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슐리 보러(Ashley Bohrer)
번역: 두견
이 논문의 필자인 애슐리 보러(Ashley Bohrer)는 시카고에 기반을 둔 학자이며 활동가이다. 노트르담Notre Dame 대학의 젠더 및 평화 연구 조교수이다. 우리가 어떻게 억압과 착취 사이의 복합적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해 오면서, 현대 자본주의 아래의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의 상호작용을 분석해 왔다. 이 논문에서 보러는 우리가 현대 권력 관계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구조 안에서 이 모든 측면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상호교차성 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종합을 시도한다. 글이 매우 길고 좀 학술적이고 어렵게 쓰여졌지만,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상호교차성, 사회적 재생산 등에 대한 고민과 논의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번역 소개한다.
출처: https://brill.com/view/journals/hima/26/2/article-p46_3.xml
최근 몇 년간,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논의되어 왔다. 이러한 논의는 너무 빈번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헤게모니적'(지배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생겨났는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2009년에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두 단어였다.
이 두 가지 사상체계는 지난 10년 동안 점점 더 분석되고 고려됨에 따라 서로가 접촉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교차성 학자들을 비판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1세기 억압의 복잡성에 역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생산적이고 미묘한 이론을 만들어내면서 이러한 사상체계를 종합하려는 흥미롭고 중요한 시도도 잇따르고 있다.
특히 이러한 논쟁은 정체성 정치, 즉 정체성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조건과 관련될 수 있고 또 관련되어야 하고, 관련될 것이라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크게 합쳐졌다. 정체성 정치를 둘러싼 논쟁의 맥락에서, 어떤 면에서는 정체성을 이해하는 동시대의 패러다임인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의 역사와 관계에 대해 더 깊고 미묘한 이해를 갖는 것은 동시대 활동가와 학자들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논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교차성의 핵심 교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설명한다. 교차성 이론가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방대한 문헌들이 있지만, 나는 특히 두 가지 문제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는 마르크스주의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분법적 구조들에 의존한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주의는 억압을 계급 억압에 대한 분석으로 오로지 또는 주되게 축소하고 성차별, 인종주의, 이성애규범성과 같은 모든 다른 형태의 지배를 단지 1차적 계급 관계에 대해 파생된 작은 문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혐의들은 많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는 확실히 사실이지만, 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들의 활기차고 빠르게 변화하는 전통이 상당히 실질적으로 발전했고 바로 이러한 비판들을 자신의 이론들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교차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의 비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종종 많은 교차성 이론들이 계급에 대한 저발전된 분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많은 교차성 이론들이 계급에 대해 논의하거나 그것을 현대 세계의 억압의 축 중 하나로 명명하지만, 구조적 계급 관계의 특수성을 파헤치거나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구조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미묘하고 구체적인 비평은 지배이론에 있어서 지극히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또한 어떤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언급한다. 왜냐하면 교차성의 특정 유형들은 '정체성 정치'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들의 용어로는 '부르주아적'이다.
나는 이러한 비판은 잘못된 것이며, 포스트구조주의적 페미니즘에 훨씬 더 정확하게 그런 비판이 적용될 수 있으며, 교차성과 포스트구조주의는 분명히 공통 요소를 공유하지만, 그들의 사상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일부가 사실상 교차성과 교감하는 데 실패한 것을 보여 준다.
교차성과 그에 따른 정체성 정치가 본질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적 개념이라는 주장은 정체성 정치를 둘러싼 논쟁의 지속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이 주장을 이해하는 것은 이 문제에 관해 마르크스주의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것보다도 더 정체성 정치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뒷받침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 부분은 교차적 마르크스주의 혹은 교차성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개발하려고 시도하는데, 이 이론은 양쪽 사상체계로부터 핵심 통찰을 사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교차성을 필요로 하고, 그것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사려 깊은 최신판에서는, 비록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교차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더 나아가 교차성이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이론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이론들 스스로의 상호적 불충분성을 강조하면서 나는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조직된 지배와 착취의 관계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의 개발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1.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상호교차성의 비판
유색인 여성 페미니스트에 의해 개발된 [상호]교차성 이론은 다인종 여성에 의해 경험되는 특정한 문제들, 흔히 인종주의, 성차별, 계급 차별과 이성해주의에 관련된 그리고 종종 계급 단일축 이론에 의해 간과되는 문제들을 이론화하려고 했다.
1989년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상호교차성'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지만, 많은 교차성 이론가들은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안나 줄리아 쿠퍼(Anna Julia Cooper)등과 같은 19세기 흑인 여성들이 자신의 젠더와 인종을 이유로 직면하는 배제와 억압을 기술하려고 했던 저술에 사상체계의 뿌리를 두고 있다.
교차성은 20세기 내내 흑인 여성주의자, 흑인 페미니스트, 치카나Chicana 페미니스트스, 히스파나스hispanas, 시카니스타스xicanistas, 시스터아웃사이더스sister/outsiders로 다양하게 자신을 정체화한 이론가들에 의해 계속 발전되었다.
그녀의 획기적인 작품인 <흑인 페미니즘의 사상>에서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는 교차성 이론을 '인종, 사회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민족성, 국가 및 연령 시스템이 흑인 여성의 경험을 형성하고, 역으로 흑인 여성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조직의 상호 구성적 특징을 형성한다는 분석적 주장'이라고 설명한다.
바바라 스미스Barbara Smith가 이러한 핵심 통찰을 설명하듯이, '주요 문제들은 ... 밀접하게 뒤얽혀 있다.' 그것들은 단순하게 분리될 수가 없다. 패트리샤 힐 콜린스와 다른 사람들은 종종 '교차적 억압' 대신에 '지배의 매트릭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른 사람들은 같은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맞물리는 억압들' 또는 '상호보강적 억압들'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적인 형태에서 교차성은 구조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지배의 사회적 시스템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시스템을 이해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함께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교차성은 억압의 한가지 축을 일차적으로 찾으려는 시도뿐만 아니라 억압의 형태들을 따로 떨어진 것으로 다루는 이론들에 대한 비판으로 제출된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것도 이런 시각에서다. 우선, 교차성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에 대한 모든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적개심을 축소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예컨대, 마르크스의 <자본>이 그렇듯이) 사실 그들의 작업에서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한 어떤 중대한 논의도 누락하고 자본의 축적, 위기, 그리고 강탈의 과정을 젠더과 인종에 대해서 무지한 개념을 기반으로 설명한다.(또는 억압의 축에 대해 논의하지만, 계급의 부수현상에 불과한 것으로서 취급한다.)
억압에 대한 논의에서 관련된 개념으로서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를 지우는 것은 일반적으로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교차성 이론가들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심각한 한계로 확인한 하나의 경향이다. 사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자본주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더 주류적인 논의를 비판하기 위해 제출한 것은 여성의 일, 삶과 폭력과 착취의 경험에 대한 오랜 삭제의 역사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주류이거나 헤게모니적인 마르크스주의를 인종과 젠더에 무지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상호교차성 이론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입각한 페미니스트들 모두가 공유하는 비판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비판적 인종문제 학자들과 탈식민주의 이론가들뿐만 아니라)이 이러한 중대한 누락을 시정하기 위한 많은 시도를 했고 계속하고 있지만, 이러한 시도들 중 많은 것들이 부적절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일각에서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산업혁명 이전 시대에 동시에 맞물리면서 현대 세계를 특징짓는 계급과 젠더 착취의 체제를 만들어낸 별 개의 시스템이라는 '이중체제론'을 제시했다. 실비아 월비Sylvia Walby와 같은 이론가들이 제공한 이 설명들은, 계급과 젠더에 대한 초기의 원시적 교차성적인 설명을 시도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인종, 섹슈얼리티,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주류 이론가들이 저질렀다고 그들이 비판한 바로 그 이론적 주변화를 반복했다.
다른 이들은 성차별이나 가부장주의와 자본주의가 하나이고 동일한 체계라는 '단일체제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통찰은 여러 형태를 취했는데, 어떤 이들은(페데리치Federici 등) 가부장제와 계급적 기반의 착취가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것의 논리 모두에서 상호 구성적이고 같은 뿌리에서 나온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가부장제와 계급적 기반의 착취가 실로 역사적으로 상호구성적인 것이며, 그들이 우리 둘러싼 주변의 세계를 경험적으로 형성하고 계속해서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또한 자본주의 논리는 그 자체가 젠더를 삭제한다고 주장했다.(메익신스 우즈Meiksins Wood).
이러한 설명들에서, 젠더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업에서 사회적 통제의 기법으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종류의 이론은 젠더와 계급이 서로를 강화하는 사회적 통제의 형태로서 함께 나타나는 경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메익신스 우즈가 되풀이하듯이, 그것은 또한 젠더를 계급이라는 좀 더 일차적인 사회적 균열의 일종의 부수 현상으로 취급하는 효과를 가졌다. 계급 관계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논리적 핵심인 반면, 젠더 관계는 단지 경험적 사실이었다. 경험적 사실로서 분석하기에는 매우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분석적 순서와 실존적 가중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서 논리적인 것이 경험적인 것보다 우수하거나 더 근본적인 것으로 명시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의 의미는 분명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특정 형태의 단일체제 이론은 억압을 위계화하여, 계급을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사회적 적대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단일체제 이론의 다른 형태는 이러한 방식으로 논리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의 차별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교차성 이론가들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적인 단일체제 이론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비판하였다.
우선, 흔히 (전부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적 단일체제 이론은 인종, 섹슈얼리티, 능력, 민족성이 이차적이거나 부수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적이거나 또는 생략하는 방식으로 제시하면서 삶의 두 측면, 즉 젠더와 계급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적어도, 그들은 구조로서 또 개념으로서의 젠더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에 깊이 내재되어 있으며 인종화되고 성애화sexualised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지속적인 분석의 토대로 보거나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방식으로는, 교차성 이론가들은 단일체제 이론가들에 대해서 젠더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주된 근거로서 가정주부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에 대해 문제삼기도 했다. 가사 노동에 대한 단일체제 이론의 대부분은, 특히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첫 번째 물결에서, 종종 아이들과 함께하는 어떤 이성애적이고 외벌이 커플을 가정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퀴어 커플이나 맞벌이 가정 또는 한 부모 가정에 대한 분석을 설명하거나 포함하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배제의 두 번째 측면은 안젤라 데이비스를 포함한 몇몇 저명한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이 시기들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지배적 경향의 모델이 백인, 이성애, 중산층의 분석 프레임을 암시적으로 가정했다고 주장하게 이끌었다.
교차성의 주요 쟁점들 중 하나는 '억압들 사이의 등가성에 대한 작동 가설'을 수용할 필요성에 대한 관점이다. 교차성의 역사학자 비비안 메이Vivian May가 말했듯이 '젠더 우선적 또는 계급 우선적 비판에서는, 억압에 위계질서가 있다는 사고방식에 대한 교차성의 비판을 취할 수 없다. 단일한 축과 정체성과 억압의 위계적 모델은 정치적/이론적 타당성의 척도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서, 교차성 이론의 핵심적 통찰 중 하나는 정확하게 억압들의 위계화 자체가 종종 가장 적은 사회적 힘이 부여된 사람들의 주변화를 영구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젠더(그리고 때때로 인종)을 자본 관계의 2차적 후유증으로만 논의하는 단일체제 이론은 다인종 여성, 노동계급 퀴어들 또는 젠더질서 거부자들이 직면하는 구체적 형태의 억압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이 이론들은 여전히 백인, 취업자, 기혼자, 이성애자 남성들(그리고 그들의 부인들)을 유일한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 같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이중체제와 단일체제적 (백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둘 모두 다 그들이 논의하던 여성들을 본질화하고 동질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스펠만Elizabeth Spelman이 '페미니스트적 자문화 중심주의의 트로이 목마'라고 부르는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의 가장 큰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이론-활동가 그룹인 ‘가사노동에 임금을’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들은 가정주부를 여성의 보편적인 위치로 받아들였다.
이 이야기들은 거의 항상 여성들이 남성 생계부양자와 이성애적 결합을 한다고 가정한다. 그들은 여성성을 임신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 그들은 중산층 백인 여성의 경험이 여성성 그 자체의 결정적이고 보편적인 결정 요소라고 가정한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시스터아웃사이드>Sister/Outside에서 이른바 경험의 동질성에 대해서 비판한다.
“자매애라는 단어로 덧씌워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경험의 동질성에 대한 가식이 있다. 확실히 우리 사이에는 인종, 나이, 섹스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우리 사이의 차이점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를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정하는 것이다.”
교차성 이론가들은 '보편적 자매애'라는 허울 아래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덮기보다는, 경험의 차이가 제도화된 권력의 형태에 의한 차별화된 구조적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적 이론화의 핵심 요소로서 분석, 서술 및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상호교차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위에서 정리한 비판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몇몇은 단순히 교차성을 무시했다.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누그러뜨리고 지배의 구조에 대한 보다 정교한 이해를 채택하려고 시도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듯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1970년대에 가장 발달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이론을 생산하고 있던 북미의 ‘가사노동에 임금을’ 캠페인이 해체되고 이탈리아의 로타 페미니스타Lotta Feminista 같은 중심적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조직이 해산되면서 그 가설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세계 곳곳의 유색인종 여성들로부터의 위와같은 비판에 대응하여, 많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인종을 계급에 대해 부차적이거나 부수현상적인 것이 아닌 억압의 일차적 구조로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관점을 급진적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또한 인종, 젠더, 계급, 출신 국가에 기초한 억압들의 동시성을 인식한 국제적 지리-정치경제학을 통해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상황적 설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위에서 지명한 두 가지 전략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교차성 이론에 대한 비판도 제시하였다. 아마도 놀랄 것도 없이, 이러한 비판들 중 많은 부분들은 교차성이 억압의 근본적 축으로서 계급에 대한 미발달된 분석을 가지고 있다고 문제삼는다. 잔 에잇 밸키르Jean Ait Belkhir는 그것을 주장한다.
현대의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이제는 익숙해진 목록 - 인종, 젠더, 그리고 계급 - 에서 계급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에서도 흔히 마지막으로 다루어졌다.' 수잔 아처 만Susan Archer Mann의 설명처럼, 계급에 상대적으로 작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교차성에 대한 비판에서 빈번한 수사이다. '다른 학자들은 인종, 젠더, 계급을 분석한다고 주장하는 저자들이 채택하는 "계급 개념의 이론적 빈곤"을 비판해 왔다.'
마사 지메네즈Martha Gimenez의 설명처럼, 계급 환원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상호교차적 분석을 지나치게 수정하게 만들었고, 전체적으로 계급이 거의 생략되게 했다.
“RGC[인종, 젠더 및 계급]의 관점에서 계급, 인종 및 젠더 간의 질적 차이를 납작하게 만들거나 삭제하는 것은 이제는 계급 관계 외부에서 탈구된 것처럼 나타나는 '지배와 종속의 기본 관계'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의 기초이다. 계급과 다른 형태의 억압 사이의 등가성을 가정함으로써 '계급 환원주의'를 거부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RGC의 관점은 계급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정하고 지배의 다른 '기본' 구조를 상정함으로써 그것의 중요성을 인정하도록 강요한다.”
지메네즈의 비판은 계급 분석에서의 미발달의 문제보다 더 나아간다. 그보다, 교차성의 분석은 종종 계급 자체의 특성을 오해하고, 계급 자체의 특성과 존재하지 않는 다른 형태의 억압 사이의 질적인 등가성을 가정하는 효과가 있다고 지메네즈는 주장한다. 지메네즈는 계급 억압의 조직화에는 무언가 독특한 것이 있고, 그것을 인종이나 젠더 모두와 종류가 다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종류의 차이'가 더 근본적이거나 1차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것은 계급적 억압이 독특하고 인종과 젠더보다는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다른 종류의 취급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별적 논의는 자본주의를 생산과 재생산, 축적과 강탈이라는 물질적 관계의 구조와 체계로서 전면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이는 정치경제학에 뿌리를 두고 문화, 이데올로기, 정치의 다면적 영역에서 그 효과를 갖는다. 나는 세 번째 부분에서 이 '차별적인 종류의 논의'로 돌아갈 것이다.
정치경제학에 대한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분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특정 교리를 강화한다며 교차성을 비판했다. 널리 읽히고 배포되는 팜플렛에서, 이브 미첼Eve Mitchell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교차성의 강조가 특별히 자본주의적 개체성의 아이디어를 강화한다고 제기한다.
비교차성 분석들에서 매우 빈번하게 나오는 경험의 동질성에 대한 비판을 반복하는 벨 훅스bell hooks에 특별히 대응하여 미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훅스는 자본주의 아래서 정치 전체를 하나의 특정한 경험 또는 특정한 일련의 차이들에 근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옳다. 그러나, 교차성 이론은 단지 특정한 순간들 또는 결정적 지점들을 추가함으로써 이 문제를 복제한다. 훅스는 계속해서 페미니스트 분석에 인종과 계급의 포함을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맞물린 억압의 매트릭스'에 대한 이론들은 단순히 그들의 물질적, 역사적 맥락에서 추상화된, 이식된 정체성의 목록을 만들어낸다. 이 방법론은 베티 프리단의 방법만큼이나 반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이 발췌에서는 관련이 있지만 약간 다른 두 가지 비판을 강조한다. 우선, 미첼의 비판은 우리가 '수리적인' 교차성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주 나타나는 비판을 대표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억압의 복합적인 중심축을 더하기나 곱하기로서 간주하는 이론들로서 계급, 젠더, 인종에 기반한 억압을 경험하는 유색인종 노동계급 여성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다중적 위험triple jeopardy'과 같은 개념을 사용한다.
이러한 접근틀을 배치하는 일부 교차성 이론가들이 분명히 있다고 해도, 많은 교차성 이론가들은 지배 구조의 상호적 구성을 강조하는데 실패한 것에 대해서 더하기 및 곱하기 모델에 맞서며 주장했다. 이러한 어법에 대한 교차성 비판의 한 사례에서 데보라 킹Deborah King의 <다중적 위험: 흑인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의 맥락>은 그녀가 지적한, 분리된 억압들이 그 다음에 합쳐지는 것으로 간주하는 '구슬꿰기pop-bead 접근법'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틀은 체계들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억압을 위계화하는 경향을 되살린다고 주장한다.
이와 동일한 개입이 다른 많은 교차성 이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수리적 모델과 교차성에 대한 미첼(과 다른 이들)의 식별은 미첼이 이 접근틀의 탓으로 돌리는 바로 그 지점을 비판하는 방대한 교차성에 대한 문헌과 진지하게 관여하기를 거부하는 허수아비 논쟁을 구성한다. 미첼이 제기하는 두 번째 관련된 비판은 교차성에 의해 논의되는 정체성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미첼은 정체성이 '자연적', '몰역사적', 그리고 이 에세이의 후반부에서는 '이상적'이고 '속물적'으로 생각되는 것을 걱정한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 비판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미첼의 주장을 깊이 있게 재구성하고 싶다. 그것은 페미니스트 이론의 본질에 대한 좀 더 미묘하고 흥미로운 질문들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질문들이 미첼의 작업에서 발전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더라도 말이다. 정체성 정치에 대한 미첼의 우려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오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에 바탕을 둔 관점으로 일반적으로 정체성을 구조적, 물질적, 역사적 과정의 결과들로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체성의 틀을 짜고, 창조하고, 감시하고, 유지하는 구조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단지 서술할 뿐인 정체성의 설명은 한계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는 구조와 제도들의 힘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 기초해야할 이론에 있어서 중요하고 필요한 분석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적 위치를 주장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정체성의 정치는 지나치게 자족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구조들의 기원, 논리, 조직, 역사 또는 힘에 대한 필요한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으면서, 지배적 구조를 통해 생겨난 사회적 분열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정체성 정치의 특정한 버전들은 순전히 개인적 조건들로 그 토대를 놓았고, 단지 사회적 총체성 안에서 위치를 주장하는 문제로 정치를 축소했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위치를 주장할 때, 예를 들어, 내가 백인 퀴어 노동계급의 미국 유태인이라고 나의 사회적 위치를 주장할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백인, 퀴어 등의 구조에 대한 분석이 없는 것을 우려한다. 나는 이러한 각각의 정체성을 자연적 사실로 취급하고, 그들 각각의 역사적 우연성을 비평하지 않고 단순히 내 개인적 육체와 역사가 그것에 들어맞는 이미 존재하는 틀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들, 특히 이론뿐만 아니라 운동에 기초한 활동적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정체성 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집단을 가로지르는 연합 구축과 연대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것은 이러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의 역사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맞서는 주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번째 공식화이고, 교차성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미첼의 분석을 배경으로 해서 나타난 것이다. 위에 열거된 우려들 때문에, 미첼은 특정한 종류의 부르주아 정치를 재확인한다고 교차성을 비판한다.
‘정체성 정치, 따라서 교차성 이론은 부르주아적 정치이기 때문에 투쟁의 가능성 또한 부르주아적이다. 정체성 정치는 자본주의 아래 소외된 개인의 모습을 재현하기 때문에 투쟁은 기껏해야 집단들간의 평등, 혹은 최악의 경우 개인화된 투쟁의 형태를 취한다.’
위에서 제시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들이 특정한 가닥의 정체성 정치의 결과들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중요한 비판들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들이 대부분의 발전된 교차성 이론에서 취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제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콤바희 강 공동체Combahee River Collective에서 제시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이것은 정체성 정치의 개념에 구현되어 있는 우리 자신들이 겪는 억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우리는 가장 심오하고 잠재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정치는 다른 누군가의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서 직접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이론가들에게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은 그것을 구조와 역사와 단절된, 끝없고 만족스러운 개인적 정체화의 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차성 이론가들은 종종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에서의 이러한 경향을 비판한다.
수잔 아처 만은 교차성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글에서, 각 개인에게 고유성과 환원불가능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 경험을 다른 경험으로 번역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포스트모던 입장을 논박한다. 집단 기반의 입장(관점)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개인의 입장, 또는 관점이 사회적이고 정치적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인식론]과 교차성의 기반을 두는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이론을 활용해서 말이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여기[차이와 정체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설명]에서 차이는 무한하며 각 개인은 잠재적으로 고유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콜린스에게 관점이라는 개념은 불평등한 권력과 특권의 관계에서 그들의 위치가 공유되었기 때문에 역사를 공유한 집단을 가리킨다. 그들은 단순히 개인에 의해 선택된 정체성에 기반을 둔 집단이나 인구통계학자, 관료 또는 학자들에 의해 분석적으로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본질주의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집단적 범주의 탈구조화를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언어 게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러한 버전의 정체성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패트리샤 힐 콜린스뿐만이 아니다. 니콜 알렉산더 플로이드Nikol Alexander-Floyd는 '유색인종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집단의 이익에 대한 복잡하고 협상된 이해를 중심으로 한 정체성 정치를 지지한다'고 설명한다.
집단에 기초한 정체성 정치의 이러한 '협상된' 개념화는 교차성 이론가들이 고발되곤 하는 반역사주의와 자연화와는 정확히 정반대인, 역사적으로 위치짖는 억압의 성격으로 전환을 나타낸다. 비비안 메이의 주장처럼, 교차성에 대한 이같은 엄청난 오독은 그 자체가 지식 생산의 정치에 휘말려 있는데, 이것은 이 이론들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이론적 세심함과 뉘앙스를 무시하는 것이다.
“맥락 대 정체성의 갈라놓기는 교차성이 사회 구조에 의해 어떻게 정체성을 내부적 위치로 받아들이고, 위치시키고, 가로질러 운행하고, 형성되는지를 무시한다. 교차성의 계보학에서 어느 시기를 봐도, 문헌을 보다 철저히 읽어보면, 무수한 사회 구조 내에서 맥락화되고 집단 내부와 집단 간의 관계적 권력의 동역학을 인지하는 (복합적) 정체성에 대한 '둘 다/그리고' 접근법이 교차성의 기본 전제임이 입증된다.”
그렇다면 '정체성 정치'는 교차성 이론의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정치의 가장 일반적인 진술에서 보면'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현재 우리는 인종적, 성적, 이성애적, 계급적 억압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데 적극적으로 전념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별한 과제로서 억압의 주요한 시스템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 통합적 분석과 실천의 개발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억압의 종합은 우리 삶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미첼의 문제제기는 터무니없게 보일 수 있다. 콤바히 강 공동체와 많은 다른 교차성 이론가들은 말하고, 질문하고, 분석하고 설명할 지배적 구조의 창문으로 가는 이론과 실천의 출발점으로서 - 최종 목표가 아니라 - 억압의 동시성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동원한다.
그리고 억압의 구조를 없애는 것이 그 자체로서는 이러한 억압에 대한 개인의 경험에 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급진적인 정치적 변혁의 목표가 억압을 없애는 것인 이유는 정확히 억압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삶과 경험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이 아닌가?
교차성 이론가들이 급진적인 변혁의 정치에 기여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의 개념을 부활시키는 것은 이런 입장에서이다.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는 개인적 정체성 정치보다는 집단적인 것을 옹호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전술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이 시점에서 권력을 빼앗긴 집단에게 가장 중요한 저항 전략은 사회적 위치의 정치를 비우고 파괴하기보다는 점령하고 옹호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사례가 나올 수 있다.’ 여기서 크렌쇼는 정치적 전략으로서의 이론과 영원하거나 보편적인 진리의 형태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치초월적인 탐구로서의 이론의 차이를 지적한다.
그 주장은 간단히 말해서 집단에 기초한 정체성 정치가 정치적 진리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 이론과 정치적 실천 모두에서 유색인종 여성을 배제하고 주변화시키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룹에 대한 최근의 중심적인 분석은 지배의 구조에 대한 개입을 구성한다.
계급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론의 다시 기초 놓기는 정치경제학, 역사학, 문화 비평 등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특징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진리가 부분적이고 만들어지는 것이며 힘과 권력의 역사적 관계 안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주류,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도 명백히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부분은 노동계급과 가장 관련이 있는 경험, 역사, 현상에 대한 조사에 기초함으로써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권위를 회복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차성 이론가들이 '상황적' 관점에서 열거한 '종속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들 사이의 차이로 인해서 많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설명들이 계급만을 위치적 관점으로 인식하는 반면, 교차성 이론가들은 지식의 현장과 투쟁의 지형을 생산하는 역사적 관점이 내포된 위치로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능력을 재확보한다.
3.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을 통합하기
내가 위에서 주장했듯이, 교차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많은 상호적 비판은 의사소통의 복합적 실패의 결과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한 교차성의 비판은 그 자체로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포착되고 동시대의 학문에 통합되었다.
정체성 정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의 우려는 페미니스트 학문의 다른 전통으로 향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들은 복합적 종류의 억압에 대해 논할지 모르지만, 교차성 이론에서 대부분의 특징적인 텍스트와 이론틀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논점들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것으로 남아있다.
나는 많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함께 많은 교차성 이론에서 자본주의를 다루는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자본주의가 현대 세계에서 억압적인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관계의 네트워크에서 근본적 원인들 중 하나를 형성하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발전하기 위해 오랫동안 추구해온 상세한 종류의 분석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나는 또한 교차성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 대한 많은 논의가 저속한 계급 환원주의에 최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기껏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복잡한 인종, 젠더 및 성적 동역학에 대한 단순한 과소 이론화에 도달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논문의 나머지를 자본주의에 대한 교차적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서론으로 채우고 싶다. 서론으로서, 나는 이 설명을 잠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내가 여기서 소진시키고 싶지 않은 길고 복잡한 프로젝트에 대한 몸짓이다.
이 부문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첫째, 자본주의에 대한 교차적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론틀의 서로 다른 발전에 기여했던 두 전통의 지배적 역사 편찬들 중 일부에 먼저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두 전통 모두의 많은 주요 인물들의 학문적 그리고 실천적인 작업을 다시 살펴보면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 사이의 분할 위에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던 반자본주의적 유색인종 여성들에 대한 지극히 중요하지만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전통을 앞세웠다.
이러한 분석들은 이러한 분석의 방식을 서로 연결하는 프로젝트에 발판을 제공한다. 둘째, 나는 자본주의가 더 자주 논의되던 프롤레타리아 착취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인종주의, 식민지화, 제국주의의 등장과 형성을 낳았던 지배적 체제라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를 구조로서 숙고하는데 비판적으로 눈을 돌린다.
이러한 체계들을 모두 똑같이 자본주의의 일부라고 규정할 때, 나는 자본주의가 교차적 이론의 중심에 놓이기를 바라지만, 계급을 특권적인 것으로 삼거나 원초적인 적대로 간주하지는 않을 수 있다.
3.1 새로운 역사기록을 향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이론과 교차성 이론은 흔히 별개로 논의되지만, 20세기와 21세기의 유색인종 여성 페미니즘의 두드러진 작업 중 일부는 대개 교차적이면서 마르크스주의적이었으며, 이는 두 전통의 역사기록학에서 너무 자주 평가절하되는 사실이다. 교차성의 기본 뼈대가 되는 텍스트 중 하나인 콤바히 강 공동체의 성명에서 발췌한 다음 사항을 고려해보라.
“우리는 억압받는 모든 민중의 해방이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정치경제 체제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사회주의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장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하고 생산을 창조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노동이 조직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자원은 자원을 창조하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인종과 성에 상관이 없는 노동자가 아니라 인종적, 성적 억압이 그들의 노동/경제적 삶에서 중요한 결정 요소가 되는 사람들의 실제 계급적 상황을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그가 분석한 바로 그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에 적용된 것에 본질적으로 동의하지만, 흑인 여성으로서 우리의 구체적 경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분석이 더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콤바히 강 공동체는 그들 스스로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 정확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그것의 진단이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분석을 원래의 범위 이상으로 확대하자는 그들의 요구는 정확히 19세기 이후 모든 마르크스주의가 취했던 프로젝트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분석에 개입하는 것, 마르크스의 분석을 '잡아 늘리는' 것, 반식민주의 사상가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배의 물질적 관계를 어느 한 사상가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이다. 콤바히 강 공동체는 마르크스의 말뭉치에 있는 한계를 인정하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논쟁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일관된 비판에 대해 거부보다는 확장 속에서 그들의 프로젝트를 찾는다.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를 동시적으로 다루는 많은 다른 유색인종 여성 페미니스트들 역시 그들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성격으로 간주한다.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아사타 샤쿠르Assata Shakur, 클라우디아 존스Claudia Jones, 루시 파슨스Lucy Parsons 그리고 이 전통의 많은 다른 흑인 여성들은 자본주의가 강탈과 지배의 세계적 시스템의 주요 원인들 중 하나라고 규정했다.
미국 공산당, 블랙 팬더스Black Panthers,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와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많은 흑인 여성들은 그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 또는 반자본주의적 무정부주의자라고 밝혔다. 많은 라틴계, 히스패닉계, 멕시코계 페미니스트들 자신들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세기 중반과 EZLN(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과 같은 현대적 해방 투쟁에서의 그들의 투쟁을 분명하게 하는데 동원했다.
위에서 인용한 마사 지메네즈와 마리아 루고네스Maria Lugones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들과 억압에 대한 상호교차적 이론들 둘 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여했다. 20세기 초를 돌아보면, 아일랜드 이민자인 마더 존스Mother Jones와 유대인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은 아일랜드인과 유대인이 백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시기에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를 모두 주장했다.
민족을 넘어선 페미니즘들은 오랫동안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이용하여 세계 남반구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특징짓는 인종화되고 젠더화된 탈권력 체제를 설명해왔다. 현대의 역사들에서 종종 잊혀지거나 지워져왔지만 백인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자본주의, 인종, 젠더 간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언급해 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획기적인 논문인 <자본의 축적>은 제국주의와 식민화가 자본주의 체제가 기능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레닌은 또한 백인 유럽중심의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불가분한 부분으로 내세웠다. 심지어 마르크스 자신도 북미, 중국, 인도, 아일랜드의 식민화와 함께 미국에서 노예제도의 곤경에 대해 썼다.
이들 저자들 중 누구도 그 모든 복잡성과 다양성에 있어서 인종에 대한 명확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폭력과 자본주의로 인종화된 체제의 공동구성을 인식하는 세계적인 착취, 강탈, 권력 관계에 대한 분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다른 백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인종에 대한 상세한 이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백색 인종의 발명>에 대한 시어도어 앨런Theodore Allen의 두 권의 책, 데이비드 로디거David Roediger와 엘리자베스 에쉬Elizabeth Esch의 <차이의 생산>, 조디 멜러메드Jodi Melamed의 <대표자와 파괴자>가 그런 점에서 모범적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이 단지 하나의 공유된 역사를 가지고 있거나, 각각의 이러한 인물과 논문이 문제의 구조에 대한 철저하고 결정적인 분석을 제공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 대안적 역사기록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교차성에 이질적이지 않으며 인종, 젠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확장된 숙고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나는 이 양상들로 돌아가, 이 이론틀들 사이에 이미 실천과 학문 모두에서 공통적 근거와 공통적 작업에 대한 중대한 역사가 있고, 교차적 자본주의에 대한 더 통합된 이론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3.2 식민지의 이성애중심주의와 자본주의의 발명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 사이의 공유된 이론적, 정치적 기반을 앞으로 내세워 주의를 환기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출현에 대한 교차적 이론의 길을 보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제국주의와 식민화의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논리와 구조에 대한 지속적이고 미묘한 비평을 제공할 것이다.
이 절에서 내가 제안하는 읽기는 자본주의는 단지 이러한 강탈 구조의 결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앤 맥클린톡Anne McClintock, 마리아 루고네즈Maria Lugones 등의 중요한 작업에 따라서, 나는 자본주의가 계급 중심주의 또는 계급 우선주의 설명으로는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경제적 계급 구조는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모든) 식민지화와 이성애중심주의가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변경할 수 없는 태생적 요소인 복잡하고 다면적인 지배 체제의 일부일 뿐이다. 이 접근법은 더 전통적인 계급 분석을 강조하기 보다는 계급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적대의 지배적 개념으로 간주될 수는 없는 방식으로 계급,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식민지화 및 제국주의가 그 안에서, 그리고 서로를 통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할 때 교차성의 핵심 통찰을 따른다.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자본주의에 대한 진정으로 타당한 분석은 자본주의를 이러한 강탈 체제의 원시적 통합으로 간주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임금 관계는 종종 자본주의 분석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설명 중 많은 부분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임금 노동 조직의 출현을 자본주의와 그 이전에 존재한 봉건적 경제를 구별하게 하는 주요 요소로 분석한다.
마르크스와 다른 사람들이 말했듯이, 시장 강박의 메커니즘으로서의 임금 노동의 발명은 생산 방식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이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분석은 노동력의 분석과 함께 시작되거나 임금 노동만을 고려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다 최근에 이론가들은 임금 관계가 백인 유럽 남성들에게는 결정적이기는 했지만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19세기 중반부터 주장해온 바와 같이, 무임금 노동도 그만큼 자본주의의 구성 요소를 형성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이 '사회적 재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요리, 청소, 생계형 영농, 아이를 낳고 기르는 무보수 노동,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지속에 구조적으로 필요하지만 여전히 무보수로 남아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감정과 보살핌 노동 말이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은 주로 여성에 의해 무임금으로 수행되는 이러한 노동이 자본주의 하에서 구조적 필수성을 형성한다고 주장해 왔다. 자본주의는 이것에 대가를 지급하지 않으면서, 재생산 노동으로부터 임금 노동자가 공식 경제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약 이 모든 노동에 댓가가 지불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파산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의 무임금 노동에 대한 이러한 구조적 의존은 마리아 미즈Maria Mies가 사회적 재생산을 '구조적으로 필수적인 초과 착취'의 지위로 여기게 하는데, 이 대상은 일반적으로 여성이며, 세계 남반구에서 온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에게 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여성의 노동은 자본주의가 의존하는 무임금 노동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었다. 도메니코 로사르도Domenico Losurdo, 시드니 민츠Sidney Mintz,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 등이 모두 설득력 있게 주장했듯이, 19세기까지 유럽 경제의 기반을 형성했던 대서양 횡단 동산 노예제라는 독특한 상품의 발명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도로시 로버츠Dorothy Roberts, 제니퍼 모건Jennifer Morgan, 에이미 드루 스탠리Amy Dru Stanley, 벨 훅스bell hooks는 그들의 육체가 새로운 노예를 낳고 노예제도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를 영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난폭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축적 체제에서 노예가 된 여성의 특정한 역할을 더욱 명확히 했다.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많은 지속적인 인종화 및 젠더화된 고정관념은 이러한 노예제도의 재생산을 위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종화된 육체의 과도 성애화는 노예화된 여성들에 대한 집단적 강간을 정당화하도록 도왔고, 나중에 노예제도가 더 이상 실행 가능한 사회적 형태가 아닐 때 폭력적 사적 제재의 공포를 강요하는 데 기여했다. 이 모든 이론가들은 18세기에 인종이 출현하고 노예제도의 직접적인 결과로 반흑인 인종주의가 지속된다는 것을 맥락적으로 인식해 왔다.
자본주의는 또한 지속적인 식민화 체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하거나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드레아 스미스Andrea Smith, 앤 맥클린톡, 도메니코 로사르도는 북미에 있는 그들의 땅에서 원주민들을 몰아낸 것이 자본주의의 내실화에 필요한 역사적 조건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키자노Quijano가 설명하듯이, '식민지 첫 십 년 동안 엄청난 인디언 집단 학살은 주로 정복의 폭력이나 정복자들이 가져온 역병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미국 인디언들이 맘대로 처분 가능한 육체 노동자로 이용되어 죽을 때까지 노동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무임금 노동이 구조적으로 필요한 자본주의의 측면을 가리킨다. <자본> 제1권의 26장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원적 뿌리가 부유한 유럽인들의 검소하고 절약하는 독창성이 아니라 오히려 살육, 노예화, 대량 학살과 강탈의 지속적 운동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원시적 축적’ 개념을 비판한다.
오늘날의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의 원시적 축적에 대한 매우 간결한 분석을 확장하여, 그것을 자본주의의 역사적, 이론적 구조의 중심에 두었다. 자본주의 아래서 이러한 서로 다른 무임금 노동의 영역을 통합하려고 시도하면서, 퀴자노는 이른바 '권력의 식민성'에 대한 분석을 개발한다. 마리아 루고네스는 이러한 개념을 재구성한다.
“퀴자노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유럽중심적 권력 모델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모든 형태의 노동에 대한 통제나 착취, 노예제도, 노예상태, 소규모 독립 상인생산, 임금노동, 상호거래 등을 자본-임노동 관계의 헤게모니하에서 구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의 통제를 둘러싼 논쟁의 구조는 불연속적이다. 비록 이것이 헤게모니적인 모델이긴 하지만 국제적, 유럽중심적 자본주의 아래의 모든 노동 관계가 자본/임금 관계 모델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임금 노동이 거의 전적으로 백인 유럽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온 것은 권력의 식민성이 도달한 지점을 보기 시작하는 데 중요하다. 노동의 분할은 지리적으로 차별화될 뿐만 아니라 철저히 '인종화'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의 식민성을 노동과 '인종'의 철저한 맞물림으로 본다."
‘권력의 식민성’은 논의 중인 현상에 대해 대단히 강력한 분석을 제공하지만, 루고네스는 키자노의 모델을 제출하며 식민지 자본의 젠더화되고 성적인 동역학에 대한 그것의 삭제에 대해 비판한다. 그녀는 자신이 말하는 '이성애주의'를 지배적인 식민지 자본주의 질서에 기본적이고 구성적인 요소로 포함시키기 위해 ‘권력의 식민성’을 복잡하게 만들고 확장한다.
“생물학적 이형성dimorphism과 젠더가 생물학적 성을 사회적으로 구성한다는 입장을 모두 비판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식민지/현대 젠더 시스템의 범위, 깊이 및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다. 그 감각은 개인적인 것으로 젠더의 축소, 섹스와 그것의 자원과 생산물을 통제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라는 것, 특히 유럽/'백인'과 식민지/'비백인'을 위한 특별히 차별화된 방법 속에서 인종을 젠더화로, 젠더를 인종화로 이해하는 현대성의 인지적 생산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종은 젠더보다 더 신화적이고 허구적인 것이 아니다. 둘 다 강력한 서사이다.”
식민지 시대 자본의 체제를 통한 인종, 젠더, 이성애주의의 현대적 체제 창조에 관한 루고네스의 분석은 불가분하게 엮여있는 지배체제에 대한 가장 미묘한 설명 중 하나를 제공한다. 백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합리성, 인종, 젠더, 성과 섹슈얼리티의 체제를 강요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 그녀의 분석은 앤 맥클린톡의 분석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력해진다.
맥클린톡은 식민지화에 수반되는 권력 관계는 단순히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백인 유럽 사회 내부에서 인종, 젠더, 성과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는데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결과를 포함했다고 주장한다. 맥클린톡은 자신의 획기적인 글인 <제국의 가죽Imperial Leather>에서 19세기에 '성적 순결은 인종, 경제, 정치 권력을 통제하는 은유로서 등장하였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을 향해 다르게 배치되었지만 식민지 사회 내부에서도 사회관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맥클린톡은 권력의 이성애주의적 식민성의 지속적인 영향 중 하나는 비백인과 식민화된 민중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성과 노동자의 복속을 정당화한 일종의 계층화된 인간의 목록이라고 주장한다. 이 체제에서 ‘영국 중산층 남성은 진화적 위계질서의 정점에 놓였다. 백인 영국 중산층 여성들이 뒤를 따랐다. 백인종과 흑인종 사이의 문턱에는 국내의 노동자, 여성 광부, 그리고 노동계급의 성노동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맥클린톡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식민지에서 규정된 지배의 종류가 이러한 권력 관계의 모든 측면에 위치한 개인들에게 중요한 영향들을 담고 있다는 인식이다. 이것은 이 효과들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순결성에 대한 담론은 백인 여성들에게 흑인 여성들과 같은 효과를 준 적은 없지만, 양쪽 모두에 대한 지배의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아무튼 중요한 통찰은 권력의 기술과 담론이 관계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억압으로부터 실질적 이익을 얻지만 그것의 구체화와 유지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가 거의 없는 사람들(예를 들어, 백인 우월주의 체제로부터 물질적으로 이익을 얻었지만, 그것을 만든 제도들의 직접적 조직화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이 거의 없는 백인 여성들)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과 억압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주체성의 구성에 대한 울려퍼지는 효과를 포함한다.
권력의 관계성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에 대한 교차적 비평의 중심적 통찰이다. 위의 분석은 자본주의가 식민지화와 그것에 수반되는 인종, 젠더, 성적 통제의 시스템을 요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맥클린톡이 제공한 이 마지막 작품이 주제화 할 수 있는 것은 유럽에서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 분열의 중심에 있는 중심적인 임금 관계 자체가 동시에 식민지 이성애중심주의 체제의 원인과 효과인 방식이다.
또는,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유럽의 계급 시스템은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의 인종, 젠더, 성적인 권력의 체제를 통해 발전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인종화, 젠더화 또는 성애화가 아이티의 농장과 같은 방식으로 파리의 골목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노동계급과 식민지 민중의 운명이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분리되어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성, 노동,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한 불가피하게 결과론적인 생각들과 함께 자본주의의 이윤 논리는 대도시와 식민지를 동시에 만들었다. 그리고 이 분열의 양쪽의 대상들은 지배와 착취의 시스템을 통해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이미지들로 구성되었다.
자본주의는 세계적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착취, 여러 형태의 강탈, 여러 종류의 주체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체제의 동시적인 회복력과 궁극적인 취약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적 진단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4. 결론: 자본주의에 대한 상호교차적 비평을 향하여
내가 발전시키려 노력한 자본주의에 대한 상호교차적 비평은 계급의 본질에 대한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다. 나는 자본주의가 억압의 현대적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시스템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인, 곧 계급이 억압의 일차적 또는 특권적 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 분석은 계급의 특정한 측면에 대한 가장 명확한 분석을 제공하며, 다른 이론들보다도 자본주의의 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활동을 세부화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할애했다. 그래서 이러한 분석에서, 내가 특권적 자본주의를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 시스템의 이름으로 여기는 동안, 나는 계급을 자본주의에 대한 특권적 이해를 가져다주는 분리 가능한 경제적 또는 사회적 결정으로 보지 않는다. 또는 그것은 적어도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이상의 것은 아니다.
노예제, 식민주의,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 – 이 모든 것들은 적어도 자본주의 안에서나 그것을 통해서 현대와 동시대 형태로 발전했다. 그래서 내가 '지배의 매트릭스'라고 자본주의라고 부를 때, 이 분석에서 경제적 결정이 특권적이라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체제가 일관된 시스템이라고 믿기 때문에 여기에 하나의 이름을 붙였다. '교차하는 억압들', '지배의 매트릭스' 그리고 '동시적인 억압'에 대한 매우 유용하고 놀랄만큼 유익한 분석이 적절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억압들의 통합이다; 억압은 서로 교차하고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재강화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그들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을 스스로 만든 교차성 이론가들의 연구는 사실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는 분리될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서로를 통해 구체화되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해왔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통찰력은 그들이 설명하는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를 훨씬 넘어선다. 교차성 학자들이 정체성 정치의 중심성을 주장할 때, 그들은 개인의 정체성과 관계 속에서 가장 명확하게 이론화된 억압은, 정확히 동시대의 세계 속에서 지배에 대한 어떤 구조적 분석의 기초로서도 질문되어야 하는 억압들이라는 근본적인 진실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집단 기반의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억압으로서 교차성에 의해 지지되는 정체성의 정치는, 개인의 정체성 경험을 훨씬 뛰어 넘는 동시에 개인과 그들의 경험이 우리 이론화에서 제거할 수 없는 부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역사적 인간들'에 대해 언급해야 할 때 추상적 인간을 말하는 것에 대해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흐Feuerbach를 비판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분석 역시 남성, 여성, 젠더질서 거부자 등 실제 역사적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즉, 그것은 그들의 실제 정체성과 그 정체성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위치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런 틀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루고네스로 돌아간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맞물리는 [억압]에 대한 이미지는 두 조각의 그림 맞추기 퍼즐처럼 전적으로 조심스러운 두 가지의 것이다. 나는 이 개념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얽혀있는 억압에 대해 해방적 맥락에서 글을 쓰는 다른 유색인종 여성 이론가들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짜여지거나 맞물리거나 얽혀 있으면 더 나은 이미지를 제공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교차성'이라는 용어를 버리지 않고 루고네스를 따라가고 싶다.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사고와 글쓰기의 맥락과 전통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가 지적으로 빚을 진 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나는 섞어 짜여진 억압이 인종주의, 착취, 백인 우월주의, 식민주의, 이성애중심주의, 트랜스포비아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루고네스의 의견에 동의한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억압이 얽혀 있다면 그것을 짜는 방법은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기사 등록 202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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