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쿠데타에 맞선 미얀마 민중의 투쟁
요즘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하고 불안정한 것인지, 우리가 권위주의적 우파와 (신)자유주의적 중도파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있다.
최근에 오카시오 코르테즈는 지난 위싱턴 폭동 과정에서 자신과 스쿼드(민주당 소속의 유색인 좌파 여성 의원 4인방)가 겪은 심각한 위험을 고발했다. 급히 몸을 숨겼던 이들은, 당시에 의회를 접수하고 장악한 다음에 곳곳을 뒤지면서 이들을 찾는 무장한 극우익 행동대원들의 소식을 들으며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사태 수습이 조금만 늦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더구나 공화당 소속의 극우파 의원들이 이들의 좌표를 찍어주고 있었다고 한다. 코르테즈가 바이든 취임식에 축하메시지만 보낸 채 불참하고, 대신 파업 노동자들의 집회로 간 것도 신변안전을 걱정해서였다고 한다.
바이든이나 팰로시조차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이들 극우, 신나치들은 코르테즈가 상징하는 모든 것 - 여성, 유색인, 이민자, 좌파 - 을 극도로 혐오, 경멸하고 존재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확신으로 뭉쳐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맘 편히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는 것은 이명박근혜 시대와 오늘날 태극기부대에서 비슷한 정서와 논리를 발견해 왔기 때문이다.
이명박근혜 시대에 종북몰이가 절정일 때 ‘종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살기어린 혐오와 대중적 적대감은 지금도 기억하기 싫을 정도다. 최근까지도 전광훈과 태극기 부대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피켓을 들고, ‘문재인과 주사파들을 죽여야 한다’는 선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은 최근 법원에서도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았다.
물론 그래도 형식적 ‘자유민주주의’가 유지되고 있는 미국이나 한국은, 최근의 러시아나 미얀마와 비교하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러시아에서는 푸틴 종신집권 체제 구축에 걸림돌이 된 나발니에 대한 암살 시도, 체포, 구속, 항의시위대 탄압이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는 더 심각하다. 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5년만에 부분적 자유화마저 집어넣고 다시 완전한 군사독재로 회귀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거리로 모이고 집단 저항하기 어려운 것을 이용한 ‘코로나 쿠데타’라 할만하다. ‘2008년 헌법’을 이용해 그동안에도 내무, 국방, 치안에 대한 실권과 자동할당된 25%의 의석을 갖고있던 군부는, 얼마전 총선에서 80% 가까운 압도적 지지로 승리한 민족민주동맹(NLD)을 제거하고, 재선거를 통해 기껏 5%의 지지를 얻었던 친군부 우파 야당에게 권력을 쥐어줄 계획으로 보인다.
로힝야 대학살의 책임자인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쿠데타의 수괴라는 것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훌라잉과 군부는 크게 두 가지를 이용했다. 하나는 지난 총선이 부정선거였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총선은 로힝야의 투표 참여를 박탈하는 등 부분적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중도, 또는 진보세력의 ‘부정과 위선’을 공격무기로 활용하는 게 우파의 국제적 유행이라는 것이 다시 확인된다.(어제는 수치가 통신장비를 불법수입했다는 혐의도 제기했다.)
또 하나는 아웅산 수치와 NLD의 타협 노선이다. 수치는 그동안 군부와 타협하면서 권력을 분점하고, 로힝야 학살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그 결과 민주화 지도자로서 수치의 대내외적 신망과 지지는 계속 떨어져왔고, 노벨평화상 반환운동까지 제기됐다. 그리고 군부는 역설적으로 이런 수치의 위상 추락을 쿠데타를 위한 호조건으로 이용했다.
이것은 중도 자유주의 세력이 기득권 우파와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이 낳는 효과를 다시 보여 준다. 그것은 기득권 우파를 부드럽게 만들 수 없다. 실제로 미얀마 군부는 수치가 더 적극적으로 로힝야 학살을 돕지않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조금씩 빼앗아간다고 불만을 키워왔다. 동시에 그런 양보는 민주화를 지지하는 기층민중의 힘과 기를 꺾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국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가 재벌, 우파, 검찰, 언론, 사법부와 타협하고 양보하려 하면서 촛불 민중들의 실망은 커져왔고(물론 검찰, 언론, 사법부와 그만 싸우라고 탓하는 진보좌파가 있다는 게 서글프지만), 법과 제도를 통한 실권을 여전히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 우파는 오히려 더 힘을 회복하면서 반격에 나서고 있다.
물론, 미얀마 상황은 미중 패권 다툼과도 연관이 있다.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 전략과 연동돼 있던 미얀마에서 부분적 자유화의 실패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성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은 얼마든지 독재자나 군부와도 손을 잡아왔지만, 문제는 미얀마 군부가 중국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제재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것도 아니고 그것에 별 도움도 안 될 것이다.
미얀마 민중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거리에서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집 안에서 가재도구를 두드리며 항의를 표시하고 있다. 이것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또 (러시아에서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스트인 나발니에 대한 탄압에 반대하듯) 수치와 NLD가 어떤 문제점을 가졌든 그들에 대한 군부의 공격과 탄압에 반대한다. 사회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미얀마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는 어떤 목소리도 지지한다. 관건은 미얀마 민중이 쿠데타를 거부하고, 소수민족과 연대하며 행동할 수 있느냐고, 수치를 넘어선 급진적 대안도 그 속에서만 건설될 것이다.
“누가 일곱 개의 성문이 있는 테베를 세웠는가?
책에서 그대는 왕들의 이름을 발견한다네.
왕들이 바위 덩어리를 끌어 날랐는가?”
- 브레히트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은 위대한 왕, 지도자, 대통령이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생각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막상 혁명과 진보의 역사를 말할 때는 또 다른 몇몇 영웅들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의 진보는 몇몇 뛰어난 혁명가, 초인적인 불굴의 투사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일어설 때 만들어졌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우리를 대신해 모든 걸 해줄 수도 해주지도 않듯이 말이다.
지금 러시아와 미얀마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나발니가, 아웅산 수치가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니다. 미얀마 군부는 수치와 NLD 지도자들을 구금하면 게임 끝이라고 본 것 같다. 그러나, 미얀마에서는 반세기 동안 군사독재에 맞서 저항하며 경험을 통해 투쟁 방법을 발전시켜 온 사람들이 존재한다.
지난 5년간의 부분적 자유화 속에서 얻은 소중한 것들을 절대 빼앗길 수 없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의류산업을 중심으로 노조를 만들고 권리를 요구해 온 (주로 여성) 노동자들의 진출이 있었다. 이들이 지금 다시 일어서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 수치 석방과 군부 타도를 외치고 있다. 이들이 쿠데타를, 계엄령을, 역사의 후퇴를 막을 것이다. 이들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미얀마 #쿠테타 #save_Myanmar #save_myanmarpeople #RejectMilitary
● ‘게임스탑’ 사태가 보여 준 기생적 축적 단계의 자본주의
최근에 논란이 된 ‘게임스탑’ 사태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실체와 모순을 잘 보여 줬다. 첫째, 그것은 자유시장 논리의 허구를 보여 줬다. 이번 사태 초기에 미국의 거대증권사들은 개미 투자자들의 매수 열풍으로 게임스탑 주가가 폭등하면서 헤지펀드들의 공매도 작전이 어마어마한 손해로 이어지자 개미들의 주식 매입을 제한했다. 결국 ‘자유’란 거대기업과 큰손들이 돈 벌 자유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손해가 되면 언제든지 자유는 제한되고 부정된다.
둘째, 주식 등의 금융시장이 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한 건전한 투자의 장은커녕 거대한 합법적 투기판일 뿐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기업과 경제의 실제 가치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몇십, 몇백 배나 올랐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이 투기판 속에서 하는 일도 없이 돈을 버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미국에서 상위 1%가 주식시장 가치의 절반을 갖고 있듯이 말이다.
셋째, 2008년 금융 위기 이후부터 지속돼 왔고, 코로나 상황에서 더욱 증폭된 전세계적 돈풀기가 거대한 거품을 가져왔고, 그 거품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다시 확인됐다. 헤지펀드와 거대투기꾼들은 거품을 키우는 과정에서도 큰 돈을 벌지만,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도 공매도 등을 통해 큰 돈을 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미’들의 집단적 반발과 행동 속에 헤지펀드들이 오히려 큰 손해를 봤다.
그러면 우리는 ‘헤지펀드와 월스트리트를 응징하자’는 이 개미군단을 응원하고 지지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헤지펀드와 경쟁관계에 있던 테슬라같은 거대기업들과 일부 ‘큰손 개미’들이 ‘개미군단’의 친구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고 있고, 실질 가치가 없었기에 결국 다시 폭락하고 있는 게임스탑 주가 속에 지금 피해를 보고 있는 것도 또 다른 개미들이다.
트럼프의 후계자인 테드 크루즈같은 대안우파는 ‘월스트리트를 조종하는 딥 스테이트’ 음모론을 펼치며 이번 사태를 포퓰리즘적 선동에 이용하고 있다.(크루즈의 부인은 골드만삭스의 고위 임원이다) 따라서 공매도를 금지하고 계속 주가의 거품을 키워 나가자거나, 개미들도 더 자유롭게 공매도를 할 수 있게 하자는 식의 방향을 지지하긴 어렵다.
이런 것은 ‘금융 민주화’가 아니라 금융 투기화를 부추길 것이다. 카지노에 큰 손만이 아니라 개미들의 돈도 더 많이 끌어들이고, 개미들이 더 자유롭게 제한없이 투기에 동참하도록 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학개미 운동’에 뛰어든 개미들을 탓하고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고, 결국 부동산 거품과 주식 거품까지 다시 부풀어오르며, 열심히 일해서 주택을 마련하고 노후를 대비한다는 꿈은 순진한 기대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 가능성은 커져가는데, 이번에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야당후보들의 공약을 보면, 세금을 깎고 투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되면 부동산과 주식을 통한 불로소득은 더욱 확대될 것이고, 이런 ‘부채주도성장’ 속에서 ‘영끌’과 ‘빛투’를 통해 이 투기판에 빨려든 사람들 대다수의 삶과 노후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다. 이것이 생산 현장의 1차적 착취를 넘어서 주택, 금융시장의 2차적 착취를 수행하는, ‘강탈적 축적’을 넘어서 ‘기생적 축적’의 단계로 나아간 오늘날의 자본주의이다.
대안은 사회복지와 안전망의 대폭적 강화, 공공이 책임지고 제공하는 안정적인 일자리와 소득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것은 월스트리트와 헤지펀드에 맞서며 자유시장과 금융을 더욱 강력하게 규제하고, 불로소득에 대한 철저한 차단과 과세를 수반해야 한다.
국가주도의 압축성장으로 건설된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금융시장 작전세력이 단지 재벌과 투기꾼만이 아니라 모피아와 금융감독기구, 검찰과 대형로펌의 전관, 언론, 조폭 등과도 연결된 거대한 카르텔을 구성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라임, 옵티머스 사례를 보면 이 카르텔 속에서 거대한 투기판을 만들고 막대한 범죄수익을 얻어간 자들은 수사, 기소, 보도도 피해가는 게 다시 확인된다. 경제정의를 위한 투쟁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
● ‘원전’ 종북몰이와 우파의 딜레마
우파-언론-검찰(감사원) 카르텔의 ‘원전 종북몰이'가 진행중이다. 호떡집에 불이 났다. 북한에 원전 건설을 지원하고 상납하려 한 “충격적 이적행위”라고 한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때 도보다리에서 문재인이 김정은에게 몰래 전달한 USB에 이미 그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했다.
당시 대화 내용은 공개된 적이 없지만, 멀리서 찍은 영상에 나온 문재인의 말하는 입모양을 ‘전문가’가 분석해서 알아냈다는 것이다. 문정부가 북한에 원전을 넘기려고 한 이 엄청난 범죄를 검찰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수사해야 한다고, 특검과 국정조사도 해야 한다고, 정권이 무너질 일이라고 조중동, 김종인, 안철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탈핵정책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가 경제성을 조작하고 문건들을 삭제했다는 검찰 수사 결과에도 크게 이슈가 불붙지 않던 상황에서, 기득권 카르텔이 잡아든 새로운 카드다. 근래 조중동은 문정부가 북한의 요구대로 강경화도 교체했다고 했다. 3월의 한미군사훈련도 북한의 요구대로 중단할 것 같다고 비난했다.
최근에 시진핑과 통화하면서 중국 공산당 100주년을 축하한 것을 두고 ‘공산당을 칭송하는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 문재인’이라는 질타도 있었다. 이어서, '원전 종북몰이'는 역시 문재인 정부는 친북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런 ‘충격과 격분’ 작전은 큰 호응을 일으키는 것 같지는 않다.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자’는 주장과 계획은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돼 이명박근혜 때도 나왔던 것이고, 미국도 승인해 왔던 것이라는 게 자료로 드러나서? 조중동에서도 그런 주장과 칼럼들을 수시로 실어왔다는 게 부지런한 네티즌들의 발굴과 고발로 뽀록나서? 그런데 저들은 이런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이 카드를 집었을까?
우파-언론-검찰 카르텔의 주도자들은 자신들의 몇 년전 언행도 기억못할 정도로 멍청한 이들이 전혀 아니다. 이해타산에 대한 계산과 두뇌 회전이 광속도인 이들은 그렇게 정치적 감각이 없는 자들이 아니다. ‘김학의 공익제보’에서도 이들은 김학의의 출국이라는 '공익'(?)을 가로막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동정론이 불붙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에 나온 <나경원의 증언>책을 보면, 2019년 검찰대란 국면을 돌아보면서 초기에 조국의 사노맹 전력과 의심스러운 사상을 파헤치다가, 효과가 없자 사모펀드와 입시로 방향을 튼 당시 자한당의 내부토론과 전략적 고민에 대한 회고가 나온다. 핵심 지지층을 다잡고 결집하는 데는 여전히 색깔론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외연 확장이 어렵고 갈수록 약발도 떨어진다는 게 이들의 딜레마이다.
결국 ‘원전’ 종북몰이와 ‘김학의 공익제보’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 드러날수록 (스스로는 도덕과 거리가 먼) 이 기득권 카르텔은 다시 ‘진보인사들의 위선과 이중성’이라는 도덕정치의 무기를 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런데 검찰이 아무리 쑤시고 털어대도 개인의 일탈과 결함을 넘어서서 권력형 비리라고 볼만한 큰 한방이 터져나오지 않는 것이 이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들이 끝없이 종북몰이로 회귀하는 것은 기득권 카르텔이 형성된 과정에 새겨진 냉전반공 DNA 때문이고, 조중동이 줄창 떠들면 결국은 슬금슬금 따라오거나 방조하는 언론지형을 믿기 때문이다. 유난히 종북몰이에 관대한 ‘중도’, ‘진보’, 자유주의 논객들 덕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사회에 여전히 뿌리깊은 종북 혐오, 낙인, 편견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석기 의원이 아직도 8년을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고, 자유의 절대적 옹호자이신 진중권, 금태섭같은 분들이 이에 대해 한마디도 안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지금의 ‘원전’ 종북몰이에서 기득권 카르텔이 쏟아내는 돼먹지도 않은 말들 중에서 한가지 그럴듯한 말은 있다. ‘탈핵’을 말하면서 북한에 대한 원전 건설 지원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3월 한미군사훈련을 반드시 중단하고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하지만, 핵발전소 건설 지원같은 것은 추진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오히려 북한에 대한 코로나 백신 지원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 백신도 주류언론들의 지나친 난리통 속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초과 확보된 상황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효과적으로 백신접종을 하고 있다는 이스라엘이 바로 옆의 팔레스타인에게 절대 백신 지원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정말 참담하다. 한반도에서 그런 서글픈 모습의 반복을 보고 싶지 않다.
물론 만약 정부가 북한에 백신 지원을 한다고 하면, 기득권 카르텔과 특히 보수언론(그리고 그들의 측면지원 후발 언론들)은 지금보다도 몇 배의 자체발광 난리통을 만들어낼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인 것은 아니니 이것은 ‘백신 민족주의’도 아니다. 그보다 더 천박하고, 오로지 증오와 편견에 기반한 ‘백신 냉전주의’일 것이다.
● 영화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넷플릭스에서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를 보게 된 것은 덴젤 워싱턴이 제작자로 참가한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덴젤 워싱턴이 먼 과거에 주연으로 나왔던 <모 베터 블루스>의 주옥같은 노래와 아련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더구나 이번에도 그때처럼 브랜드포드 마샬리스가 영화 음악을 맡았다니 더욱 보고싶어졌다. <마 레이니>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채드윅 보스만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니 더 의미가 있었고, 영화를 보고나서 이어지는 메이킹 필름도 보니 내용과 의미가 더 잘 이해가 됐다.
영화는 멋진 블루스 음악들을 감상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채드윅 보스만의 연기도 좋지만 비올라 데이비스의 연기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단지 음악만이 좋은 게 아니라 역시나 미국의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다. 블루스를 다루면서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그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강제이주와 노예노동 속에서 흑인들의 한과 흥을 담아서 발전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는 1920년대에 미국에서 흑인들이 남부에서 북부로 대거 이주하던 것을 시대적 배경으로 했다. 이런 미국 자본주의와 노동력의 구조조정과 블루스 음악의 부흥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는 당시 흑인들이 북부에서 직면한 빈곤, 차별과 억압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장면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그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세 가지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하나는, 주인공이 답답한 지하 연습장에서 벗어나고자 계속 문을 두드리고 박차다가, 겨우 열린 문으로 나가서 마주한 것이 사방이 높은 벽으로 막힌 감옥 독방같은 곳이었다는 것이 상징하는 숨막히는 갑갑함이다.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문화와 체제로서 인종주의는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빈곤, 차별, 억압, 폭력과 성착취에 시달리던 흑인 주인공들 각자와 가족의 삶이 드러나다가, 그것이 서로에 대한 분노와 폭력으로 발전해나가고 결국 커다란 비극으로 폭발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정당한 분노와 불만이 제대로 된 방향을 못찾으면 피억압자들 서로를 해치는 ‘수평폭력’을 낳는다는 프란츠 파농의 지적을 떠오르게 한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수직적 억압과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아래에서 서로를 증오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 이것은 오늘 한국에서도 나날이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런 흑인들의 고통, 욕망, 저항을 담았던 블루스가 상업화되고 대중화되면서 백인지배 체제가 그 영혼은 빼먹은 채 그 형식만을 더 세련된 방식으로 가져가버린 현실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의 막막함이다. 이것은 며칠 전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레이디가가와 제니퍼 로페즈의 멋진 공연에서 나타난 분노와 저항의 메시지가, 화해와 통합을 말하는 바이든의 취임사에서 희석돼버린 것과 비슷하다. 물론 화해와 치유도 소중한 가치이고 대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취임식에서 낭송한 시에서 아만다 고먼은 ‘조용한 것이 평화는 아니다’고 말했다. 바이든 시대에도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을 것이고, 예술가들은 계속 시대의 분위기를 담아낼 것이다.
● 사라지지 않은 ‘트럼프주의’의 기반과 미국 좌파
레이디가가가 멋지게 미국 국가를 부르는 바이든의 취임식과 초라하고 쓸쓸하게 물러나는 트럼프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프라우드 보이스’ 등의 극우단체들, 유사종교적 음모론자들도 이제는 트럼프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의 말바꾸기가 큰 배신감을 준 것이다. 트럼프의 경제민족주의를 강력 지지해온 자본가들의 핵심 연합체인 전미제조협회도 트럼프에게 등을 돌렸으니 이제 트럼프주의는 끝난 것일까.
그러면 좋겠지만, 트럼프주의의 기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저학력 백인노동자들 중에 상당수가 이번에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기층 민중과 노동계급 속에 인종주의적 기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이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줬고, 그것이 낳은 분노와 불만이 우파적 대안의 자양분이 돼 버렸다.
지금도 미국의 반동적 극우는 코로나는 중국과 연결된 엘리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극이라는 음모론으로, 일자리냐 안전이냐는 거짓구도로, 팬데믹 속에 일자리를 잃고 삶이 망가진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물론 이들의 분노와 상처에 파고들면서 혐오정치를 선동하는 리더들은 재산과 학벌을 가진 엘리트 출신이 많다.(마치 한국의 태극기부대의 지도부에 고위정치인과 검사, 군장성, CEO 출신이 많고 재벌들이 뒷돈을 대듯이) 미국 역사에서 KKK 등을 이끌었던 리더들도 교육받은 상류층과 존경받던 엘리트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층 지배계급의 다수나 주류가 극우적 대안이나 파시즘을 대안으로 선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썩은 이빨을 가진 사람도 그것을 빼는 것은 주저하고 꺼리는 법’(트로츠키)이기 때문이다. 보통 매우 심대한 위기 속에서 지배계급이 심각하게 분열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지는 데, 지금 미국의 상황이 그 정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난 4년의 과정과 이번 의회난입 사태는 상황이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바이든 정부가 민주당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지금의 팬데믹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다 실패하고 기층 대중의 상처, 고통, 불만, 분노를 더욱 키운다면 위험성은 커질 것이다. 이번에 워싱턴에서 나타난 작은 희극이 다음번에는 커다란 비극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공화당 자체가 극우 나치정당으로 변화하기 보다는, 분열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미 트럼프는 제3당(애국당)을 만들 수 있다고 협박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좌파정당이 분화해 나오기도 전에, 공화당에서 극우정당이 먼저 분화해 나올지 모른다. 퇴임할 때가 돼서야 트럼프의 SNS를 차단한 거대 플랫폼 자본가들이 이런 흐름을 알아서 막아줄 거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1930년대에 독일 공산당은 ‘파시즘이냐 자유민주주의냐의 다툼은 저들끼리의 다툼이고 우리가 후자를 방어할 필요는 없다, 둘 다 싸우다 망하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권력을 잡자’는 식의 태도를 취했고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좁은 경기장에서 골치아픈 상대와 싸우기보다 넓은 경기장에서 더 만만한 상대와 싸우기를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한다. 좌파에게 주어진 것은 ‘좌파적 원칙을 고수하면서 계속 주변화에 머물 것인가, 원칙을 후퇴시키며 대중성을 얻을 것인가’의 양자택일은 아니다.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키는 방법이 정치이고 전술이다.
그래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세운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며 개입해 온 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이 지난해 민주당 경선 패배 후에도 급성장을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갑다. 위상이 더 높아진 버니 샌더스는 최근 상원 예산위원장까지 됐고, 더 강하게 그린뉴딜과 부자과세 복지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오카시오 코르테즈 등은 바이든 정부를 왼쪽에서 압박하며 민주당 지지자들을 파고들고 있다. 그들도 민주당이니 틀려먹었고 망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를 재평가해 온 역사가이면서 DSA의 주요활동가인 에릭 블랑의 주장이 더 타당해 보인다.
“좌파들이 민주당으로 출마하는 이유는 우리가 민주당의 주류지도부를 지지하거나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민주당의 노동계급 기반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왜 아직은 제3당이 실행 가능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다 변절했기 때문이 아니고 투표 제한 법안 때문도 아니다. 왜냐하면 다인종 노동계급의 진보적 부분들이 아직도 대부분 민주당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고 - 최다득표자 당선의 투표 제도 속에서 - 제3당에게 투표해서 공화당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 삼성 이재용 재판 결과를 보고
당일 2시에 시작한 이재용 재판 기자회견 도중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고 곧 재판 결과가 나왔다. 박근혜도 20년이고, 누구는 입시스펙을 과장했다는 의혹만으로 4년인데 2년반... 이미 1년을 살았으니 잠깐 더 안에서 쉬다가 가석방을 노려보라는 말이다. 삼성 피해자분들은 법정구속에 안도하면서도 고작 2년반에 분노했다. 물론 법원에 그많던 언론사와 기자들은 판결 결과 규탄의 목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다 지나쳐 갔다. 나도 복잡한 심정을 담아 발언했다.
이재용이 그나마 법정구속된 것은 촛불의 힘이고 삼성 피해자들이 투쟁하고 연대한 성과다. 다시 한번 이재용의 범죄를 정리해보면 뇌물, 횡령, 국정농단, 노조파괴에 수많은 산재사망과 철거민, 해고자, 암환자 등의 삶을 파괴한 책임도 있다. 더구나 대법원이 파기 환송했고 뇌물액수가 대폭 늘었는데도 2심 때와 같은 징역 2년6월이 나온 것은 봐주기가 명백하다. 봐주려고 아주 최선을 다한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사법정의는 이미 훼손, 왜곡돼 왔다.
이것의 책임자는 먼저 사법부이다. 사법부는 앞서 윤석열의 손을 들어줬고, 전광훈을 풀어줬다. 오늘도 이재용에게 완전한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느니,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느니 이런 말들처럼 요즘 듣기 싫은 말도 없다.
다음은 언론이다. 언론은 항상 이재용의 눈과 입과 귀처럼 굴었고 전지적 이재용 시점으로 보도해 왔다. 오늘 아침부터도 거의 모든 언론이 이재용을 걱정하는 것을 보면서 여기로 왔다. 다음은 검찰이다. 떡값검찰이고 삼성장학생이던 검찰이 이번에는 달랐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검찰은 촛불에 밀려서 수사에 나섰던 것이고 중간에 계속 김을 빼고 장난을 쳤다. 계속 이재용을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찍던 청와대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이제 또 저들은 이재용 수사와 처벌 과정의 절차상 흠결을 찾으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이명박근혜 사면론처럼 이재용을 사면하거나 가석방하자는 말도 나올 것이다. 따라서 이재용을 정말 제대로 처벌받게 하려는 투쟁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무엇보다 삼성은 당장 오늘 기자회견에 참가한 삼성 피해자들(과천철거민, 암보험 피해자, 해고노동자)에게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
(기사 등록 20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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