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국제적 좌파들 사이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칼 카우츠키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가 활발하게 진행돼 왔다. 카우츠키를 "배신자"라고 한 레닌의 그 유명한 비난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카우츠키의 저술에 실제로 관여하는 것을 오랫동안 좌절시켜 왔다. 그리고 이것은 카우츠키가 남긴 유산과 그것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실질적으로 철저하게 평가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돼 왔다. 그러나 레닌이 카우츠키의 후퇴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민주주의 전투에 결정적 역점을 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담긴 카우츠키의 초기 저술에 대한 그의 큰 존경 때문이었다. 여기서 인터뷰한 벤 루이스(Ben Lewis)는 연구자, 번역가, <위클리 워커>의 기고자이며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많은 연구와 저술을 남겨왔다. 특히 그는 독일어로 된 1차자료에 대한 조사를 통해 카우츠키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해 온 것으로 유명하고, ‘열린대학’(Open University)에서 독일어 부강사로 일하고 있다.(번역: 두견)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20/10/karl-kautsky-ben-lewis-marx-lenin
"마르크스주의의 교황" 또는 레닌의 유명한 말인 "배신자"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19세기 말엽 독일사회민주당(SPD)과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유명한 대중적 보급자였던 카우츠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가가 되었다.
그리고 레닌주의에서 파생된 주요 경향에 의해 저주받았다. 카우츠키의 저술은 최근 몇 십 년 동안 역사학자들로부터 다시금 주목받았지만, 이러한 재평가들은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하며, 초기 혁명적 시기를 되찾으려는 시도에서부터 카우츠키적인 반볼셰비즘에 대한 긍정적 묘사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벤 루이스는 독일어로 된 마르크스주의 고전 저술들을 영어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번역 프로젝트’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연구자이다. 그는 또한 2019년에 역사유물론 북 시리즈로 ‘헤이마켓’에서 출판된 <칼 카우츠키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번역가 겸 편집자이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카우츠키의 이해, 그가 민주공화정의 요구에 특정한 강조점을 둔 것, 그리고 오늘날 그의 사상에 대한 아주 흔한 그릇된 설명들과 싸우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 당신의 소개는, 최근의 다른 학문적 조류와 마찬가지로 카우츠키가 개혁주의자라는 신화를 거부한다. 라스 리(Lars Lih)처럼 1918년에 레닌이 '배신자 카우츠키'를 맹비난한 것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때"라는 이전 기록과 정확히 대조를 이루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1914년 이전 노동운동에서 카우츠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말해주겠는가? 나는 특히 그의 '계승자'나 '대중적 보급자'로서 역할이 마르크스 사상의 타락을 수반했다는 주장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 관심이 있다.
사상가로서의 카우츠키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의 역할은 매우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출판을 위해 마르크스의 초고 여러 권과 편지(예컨대 일반적으로 <자본>의 제4권으로 보는 <잉여가치학설사> 등)를 정리하며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대중화시켰고,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도달했던 위치보다 훨씬 더 넓은 국제적 청중에게 그것을 가져다 주었다.
1883년에서 1918년 사이에 그는 거의 40권의 책과 500여 편의 학술 논고, 그리고 300여 편이 넘는 신문 기사를 썼다. 그의 저술은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1891년 SPD의 에어푸르트 강령(Erfurt Program: 영어로는 '계급투쟁'이라는 요약된 형태로 이용 가능한)에 대한 해설이 걷잡을 수 없는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베벨-카우츠키' 경향의 주목받는 이론가로 떠올라서 조직화 전략과 전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국제적인 도달은 주로 1917년까지 카우츠키가 편집한 엄청나게 인기 있는 마르크스주의 주간 이론지 '다이에 자이트'(Die Neue Zeit: 신시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학술지는 독일 제국의 경계를 훨씬 넘어 연구되고 논의되었다. 러시아에서 카우츠키는, 종종 그 나라의 전략과 전술 문제에 대해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RSDLP]의 볼셰비키 분파와 같은 편에 섰다는 이유로 '명예 볼셰비키'로 여겨졌다. 러시아에 관한 그의 저술은 그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배후에서 영감을 주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카우츠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동맹을 일관되게 옹호해 왔으며 러시아에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의 어떠한 타협에도 단호히 반대해 왔다. 이 "비타협주의적" 접근법은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볼셰비키의 성공을 이끌었다. 라스 리가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듯이 10월 혁명은 2월 혁명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연속이었다.
더욱이, 전위주의적 폭동론자의 혐의를 쓴 레닌과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 알려진 카우츠키 사이에 괴리를 일으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은 사실상 합헌적이었다. 이것은 차르 체제 붕괴 이후 그들의 실질적 주권을 어떻게 가장 확고히 할 것인가에 대한 소비에트 내부의 견해 변화를 반영했다. 임시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다는 인식으로 나아가면서 그것은 교체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발전에서 결정적 요인은 볼셰비키의 강력한 '비타협주의' 메시지였다. 그들은 카우츠키의 뒤를 따라서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대한 어떤 환상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며, 노동자와 농민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혁명적 권력에 대한 지원을 일관되게 요구했다. 결국 이 메시지가 승리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이것을 바라본 카우츠키는 10월 혁명을 쿠데타의 한 형태로 보고 초기 러시아 국가에 대한 몇 차례의 격렬한 비평을 썼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시절"의 카우츠키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을 구체화하면서 역사적 실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흐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정당하게 강력 비판된 "배신자" 정도를 넘어서서 카우츠키의 이름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본질을 납작하게 하거나, 저하하고, 천박하게 만들거나 제거했다는 비난으로 끝없이 얽매여져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책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혐의는 그의 저술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결국, 이러한 부재는 20세기에 그의 사상이 주변화되었던 역사적 조건화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는 카우츠키 해석의 세 학파가 그의 일생의 업적에 대한 경멸적 바라보기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동구블록의 마르크스주의 조악화(및 트로츠키주의의 거울 이미지), 서구의 친자본주의적 냉전 역사학,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헤겔주의적 해석. 이들 세 학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장일치로 카우츠키를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어떤 긍정적 영향도 미치지 않은 숙명론적이고 기계적인 사상가로 보고 있다.
더구나 서양의 신헤겔주의적 해석과 특히 동구권의 역사학에서는 카우츠키의 숙명론적 수동성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잘못 해석한 것에 기반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 후 이러한 해석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속류화한 인물이라고 주장한 1956년 이후의 뉴 레프트 사상에 반영되었는데, 엥겔스주의-카우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로 이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연구를 하는 동안, "속류화" 논지는 정밀한 검증을 견뎌내지 못했다는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정치 경제, 역사, 민주주의, 혁명 전략 등에 관한 카우스키의 방대한 저술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후의 역사에서 이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 얼마나 불공정하게 취급되어 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의 이론적 산출물과 절정기에 있었던 카우츠키의 결론 중 몇 가지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차적으로 국가적 사건이라는 생각, 그가 1890년대를 질적으로 "새로운" 제국주의 국면이라고 파악한 것,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단결을 우선시하려던 그의 평생의 경향 등. 그러나,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를 - 의식적이든 아니든 - 납작하게 만든 것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급변하는 세상에서 앞선 이들의 미완성된 지적 산출물에 비판적으로 관여하는 사람을 보여 준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을 단순히 재활용하고 반복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영웅들의 방법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권리를 가진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때때로, 이것은 그들의 예측을 갱신하고 다른 사람들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카우츠키는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에 심지어 제국(Kaiserreich)의 헌법 질서 안에서 사회주의를 창조한다[국가사회주의]는 다양한 관념이 존재해왔으며, 카우츠키는 종종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할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얼버무린다는 비난을 받는다. 1891년 SPD의 에어푸르트 강령을 둘러싼 논쟁은 어떻게 그러한 독해를 반박하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젊은 카우츠키가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내기를 회피했다는 - 또는 전기 작가 딕 기어리(Dick Geary)의 말에 따르면, 카우츠키의 혁명적 격변의 "전제조건"에 대한 강조가 "혁명적 상황에서도 (혹은 아마도 특히) 주체적인 무대응을 정당화할 정도로 너무나 철저했다"는 - 개념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의 생각을 비혁명적 또는 반혁명적 사상가로서 거짓되게 일축한 것의 산물이다.
1890년대 초에 에어푸르트 강령을 둘러싼 논쟁에서 특히 매우 흥미로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SPD 지도부가 얼마나 진지하게 강령과 그것의 이론적 기반을 정식화하기 시작했는지 명백했다는 것이다. 출발점은 당시의 주어진 시점에 유행하는 요구나 아이디어를 쇼핑 리스트로 삼은 것이 아니라, 반동적인 제국의 완전한 해체의 일환으로 SPD가 어떻게 집권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개요였다.
이러한 노동계급 통치를 위한 투쟁은 "성이나 출신에 대한 구별 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의무를 위하여 계급 통치와 계급 그 자체의 폐지"로 나아가는 단계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에어푸르트 강령은 인민을 무장시키고 군주제를 해체하며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등의 사상을 선포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둘째로, 1848년의 공산주의자 선언이나 1880년의 노동자당 강령(Program of the Parti Ouvrier)과 같이 그와 마르크스가 집필한 초기의 강령적 전통 속에서, 그 강령을 부끄럽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적 존재 중 하나로 만드는데 엥겔스가 얼마나 중심이었는지가 명백하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런던에서 기사를 발행하고, 강령 초안에 대해 논평을 내고, 카우츠키와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과 같은 지도층 인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당내에서 국가사회주의적 환상에 패배를 가져다주려 했다. 나는 엥겔스의 주된 관심사는 당이 스스로 국가와 사회의 변혁에 대한 민주적 공화주의의 접근법을 받아들이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카우츠키의 글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왜 이것은, 단순히 과거 반사회주의 법(Anti-Socialist Laws)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할 공간을 방어하는 문제 이상으로 민주주의적 요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에어푸르트 강령이 민주주의적 요구에 집중한 것은 두 가지 차원이었다. 한편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는 독일의 노동계급이 조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조직화하고 번창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 카우츠키의 더 기억에 남는 구절 중 하나에서, 정치적 자유는 노동계급의 "빛과 공기"로, 그 자신의 이미지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고 했다.
SPD는 10년 이상 불법화되었었고, 1890년대에 다시 그것을 금지하려는 몇 번의 다른 성공하지 못한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확히는 국가의 혁명적 전복에 대한 강령적 약속 때문에 당은 합법성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고, 반대파는 그 합법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문제의 끝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앞서 내가 언급했던 마르크스주의적 공화주의의 의의로 되돌아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민주공화국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민주공화국을 위한 싸움에서 노동계급이 "대자적 계급(class for itself)"이 되어 권력을 잡게 되는 셈이다.
최초의 노동자 정부인 파리 코뮌의 경험에 대한 묘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국가가 단일한 입법 및 행정 위원회, 판사를 포함한 모든 관료들의 정기적 선출, 소환 가능성, 관료들에게 노동자 평균임금 지급, 민병대 등 몇 가지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고 주장했다. 엥겔스의 열정에 의존하는 에어푸르트 강령 자체에도 이러한 민주주의적 요구가 다수 존재했다.
엥겔스의 비판은, 그러한 강령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가 쓴 초안에 대한 비판으로서, 명시적인 강령적 목표로서 민주 공화국의 부재를 중심으로 삼은 것이었다.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초안의 정치적 요구는 한 가지 큰 결함이 있다. 그것은 말했어야 하는 것이 정확히 부족하다. 만약 10가지 요구가 모두 승인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주요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더 다양한 수단을 가져야 하지만, 그 목표 자체는 결코 달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불법화의 위협이 크게 나타났고, 엥겔스는 민주공화국의 선언으로 당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면, 그 때 대안적 공식화를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엥겔스의 비판은 민주주의적 요구나 강령의 전체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령의 최소요구에서 흘러나오는 목표 - 노동계급의 정치 권력 - 에 대한 모호하지 않은 선언이 없다면 국가-사회주의적 이탈에 대해 문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 마시모 살바도리(Massimo Salvadori)와 같은 저술가들은 최소 강령(SPD가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최소 근거)과 최대 강령(사회주의 사회)의 구별을 사회주의적 관점의 협소함으로 제시해 왔다. 사회주의의 최종적 목표가 전략적인 "위험지대"에서의 즉각적인 요구로부터 분리되어, 미지의 미래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요구와 공화주의적 요구는 두 가지를 연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최소' 강령이라는 생각 자체가 오해받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방향으로 작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최소강령은 실제로 크게 오해받거나 잊혀졌다. 다양한 역사적 이유로 <공산주의자 선언>, 에어푸르트 강령, 1903년 RSDLP 강령, 1917년 RSDLP(볼셰비키) 강령 등 최소 부문 강령의 혁명적 내용이 간과되고 있다. 이것은 특히 10월 혁명의 경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 등에 - 방법론적으로 완전히 다른 - 레온 트로츠키의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과제>를 몰역사적으로 투영하는 경향이 있는 1938년부터의 트로츠키주의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당신은 살바도리를 언급했지만,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접근방식에서 단서를 얻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독일 혁명에 관한 권위있는 작품의 저자인 존경받는 역사가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이다. 일련의 공허하고 최소한도의 일상적인 요구라는 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과 운동가들이 오늘날 최소강령을 보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이 강령을 어떻게 망원경의 잘못된 끝을 통해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운동의 역사적 후퇴와 카우츠키의 유산에 대한 참조를 통해 다시 한 번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SPD는 결국 엥겔스, 카우츠키 등으로부터 비판받은 합법주의적이고 국가-사회주의적인 접근법에 더 가까운 쪽으로 표류했다. 이런 경향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이 지속적으로 침식되는 것을 수반하며, "최소"요구는 점차 대중에게 너무 진보적이거나 지나치게 인기가 있다고 간주됐다. 이들은 상급의 정치와 사회주의가, 로자 룩셈부르의 적절한 표현대로 “멀리 길잡이 별”처럼 미래로 더 밀려나게 되면서 점점 더 "최대 요구"로 변모했다.
이것은 실로 전략적인 "황무지"의 출현이었다. 스탈린주의자가 민중전선주의의 정치를 정당화하고 '진보적' 부르주아지 세력과 동맹을 맺기 위해 최소강령을 악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요점은 그것이 마르크스나 엥겔스, 또는 카우츠키의 마음 속에 있는 최소강령의 본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기회주의적인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내버려서는 안 된다.
처음에 당신이 말했듯이, 내 연구에서 나는, 그 초기 관점의 혁명적 성격을 결국 어기게 된 사람으로 카우츠키를 본 레닌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1차적 기초 자료를 가져와서, 카우츠키가 - 또는 심지어 “배신자 카우츠키”가 - 사회민주주의의 최소강령을 최저강령으로 축소하는 데 중추적 역할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05년과 1918~1919년의 그의 공화주의적 저술을 비교함으로써, 나는 1919년 카톨릭 중앙당, 자유당과 함께 공공연히 부르주아 정부에 들어가려는 SPD의 결정을 카우츠키가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로 색칠해 주는지 보여준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혁명적 사상가로서의 그의 몰락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이며, 유감스럽게도 기존의 학계나 좌파에서 너무나 자주 그렇듯이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가 고정된 변하지 않는 세계관(Weltanschauung)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일깨워 주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부르주아 연합주의와 밀레랑주의[Millerandism: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그것을 포용하는 것으로의 이러한 변화를 결코 설명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 거기서 당신은 세기가 바뀔 무렵 제2인터내셔널에서 논쟁의 주요 쟁점이었던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의 부르주아 정부 참여에 대해 언급한다. 카우츠키가 밀레랑에 맞서는 고발을 주도했다면, '자리를 얻는 것'과 '권력을 얻는 것'을 명쾌하게 구분했을까. 그리고 "공화국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정부에 개입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제안했을 때 카우츠키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밀레랑주의의 충격에 대한 카우츠키의 반응은 여러 단계를 거쳤다. 1900년에 그는 그해 파리 국제 회의에서 채택된 부르주아 정부에 사회주의자의 참여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초안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결의안에는 핵심적 약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그것이 명백히 "정상적 상황"에서 사회주의적 연합주의를 비난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한 나라가 침략이나 점령을 당한 기간과 같은 극단적이거나 재앙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참여의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보는 사회 민주주의의 "수정주의"적 우파를 기쁘게 했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공직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동시에 그것은, 그것을 "카우츠키 결의안"이 아니라 "고무(러시아어로 카우츠키와 발음이 비슷한) 결의안"이라고 불렀던 <이스크라>(Iskra) 편집부에게 어설프고 그러므로 기회주의적인 성명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903년 드레스덴에서 SPD회의가 열릴 무렵, 카우츠키는 모든 애매함에서 자유로운 정부 참여에 관한 결의안 초안을 작성했고 극한 상황에 대한 언급을 모두 삭제했다. 그는 드레스덴 의회에서 1900년 결의안을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때 나는 원칙적으로 밀레랑에 맞서서 돌아섰지만, 그의 행동을 범죄가 아닌 실수라고 제시하는 방식으로 결의안을 정식화하려고 했다. 나는 원칙적인 관점을 지키고 싶었지만 프랑스인들 사이에 단결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그는 이 때문에 기회주의라는 야유와 비난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 지지자들과 밀레랑주의적이던 프랑스 사회주의의 소수파 경향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난 1904년 암스테르담 국제 회의에서, 카우츠키는 우익적 반동으로부터 "공화국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자본주의 정부에의 입각을 지지하는 일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데 흔들리지 않았다.
그 여파는 그에게, 영어 번역으로는 내가 출판한 책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는 "프랑스에서 공화국과 사회민주주의" 시리즈를 쓰도록 자극했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 '현실개혁적'(Possibilist) 사회주의가 권력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부르주아 계급의 더러운 일을 수행했다는 확장된 비판이다. 따라서 그것의 "공화국 수호"는 공격적인 반노동계급 부르주아 국가를 보호하고 변호하는 데 그만큼 도움이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따라서 카우츠키는 부르주아적인 프랑스 제3공화국의 가짜 공화주의("황제 없는 제국")와 단명한 파리 코뮌의 프롤레타리아 공화주의를 구분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제3공화국의 사법, 헌법, 군사, 선거, 경제적 토대를 파리 코뮌의 그것들과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전면적인 비판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기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며, 카우츠키가 정치나 혁명에 대한 이론을 전혀 소유하지 않은 수동적 사상가로서 단지 나무 위에서 익어가는 열매처럼 혁명이 다가오기를 기다렸을 뿐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이야기인지에 대한 또 다른 예를 제시해 준다.
* 우리는 SPD 활동의 긍정적 측면을 볼 때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이 흔히 말한 “국가 내부의 국가” 즉, 자율적인 노동계급 문화를 구축한 복지 기관, 협동조합, 교육 및 여가 활동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단지 수동적 소비자들을 위해 당 기구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를 운영하도록 하는 일종의 교육이고, 또는 더 관습적으로 정치적 위치에 이르는 길이라고 어느 정도까지 성격지워야 하는가?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처음 인기를 얻었고 오늘날 까지 지속되고 있는 제임스 리탈랙(James Retallack)의 <레드 색소니Red Saxony>같은 지역 SPD 조직의 사회사적 연구를 종합하고 구축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말했듯이, 원래의 생각은 당과 노동계급 기관들이 기존 국가에 대해 양립할 수 없는 반대를 형성하고 대신 그들만의 조직, 교육, 휴양 등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들 자신의 대안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국가의 건설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위해 분투하는 조직 내부의 수동성은 부르주아 교육, 오락, 스포츠 구조들 내의 활동성보다 분명히 훨씬 덜 바람직하다. 능동적 개입과 수동적 개입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대안적 문화"가 얼마나 널리 퍼지게 되었는가는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나는 이 당이 노동계급 생활을 조직하는 방법으로서 이러한 자립적 기관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만으로, 노동계급을 단지 일터에서만이 아닌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하려는 SPD의 열망은 모방되어야 할 모델로 남아 있다. 이들 SPD가 운영하는 기관들은 현대의 관료화된 통제적 노동조합과 노동당이 “고객”을 위해 운영하는 기업화된 “서비스”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더욱이 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조직가, 의회 의원들 중 일부가 SPD와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쇠약해진 노동운동에서 종종 지적으로 한심하고 편협한 출세주의자들이 번성하는 것과는 반대로, 야심차고 잘 조직된 사회주의적 반체제 문화는 사상, 조직, 리더들이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SPD와 그 다양한 조직들이 성장함에 따라, 조직적 관료주의와 지도자들의 제도적인 책임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나는 이것을 대규모 정치 기관 내에서의 로버트 미헬스(Robert Michels)가 말한 “과두제의 철칙”의 불가피한 표현으로 보지는 않지만, 잘 보장받고, 자기 강화적이며, 기술관료적인 관료집단의 등장은 SPD의 정치적 쇠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할애될 필요가 있지만, 1890년대까지만 해도 당 대회에서는 관료들과 대표들이 받는 과도한 봉급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에어푸르트 강령과 엥겔스가 그 초안에 대해 비판한 것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 누락은 노동자 대표가 평균 노동자의 임금을 받아야 하는 필요에 대한 것이었다.
* 1914년 8월 전쟁 공채에 대한 투표의 프리즘을 통해 초기 SPD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갑자기 쏟아진 날벼락이 아니었다. 관료적 기구를 구축하게 되면서 독일 사회의 기득권 부분을 대표하게 되었고, 스스로 찾아낸 공간에 물질적으로 묶여 있게 됐다. 그러나 만약 SPD가 1914년 전에는 결코 분열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던 여러 경쟁하는 영혼들의 당처럼 보인다면, 그들이 원했듯이 혁명적 요소와 개혁적 요소들의 조합이 불가능했던 것은 정확히 독일의 비민주적 정치 체제가 개혁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았기 때문인가?
전쟁 공채 투표가 전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 사실이다. 즉, SPD 의회적 분파의 요소들은 오래 전부터 제국의회의 해군 법안과 팽창주의적 식민지 모험에 표를 던짐으로써 당의 '명망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옌스-우웨 구테텔Jens-Uwe Guettel이 보여주듯 이러한 친식민주의 경향은 - 이들 의원들에게는 유감이게도 - 당 지도부와 당원 과반수의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 공채에 대한 투표에서 너무나 황당했던 것은, 그것이 어떻게 SPD가 가지고 있던 비타협적 반대라는 모든 공약이 이제 독일 국가와 전쟁 목표에 얽매이게 되었는지를 상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전의 '극좌파'로서 열광적인 '독일의 승리' 유형(알렉산더 파르부스Alexander Parvus, 폴 렌치Paul Lensch, 콘래드 해니스치Konrad Haenisch)에도, 그것에 비판적이지만 당의 단결을 지키려 했던 카우츠키와 같은 이들에도 진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소위 "요새 안의 평화"[Burgfrieden]라는 틀 안에서 통일을 의미했다. 즉 카이저의 장군들 및 주류 정당들과의 통일이다.
분명히, 당 분열에 대한 문제가 더 일찍 제기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20세기의 "근본적 재앙"에서가 아니라 당 자체에서 왔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것이 독일 국가에 대한 충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던 한 가지 방법으로서 예를 들어, 독일의 선거제도의 대표성이 더 높아져서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들어갈 가능성을 높여야 했다는 당신이 옳다고 본다.
사회주의 역사의 매혹적인 "만약에 그랬다면" 중 하나는 카우츠키와 베벨 등이, 프랑스의 동류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수정주의자들이 정부에서 직위와 영향력을 얻기 위해 독일의 기성 정당들과 발을 맞추는 것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그러한 시도에 관한 한, 카우츠키는 장 조레스(Jean Jaurès)와 같은 사람들이 인터내셔널에서 쫓겨나는 것을 선호한 반면, 베벨은 그러한 제안을 싫어했다.
* 최근 SPD에 대한 일부 흥미로운 학문적 탐구가 있었는데, 일부는 카우츠키를 인물로서 재평가했지만, 당 문서고를 사용한 앤드류 보넬(Andrew Bonnell)의 연구와 같은 식으로 작업했다. 그러나 카우츠키가 이론적인 정교함을 지탱하는 것보다 대중화하는 사람으로 더 기억된다면, 왜 이 텍스트들을 번역하는 것이 오늘날 좌파에게 유용한 것인가? 왜 이것들은 단지 100년 전의 토론의 배경일 뿐이 아닐까? 오늘날, 다양한 좌파 포퓰리즘 세력이 제도적 변화를 위한 멀리 도달할 프로그램을 개념화하거나, 미래의 최종 목표를 상정할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내 대답은 세 가지 차원일 것 같다. 첫째, 나는 카우츠키를 단지 마르크스주의를 대중화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대규모의 국제적 청중을 위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정치를 발전시킨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좌파가 ‘신시대’(Die Neue Zeit)와 같은 저널이나 ‘라이프치히 인민신문’(Leipziger Volkszeitung)이나 ‘전진’(Vorwärts)과 같은 신문에 개제된 풍부한 자료들과 진지하게 상호작용하지 않은 것은 거의 죄악에 가깝다. 그것들은 사회주의가 유럽의 노동계급 대중들 속에서 모종의 '상식'에 도달했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진정한 보물창고다.
둘째, 나의 연구는 사실 다른 시대일뿐 아니라 다른 세계인 것처럼 보이는 조직 내에서의 논쟁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지만, 역사적 기록을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데이비드 브랜든버거(David Brandenberger)와 미하일 젤레노프(Mikhail Zelenov)가 최근 펴낸 훌륭한 출판물을 보면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하게 알 수 있듯이 이른바 ‘볼셰비키’가 혁명적인 카우스키와 “제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와 SPD를 축출해 버린 것은, 바로 1938년 요셉 스탈린의 날선 글쓰기에서 비롯됐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과 그 정당들에 대해 험악한 반대 속에서 자신이 건설하고 있던 러시아의 "새로운 유형의 정당"을 대치시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현대의 반스탈린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볼셰비즘에 대해 이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역사는 좌파에게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패배가 아니라 과거에서 최고의 것에 우리의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셋째로, 나쁜 역사는 나쁜 정치를 낳는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좌파는 카우츠키 학파의 거대한 야망과 참을성 있는 혁명적 리얼리즘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내에서 그리고 맞서서 대안적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개발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헌신하는 대중 정당을 구축하는 대신, 한 무더기의 "새로운 유형의 정당"으로 포장된 절반쯤 음모적인 집단들이 회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가장 효과적인 단일쟁점 캠페인, "광범한" 노동조합 전선,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가 말했듯이) "개혁과 혁명의 범위를 정하지 않은 정당들", 또는 "대부분의 노동당원들이 원하는 정책들"을 둘러싸고 말이다. "전환적 방법"이라는 이름 속에 가장 최소의 요구들은 그들이 갖고 있지도 않은 혁명적 중대성의 축복을 받는다.
구체적으로 카우츠키에 관한 한, 그의 사상의 반가운 재발견뿐만 아니라, 왜곡된 20세기적 서사의 연속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코비니즘(Corbynism)이나 버니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카우츠키적 전략의 현대판 화신처럼 보는 최근의 몰역사적 묘사나, 의회의 민주당 "스쿼드"(Squad: 미국 민주당의 좌파 유색인 의원 4인방)가 지배계급의 부패와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제국의회에서 SPD 의원들의 정신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내가 볼 때, 카우츠키의 유산에 대한 그러한 도용은, 심지어 결국에는 그의 경력에 걸쳐 - 다른 변종이지만 - 사회주의 강령으로 노동자 정당을 건설할 필요성을 주장했던 주요 수정주의자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이다. 오늘날, 혁명적 사상에 대한 신뢰가 철저히 떨어져 있는 미국에서는, SPD가 19세기 후반의 독일에서 세워낸 일종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반대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활동가들은 대신에 최저임금 15달러, 케인즈주의적 조세 정책, 그린 뉴딜 등과 같은 소위 대중적 요구를 중심으로 미국 좌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런 “빵과 버터”같은 상식적인 요구를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길이 닦여진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한 세기 전에 사회주의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 미국 동지들이 현재 그러한 정치를 퍼뜨리기 위해 카우츠키를 인용하고 있지만, 명백히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역사 - 바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기 위한 혁명적 프로젝트 - 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 중 한명의 권위가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빈틈없이 뒷받침한다고 느끼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혁명가로서 카우츠키와 그 자신의 초기 관점을 외면한 배신자 모두의 유산에 대한 부정직한 역사적 변조를 포함한다.
나는 초기 SPD의 노선을 따라 자본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계급조직의 대중정당으로 통일시키는 것만이 국제적으로 노동계급 운동에 진지하고 지속적인 돌파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일은 즉시 착수할 필요가 있고 소위 "현실 관련성"과 즉각적 편의라는 명목으로 연기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 상태로는, 이것은 정말로 상상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나는 그것이 현재의 좌익의 상식에 대한 전면적인 정비에 필요한 발전이라고 믿는다. 오늘날 좌파에게 개혁주의자라고 묵살되거나 포용되는 사상가인 혁명가 카우츠키가 사회주의 투쟁을 위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좋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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