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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아시안 혐오/ 미얀마 항쟁/ 이경진 추모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3. 23.

전지윤

 

● 아시아인 혐오를 멈춰라 #StopAsianHate

 

3월 16일 미국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연쇄총격으로 살해당한 분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싶다. 사망자 8명중 한국계 등 아시아계 미국인이 7명인 이 사건은 인종혐오 범죄가 명백해 보인다. 경찰이 초기에 이 사건을 ‘성중독’ 때문이라고 한 것은 왜곡이며 물타기이다.

 

성(섹스)을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욕구에 죄책감을 주입하고, 타자화된 대상을 희생양삼아 ‘저들이 나를 오염시킨다’는 적개심과 살기를 표출하게 하는 것도 극우복음주의 등이 부추기는 전형적인 인종혐오, 여성혐오의 메커니즘이다. 이런 혐오의 논리는 타자화된 대상을 비인간화하며 극도로 증오할 뿐 아니라 절멸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래서 너무나 위험천만하다는 것이 다시 입증된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 범인 로버트 애런 롱의 언행에서 우리는 ‘트럼프없는 트럼프주의’의 유산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코로나19 은폐에 관여했다”, “‘우한 바이러스’가 어떻게 창조됐는지 알고 있으며 50만 미국인을 죽인 것은 21세기 세계 지배를 위한 그들의 계획 중 일부”, “모든 미국인은 중국에 맞서 싸워야 한다”, “[중국은] 우리 시대 최대 악”...

 

트럼프가 했던 악선동들을 그대로 복붙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트럼프 4년 동안 극우복음주의와 대안우파의 리더들은 이민자와 아시안(특히 중국인)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부추겼다. ‘저들은 더럽고, 몰려다니고, 야만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고, 잘 번식한다’, ‘민주당의 기득권 엘리트들은 저들만 위하고, 그래서 우리(백인 하층민들)가 피해를 본다’는 식이었다.

 

대안우파는 이것을 중국=공산주의=민주당이라는 매카시즘과도 연결했다. 이것은 '민주당이 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트럼프를 몰아냈다'는 음모론과도 이어졌다. 공화당의 어떤 의원은 BTS의 노래까지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통로로 지목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공화당과 트럼프주의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체로 국내정책은 대외정책의 연장이고 제국주의 강대국일수록 이것은 더욱 그렇다. 1950년대 미국의 국내적 매카시즘과 공안탄압은 미-소 경쟁 속의 대외적 냉전정책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아시안(중국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미-중 경쟁 격화의 대결정책과 구분해서 보기 어렵다.

 

이것은 오바마 때부터 시작돼서, 트럼프 시대에 격화됐고,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대거 증폭된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의 지배계급은 ‘저 열등하고 위험한 인종이 핵심경쟁자가 된 것도 모자라 우리를 능가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고있고, 그것을 적극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4분의 3이 ‘중국에 부정적’이라고 답했고, 중국을 적으로 규정해서 경쟁을 강화하는 방향은 바이든 정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지배계급으로서는 지난해 미국에서 역사적인 규모로 분출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대한 대응으로도 소수인종들 사이에서 편을 가르고 분열을 조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92년 ‘LA 폭동’ 때 흑인-한인 갈등으로 문제를 비틀어서 분노의 불길이 더 크게 합쳐지지 못하게 했던 경험을 돌아볼 것이다. 지난해 팬데믹 속에서 사망자와 피해자의 큰 비율이 BAME(black, Asian, Minority Ethnic)였는데, 그들 속에서 또 틈을 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 자본주의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갈수록 커지고, 그것이 강대국들간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국 지배자들이 홍콩 등에서 독재정부를 편들면서,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당장 이 나라만 해도, 지난해 중국인 입국금지 청와대 청원이 무려 100만을 넘긴 적이 있다.

 

극우단체들이 강남역에서 중국인 입국금지 요구 행진을 했고, 지난해 총선에서 새벽당, 자유당같은 극우정당들은 TV토론회에 나와서 중국인 혐오 선동을 펼쳤다. 군소정당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교안이 앞장서서 ‘우한바이러스’라면서 중국인 입국금지와 심지어 중국인 관광객 송환까지 주장했고, 조중동이 그것에 동조했다.

 

얼마 전 국힘당 오세훈은 ‘내가 지난 총선에서 진 것은 양꼬치 거리의 조선족 탓’이라고 했다. 최근 조선일보는 ‘중국산 알몸절임 김치’에 대한 기사와 사진을 계속 어뷰징했다. 포털에서는 현 정부를 옹호하거나 긍정적 반응을 보이는 기사나 댓글에 ‘너 중국인이지?’, ‘너 조선족이지?’이런 댓글이 달린지 오래됐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에 부정적이란 답변(30%)보다 중국에 부정적이라는 답변(75%)이 증가하는 결과도 계속되고 있고, 특히 지난해 여름의 팬데믹 속에서 ‘중국인’은 ‘신천지’와 엇비슷할 정도로 욕설, 비속어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였다는 빅데이터 조사 결과도 있다.

 

중국계 동포와 조선족은 우리가 건설현장, 식당, 육아와 가사 도우미로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이주민이다. 고향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삶이란 힘들 수밖에 없다. 최근에 관심을 모으는 영화 <미나리>는 돌봄과 사랑에 대한 영화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민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에는 어둡고 좁은 병아리 감별 작업장에서 종일 일하는 아시안 이주민들이 나온다.

 

주인공 제이컵은 아내와 싸우다가 울컥하며 “10년 동안 병아리 똥구멍만 보며 살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부추겨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그들 모두 ‘중국인’이고, ‘바이러스’라고 취급받는다. 한국에서는 ‘우리와 다른 중국인들이 문제’라고 한다. 그 속에서 이제 이번과 같은 참담한 비극이 터져 나왔다.

 

 

● 미얀마 - 민중항쟁에서 민주혁명으로

 

 

미얀마의 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피로 물들고 있는 지금, 하루 하루가 견디기 어렵다. 뉴스를 확인하고, 페북을 보고, 모금에 동참하고, 소식을 공유하고 알리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죄스러움과 안타까움에 많은 사람이 속이 타고 발만 구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 민중은 군부 테러리스트 범죄집단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고 있다. 거리시위는 이미 민중항쟁을 넘어서서 혁명적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22222혁명’(2021년 2월 22일) 하루에만 2천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는 미얀마 민중은 이제 각각의 지역으로 흩어져 밤낮으로 시위를 벌이고 총파업과 시민불족종을 이어가고 있다.

 

이것은 초기에 판세를 낙관했던 군부도, 거리시위 호소에 소극적이었던 NLD 지도부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일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초기에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이것은 한자리 수에 머물던 미얀마 노조 조직률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미얀마 민중의 혁명적 잠재력의 자생적 폭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설사 군부가 아웅산 수치를 풀어주며 통제를 부탁해도 민중의 분노와 투지를 가라앉히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 NLD와 군부의 ‘불편한 정치적 동거’는 물 건너갔다. 민중은 군부의 완전한 역사적 청산을 원한다. 임시정부(CRPH)도 군부 타도의 혁명, 개헌, 연방제 민주주의를 목표로 선포하고 소수민족 무장단체들과 힘을 합쳐 연합군을 창설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봄의 혁명’이고, 타협지점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군부는 더 발악적으로 총칼만 휘두르고 있다. 중국 공장 방화 사건도 살인 진압의 빌미로 이용하고 있는데, 그 점에서 이것은 분노한 시위대의 행동이기보다 군부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방화를 병력 투입의 명분으로 삼는 것은 로힝야 학살 등에서도 군부가 자주 악용하던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골적으로 군부를 편들거나 기껏 양비론을 펴는 중국 정부와 기업에 대한 미얀마 민중의 분노는 크고도 정당하다. 그런데 지금 미얀마 민중의 투쟁과 힘의 놀라운 성장을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중국 기업만이 아닐 것이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찾아서 북반구에서 남반구와 동아시아로 공장과 투자를 이전시켜온 다국적기업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이다.(한국의 포스코 등도)

 

중국에서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되고 노동3권이 강화될 때 가장 거부감을 보인 것도 이들이었다. 이들은 미얀마 ‘봄의 정치혁명’이 승리로 마무리될 때, 거대한 노조 조직화,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 투쟁으로 이어질 것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87년 6월항쟁 이후에 7,8,9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던 남한에서도 벌어졌던 일이다.

 

거대한 투쟁은 권력자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민중의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키며 불가능의 벽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80년 광주에서 ‘미국이 우리를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었던 남한의 민중들이 이후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반제반미 운동의 지지자들로 발전하게 된 것도 비슷한 과정이었다. 따라서 지금 ‘미국의 개입’을 운운하면서 미얀마 투쟁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주저하는 반제 투사가 있다면 완전히 착각하고 크게 실수하는 것이다.

 

지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다국적 기업의 착취에 맞서려는 모든 이들은, 강대국들의 패권을 반대하는 모든 이들은,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을 믿는 모든 이들은 미얀마 민중의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CRPH을 미얀마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군부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어떤 기업도 군부를 돕거나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는 미얀마 민중의 요구는 우리 모두의 요구가 돼야 한다.

 

#SaveMyanmar #save_myanmarpeople #StandwithMyanmar

#StopCoup #RejectMilitary

 

미얀마 시민행동 연대기금 488401-01-224956(국민은행, 해외주민운동연대)

 

미얀마 아동과 시민 지원 1005-802-499757(우리은행, 따비에)

 

미얀마 민중가요 '어찌잊으리'

https://www.youtube.com/watch?v=_rPAJ9YXQ7g

 

일어나라 열사여

https://www.youtube.com/watch?v=nYC6rEj0_jY

 

 

● 분열지배 정책과 감정적 대립과 반목

 

미얀마에서 영국 제국주의가 그 씨앗을 뿌리고, 독재군부가 이어받은 민족(종족)간 분열지배 정책은 미얀마 민중의 힘과 연대를 가로막은 핵심적 기제였다. 지역과 부문을 뛰어넘은 거대한 투쟁이었던 8888항쟁을 더 나가지 못하게 발목 잡았던 핵심도 이 분열책이었다.

 

아웅산 수치 정부가 군부의 로힝야 학살에 대해 침묵하거나 방조했던 것은 그래서 더욱 치명적인 잘못이었고 비판받아 마땅했다. 일부에서 군부에 대한 분노보다 수치와 NLD 지도부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던 것도 그 점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히 지금 미얀마의 반독재 임시정부(CRPH)는 소수민족까지 포함한 대안정부를 구성했고, 군사정권 타도의 혁명을 통해서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연방민주주의를 구현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반군부 투쟁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소수민족들의 모습이 이런 진보를 낳았을 것이다.

 

피억압 민중 내부의 각종 차이를 이용해서 서로 분열하고 적대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지배자들의 핵심적 무기이다. 무엇을 분열지배에 이용하느냐는 역사와 지역에 따라 상이했는데, 이 나라에서는 종북몰이, 지역주의 선동, 정규직-비정규직의 분열지배 등이 주요기제였다. 요즘은 ‘능력있고 노력한 사람들’과 ‘무임승차하려는 사람들’로 편을 가르는 경향이 새롭게 커지는 듯하다.

 

그런데 87년 이후에 활동가층 수준에서 심각했던 것은 자주파(NL)와 평등파(PD)의 편가르기였다. NL과 PD와 IST(국제사회주의경향)까지 거쳐 온 경험으로는 사실 그 차이가 그렇게 크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최근 돌아가신 백기완 선생님을 봐도 그렇다. 통일은 반자본과 함께 선생님의 오랜 화두였고, 고인의 정치 역정은 비지론(비판적 지지)과 민독정(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을 거쳐왔다.

 

하지만 지배자들은 의식적이고 집요하게 차이를 부각하며 틈을 파고들고 갈라쳤다. 공안탄압도 우선은 한쪽에만 집중하는 식이었고, 그 과정에서도 서로간의 오해, 편견, 감정적 앙금을 부추겼다.(예컨대 2007년 ‘일심회’ 탄압 때 국정원은 ‘자주파가 평등파에 대한 사적정보들을 북한에 넘겼다’고 발표했고, 그것은 나중에야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편이 갈라지면 상대방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은 사라지고 타자화가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타자화는 오해, 편견, 감정적 대립을 더욱 극대화시키게 된다. 이것은 상대방이 심각한 탄압과 고통 속에 있을 때 차갑게 외면하거나 심지어 남들과 같이 돌을 던지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올해로 30주년이 되는 91년 5월 투쟁이 많은 활동가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부분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91년 5월 투쟁 자체는 긴 시야로 볼 때 패배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 투쟁은 87년 이전으로 반동을 꾀하던 구체제의 지배자들에게 브레이크를 걸었고, 정치적 ‘민주화’라는 흐름을 더욱 굳히게 만드는 디딤돌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분신정국과 유서대필 조작 사건, 정원식 밀가루 사건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지배자들의 공안탄압은 극심했다. 검찰과 언론이 주도한 마녀사냥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 것은 같은 동지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그것에 동조하며 자신을 불신, 외면하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비인간적 수단도 불사하는 집단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이 아니었을까.

 

당시에, 한때는 동지였지만 갑자기 공안당국의 스피커가 돼버린 김지하 시인 등의 구실이 그만큼 활동가들에게는 아프게 다가왔고, 지배자들에게는 유용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진중권 교수에게서 그런 역사의 반복을 느끼게 된다.

 

지난 정권 때, 진교수가 극우인사인 전원책, 한나라당 이준석 등과 소통하며 남다른 친분을 과시할 때만 해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이견은 존중돼야 하고 정치적 차이가 꼭 인간적 적대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전원책과 잘 구분돼지 않는 논리와 태도로 종북몰이 마녀사냥에 동조할 때는 놀라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년전부터 '검찰대란'을 거치면서 진교수의 정치적 좌표이동은 더 분명해졌고, 이제 그는 극우신문의 주요논자가 돼서 우파에게 전략과 전술을 조언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연히 그가 청년극우 유투버와 대담한 것을 보게 됐다. ‘나는 소련 몰락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했지만 주사파 운동권들은 여전히 전체주의적 인민민주주의자들’이라는 게 그의 논지였다.

 

별로 유쾌할 것 없는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는 이유는 진교수가 요즘, 임은정 검사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의 대표적 흑역사인 한명숙 조작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임은정 검사를 계속 비난, 조롱하던 진교수는 최근에는 임은정 검사의 페북에 댓글까지 달면서 모욕하기 시작했고 수구언론은 물론 그것을 실시간 중계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했다는 그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검찰, 수구언론, 우파 정치세력과 친해지는 것은 그렇다쳐도, 검찰의 조작범죄까지 옹호하면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려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봐주기 괴롭다. 정치검찰을 편드는 사람들은 또 되물을 것이다. ‘국가권력에 피해를 당한 억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왜 굳이 고위정치인이었던 사람에 관심 갖느냐’고.

 

전형적인 틀린 질문이다. 이 사건이 중요해진 이유는 기득권세력이 힘을 모아서 공모하고 조작한 증거가 드러나 저들의 약한 고리가 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실과 정의를 밝히려는 사람들은, 고위 권력자의 억울함에만 관심있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진실과 정의를 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이경진 선생님을 추모하며 - 이석기 위원을 석방하라

 

며칠전 몇몇 동지들과 고 이경진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국화꽃을 바치고 목례를 하고 이경진 선생님의 사진을 보니, 청와대 앞에서 다른 문제로 1인시위를 하다가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스쳐갔다. 종교인으로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 봉사해야 한다는 선한 신념을 평생 실천한 분이었고 동생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청와대 앞에서 이석기 의원 석방을 호소하면서 무려 1000일을 지내셨다. 나처럼 어쩌다 잠깐 가서 1시간만하고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하루 종일 청와대 분수대에 서 있었다. 추운 겨울에도 비닐을 덮고 노숙을 하셨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1인시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을 같이 나누었고, 다른 이들이 몸이 아프거나 지쳐 포기해도, 끝내 포기하지 않던 분이였다. 청와대 앞을 지키는 경찰과 형사들도 모두 그 분을 기억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세상 모두가 너를 욕하고 버려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 1000일의 사랑은, 정부의 어떤 응답도 얻지 못했고, 결국 고인의 건강을 앗아갔고, 수술 이후에는 목소리도 앗아갔다. 고인이 1000일의 투쟁이 왜 박근혜 정부 때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 때 진행됐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촛불정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하는 기대 속에 하루하루가 지나서 1000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희망이 꺾일 때 모든 것이 뚝 끊어지곤 한다. 마지막 통화에서 이석기 의원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고인은 ‘내가 백배 천만배 더 사랑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사랑의 마음을 직접 만나서 눈을 보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싶은 소망을 앗아간 것이 누구인가.

 

어제 장례식장에서 뒤늦게야 3일의 귀휴를 얻어서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 이석기 의원을 만나서 인사할 수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너무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뒤늦게 3일 귀휴라도 허락한 문재인 정부에게 고마워해야할까? 그런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지금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진정으로 후퇴시키는 것은 ‘이석기 석방은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강경우파보다, ‘기다리라’고 희망 고문하는 이 정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과 정의는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 당장’ 실현돼야 한다

 

(기사 등록 20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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