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22222혁명과 미얀마 민중항쟁의 전망
미얀마에서 독재자 흘라잉과 군부가 총격과 학살까지 자행하며 쿠데타를 완성하려 하면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 군부가 극우인사들이 포함된 중범죄자들 2만여 명을 가석방한 것도, 혼란과 범죄와 폭력적 정치 갈등을 부추기고 그것을 핑계로 본격적으로 장갑차와 군 병력을 투입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또한 미얀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에게 부정선거만이 아니라 비자금 조성 혐의를 추가해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수치와 NLD를 부패한 정치세력으로 이미지화해 미얀마 민중의 사기를 꺾고 환멸과 냉소를 불러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사모펀드나 표창장같은 것은 아직 안 나온 것을 보면 미얀마 군부는 한국의 검찰과 언론에게서 아직 배울게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어제 미얀마 민중은 수백만 명이 참가한 전국민적이고 역사적인 총파업으로 이것에 맞섰다. 어제는 2021년 2월 22일이었기에 이것은 88년 8월 8일의 ‘8888항쟁’에 이어서 ‘22222총파업’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8888항쟁에도 참가했었던 미얀마의 투사들은 지금 저항이 발전하는 속도와 규모가 그때의 몇 배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다양한 세대, 젠더, 지역, 직종, 계층, 부문을 뛰어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에 동참하며 나라 전체가 마비되고 있다. 청년,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등의 주도성과 적극성이 두드러지고, 공무원과 경찰도 합류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로힝야, 카렌족, 라카인족 등의 소수민족도 ‘우리가 당할 때 당신들은 침묵했지만, 우리는 지금 침묵하지 않겠다’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방글라데시의 난민캠프에서 로힝야 난민들의 촛불시위 소식은 감동적이다.
사실 지금 서방 선진국들은 로힝야 문제로 미얀마인들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없다. 왜냐면 버마인과 로힝야인, 불교도와 무슬림을 분열시켜서 지배한 것은 바로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던 당시에 영국 제국주의가 뿌려놓은 씨앗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슬람포비아적인 낙인과 편견을 만들어낸 것도 서방 강대국들이기 때문이다. 미얀마 군부는 이런 지배전략의 충실한 계승자이다.
버마의 민족주의와 불교도들은 분명 과거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어느 시기와 국면에서 긍정적 구실을 한 요소가 다른 시기와 국면에서는 부정적 구실을 하게 되는 것,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역사의 변증법이다.
따라서 오늘날 미얀마 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버마족과 불교도들이 ‘마바타’같은 극우불교민족주의 단체들과 분명히 선을 그으며, 로힝야 등 소수민족들의 고통을 외면했던 것을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민주적 연방제를 저항운동의 주요 요구와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한국에서 미얀마 연대 운동을 건설하는 분들도 이 점을 고려하고 반영해주면 좋겠다.)
더불어 단지 수치의 복귀를 넘어서 군부와 NLD의 권력분점을 뒷받침해 온 2008년 헌법의 개정을 통한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방향을 제시하면 좋을 것이다. NLD 지도자들의 석방을 넘어서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위한 더 많은 요구들이 포함되면 좋겠다. 수치의 초상화만 아니라 민중의 관심을 반영한 다양한 선전물이 늘어나면 좋겠다.
이렇게 민족과 종교를 넘어서 연대가 이뤄지고, 현상복귀가 아니라 더 나은 민주주의적 미래의 희망이 나타날 때 미얀마 민중의 저항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저항운동을 어떻게든 분열시키려는 군부의 시도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저항운동의 승리를 위해 어떤 전략과 방향이 필요할지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은 누구보다 미얀마 민중 자신들일 것이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정당, 노조, 학생회, 농민회, 종교단체, 여성단체, 의사, 변호사, 작가단체 등 25개 단체가 참여하는 총파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각 지역에서는 자체적으로 치안 등을 관리하며 총파업과 불복종 운동을 조직하는 자치기관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또 소수민족들을 포괄하는 공동투쟁위원회도 구성되고 있다고 한다.(아래는 소수민족들을 상징하는 다양한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사진이다.) 투쟁 속에서 NLD보다 더 급진적인 정치세력도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흘라잉과 군부가 막강한 거인을 잠에서 깨운 것을 후회할 날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믿고 응원한다.
#22222Revolution #미얀마 #save_Myanmar #save_myanmarpeople #RejectMilitary
● ‘학교폭력 미투’와 피해의 치유와 회복
멀리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나도 학교폭력으로 힘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공부를 잘하거나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아이였고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고 빨간머리 앤을 좋아하는 ‘남자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아이였으니 말이다. 특히 초등학교 때는 학교 끝나고 나를 괴롭히던 아이의 가방을 들고서 그 애의 집까지 고통스럽게 따라가야 했던 게 아주 어렴픗이 기억난다.(물론 기억은 대개 편의적이니 내가 누군가를 괴롭게 한 기억들은 삭제됐을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학폭 미투’라는 흐름 속에서 고발하는 피해자들의 분노와 고통에 공감한다.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와 고통은 오래 남아서 당사자를 힘들게 하고 다양한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다. 당시의 가해자가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도 알 것 같다. 그런다고 그 어린 시절이 되돌려질 수는 없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면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상대가 방송에서 자주 봐야하는 유명인사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동안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의 심각성은 사소한 것으로 취급돼 왔고, 피해자들의 고통도 가려져왔다. ‘학폭 미투’가 여기저기서 이어지고, 늦게라도 반성과 사과가 이뤄지고, 그럼에도 가해자의 자격정지와 박탈, 스포츠계 추방이 이뤄지는 지금의 흐름은 그 점에서 이해가 간다.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높이고 이런 일이 반복돼지 않도록 선을 긋는 바람직한 효과가 있을 것이고, 다소 과한 점이 있더라도 과도기적 불가피성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가게 된다.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더라도, 모든 자격이 박탈되고 공동체에서 영원히 추방돼야 한다는 흐름에 대한 우려가 생기는 것을 숨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 사과하기보다 결사 부인하면서 상대방을 집요하게 공격해야 차라리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추길 것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쟁과 성과 지상주의, 대물림되는 폭력적 규범과 문화, 그것을 묵인하고 은폐해 온 스포츠계의 기득권 세력 등의 구조적 문제와 책임은 사라지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개인적 관계만 남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조에 주목하면 오늘의 가해자가 어제의 피해자이기도 한 복잡한 문제들이 드러날 것이고, 그 구조 위에 권력을 누려온 더 큰 책임자들이 드러날 것이고, 그 구조가 변화할 때 피해자도 치유되고 공동체도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언론은 단지 가해자-피해자의 개인적 대립과 갈등에만 주목하고 그것을 더욱 부추기며 선정적으로 문제를 몰아간다. 또 가해자에게 최고의 처벌과 형벌을 가하는 것이 해결책인 것처럼 몰아간다. 이것은 얼마 전 아동학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 ‘다문화’ 가족의 사례를 보면서 고민이 커졌다. 거기서 결혼이주 여성은 멀리 한국에 와서 경제적으로 무능하며, 폭력을 휘두르고, 아내를 통제하려는 남편에게 오래 시달렸다.
나중에 그 여성에게는 정신질환 증세가 나타났고, 당연히 그 가정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 여성은 아이들을 방치 학대했다는 혐의로 입건돼 가족과 격리돼 정신병원에 보내진 반면,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은 여전히 가정에 남았다. 이것을 보면서 그 여성을 단지 아동학대의 가해자로 비난할 수 있는지, 이 여성을 단죄하면서 이뤄진 조치들이 과연 진정한 해결책인지,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최선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구조와 맥락은 빠트린 채 가해자 개인만을 괴물화하는 언론의 선정적 보도는, 클릭수는 높여주겠지만 이런 문제들의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더구나 언론 보도 자체가 전국적 신상공개, 낙인과 망신의 처벌 효과를 낸다. 가해자로 지목된 개인의 사회적 관계와 인간관계는 끊어지고, 가족들까지 고립되게 된다. 이것은 잘못에 비해 과도한 처벌과 이중처벌의 논란도 낳게 된다.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가-피해의 개인적 관계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가 해결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그나마 가해를 인정하고 반성과 사과를 하는 사람들에게 무관용과 영구추방이 적용되고 어떤 동정도 용납되지 않고 있는 반면에, 끝까지 가해 인정과 반성과 사과를 거부하는 사람들, 거꾸로 피해자를 공격하는 사람들, 피해자의 입과 언론의 보도를 막기 위해 고소 소송하는 사람들은 별 문제없는 상황이 너무 부조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에 대한 역고소를 철회하지 않고 있는 노동자연대 지도부도 있지만, 승설향 씨의 미투에 인신공격과 고소로 답한 가해자도 있다. 국힘당 대표 주호영도 마찬가지다. 영상만 봐도 주호영이 영세인터넷매체 기자를 무시하며 폭력적으로 밀어낸 것이 명백한데, 피해기자의 호소는 들은 척도 않던 언론은 주호영의 역고소와 입장 발표가 나오자 대대적으로 자세히 실어줬다. 고문, 사건조작, 사찰 등 검찰, 국정원이 저지른 국가폭력의 수많은 피해자들도 여전히 반성과 사과를 듣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의 치유에 필요한 것은 이런 가해자들이 사회에서 영구추방, 삭제되는 게 아니라, 진정성있게 사과하고 거듭나는 모습이다. 이를 통해 재발방지책이 마련되고 구조적 변화가 이뤄져 또 다른 가해와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길 때 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치유와 회복’에 대한 이야기는, 피해자들에 대한 반성과 보상도 없는 삼성 이재용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재판부의 논리로나 등장하고 있다.
● 드라마 <허쉬> - 펜보다 강한 밥, 밥보다 강한 부끄러움
JTBC에서 16부작으로 방영한 드라마 <허쉬>가 지난 주말에 끝났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16부작이나 되는 드라마는 잘 안 보게 되는데다가 ‘펜보다 밥이 강하다는 생활인으로서 기자들...’ 이런 소개를 보고 더 흥미가 떨어졌었다. 그런데도 나중에 다시 허쉬를 찾아보게 된 이유는 주류언론들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언론이 이 드라마를 외면할 뿐 아니라 어쩌다 나온 리뷰도 부정적 반응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배우 황정민이 나왔다지만 이런 비현실적이고 유치한 내용에 저조한 시청율...’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흥미와 궁금증이 생겨서 보게 됐는데, 그 결과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물론 ‘한드’의 특징이 된 어느 정도 자극적 요소와 과도하고 다소 유치한 설정이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점들이 그것을 충분히 커버한다. 드라마는 스스로 ‘기레기’라고 자조하는 기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심각한 대중적 불신의 대상이 된 주류언론의 씁쓸한 실상을 생생하고 남김없이 보여 준다.
트래픽을 높이기 위한 자극적 제목 낚시, 계약직 온라인 별동대를 꾸려서 오타까지 복붙하며 어뷰징 기사 쏟아내기, 광고 수주를 위해 발행부수를 늘리고 발행 즉시 계란판으로 넘어가는 신문, 명문대 중심의 기자 선발과 지방대와 비정규직 차별, 검찰 출입기자를 통한 검언유착, 채용비리를 덮어주는 기사거래로 공천을 받아내는 족벌사주, 정치권과 결탁해 언론특보로 가려는 기자,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사주의 가족과 세습 준비, 혼맥과 인맥으로 연결된 족벌언론과 정치권과 재벌기업의 카르텔 등등.
언론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카르텔이 어떻게 기사와 논조를 통해서 프레임을 만들고 이용하는지도 보여 준다. 언론개혁을 요구하던 노조위원장을 뒤로 뇌물받은 위선자로 만들어 버리거나, 메시지를 가리기 위해서 메신저의 사생활과 인간적 결함을 파헤치거나, 분식점 주인과 알바생의 대립을 부추겨 ‘을과 을’의 싸움을 만들거나... 이런 프레임 짜기의 전문가인 국장은 우습게도 ‘해장국 언론이 아니라 진실이 중요하다’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프레임은 대개 없는 사실보다는 있는 사실을 어떻게 배치하고 구성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주요무대는 ‘일등신문’을 자처하는 족벌언론 ‘매일한국’인데, 이 신문사의 사장실에는 유명한 렘브란트의 ‘해부학 강의’ 그림이 걸려있다. 시신을 해부하면서 뭔가를 설명하는 의사와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그림이다. 사장은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세상에는 신문을 만드는 사람과 신문을 읽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신문을 만드는 우리는 세상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이고, 신문을 읽지도 않는 사람들은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도 가만있는 저 시체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족벌경영과 세습이 이뤄지는 이 ‘일등신문’이 조중동(특히 아마도 조선일보)을 상징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반면에 개혁적 언론으로 비춰지는 ‘신라일보’도 가끔 나오는데, 신라일보도 결국은 ‘매일한국’의 치부를 고발하려는 기자들의 시도를 외면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거미줄처럼 연결된 이 바닥에서 언론들이 서로 공모하고 외면하면 어디서도 진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이것이 요즘 개혁언론들에 느끼는 많은 독자들의 기대이자 실망감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2016년 촛불 이후의 변화된 현실을 담아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같이 목소리를 내고 함께 힘을 모으는 보통 사람들의 힘겨운 모습도 보여 준다. ‘매일한국’에서 부당한 차별을 겪다가 죽어간 오수연 인턴기자를 추모하면서 사람들은 ‘노 게인 노 페인’(No gain No pain)이라는 해쉬태그를 달아서 연대하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서 서로의 경험과 분노의 목소리를 나누고, 청와대 청원을 올리고, 집회를 하고, 거리 서명운동을 벌인다.
이 드라마가 언론사 기자들을 단지 ‘악당’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뒤틀린 언론구조 속에서 순응하고 체념하며 살아가는 생활인, 소심하게 저항도 해보지만 좌절하면서 결국 생계를 걱정하며 스스로를 ‘기레기’라고 자조하는 사람들로 그린다. 심지어 국장도 타고난 악당은 아니고 언론구조 속에 적응해 가면서 자기를 정당화해 가는 복잡한 인물로 나온다. 그럼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그런 체념과 순응, 자기 정당화의 결과가 어떤 비극을 낳는지를 봐야 한다.
드라마에는 잘못된 언론구조가 만들어낸 크게 3번의 죽음, 또는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진 각종 비극들이 떠올라서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언론이 짠 프레임 속에 낙인이 찍히고 사냥감이 돼서 수많은 조리돌림을 당하고 벼랑 끝으로 몰렸던 사람들,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사들 속에서 어떤 해명도 통하지 않는 거대한 벽 앞에 무너진 사람들, 그 기사들마다 달린 증오와 저주의 댓글들을 보며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고, 지금도 많은가.
드라마는 몇몇 장면을 통해서, 펜이 칼이 돼서 난도질을 하는 게 상처받기 쉬운 누군가의 영혼이고, 그런 기사들에 달린 ‘그냥 목매라’라는 5글자의 댓글이 마지막 총알이 돼서 누군가의 심장을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을 담아낸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마지막이 더 이상 침묵과 순응을 거부한 기자들의 반성과 참회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주인공인 기자들은 ‘매일한국’에서 자신들이 공모해서 벌어져 온 불의를 고발하는 집단 양심선언을 한다. 그것은 한 주인공이 말하듯이, 가만히 누워서 해부학 재료가 되고 있던 시체가 갑자기 일어나 메스를 잡은 의사의 팔을 잡아챈 것과 같다.
물론, 세상은 드라마처럼 단순하지도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드라마도 집단 양심선언 이후에도 바뀐 것은 거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주요 책임자들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더 이상 누구도 일하다가 차별받고 죽지 않길’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오수연 특별법’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매일한국’에서 나온 기자들은 스스로 작은 독립방송 ‘허쉬’를 만들면서 끝난다.(이것은 마치 박근혜 정부 때 <뉴스타파>가 만들어진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의 현실은 드라마보다도 별로 나을 게 없다. 언론시장에서 조중동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하고,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가장 많은 광고를 빨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기사와 지면을 통해 삼성일가를 비호하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고, 어떤 개혁도 가로막고 반대하고 있다. 물론 ‘권력 감시’도 한다. 예컨대 물러난 지 오래인 조국 교수의 딸이 면접만 봐도 ‘특종’, ‘단독’이라면서 스토킹 중이다.(이것이 무슨 ‘살아있는 권력 감시’라는 것인지, 이런 낙인찍기와 혐오 선동, 집단적 괴롭힘, 사생활과 인권침해를 왜 대부분 모른 체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누구든 이런 취급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며칠 전 <조선일보>는 ‘친정부 언론은 언론도 아니다. 살아있는 권력을 파고들며 비리를 캐내는 특종과 진실 보도는 우리만 하고 있다’며 자뻑하는 칼럼을 실었다. 이런 <조선일보>가 현직 기자들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영향력과 신뢰도 있는 언론’으로 꼽혔다고 하고, 이런 족벌언론들만이 아니라 개혁언론들에서마저 검찰 받아쓰기는 계속되고 있다.
정작, 얼마 전 문재인 신년 기자회견에서 그 많은 질문 속에 차별금지법은 왜 감감무소식인지, 중대재해처벌법은 왜 후퇴한 것인지, 김진숙 복직 문제는 왜 진척이 없는지, 한미전쟁연습은 중단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따져 묻는 기자는 하나도 없었다. 재벌, 족벌언론, 기득권 카르텔의 치부를 고발하는 보도는 <뉴스타파>나 각종 탐사보도 프로에서나 간간히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기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자들이 ‘유치하고 현실성이 없다’고 외면할 게 아니라 ‘허쉬’를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고민하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특히 조중동이 그래도 뭔가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이나, <조선일보>도 협력하고 인터뷰할만한 언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진보 정치인들이 있다면 ‘허쉬’와 더불어, <뉴스타파>가 만든 ‘족벌’을 꼭 같이 봤으면 좋겠다. 조선, 동아가 어떻게 독재권력에 빌붙어 오다가, 어떻게 스스로 살아있는 자본권력의 핵심이 됐는지를 봤으면 좋겠다. ‘족벌’에서, 이제는 노인이 된 조선, 동아 해직기자들은 ‘우리도 과거에 독자들의 질타를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서 행동에 나서게 됐었다, 오늘날 조선과 동아에서 다시 그런 목소리가 나왔으면 한다’고 말한다. 부끄러움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기사 등록 20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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