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뢰비(Michael Löwy)
번역: 두견
생태주의 좌파는 모든 소비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널리 퍼져있는 소비 유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이 글의 필자인 미카엘 뢰비(Michael Löwy)는 사회주의 활동가이지 학자로서 <생태사회주의: 자본주의적 재앙에 대한 급진적 대안> (Haymarket 2015)의 저자이고, 파리의 전국과학연구센터(National Center of Scientific Research)에서 사회과학 분야 명예 연구 책임자이다.
출처: https://climateandcapitalism.com/2020/10/08/ecosocialism-and-or-degrowth/
생태사회주의와 탈성장 운동은 생태주의 좌파의 가장 중요한 경향에 속한다.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생태학적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에서 상당한 감축를 보이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탈성장(degrowth) 이론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하고 있다.
* 대안 프로그램을 정의하기에는 "탈성장"의 개념이 불충분하다.
* 자본주의의 틀에서 탈성장이 달성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 감축해야 할 활동과 발전이 필요한 활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특히 영향력이 큰 탈성장 경향이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소비자 사회에 대한 비판에서 영감을 얻은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가이 데보르드(Guy Debord),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와 "기술적 시스템"의 자크 엘룰(Jacques Ellul)은 다른 정치적 전망을 담고 있다. 반대하지는 않더라도 서로 거리가 꽤 먼 극들이 적어도 두 개 있다. 한쪽에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유도된 서구 문화에 대한 비판자들(세르게 라투슈Serge Latouche)이, 다른 한쪽에는 보편주의적 좌파 생태주의자들(빈센트 샤이넷Vincent Cheynet, 폴 아리에스Paul Ariés)이 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세르게 라투슈는 가장 논란이 많은 프랑스의 탈성장 이론가 중 한 명이다. 확실히, 그의 주장 중 일부는 정당하다: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신화 해체, 성장과 "진보"의 맹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문화 혁명에 대한 호소. 그러나 서구의 휴머니즘, 계몽주의, 대의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전면적인 거부와 더불어 그의 (보편적인 가치가 없다는)문화적 상대주의와 석기시대를 지나치게 찬양하는 그의 모습은 비판의 여지가 매우 많다.
더 나쁜 것도 있다. 더 깨끗한 물, 학교, 병원 등 세계 남반구 국가들을 위한 생태사회주의적 개발 제안들을 "자민족중심주의", "서구화" 그리고 "지역적 삶의 방식 파괴"라고 그가 비난하는 것들은 상당히 견디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특히 "마르크스에 의해 이미 행해졌고, 잘 행해졌으니"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할 필요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진지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그것이 이미 안드레 고르즈André Gorz(또는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에 의해 이미 행해졌고 "그리고 잘 행해졌기" 때문에 이 행성의 생산주의적 파괴에 대해 비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부 이론가(빈센트 샤이넷, 폴 아리에스)의 프랑스 "공화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고 해도, 좌파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저널 '라 데크로쌍스La Décroissance(탈성장)'로 대표되는 보편주의적 경향이다. 첫 번째와 달리, 이 탈성장 운동의 두 번째 경향은 세계 정의 운동(ATTAC), 생태사회주의자들, 급진 좌파 정당들과 - 비록 때로는 논쟁을 벌이지만 - 많은 융합 지점을 가지고 있다: 선물[무상으로 제공되는 물건, 서비스, 또는 편의시설]의 확대, 교환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우위, 노동 시간의 단축, 사회적 불평등과의 투쟁, "비시장" 활동의 개발, 사회적 요구에 따른 생산의 재편, 환경 보호.
많은 탈성장 이론가들은 생산지상주의(productivism)의 유일한 대안은 성장을 완전히 멈추거나, 마이너스 성장으로 대체하는 것, 즉 개별 주택, 중앙 난방, 세탁기 등을 포기함으로써 에너지 지출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인구의 과도하게 높은 소비 수준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이러한 그리고 이와 유사한 가혹한 긴축 정책은 상당히 인기가 없기 때문에, <책임의 원리>를 쓴 한스 조나스(Hans Jonas)와 같은 중요한 저자를 포함한 그들 중 일부는 일종의 "생태적 독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움직였다.
이러한 비관적인 견해에 반하여, 사회주의적 낙관론자들은 기술적 진보와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의 사용이 무한한 성장과 풍요를 허용하여 각자가 "필요에 따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보기에 이 두 학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장"이나 생산력 발전에 대한 순전히 양적인 개념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더 적절해 보이는 제3의 입장이 있는데, 그것은 발전의 질적인 전환이다.
이것은 대규모이고, 쓸모없고/또는 유해한 제품의 생산에 기반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의한 엄청난 자원 낭비를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군수산업이 좋은 예시이지만, 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많은 부분은, 그들의 내재된 진부화로, 대기업들에게 이익을 창출하는 것 외에는 다른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쟁점은 추상적인 "과도한 소비"가 아니라 눈에 잘 띄는 습득, 막대한 낭비, 상업적 소외, 강박적인 상품 축적에 기반한 널리 퍼져 있는 형태의 소비와 '패션'에 의해 부과되는 위조된 참신함의 강박적 구매이다. 새로운 사회는 "성서적인" 것 - 물, 음식, 옷, 주택 - 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건강, 교육, 교통, 문화의 기본적인 서비스도 포함하는, 진정한 필요의 충족을 지향하는 생산을 추구할 것이다.
인위적인, (인위적으로 창조된) 허구의, 임시변통의 필요와 진정한 필요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앞의 것들은 정신적 조작, 즉 광고에 의해 유도된다. 광고 시스템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침범했다: 음식과 의복뿐만 아니라 스포츠, 문화, 종교, 정치도 그 규칙에 따라 형성된다.
그것은 영구적이고 공격적이며 음흉한 방법으로 우리의 거리, 우편함, TV스크린, 신문, 풍경 등을 침범해 왔고, 눈에 잘 띄고 강박적인 소비 습관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더구나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 사회적 필요와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생산'의 한 갈래에서, 소비자들이 모두 지불하는 천문학적인 양의 석유, 전기, 노동시간, 종이, 화학물질, 그 밖의 원자재를 낭비한다.
광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측면이지만,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회에서는 소비자 조합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관한 정보로 대체되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진정한 요구와 인위적인 요구를 구분하는 기준은 광고(코카콜라!)의 억제 이후에도 나타나는 그 요구의 지속성이다. 물론, 몇 년 동안의 오래된 소비 습관은 지속될 것이고, 아무도 사람들에게 그들의 필요가 어때야 하는지 말할 권리가 없다. 소비 패턴의 변화는 역사적 과정일 뿐 아니라 교육적 도전이다.
개별적 자동차와 같은 일부 상품들은 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가용은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세계적 규모로 죽이고 상해를 가하고, 대도시의 공기를 오염시키고, 어린이와 노인들의 건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며, 기후 변화에 현저하게 기여하는 공공의 골칫거리다.
그러나, 그들은 직장, 집 또는 여가 장소로 사람들을 수송함으로써, 진정한 필요에 대응한다. 생태학적 마인드로 운영되는 몇몇 유럽 도시에서의 지역적 경험에 따르면, 개인차가 운행하는 부분을 버스와 전차의 이점으로 점진적으로 제한하는 것과 인구의 대다수가 그것을 승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중교통이 지상이나 지하로 엄청나게 확장되고 이용자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생태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행자나 자전거 이용자들이 노선을 따르게 될 경우, 자가용은 부르주아 사회에서보다 훨씬 작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것은 고집스럽고 공격적인 광고, 명망의 상징, 정체성의 간판으로서 촉진되어 물신적 상품이 돼 있다. 미국에서 운전 면허증은 인정된 신분증이고 자동차는 개인적, 사회적이고 에로틱한 삶의 중심이다.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 속에서, 끔찍한 사고와 높은 수준의 오염에 책임이 있는 트럭에 의한 상품 수송을 대폭 줄이는 것은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즉, 프랑스인들이 그것을 기차나 페루타주(ferroutage: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트럭들)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오직 자본주의적 "경쟁력"의 터무니없는 논리만이 트럭 시스템의 위험한 성장을 설명한다.
그렇다, 비관론자들은 대답하겠지만, 개인들은 통제되고, 견제되고, 억제되고, 필요하다면 억눌러져야 하는 무한한 열망과 욕망에 의해 움직이며, 이것은 민주주의에 어떤 한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현재 생태사회주의는 이미 마르크스가 말한 다음과 같은 내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계급이 없고 자본주의적 소외에서 해방된 사회에서 "소유"보다 "존재"가 먼저다. 즉 상품의 무한한 소유보다는 문화, 스포츠, 놀이, 과학, 에로틱, 예술, 정치 활동에 의한 개인적 성취의 자유 시간이 우선이다.
강박적 소유욕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 상품 물신숭배, 지배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광고에 의해 유도된다. 반동적 담론이 우리가 믿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것이 "영원한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은 이렇게 강조했다.
"(‘한계효용’의 체감 속에) 더욱 더 많은 상품들의 계속적인 축적은 결코 인간 행동의 보편적이고 심지어 지배적인 특징이 아니다. 그들 자신을 위한 재능과 성향을 개발하는 것, 건강과 생명의 보호, 아이들을 돌보는 것, 풍부한 사회관계의 발전 …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면 이 모든 것들이 주요한 동기가 된다."
이것은 특히 과도기 과정 동안, 환경 보호의 필요와 사회적 요구, 생태적 의무와 특히 가난한 나라에서 기본적 사회기반시설 개발의 필요성, 대중적 소비 습관과 자원 부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모순은 피할 수 없다. 자본과 이윤 창출의 의무에서 해방된 다원적이고 공개적인 토론에 의해, 그것을 해결하며 사회 자체의 의사결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생태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적 계획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런 풀뿌리, 참여형 민주주의만이 오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잘못을 사회적이며 집단적으로 스스로 교정하는 유일한 길이다.
생태사회주의자와 탈성장 운동의 관계는 무엇일까?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목표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몇 년 전에 출판된 책 <La décroissance est –elle souhaitable?>(탈성장은 바람직한가?)에서 프랑스의 생태주의자 스테판 라비뇨테(Stéphane Lavignotte)는 그러한 동맹을 제안한다.
그는 양쪽 관점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는 사안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회 계급의 관계와 불평등과의 투쟁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생산력의 무한한 성장을 규탄해야 하는가? 개인적 주도성, 지역적 경험들, 자발적 소박함인가, 아니면 생산장치와 자본주의적 '거대기술'의 변화가 더 중요한 것인가?
라비뇨트는 선택을 거부하고, 이 두 가지 보완적 실천을 연관시킬 것을 제안한다. 과제는 자본의 무소유자인 다수자의 생태적 계급 이익을 위한 투쟁과 급진적인 문화 변혁을 위한 적극적 소수자 정치를 결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불가피한 이견을 숨기지 않으면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구상의 생명체, 특히 인류의 생존이 자본주의와 생산지상주의와 모순된다는 것을 이해한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 합성'이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이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체제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사회주의자로서, 그리고 제4인터내셔널(Fourth International)의 일원으로서, 나는 이러한 관점을 공유한다. 모든 종류의 반자본주의적 생태학의 결속은, 너무 더 늦기 전에 현재의 문명의 자살적 진로를 막아야 하는 긴급하고 불가결한 과업으로 향하는 중요한 단계이다.
(기사 등록 20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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