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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전술의 탄생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1. 23.

존 리델(John Riddell)

번역: 두견

 

 

존 리델(John Riddell)이 사회주의 역사 속에서 좌파가 다수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시도 속에서 어떻게 전술을 발전시켜 왔는지 살펴본다. 혁명적 노동자들이 원칙만을 고수하는 것이아니라 개혁주의나 중도주의적인 노동자들과도 공동의 요구를 중심으로 함께 행동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전술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코민테른 초기 역사에서 그런 시도와 고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좌파에게도 많은 교훈과 영감을 줄 것이다. 존 리델은 캐나다 토론토에 기반을 둔 베테랑 사회주의 활동가이며 무엇보다 코민테른 역사에 대한 치밀하고 전문적인 탐구와 저술로 유명하다. 코민테른의 역사를 소개하고 관련 문헌과 자료들을 번역 소개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해 왔다.

 

출처: https://weeklyworker.co.uk/worker/1316/birth-of-a-tactic/

 


토론하는 레닌, 부하린, 지노비예프



<공산주의 선언>에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세력이 혁명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고, 또한 노동계급 세력은 사회주의로 기울어지게 되는 "기존의 사회정치적 질서에 맞서는 모든 혁명적 운동"과 동맹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시시각각의 이익을 집행하기 위해 당면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투쟁한다 ... 그러나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고...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노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후에 그것을 '공동전선'(United front)이라고 부르게 된 것에 대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용어는 단결이 어려워 보이는 다른 환경에서 주도력을 설명하기 위해 단지 70년 후에 도입되었다. 공동전선의 잉태는 1920년에서 1923년 사이에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일어났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다시 설명하기 전에, 나는 네 가지 주요 질문을 제시하여 여러분이 본 궤도에 오르도록 돕겠다.

 

1. 주도력은 국가의 공산당 지도자들로부터 더 많이 나오고 있는가, 아니면 노동계급의 기반으로부터 더 많이 나오고 있는가?

 

2. 국제적 차원에서, 주도력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나 국가의 정당에서 더 많이 나오는가?

 

3. 정책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가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전개되는가?

 

4. 공산주의 운동이 자신의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역량을 보이는가?

 

사회주의 내부의 분열

 

우리의 이야기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시작된다. 1889년에 출범한 이 단체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사회주의 당과 노동자 당을 모았다. 그러나 그 통일성은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1919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또는 코민테른이 창설되었을 때, 세계 사회주의 운동은 세 개의 상호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뉘었는데 첫째는 전쟁을 지지한 불명예스러운 세력, 둘째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셋째는 양쪽 모두에 비판적인 세력, '중도주의자'라고 불렸던 세력이다.

 

1918년 말과 1919년에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었고, 노동자 권력이 빠르게 유럽 전역에서 서쪽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공산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1920년 후반에 이르러 자본주의적 통치는 적어도 당시로서는 안정되었다. 러시아 밖에서는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노동자들 사이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 세력은 사회주의 혁명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생활 조건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막았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통일된 노동자 집단 행동을 위한 길을 다시 열기 위한 방법으로 공동전선정책을 채택했다. 공산당은 전체 노동자 운동이 지지하는 기본적 요구를 중심으로 단합된 행동을 추구하면서 지도부와 당원의 양면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구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발전시킬 권리를 유보하면서 공동전선 기구의 결정을 충실하게 적용하기로 약속했다.

 

192112월에 선언된 이 정책은 알력과 애매모호함, 그리고 많은 헛걸음으로 특징지어지는 과정 속에서 몇 년 동안 진화해 갔다. 그것은 특히 독일에서 주로 노동계급 기층 대중의 고민과 주도력 속에서 추진되었다.

 

공동전선 정책은 10월 혁명 이전에 그들의 멘셰비키 경쟁자들에 대한 볼셰비키의 주도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17년의 소비에트도 공동전선의 한 종류였다. 10월 혁명은 소비에트의 공동전선 소위원회에 의해 조직되어 농민에 기반을 둔 사회혁명당 좌파와 볼셰비키가 함께하는 연립정부로 이어졌다.

 

191811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혁명적 타도를 주도하며 단결한 노동자와 병사 평의회가 있었던 중부 유럽에도 비슷한 앞선 역사가 있었다. 이러한 단결은 그 후 몇 달 동안 '공식적' 사회민주당에 의해 조직된 독일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무력 공격으로 곧 깨졌다. 그 균열을 치유하기 위한 첫 단계는 헝가리에서 나왔고 역설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전쟁, 경제 붕괴, 혁명으로 흔들리는 나라에서 19193월 헝가리 사회민주당은 새로 결성된 공산당이 정부를 구성하는 데 동참할 것과 더 나아가 그들 두 당의 유기적인 융합을 통해 이 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은 동의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군대가 침공해 그들을 타도할 때까지, 노동자 평의회를 바탕으로 공동정부를 주도하며 4개월 동안 통치했다.

 

코민테른의 저술가들은 공산당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준비되지 않은 하향식 융합이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성을 제거해 버려서 정권을 배신에 취약하게 만들어 놓아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당과의 정부 차원의 동맹을 고려한 것은 잘못된 것일까? 그 중요한 질문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가장 분명한 언급은 코민테른의 지도자 칼 라데크(Karl Radek)로부터 나왔다. 이런 유형의 연립정부는 어떤 상황에서는 적절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별도의 조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쿠데타에 맞서서

 

그 후 몇 달 동안 코민테른은 진정한 혁명적 세력을 통합하는 데 주의를 집중시켰고 동맹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19203, 처음에는 노동조합에서 이어서는 정부 차원에서 다시 노동자 세력 연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두 번 모두 사회민주주의 쪽에서 다시 한번 그 구상이 나왔다.

 

새로 형성된 독일의 자본주의 공화국은 우익 음모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1920313, 그들은 볼프강 카프(Wolfgang Kapp)가 이끄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쫓겨나게 했다. 같은 날 SPD 주도의 노동조합은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총파업을 요구했다. 독일 공산당(KPD)은 놀랍게도 파업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를 거부했다. 그들은 진정한 투쟁은 노동자 권력을 위한 것이고 그것이 미래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카프 폭동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독일 전역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으로 집결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재빨리 잘못을 바로잡고 곧 노동자 파업위원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래도 전쟁 이전 사회민주주의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2인터내셔널에 근본이었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한다는 원칙은 시야에서 사라졌었다.

 

그 파업은 전국적으로 단단했다. 노동자들의 무장 저항은 확산되었고, 때로는 통일된 노동자 평의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나흘 후에 폭동 주도자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총파업은 계속되었다. 파업자들은 우파 군국주의 위협에 맞선 새 정부와 단호한 조치를 요구했다. 노조연합의 위원장인 칼 레기엔(Carl Legien)SPD와 독립사회민주당(USPD), 노동조합이 결성한 노동자 정부로 SPD와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립정부를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이 제안에 지지를 표명하며 이런 정부를 향해 충성스러운 반대파”(loyal opposition)로 행동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중도파인 USPD가 참여를 거부해 제안이 무산됐다. 파업은 점차 잦아들었고, 정부와 군은 무자비하게 통제력을 재확립했다.

 

KPD'충성스러운 반대파' 진술은 많은 당 지도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당 중앙위원회 투표에서 12:8로 부결됐다. 소수의 동지들 중 한 명은 '노동자 정부' 개념이 191710월 혁명 직전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부르주아 계급과 결별하고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공동정부를 구성하자'던 볼셰비키의 제안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라데크는 러시아의 사례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하지만 레닌은 KPD 입장이 "기본적 전제에서나 실천적인 결론에서나 모두 정확하다"고 판단하고 1917년 볼셰비키의 접근법이 실제로 독일의 논의와 관련이 있다고 단언했다. 레닌의 논평은 토론을 끝낼 수 있는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견 불일치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한편, 카프 폭동 동안의 공동 행동 위원회의 중요성은 단명한 헝가리 소비에트 정부의 수장이었고 초좌파적 견해로 잘 알려진 코민테른의 지도자 벨라 쿤(Béla Kun)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쿤은 카프 사태에서 표현된 "단결의 정신"반혁명적이라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혼자 투쟁해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쿤의 관점을 공유했다.

 

1920년에 레닌은 "좌파" 공산주의의 오류에 대한 유명한 소책자를 썼다. 그는 공동전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소책자는 영국 공산주의자들이 노동당 후보자들에게 선거 지원을 해주고 당에 입당을 신청할 것을 권고했다. 2년 후, 코민테른의 그레고리 지노비예프(Gregory Zinoviev) 의장은 레닌의 이러한 제안에서 "우리는 이미 영국의 상황에 적용한 공동전선 정책 전체를 발견한다"고 말했다.

 

공동전선 접근법은 19204월 폴란드 정부가 소비에트의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도 시험됐다. 이에 대해 유럽 전역의 친소비에트 연대 움직임은 폴란드로의 무기 수송을 중단시켰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과 노조 지도부가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공산주의자들이 지역 차원에서 참여할 수 있는 행동을 주도했다.

 

반식민지

 

1917년 이후 옛 차르 제국 내에서 억압받는 아시아 민족들 사이에 해방 투쟁의 확산과 함께 또 다른 단결된 행동의 장이 열렸다. 이들 운동의 좌파는 소비에트 정부를 종교적, 민족적, 인종적 억압에 맞서는 민중들에 대한 최고의 방어자로 간주하고 공산주의자와의 동맹을 도모했다. 19207~8월에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 대회는 식민지 세계에 걸쳐 이러한 연합의 필요성을 선언하면서 "종속돼 있고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민족들 속에서의 혁명 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9월에 코민테른은 아제르바이잔 바쿠(Baku)에서 아시아 전역에서 온 2,000명의 대표단이 모인 제1차 동방인민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전 세계의 모든 노동자와 억압받는 민족들은 단결하라!"라는 호소에 환호했다. 이는 <공산주의 선언>의 역사적 호소문의 확대판이었다. 바쿠 회의 선언문은 "동방 민중의 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을 선포했다.

 

2년 후 극동 지역 회의에서 코민테른 지도자인 GF 사파로프(GF Safarov)는 선얏-(Sun Yat-sen: 손문)이 이끄는 중국 내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것이 민족 해방을 위한 민족주의적이고 민주적인 봉기의 문제인 한에는 우리는 당신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독립적으로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반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조직하는 공산주의적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공개 편지

 

1920년 여름, 독일 동지들은 카프 시절의 단결된 투쟁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지역 노동자들이 앞장섰다. 한 공산주의자는 나중에 "당시 우리는 공동전선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플레이션과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이 정책을 적용했다."

 

카프 폭동에 맞선 성공적인 저항은 혁명적인 좌파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다. 지난 10월 중도성향의 USPD의 과반수가 투표로 코민테른에 가입하면서 12월에 KPD와 융합하며 30만 명 이상의 당원을 가진 통합정당을 만들었다. 그런데도 KPD는 노동계급의 5분의 1도 안 되는 지지를 누렸다.

 

192011, 슈투트가르트의 평당원들은 이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유망한 주도력을 발휘했다. 지역 금속노조의 공산주의자들은 노조 지도부에 단결된 행동을 청원했다. 26,000명의 슈투트가르트 금속 노동자들의 지도부는 "모든 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다섯 가지 요구를 채택함으로써 응답했다.

 

1. 생활필수품의 가격 인하.

 

2. 최대 역량의 생산과 실업급여의 증가.

 

3. 노동자가 내는 세금을 줄이고 대규모 사유재산에 대한 세금 인상.

 

4 원재료 및 식자재의 공급과 유통에 대한 노동자 통제권 확립.

 

5 반동적 패거리의 무장 해제와 노동자들의 무장.

 

이 요구들은 슈투트가르트 금속노동자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채택되었다. 라데크는 강력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모스크바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은 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조의 주요 기반인 USPDSPD는 처음에는 슈투트가르트의 주도력을 무시했다. 그러나 노조의 지역 기반에서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 KPD의 유력 신문의 노동조합 편집자에 따르면, "우리 사무실에 수백 명의 지지 결의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SPDUSPD는 이 주도력을 지지하지 않을 구실들을 찾았다.

 

슈투트가르트의 주도력에 대한 강한 반응에 감명을 받은 KPD 중앙지도부는 1229일 노동계급의 공동 행동을 위한 일반적인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라데크의 지지는 얻었지만, 새롭게 단합된 당이 동맹을 찾기 보다는 독자적 정책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당 지도부의 당원들에게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루르(Ruhr) 지역에서는 그들이 이미 그러한 단결된 주도력을 움켜잡았다고 반응했다.

 

그 결과는 다른 노동자 정당과 4개 노동조합 연합에 대한 공산당의 공개서한으로, "소멸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가 지금 가지고 있어야 할 최저치"를 달성하기 위해 슈투트가르트의 호소와 유사한 요구들과 사장들의 노동자에 대한 공세를 막기 위해 행동으로 함께할 것을 호소했다. 다시 한 번 전국 지도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층 노조와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의 지지 물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곧 공산당은 2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공개서한의 요구를 지지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고 발표했다.

 

곧 사회민주주의 진영에서 동조가 있었다. SPD는 궁핍한 실업 노동자들을 위해 원조를 호소했다. 베를린의 공장 협의회 대표자들은 실업에 대항하기 위해 단결된 전국적 행동을 요구했다. 1921226일 노조 집행부는 "실업과의 투쟁 "을 위한 10가지 요구를 발표했다. KPD는 노조의 요구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어떤 중요한 행동도 나타나지는 않았다. SPD 지도부는 공동전선 캠페인을 유리한 세력 관계로 전환하려는 KPD의 당파적 시도로 간주했다. 여기에는 진실의 알맹이가 있었다: KPD가 노조와 노동계급에서 그것의 영향력을 급격하게 증가시킴으로써만 단결된 행동을 성취하고 혁명적 승리를 위한 조건의 지렛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19213월에 시간이 갑자기 바닥났다.

 

역행

 

더구나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단결 캠페인이 이점을 얻으면서, 공산당 내에서는 당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스스로 더 과감하게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접근법 사이의 긴장감은 전체적으로 독일 노동계급의 분열을 반영했다. 1919년 초 혁명적 노동자들이 당한 패배 이후 계급투쟁은 4년 동안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었는데, 객관적인 조건이 혁명을 외쳤으나 노동계급은 그것을 돌파할 수 없었다.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의 말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거의 필사적"이지만, "투쟁할 의지가 없다"고 했다. 나중에 당내의 한 좌익 반대파 당원은 "모든 것이 수렁에 빠졌다. 우리는 수동성의 벽에 부딪쳤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돌파해야 했다"고 말했다.

 

레닌은 제트킨과의 토론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불만에 차고 고통스러운 노동자들은 혁명적이라고 느끼지만 정치적으로 설익고 혼란스럽다... 세계사는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만에 찬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당 지도자들이 그것을 서두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스크바 지도부에서 지노비예프와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Bukharin)은 돌파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었다. 이는 코민테른 참모부에 편입된 쿤과 다른 좌경적인 헝가리 지도자들이 촉진한 견해이기도 하다.

 

쿤의 우려는, 결정적인 베를린 지역에서 지배적인 KPD의 새로운 '좌익' 반대파가 '공개 서한' 정책에 반대하면서 공유되기도 했다. 그들의 견해는 코민테른 집행부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KPD"기회주의적 성향에 대한 동요와 수동성의 요소에 대한 경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부하린과 지노비예프는 이런 견해를 분명히 밝혔고, 반면에 라데크는 공개 서한을 옹호했다. 레닌은 KPD의 전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메시지를 보내 그런 비난을 막았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2월 말, 독일당 내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늘날 "공세의 이론"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 즉 노동자들 사이의 소수 지지자들만 가지고도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권력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새로운 지도부가 지휘봉을 잡았다. 채택된 지 두 달도 안 돼 공개서한은 폐기됐다.

 

3월에 그 공세의 정책은 독일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사회적 긴장이 큰 상황에서 그 정당은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개입했다. 벨라 쿤과 그의 초좌파적 견해에 동조하는 2명까지 포함해 3명의 집행위원회 특사단이 모스크바에서 도착했다. 그들은 혁명적 공세를 위한 추동을 향해 그들의 모든 권위를 쏟아부었다. 정부는 작센(Saxony)에 있는 노동자들의 근거지를 공격하며 도발을 감행했다. KPD는 반란을 일으킬 총파업을 호소했다.

 

독일 전역에 걸쳐 기층 노동계급은 깊이 분열되어 있었고, 오로지 소수만이 KPD의 부름을 따랐다. 파업을 강제하려는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공장에 들어가려는 노동자들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파업은 실패했다. 먼지가 걷히자 KPD는 절반 이상의 회원을 잃었고, 기층 노동계급과의 유대는 크게 약화되었다. 19216월에 제3차 코민테른 대회가 소집되자 독일 3월 행동의 지지자들이 과반수를 차지할 것처럼 보였다. 클라라 제트킨은 KPD의 소수파 대표자들을 이끌고 이것에 반대했다.

 

회복의 단계

 

그러나 KPD 다수파가 제3차 대회에서 지지를 압박하는 상황에서도 당의 노조 기반은 이를 다시 '공개 서한' 노선으로 되돌렸다. 1921415, KPD 중앙의 회람 문서도 3월 행동 정책을 옹호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공세에 대항하는 공동 투쟁의 플랫폼으로서 공개 서한의 요구를 확인했다.

 

KPD'메이데이 호소'는 더 나아가 '10가지 요구'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노조 지도자들은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지역 차원에서 이를 행동에 옮겼고 많은 단결된 행동을 했다. 많은 당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정책을 펴면서 공세 이론의 방향에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6월 중순까지, 3차 코민테른 대회가 소집되면서, KPD는 그 영향력의 일부를 재건했고 다시 한번 연합 대중 시위를 시작할 수 있었다.

 

1921년 초, KPD는 제트킨을 위원장으로 하는 노동계급 정치범 방어를 위한 광범위한 기반의 위원회를 발족하기도 했다. 이것은 192211월 제4차 코민테른 대회 때 창설된 국제 적색 원조(러시아어 약자: MOPR)의 전신이었다. 특히 미국의 아나키스트로 분류되는 니콜라 사코(Nicola Sacco)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의 방어를 통해 인상적인 범위와 명성을 얻었다. 그것은 코민테른이 가장 성공적으로 주도한 공동전선 중 하나였다.

 

코민테른의 제3차 대회(1921623~ 712)3월 행동에서 발생한 쟁점에 대한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 볼셰비키 지도자인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는 대회가 시작될 때의 지배적 분위기는 "독일의 동지들 중 한 명이 제안한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충격요법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혁명적 상황을 조성하려는 시도"KPD3월 정책을 일반화하려는 것이었다고 나중에 썼다.

 

이러한 견해는 독일의 지도부 다수가 주장하였는데, 초기에는 지노비예프, 부하린, 라데크의 지지를 받았다. 이 노선에 대한 반대는 러시아 대표단에서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KPD에서는 제트킨이 주도했다. 초좌파적 충동을 잠재우려 했던 대회의 결정은 '전술에 관한 테제'의 문장으로 요약되었다. "현 시점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대다수 노동계급에 대한 지배적인 영향력을 획득하고 노동자들을 직접적 투쟁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대중에게"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된 전략이다.

 

3차 대회 결정들의 두 가지 측면은 6개월 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채택한 공동전선 정책을 미리 보여 줬다.

 

* 첫째, '전술에 관한 테제들'KPD'공개 서한'을 그 전략의 "우수한 사례"로서 승인했다.

 

* 둘째, 이 테제들은 권력을 향한 투쟁의 준비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발전시켜야 하는 프로그램의 유형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명확히 하였다. 이 접근법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였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개혁주의자들과 중도주의자들의 최소강령을 대신하여... 전체적으로 부르주아지의 힘을 약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하며 [통치]를 위한 투쟁의 단계를 표시하는 요구의 체계를 위한 투쟁을 제안한다.”

 

이러한 전략적 비전은 '전환적 요구'의 강령[이행기 강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KPD 껴안기

 

3차 대회가 독일당과 코민테른 지도부 내부의 갈등을 종식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8월에 KPD 당대회는 "기아와 빈곤 에 맞선 투쟁"을 위한 12개항의 프로그램을 전국적 및 지역적인 단결 행동을 위한 노력의 근거로 채택했다.

 

당대회가 끝나고 몇 시간 후, 독일의 지도적인 부르주아 정치인 마티아스 에르즈베르거(Matthias Erzberger)를 극우 조직이 암살했는데, 그가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정전협정에 서명했다고 증오했던 것이다. KPD의 기관지 붉은 깃발’(Rote Fahne)은 즉각 에르즈베르거의 친카톨릭 중도주의 정당과 연계된 기독교 노조와 함께 단결된 행동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베를린에서는 3개 노동자 정당이 모두 단결된 시위를 호소했고 50만 명의 참가자를 동원했다. 독일 전역의 행진과 파업은 약 5백만 명의 시위자들을 참가시켰다.

 

그 후 몇 달 동안, KPD공개 서한의 노선을 완전히 재가동했고, 공동 행동을 위한 그것의 주도력은 전진을 고무했다. 가장 성공적인 것 중 하나는 광범위한 기근에 대응하여 1921727일에 시작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원조를 위한 국제적 캠페인이었다. 광범위한 비공산주의 지식인과 노동자들이 이 노력을 지지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작업의 주역은 클라라 제트킨이 이끄는 공산주의 여성운동이 맡았다. 코민테른의 여성들은 국제 여성의 날을 위한 폭넓은 지지 구축과 여성의 정치적 권리와 재생산권을 위한 캠페인에서도 비슷한 성공을 거두었다. 지노비예프는 2년 뒤에 1921년 코민테른 지도부에서 열린 공동전선에 관한 토론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사실 나도 그때 의심을 품었다. 많은 것이 아직 완전히 확실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려운 전환이었고, 우리는 격렬한 내적인 투쟁을 겪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어떻게 합의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92111월 말 지노비예프, 라데크, 부하린은 볼셰비키 정치국에 러시아 당이 코민테른 전체에 독일 공동행동 정책의 확장을 지지할 것을 제안했다. 레닌에 의해 초안된 이 정치국의 발의는 이 과정을 승인했고 또한 부하린에게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의 멘셰비키와의 연합에 대한 경험을 기록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그 달 말에 채택된 집행위원회의 공동전선 결의안에 나타나 있다.

 

부하린이 정리한 글은 별로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1917년 혁명 시기에 볼셰비키의 공동전선 경험은 여전히 검증돼지 않은 것으로 남아있었다. 124일에 지노비예프는 코민테른에 공동전선의 채택을 권고했다. 1218일 표결에 부쳐진 공동전선에 관한 테제에는 지노비예프적 사고의 특징이 새겨져 있었다. 공동전선은 당시의 국면에 근거하여 동기 부여가 되었다. '노동자의 정부' 슬로건은 비록 독일만을 위한 것이지만 지지되었다. 단결된 행동을 압박한 KPD의 경험은 다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전역의 노동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파괴하는 파시스트 운동과 관련된 공동전선의 논의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124일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이탈리아 대표인 에지다오 겐나리(Egidio Gennari)는 자신의 나라에서는 공동전선 정책의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부하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파시스트들이 노동자들을 총살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땅이 불타고 있는 이 나라에서, 파시스트 조직의 단순한 존재마저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단결하여 이 쓰레기들을 쳐부수도록 하자'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부하린의 제안은 돌투성이 땅에 떨어졌다. 당시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가 이끄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대열 밖의 노동자 단체와 동맹하지 않고 스스로 반파시스트 저항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반파시스트 전투 단체를 결성하자 공산당은 이에 반대했다.

 

1218일 집행위원회의 공동전선 결의안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구절은 파시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공산당이 실제로는 강하게 반대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부하린은 나중에 이탈리아 당에 보낸 편지에서 이 실패를 떠맡았다. 그러나 집행위원회의 후속 조치는 없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단결된 반파시스트 저항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192211월 무솔리니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달 말 소집된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는 반파시스트 공동전선의 필요성이 결의안에 포함되기에는 너무 늦게 발의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아니라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였고, 그들은 대회가 끝나면서 그들의 입장 채택을 확보했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승리한 지 6개월 후, 클라라 제트킨의 유명한 연설은 마침내 코민테른에게 파시즘에 대항하는 단결을 위한 분명한 입장을 제공했다.

 

3개 부분의 전략

 

코민테른의 새로운 공동전선 정책은 집행위원회에서보다 구성 정당들 속에서 훨씬 더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가장 자주 나온 반대의 목소리 중 하나는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들은 그들의 조직에 대한 문의없이 공산주의 운동에 직접 모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행위원회의 리더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에 대한 공식적 접근을 필요로 하는 효과적인 단결을 구축하는 것은 정확히 불가능하다고 응답했다.

 

1922224일부터 34일까지 모스크바에서 확대 집행위원회 총회가 열렸을 때도 공동전선이 주요 의제였다. 여기에는 36개국에서 15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러시아 외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개의 코민테른 부문 중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당이 공동전선에 반대했고 노르웨이의 다수파는 이것이 자신의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에서도 상당한 소수파가 이 정책에 저항했다. 의견은 작은 정당들에서도 비슷하게 나뉘었다.

 

총회 막바지에 46:10의 투표로 공동전선 정책이 채택되었다. 집행위원회는 회원 정당들에게 그 정책을 적용하도록 강요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가적인 부문들에서 일련의 논의와 경험을 통해 공동전선 정책에 대한 수용은 더욱 폭넓어졌다.

 

192211~12월 제4차 대회에서는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가 집중되었다. 대회는 공동전선 개념을 보다 광범위한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움직였다. 노동계급의 후퇴뿐 아니라 권력으로 전진해 나가는 동안에도 말이다. 즉각적 요구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재산권에 의문을 갖게 하는 과도기적 요구에도 말이다. 단순히 정권에 대해 요구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노동자의 정부로 대체하는 것에도 말이다.

 

여기서 코민테른은 카프 폭동에 맞선 저항 중에 독일에서 제기된 노동자 정부의 개념을 움켜잡았다. 그런 정부는 일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운동에 의존하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행동할 것이다. 러시아처럼 노동자 평의회를 기반으로 할 수도 있지만 의회 다수당 획득도 그 설립에 한 몫할 수 있다. 어쨌든 자본주의 권력에 타격을 주고 사회주의로의 길을 열어주려는 과도적 정부일 것이다.

 

1년 후인 1923년에 코민테른은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를 포괄하는 게 가능하도록 그 공식을 확대했다. 따라서 코민테른은 공동전선과 과도기적 요구, 그리고 노동자의 정부를 하나의 전략적 틀로 묶어서 오늘날의 운동에서 권력을 위한 투쟁에까지 이르게 했다.

 

갈등에 빠진 유산

 

채택 후 몇 년 동안 공동전선 정책은 코민테른 내부에서, 특히 루스 피셔(Ruth Fischer)가 이끄는 독일의 좌익적 조류로부터 저항을 계속 받았다. 1924년 코민테른 대회는 비공산주의적 구성의 지도자들과 공동 행동을 논의하자는 제안을 철회했다. 따라서 이 정책은 공산주의자의 주도권을 지원하기 위한 기층 노동계급에의 호소로 축소되었고, 이는 본질적으로 공동전선 정책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1930년대 후반에는 나아가 두 번의 반전이 더 있었다.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는 동안,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과의 반파시스트 동맹을 거부했고, 따라서 10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저질러진 실수를 반복하며, 똑같이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1935년 코민테른은 이른바 '인민 전선'(people’s front)정책으로 전환하였는데, 이 정책은 다른 노동자 정당뿐 아니라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한 날개와의 단결을 수반하는 것으로 레닌 시대에 코민테른의 기본 원칙을 위반하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유산을 감안할 때, 우리는 레닌 시대에 원래 제시된 공동전선으로부터 길잡이를 구할 필요가 있다. 나는 '공동전선의 처음 공식들'이라는 제목으로 내 블로그에 관련 짧은 읽을거리들을 모았다.

 

레닌 시대의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공동전선 개념을 그렇게 문제거리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우리는 리더십의 심각한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기간 동안 사건들은 두 가지 근본적 요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첫째,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과 그리고 또한 많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행동에 대한 광범위한 조급함이다. 그리고, 둘째, 종파주의이다. , 당이 인식하는 단기적 이익을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려는 충동이다.


(기사 등록 20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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