간이 자신이 선택한 조건 하에 서는 아니지만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역사유물론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손상시켰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말이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거대한 부를 소유하지도 않는다”,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실행하고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인간, 실제 살아있는 인간이다.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활동에 불과하다.”

 

경쟁과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의 핵심 개념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행동하는 조건에 대한 그러한 이해를 발전시키는데 필수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역사유물론의 추가적 발전은 경쟁과 계급이 표현되는 제도적 형태에 대한 과소적 이론화, 또는 적어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론화를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이러한 제도들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관행들이 자본주의 경쟁과 계급 세력들의 다른 균형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제도들의 추가적 발전이 모순과 위기에 대처하는 그들의 능력을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역사유물론을 더 나은 곳으로 가져가는 것은 자본주의적 경쟁, 자본주의적 계급, 자본주의적 국가들의 제도적 차원에 대한 더 나은 이론화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왜 자본주의가 21세기까지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역사유물론의 창시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노동계급으로의 형성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것을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21세기 사회주의 전략을 위한 특정한 지침을 이끌어냄으로써 결론맺을 것이다.

 

1. 자본주의적 경쟁

 

주류 경제학자들은 항상 기업의 규모와 시장 우위에서의 성장을 자본주의의 경제적 경쟁에 대한 그들의 양식화되고 고도로 낭만화된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리고 자본의 집중과 집적이 20세기까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목격하면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독점적 단계, 즉 레닌이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의 성숙기를 대표하는 것이 경쟁적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를 대체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자본 단위들간의 경제적 경쟁은, 이 새로운 단계에서 제국간의 경쟁의 형태로 정치화된 것으로 보였다. 자본의 집중과 집적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경쟁적 동역학의 경향은 실로 마르크스의 위대한 통찰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경쟁의 성격을 재구성한다는 측면에서 이를 이해했는데, 이것은 그것을 없애기는커녕 이른바 그가 말한 '대규모 산업'에서도 그것을 심화시켰다.

 

'금융 자본'의 지시 아래 산업과 은행을 직접 연결하는 독점 트러스트에 대한 힐퍼딩의 매우 영향력 있는 묘사는 이 점에서 마르크스와의 급격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그것은 독일로부터 너무 일반적으로 추론했던 것이다. 20세기에 점점 더 규범이 된 것은 미국에서 만연한 생산과 금융 제도 간의 훨씬 더 느슨한 관계였다.

 

이것이 사실로 판명 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의 결과와 같은 역사적 우연성을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분석으로 가져 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독일 파시스트 정권은 산업 및 금융과의 구조적 관계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국가 독점 자본'과 더 비슷해 보였을 것이다.

 

그 정권의 전쟁에서의 패배는 자본주의의 후속적 윤곽에 결정적이었는데, 자본주의는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의 확장과 재생산을 책임지는 비공식적 미국 제국에 의해 형성되었고, 해외에 있는 자본가 계급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다국적 기업(mncs)과 투자은행이 당대의 주요 자본주의적 기관으로서 자본주의 세계화의 중심 주체로 번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마르크스가 이 유한 책임회사의 제도적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현대적 기업 형태가 19세기 마지막 4분기에야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자본의 이동과 배분에 대한 역할과 함께, 무엇보다도 그것을 조직적으로 특징지었던 것은 생산과 유통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대륙적 규모의 기업간 경쟁으로 지역 또는 지역적 독점을 대체하는 능력이었다.

 

이러한 기업 형태는 해외 시장에 침투하면서 우리 mnc의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mnc가 채택한 형태였으며, 특히 1970년대 이후 서로의 시장을 상호 침투했다. 20세기에 독점자본의 개념이 과소평가한 것은 경쟁이 한 산업 내 기업의 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자본의 이동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도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규모 산업에서 고정된 비용과 노동력에 의해 발생하는 불균등한 기술 개발과 가격 인상 압력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몇몇 거대 산업 기업들에 자본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에도, 그들은 서로 치열한 경쟁관계를 유지했는데, 그것은 항상 가격을 넘어서, 그 다음으로 수익성, 시장점유율, 그리고 새로운 자본을 유치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였다.

 

갈브레이스Galbraith의 '신산업 국가' 못지 않게 '독점자본'에 대한 바란Baran과 스위지Sweezy의 이론은 이것의 근본에 있는 동역학을 발견하지 못했고, 20세기 마지막 4분기는 이전에 독점의 영역으로 지정되었던 많은 곳에서 새로운 자본의 진입과 가격 경쟁으로의 복귀가 이어졌다.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 신제품, 새로운 노동 과정 및 새로운 유통 물류를 통해 경쟁함에 따라, 이 모든 것은 자본의 집중과 집적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경쟁에 대한 이전의 장벽을 종종 극복한 자본의 부문과 지역을 가로지르는 이동성을 크게 확장시킨 제도적 혁신과 함께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완전히 다른 분야의 기업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사실 전통적으로 경제의 한 부문이 이해하던 것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운송 및 통신 비용의 감소가 촉진하여, 기업과 국가 간에 새로운 가치 사슬이 도입되었고, 이를 통해 기업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전 세계의 수많은 공급자들 사이에서 가치 사슬에 편입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정교한 내부 회계 방법의 개발은 같은 회사의 자회사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경쟁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정보 혁명의 과정을 통해 자본의 집중과 집적을 우리가 다시 한번 목격했듯이, 독점자본이라는 규정은 여전히 부적절하다.

 

예를 들어, 구글은 현재 검색 엔진으로서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터넷 전체에 걸쳐 잠재적 수익성에 대한 접근을 놓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개인화된 검색은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같은 소셜 미디어와 점점 더 연결되고 있으며, 음성 검색에는 애플 아이폰을 기반으로 한 애플리케이션과의 경쟁이 포함되며, 현재 선두주자인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이비엠, 아마존이 참여하는 클라우드 컴퓨팅을 둘러싼 극적인 가격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대형 금융기관들 또한 점점 더 그들끼리 경쟁하면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사이의 오래된 분할을 타파하고 보험과 사업 서비스 등으로 분업화하면서, 그들은 또한 비금융 부문에서 더 큰 경쟁을 지원하고 촉진하는 새로운 제도적 역량을 발전시키고 있다.

 

금융이 국내 및 글로벌 저축을 동원함에 따라 이는 합병을 지원하기위한 자금 풀을 제공하여 산업 및 서비스 기업 간의 기업 수와 신규 진입자를 감소 시켰다. 파생 상품의 개발은 새로운 선물 시장을 통해 환율과 가격 및 비용 변동에 대한 보험을 제공함으로써 글로벌 경쟁의 장벽을 줄였다. 그리고 고도로 유동적인 금융 시장은, 한 회사 주식에서 다른 회사 주식으로, 그리고 한 회사 채권에서 다른 회사 채권으로 쉽게 이동함으로써, 더 큰 경쟁력을 위해 끊임없이 자본을 규율했다.

 

20세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금융자본'의 오래된 이론은 사라졌다. 그 용어는 주로 자본가 계급의 재정적 부분을 나타내기 위해 제한되었다. 그러나 독점자본의 다양한 개념은 특히 자본가 계급의 지배적인 부분과 국가에 대한 그것의 직접적 지배를 언급하기 위해 지속되었다. 이것은 실제 역사적 행위자로서 자본가 계급에 대한 역사유물론의 이해의 적절성에 대해 우리가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2. 자본가 계급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종 방언에 대한 풀이뿐만 아니라 적절한 이론적 풀이를 필요로 하는 계급의 언어로 말한다. 계급투쟁은 단순한 청원이 아닐 때, 대개 일련의 행위자, 제도들, 전략 및 전술들과 관련된 매우 복잡한 힘의 균형을 위한 개념적인 기술이다.

 

즉자적 계급에 대한 개념과 대자적 계급에 대한 개념 사이에는 노동계급의 경우뿐만 아니라 자본가 계급에서도 극히 광범위한 경험, 정체성, 행동이 존재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개인의 위치를 규정하는 구조로만 계급들을 취급해서는 파악할 수 없다.

 

계급들은 오히려 공통의 경험과 활동에 기초한 변화하는 형성이 역사적으로 추적될 수 있는 실제 집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역사유물론의 핵심 관심사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급의 정체성과 관심사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의 변화와 그것이 계급 세력의 상대적 균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비록 구체적인 제도들에 초점을 맞춘 마르크스주의 역사기록학과 정치사회학에는 풍부한 전통이 있지만, 이것은 베버 이래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그리고 법적 제도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주요한 문제제기들에 맞서는 데 충분치 않다.

 

물론,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평가들은 계급 불평등을 무시하거나 지위 증명이나 소득 범위에 의해 정의된 생명 없는 위계질서로 계급을 축소시킨다. 이것은 바로 올해 '계급투쟁'을 넘어선 '백가지centile 투쟁'을 옹호하면서 많은 찬사를 받은 토마스 피케티Thomas Piketty 버전의 '자본'에 의해 요약되었다.

 

이것은 계급을 소득과 부의 분배를 설명해주는 계급 세력 균형과 사회적 관계가 아닌, 소득과 자산으로 설명되는 통계적 가공물로 취급하는 역전이다. 그렇긴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본 축적의 추상적 논리에서 비롯된 이해의 결과로서 자본을 일관성 있고 자의식적인 행위자로 취급하는 잘못된 경향이 있어왔다. 이것은 심지어 때때로 ‘합리적 선택 이론’이나 ‘게임 이론’과 유사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자본가 계급은 사실 그들의 형성, 정체성, 행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도들을 통해 진정한 사회적 행위자로서 결합되는데, 이는 특히 계속되는 경쟁 속에서 자본가들 간의 분열을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자본의 일부분을 거의 물샐틈없는 별도의 칸으로 여기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 종종 존재한다. 산업과 금융, 독점과 경쟁, 국외와 국내. 이것은 자본주의적 삶의 유동성을 놓치는 어떤 정적인 경제주의를 반영한다. 필요한 것은 계급 형성 및 계급투쟁에 역사적으로 관여된 제도들을 경쟁과 불평등에 대한 분석과 연결하는 역사유물론이다.

 

고용주 협회, 산업연맹, 상공회의소, 싱크탱크, 컨설팅업체, 로펌, 재단, 자선단체 등의 기관들이 자본의 집단적 계급 이익을 중재하고 만들어내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지속적이고 증가하는 계급 불평등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있을 수 없다. 기업 이사회의 연동형 이사직은 기업에서 직접적으로 기능하는 어떤 역할보다 자본의 다양한 부분을 연결하는 데 더 중요할 수 있다.

 

소유권 대 통제권에 대한 오래된 논쟁은 점점 더 학술적으로 변했는데, 이는 기업 경영자들을 위한 스톡옵션의 광범위한 확대 때문만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대학의 경영대학원들이 법인 관리자들을 그 무수한 MBA 프로그램들을 통해 자본가 계급에 편입시키는 등 계급 형성 과정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국가적 자본가 계급 형성에 관한 문헌들은 기관들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아무리 유럽 기업 원탁회의나 세계경제포럼이 지역적, 세계적인 축적 패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들이 만든 자본가들 사이의 유대관계는 영국의 CBI(영국산업연맹), 독일의 BDI(독일산업총동맹) 또는 미국의 상업 및 기업 원탁 회의소와 같이 국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건설된 것보다 훨씬 더 얇다.

 

그리고 이것은 브릭스(BRICS 신흥5국 -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심각한 비교 역사유물론적 분석도 공산당이 중국에서 그러한 자본가 계급 형성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는 것이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에 대해, 또는 ANC(남아프리카민족회의) 엘리트들이 남아프리카 자본가 계급으로 통합되었던 제도적 형태들에 대해, 또는 브라질 개발은행이 국내 자본가들을 브라질 MNCs(다국적 기업들)의 아류 제국주의 프로젝트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에 대해, 그 자체로 고심해야 한다.

 

3. 자본주의 국가들

 

분리된 국민국가들에서 계급 정체성의 제도적 구축은 세계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수행하는 매우 적극적인 역할과 함께 적어도 196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 스스로 역사유물론의 주요한 문제로 인식되어 온 것을 극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화한다.

 

국가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 약점은 '국가는 근대적 대의 국가를 통해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얻은 부르주아지들의 공통된 사무들을 집행하는 장치일 뿐'이라는 [공산주의] 선언의 주장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가 권력과 계급 권력을 구별할 필요성에 대한 랄프 밀리밴드Ralph Miliband의 주장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국가 기관들을 명확하게 범주화하는 것의 중요성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발전을 나타냈다.

 

세계 자본주의를 만드는데 있어서 미국 국가의 중심적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자본가 계급의 대서양 횡단적 상호침투라는 풀란차스Poulantzas의 주장에 의해 크게 도움을 받았다. 여기서 다국적 기업들MNCss의 확대는 외국 자본이 서로의 사회적 형성 안에서 사회적 힘이 되도록 이끌었기 때문에, 제국간 경쟁의 오래된 이론을 무효화시켰고, 미국 국가의 국제화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풀란차스가 국가 권력의 특수성에 대한 밀리밴드의 통찰을 거부하고, 대신 국가를 계급적 표현의 '장' 또는 계급 세력의 '응축'으로만 생각하자고 주장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직접적인 계급의 도구가 아니며 단지 계급적 행위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들 자신의 세금 수입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 축적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은 항상 계급 세력의 사회적 장 안에 위치해야 하지만, 국가 권력은 계급 권력과 똑같지 않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국가와 경제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정치적 마르크스주의’의 기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전해 온 국가 기관과 경제적 기관의 구별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추적되지 않았다. 국가 기관들은 계급적 대변과 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다소 자율적일 뿐만 아니라,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경쟁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질서의 일관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자본 축적을 용이하게 하고 경제적 모순과 위기를 억지하려는 시도와 관련된 훨씬 더 전문화된 기관의 형태와 역량을 발전시켰다.

 

국가 기관들이 관여하는 광범위한 활동은 일부 추상적인 '자본의 논리'에서 직접적으로 유추될 수 없으며, 국가의 모든 행위가 일부 또는 모든 자본가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것으로 돌려질 수는 없다. 게다가, 국가가 하는 일은 케인즈Keynes나 아니면 하이에크Hayek로부터 영감을 받았든 간에 경제학자들이 신탁한 정책을 실행하는 것일 뿐이라는 개념은 자본가들이 자본주의 진흥이나 지속을 위해 국가가 할 일을 지시한다는 개념만큼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국가의 행위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 행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배우는 것은 주로 어떤 국면에서든 특정한 문제에 대처하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서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국가 기관들이 겪는 변화, 그 중에서도 위계구조의 변화는 국가 자체 내부의 점진적이면서 경합적인 모든 과정의 결과이다.

 

이것들은 계급 세력 균형의 변화와 관련이 있지만 그것들로만 축소할 수 없다. 종종 자본가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바로 그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국가의 행위자들은 자본가와 달리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에 대처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은 흔히 관계들을 뒤엎고 국가 기관들 자체 사이에 쟁투를 일으키는 것을 포함해 특정한 단계를 밟음으로써 발생할 다른 문제들을 대비하도록 훈련 받는다.

 

이것은 직업 공무원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세계에서 국가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며, 한때 국가 기관들에 포함되어 해당 기관들에 구체적으로 틀지어진 책임을 맡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자본 축적과 사회적 관계를 촉진하고 지속하는데 있어서 실제로 국가가 무엇을 했고 자본가 계급들이 무엇을 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왜 자본주의가 21세기까지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 실로 결정적이다.

 

4. 자본주의의 생존

 

세계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변혁시키기 위해 역사유물론을 발전시킨 사람들이,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가 실제로 그들의 혁명적 노력에 취약하다는 용기를 주기만 한다면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조급한 예측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마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들이 이미 '그 자신의 발 아래서 땅을 파고 있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의 마르크스의 예언은 자본주의 역동성에 대한 그의 예리한 이해에서 매우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부르주아지가 '세상을 자신의 이미지대로 만들고 있다'는 선언의 설명이 여전히 그러한 현대적 울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너무 과한 것은 <자본> 제3권에 기술되어 있는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야 엥겔스가 합쳐버린 것이다. 어쨌든, 폴 스위지Paul Sweezy는 폴 바란Paul Baran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식은 경제학자들의 아편이고, 그들은 마르크스에게도 그렇게 작동했다. 동어반복에서 학문을 짜내기 위해 현대의 그 어떤 것 못지않게 열심히 노력하는 이윤율 하락에 대한 장을 참조해 봐라.’

 

실제로, 이 공식에 기초해 종말적 붕괴를 추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 역사 전반에 걸친 위기의 단일한 원인을 전제로 한 이러한 공식을 사용하는 것은 역사유물론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배반이다.

 

정확히는 마르크스가 그렇게 잘 포착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비교적 정적인 생산 방식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역동적이기 때문에 위기에 직면하기가 더 쉽다. 현대 균형 이론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오래된 개념에 반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쟁적 시장, 불균등 한 발전 및 계급 갈등의 끓는 가마솥에서 주기적인 경제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항상 옳았다.

 

현재 자본주의에는 4대 위기가 있었다. 19세기 마지막 4분기, 1930년대, 1970년대 그리고 현재의 위기가 그것이다. 각각의 위기는 역사적으로 구체적이었으며, 각각의 원인은 각 시기에 특정한 경제적 모순뿐만 아니라 계급 관계와 제도적 형태들과 관련하여 분석되어야 한다.

 

또한 각 위기의 심각성, 지속기간 및 해결책은 계급 세력 균형, 새로운 기술과 조직적 형태를 배치할 자본의 역량, 그리고 국가가 위기를 억제하거나 악화시키기 위해 행동하는지, 계급 세력의 균형을 변경하는지, 그리고 자본의 축적을 갱신하는 방식으로 제도적 사회기반 구조를 변경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마르크스가 지적한 이윤율 하락 경향의 '반대 경향' 가운데서도 속하지 못했지만,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자본주의를 괴롭히는 모순에 대한 분석에서 국가를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이론의 문제점을 제쳐두고라도,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의 국제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 없이는 이 단계를 넘어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일부 국가들이 국제적으로 자본주의를 육성하고 재생산하고 그들의 제도뿐 아니라 국내 경제 및 사회관계를 이와 연결시키는 책임을 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결합하면서 세계화를 감독하고 그것이 야기한 경제적 위기를 억제하는 비공식적인 미국 제국의 제도적 능력의 발전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게다가 세계화가 이루어진 것은 자본주의의 '생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세계 구석구석까지 확산시켰다. 비록 매우 고르지 못한 과정으로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과 오래된 ‘저발전의 발전’ 이론의 중심이었던 과거 제 3세계의 가장 큰 나라들 모두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수반했다.

 

물론, 이것은 순전한 '진보'로 이해될 수 없다. 생산과 권력의 국제적 위계구조는 순위 변동에도 지속된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기 시대에 분석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또한 강탈과 탈취, 착취와 불평등, 모순과 갈등이 동반된다.

 

게다가, 오늘날의 생태학적 파국은 풍부한 역사유물론-물질적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자본주의가 계속 생존하는 데 수반되는 파괴적이고 혼란스럽고 비합리적인 세계를 인식하기보다는 임박한 붕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5. 자본주의의 무덤 파는 사람들

 

21세기까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것은 역사유물론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공산주의 선언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로 지정한 노동계급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의 견해로는, 경쟁이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에 미치는 비대칭적 영향을 파악하지 않고, 이것이 그들이 내린 선택과 그들이 채택한 관행을 조건화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한 지붕 아래 모이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들 사이의 경쟁을 잠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조건을 확립한 순간부터, 그들이 그렇게 하는 제도적 형태는 계급 형성에 양면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인조합이 자본주의 기업들을 아우르는 조직을 통해 임금을 경쟁에서 빼내려고 했듯이, 다른 노동자의 배제는 노동자들 자신의 제도적 형태에 내재되어 있었다. 나중에, 산업 전반의 노조 조직들은 더 넓은 연대들을 만들었지만, 이것은 부문주의적 계급 형성을 제도화했다.

 

노동계급 내부의 그러한 제도화된 분할은 항상 노동계급 지역사회가 장인과 부문적 정체성들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 그러나 <선언>과 <브뤼메르 18일>에서 모두 마르크스는 농민 못지않게 노동자들도 '단지 지역적 상호연결성'을 가지고 있는 한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다'고 옳게 강조했다.

 

실제로, 이것이 아마도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일반적으로 유사한 성격의 많은 지역적 투쟁을 국가적 투쟁, 계급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과정을 위해 계급투쟁이라는 용어를 남겨 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또한 이러한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 그 자체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계속해서 뒤집히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경제적 경쟁이 특정 기업을 파괴하는 반면 적자생존은 자본가 계급 전반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그것은 종종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고용주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다른 노동자들을 경쟁자로 간주하도록 강요했고, 이것은 연대를 손상시키고 노동계급을 약화시켰다. 이는 <공산주의 선언>의 '연령과 성의 차이는 더 이상 노동계급에게 사회적 타당성이 없다'는 명백히 잘못된 주장에 비추어 볼 때 특히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인종, 종교, 민족성의 차이뿐 아니라 국가적 정체성이다. 노동계급 정체성의 지속적인 다양성의 중요성을 완전히 인식하려면 경쟁과 계급 사이의 지속적 변증법 속에서 노동계급 제도가 어떻게 조직되었는지의 중요성에 특히 민감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조직이 이러한 차이들을 무시하거나 제도화하는 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차단하는 계급 형성 과정에 복무해 왔던 것이다. 에드워드 톰슨Edward Thompson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에 점점 더 집중하면서, 때때로 '역사적 특수성과 동떨어진 고정적이고 영원한 법칙'을 찾는 것에 너무 사로잡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때때로 마르크스의 관심을 기관의 중요성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돌렸다고 해도, 그것의 결정적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의 모든 정치적 저술에 명백하게 남아 있었다. 이것은 1866년 제 1인터내셔널 제네바 총회를 위한 그의 '대표자 규약'에서 특히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여기서 그는 노동조합 협회를 '노동계급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넓은 이익을 위해 노동계급의 조직적 중심으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종류의 기관들로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산업 부문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위해서 임금에 대한 경쟁을 없애는 것은 확실히 의식적으로 조직화의 중심으로서 역할하는 노조와 관련있었고, 비록 노동자의 완전한 해방을 지향하지는 않더라도, 노동계급에 대한 장인조합보다 더 폭넓은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완전히 다른 분야의 기업들이 서로 경쟁하게 되면서, 이것은 부문별 노동조합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고, 계급 세력의 균형을 자본에 유리하도록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더욱이 이와 관련된 자본주의적 구조조정 - 불안정 노동의 성장, 산업 생산과 관련된 서비스의 확대, 소규모 작업장으로의 이동 - 의 특정한 직업적 타격은 노동계급 내의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시대의 경쟁으로 인한 공간적 구조조정이다. 자본이 국내외로 재배치됨에 따라, 그것은 일반적으로 자본가들을 더욱 가깝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연계를 구축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동시에 국제적 프롤레타리아의 규모를 크게 증가시켰지만, 이 일이 일어나면서 계급적 정체성을 창출하기 위한 세대간 및 공동체적 기반은 종종 훼손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역사는 끝이 없으며, 새롭고 갱신된 계급 형성 및 조직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 마르크스가 좋아하던 문구를 사용하면 - '우리 눈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프레카리아트로 재구축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예를 들어서 자동차 노동자들 또한, 노동조합이 그들의 일을 안정시키기 전에 불안정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의 노동관계 체제의 낡은 보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봉건적 의무에 대한 기억이 19세기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촉발시켰듯이 그러한 보장들에 대한 기억은 오늘날 새로운 투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 더욱이 적시생산 경제는 특히 운송, 창고 및 공급업체 사이와 전산화된 물류에서 급작스러운 중단에 취약하다.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은 낡은 산업 노조들이 서비스 분야, 심지어 대학들에서도 조직화 추진에 착수하도록 했다.

 

노동조합의 여성화는 이에 기여하고 있으며, 때로는 병원의 간호사와 청소원 사이에서와 같이 고숙련과 저숙련의 여성 노동자들 사이의 매우 오래된 분열을 극복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노조들의 오늘날의 제도적 형태가 계급의 정체화와 능력을 실제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것을 부추기는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유물론이 필요하다.

 

또는 노조가 노동자들을 위한 보험의 대리 판매자로서 서로 경쟁하도록 하기 위해 오히려 구조화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일반적 노조들을 향한 제도적 변화는 여전히 마르크스가 의도한 의미에서 그들을 '노동계급 조직화의 중심'으로 만들기 보다는 계급 형성과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제한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또한 미헬스가 1세기 전에 특징지었던 것처럼, 노동계급 조직의 관료화가 사실상 '철의 법칙'인지, 아니면 교육 수준과 의사소통 방법의 변화가 이전에 가장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관료화의 도구적 수용뿐만 아니라 공손하게 만들었던 조건을 변화시키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유형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이 필요하다.

 

우리는 계급, 민족, 인종, 지역 정체성을 연결하는 노동자 행동 센터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계급 조직에 대해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오늘날의 캠페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어려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오늘날 어떠한 진지한 비교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위해서도 브릭스BRICs 내에서의 특정한 제도적 형태의 자본가 계급 형성 및 조직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중국의 파업 물결 뒤의 지역 조직에서부터, 인도에서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신노조 운동, 우리가 말하는 남아프리카 노동계급의 제도적 구조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발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노동계급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6. 전략적 지침

 

우리가 역사유물론 이론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사례는 우리에게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 세계로 가는 GPS 경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전략적 지침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정말로 죽었다고 선언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9가지 살아있는 것들과 어울리는 9가지를 열거할 것이다.

 

첫째는 자본주의 위기가 사회주의적 변혁의 여건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위기는 정치 교육과 투쟁의 지속적인 기회를 만들어내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우리에게 무거운 정치적 짐을 덜어줄 것이라는 가정은 버릴 필요가 있다. 위기는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 뿐일 수도 있고, 그후에 단지 낭만적인 과거가 그리울 수도 있다. 케인즈 복지국가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것은 케인즈 복지국가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는 우리의 두 번째 전략적 지침으로 이어진다. 역사유물론은 미래로 가는 길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60년대까지 계속 증가한 상품화, 소비자 신용, 금융화 및 자본 이동성이 완전 고용, 노조의 힘 및 전후 금융 규제와 모순됨에 따라 1970년대의 위기와 그 뒤를 이을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단순히 케인즈 복지국가로 돌아가기 위한 정책만 진전시키는 것은 그러한 계급 타협이 확립된 이면의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본주의, 노동, 그리고 국가 기관들이 겪은 변화는 말할 것도 없다. 엄청난 산업, 금융, 공간적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의 난제를 해독할 수 있는 척하는 것이다.

 

우리의 세 번째 전략적 지침은 사회주의적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이 문제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는 ‘트로츠키 3부작’의 제1권 마지막에서 이미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탁월한 생각이고, 한번 그것을 신봉하게 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는... 전체 유럽의 사회주의 사상 학파'의 잘못된 가정에 대해 언급했다.

 

도이처는 볼셰비키 당이 혁명 이후에 겪은 야당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구실에 대한 논쟁과 사회주의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정신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는지의 고통을 추적했다. 도이처는 이것이 독재에 기여했다고 썼다. '그것은 계급 그 자체가 아니라 기껏해야 계급의 사상을 대변했다.'

 

20세기 말까지,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원들 모두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겪은 역사적 패배는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와의 동일시가 실제로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급 그 자체'라는 개념이 점점 더 문제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었던 거대한 대중적 사회민주주의 및 공산주의 정당은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역사적 진로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종종 이들 정당들을 상대로 했던 이 시대의 노동조합의 전투성은 1970년대의 위기에서 벗어나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수립하거나 유지할 수 없었다.

 

이것은 최근 몇 십 년 동안 유행했던 노동계급을 깎아내리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150 년 전에 마르크스가 '완전한 해방의 광범위한 이익을 위한 노동계급의 조직화의 중심'이라고 불렀던 것을 창조하는 것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우리의 네 번째 전략적 지침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다시 한번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으로 조직하는 데 직접 관여하는 기관을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해야한다.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의 힘은 주로 노조 기관들 힘을 통해 표현되어 왔으며, 이들의 지속적인 적절성과 영향에 대한 시험은 이들이 노동계급을 좁게 보다는 더 넓게 정의, 조직, 대표하는지 여부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사이버테리아트cybertariat 등이 실제로는 다른 계급들이 아님을 실천에서 입증한다.

 

계급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일반적으로 유사한 성격의 많은 지역적 투쟁을 국가적 투쟁, 계급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과정을 위해 계급투쟁이라는 용어를 남겨 둔 이유와 크게 관련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다섯 번째 전략적 지침으로 직결되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공공재 및 서비스를 계급투쟁의 중심 목표로 삼는 것의 중요성이다.

 

실제로 우리는 더 높은 소득을 위한 지역적이나 부문적은 물론이고 전국적 캠페인도, 그러한 캠페인이 개인화된 소비에 대한 더 큰 접근을 위해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부추길 수 있는 한, 더 큰 개별화된 소비를 지향하는 생산의 생태학적 결과를 무시하는 한, 그것이 계급투쟁으로 효과적으로 전환될 것인지 여부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섯 번째 전략적 지침을 통해서, 이것이 국가 경제의 경쟁력인지, 부문의 경제적 경쟁력, 또는 개인의 경제적 경쟁력으로 여겨지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경제적 경쟁력의 목표를 거부하는 것이다. 흔히 진보주의자들도 집단적 서비스를 지속하거나 개선하기 위한 물질적 기반을 조성하는 조건으로 이것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경쟁력의 규율은 노동계급을 해체하는 효과가 있다.

 

물론 경쟁력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제약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표로서 거부되어야 한다. 이는 수출지향적인 전략을 깨고 내부지향적 민주적 경제 계획의 시너지 효과를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본과 투자 통제의 필요성에 중점을 두고 포용적이고 연대주의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극우파는 공백을 메우며 일자리를 얻기 위해 그들과 경쟁할 수 있고 오늘날의 자본주의 안에서 그들이 가진 발판은 무엇이든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타자들'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겠다고 제안할 것이다.

 

이는 21세기에 국제적 연대를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일곱 번째 전략적 지침이다. 이는 각 국가의 노동계급을 경제적으로 보다 경쟁력있게 만들기 위한 캠페인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남반구의 노동자들은 이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경쟁력이라는 명목으로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 목표는 경쟁력을 통해 제조업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요구를 충족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생산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MNCs와의 국제적 단체 교섭은 집단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각 나라의 계급투쟁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그것은 다른 곳에서 계급투쟁을 위한 더 많은 공간을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보다 이것을 훨씬 덜 진전시킬 것이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지속적인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강조점과 자본주의 세계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국가 간이 아니라 국가 내부의 갈등이라는 우리의 통찰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그것은 또한 국가가 단순한 계급의 도구가 아니고 계급적 행위자로만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자본주의 체제에 의존하지만 스스로 행동 할 수있는 자율적 능력을 가진 일련의 독특한 공공적 기관이라는 우리의 주장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의 여덟 번째 지침으로서 여기서 도출되는 중요한 전략적 요점은 계급 세력의 균형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의 맥락에서 국가의 변혁은 공공기관들의 형태, 목적, 능력의 변화를 중심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국가에서의 계급투쟁이 경제적 경쟁력이 아니라 집단적 서비스의 우위를 주장할 필요성에 대해 방금 말한 것을 감안할 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중심적 조건은 공공 기관들의 범위와 자원의 확대를 수반해야 한다. 자본을 할당하고 국가, 기업 및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규율하는 데 있어서 금융의 무게는 은행 및 기타 금융 기관을 공공 공익사업으로 전환하고 특히 어떠한 진보적인 정책을 위해서든 자원에 접근하고 할당하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적 시장의 혼돈과 비합리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공적 계획 능력을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데, 그것은 오늘날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이것은 단지 장기적인 비전이 아니다. 우리는 1960년대에 앙드레 고르즈André Gorz가 이 개념을 주조할 때 의도했던 전략적 우려를 다시 한 번 표현하기 위해 IMF의 의제에서 구조개혁structural reforms의 개념을 재도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가 단지 자본주의적 조건을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해 누적적으로 구축되는 그러한 유형의 개혁을 명시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국가의 파괴와 시들어진 국가의 소멸에 대한 낡아빠진 개념들은 이것을 포착하기 시작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바쿠닌에게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는 계급 지배와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기관이라는 의미에서 국가를 없애는 것이지 계급 없는 사회에서 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한 공공기관을 발전시키고, 책임있는 대의와 행정을 없앤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러한 민주적인 공공기관은 사실 인류의 다양한 능력과 표현이 육성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이것은 '이중 권력'이라는 낡은 관념과 '권력을 잡지 않고 세상을 바꾼다'는 새로운 관념이 모두 완전히 회피하는 사회주의자들의 핵심 전략적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전의 핵심은 계급 사회의 초월이다. 비록 이것이 노동계급의 주체를 통해 일어난다고 여겨지지만, 인류의 다양한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자체의 초월이 수반된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조직적 역량이 재개발되지 않는 한, 그리고 그 때까지, 국가의 구조 개혁을 위한 사회주의 전략의 변혁적 잠재력에 대한 환상은 없을 것이다.

 

공공부문 노조가 이것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지만, 이러한 노조들의 목적, 조직, 실천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논의해 온 일종의 전략적 방향성을 가진 사회주의적 중핵들이 필요할 것이다. 국가를 노동계급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공기관들을 민주적 사회주의 체제에서 모든 인류를 대표해 행동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실제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어려운 질문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한다. 노동계급 정당이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앞선 조직들을 뒤따른다는 그의 개념과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형성'하는 정당의 결정적 역할이라는 그의 대안적 개념 사이에서, <공산주의 선언> 이후의 마르크스의 정치 저술에는 대체로 해결되지 않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게다가, 루카치Lukács가 1922년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 지적했듯이, 혁명정당은 대개 '혁명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지적인 질문들 중 하나라기보다는 순수하게 기술적인 관점에서만 보여졌다'. 루카치 자신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람시Gramsci의 풍부한 기여는 무엇보다도 이것에 대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적 전략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배치한 사람들에게서 아마도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저술에 대한 비판을 넘어 계급 정체성과 능력의 형성과 관련하여 정당들이 했거나 하지 않았던 실제 작업에 대한 실질적인 역사적 분석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좌파 정당에 대한 환멸이 만연하는 모든 이유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효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으로 형성되는 것에 대한 그들의 한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60년대와 70년대에 옛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에 대한 명확한 대안으로서 형성되었지만 결코 대중 정당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나머지 혁명적 단체들이 내부적으로 붕괴한 것도 길을 터주는 기회로 볼 수 있다.

 

노동계급을 사회변혁의 주도적 주체로서 변화시킬 수 있는 정당 유형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이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정당을 세우거나 갱신하려는 이전의 시도들을 너무나 심하게 방해해왔던 1917년 또는 1945년의 계류장에서 해방될 것이다.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아홉 번째 지침으로 데려간다. 전략적 우선 순위는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사회주의적 목표를 현실 적합하게 만들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역량을 개발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제도 창조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사 등록 20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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