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 이론에서 사회적 재생산 이론까지 - 로자 룩셈부르크의 페미니즘
앙키카 차카르디치(Ankica Čakardić)
번역: 두견
이 논문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경제 비평의 틀을 활용해서 여성의 재생산 작업과 축적의 재생산에서 그 역할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룩셈부르크의 '공간성의 변증법'과 오늘날 사회적 재생산 이론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 주고, 룩셈부르크의 이론이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이 논문의 저자인 앙키카 차카르디치(Ankica Čakardić)는 크로아티아에 있는 자그레브 대학교의 사회철학 조교수이고, <전환의 유령들: 자본주의의 사회사>, <천둥의 박수소리처럼: 로자 룩셈부르크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등의 책을 썼다. 이 논문에 1/3 가량을 차지하던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비판 부분은 분량 관계상 생략해서 번역했다.
출처: https://brill.com/view/journals/hima/25/4/article-p37_37.xml
들어가며
룩셈부르크(Luxemburg)는 이른바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작품이 혁명적인 페미니스트의 역사에서 누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그녀의 작품과 특히 정치 경제에 대한 그녀의 비평이 역사와 오늘날에 걸쳐서 진보적인 페미니스트 정책의 발전과 여성 해방을 위한 수많은 참고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부정확할 것이다.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을 염두에 두고 그녀가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공간 사이의 활기찬 역동성을 강하게 강조한 것과 함께 룩셈부르크의 이론을 한 단계 더 도약시켜 보도록 하자. '룩셈부르크의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룩셈부르크의 '공간성의 변증법'과 사회적 재생산 이론 사이의 연관성을 확립할 수 있을까? 룩셈부르크의 정치경제 비평의 틀이 여성의 재생산 작업과 축적의 재생산에서 그것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에 사용될 수 있을까?
이 논문에서는 a)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비판에 대한 제시와, 이어서 b) 룩셈부르크의 자본 축적 이론과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핵심 요소들 사이의 확립된 연관성을 통해서 위의 질문을 더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 우리가 룩셈부르크의 축적 이론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으로 이동하기 전에, <자본의 축적>과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 간단히 몇 가지를 소개하고 언급하자.
1차 세계대전의 전날, 약 15년간의 준비 끝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가장 포괄적인 이론적 작품이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가장 의미있고 독창적인 고전 작품 중 하나인 <자본의 축적>(베를린, 1913)을 출판했다. <자본의 축적: 제국주의에 대한 경제적 설명에의 기여>는 룩셈부르크가 1906년과 1916년 사이에 독일사민당 학교에서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쓴 <정치경제학 개론>의 후속작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자본의 축적>은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적인 공간성의 역동적 관계를 고려하면서 자본주의적 독점, 확대 재생산, 제국주의의 조건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가 자본에 대한 비판에서 오로지 '시간', 즉 자본주의 재생산의 내부적 동역학에서 시간적 차원에 초점을 맞춘 반면 자본의 공간적 결정을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내부적 핵심이 그것에 외부적인 것, 즉 비자본주의적 단층을 소모시키려는 의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룩셈부르그의 목표는 시간뿐 아니라 '공간 분석적 차원'을 포함할 그녀 자신의 확대 재생산 이론과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평 이론을 정교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이러한 공간적 결정은 피터 후디스(Peter Hudis)에 의해 '공간성의 변증법'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자본> 2권에서의 축적과 확대 재생산의 문제에서 마르크스의 접근에 '결함들'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녀의 친구들과 적들은 똑같이 마르크스의 '눈부신 모순'을 지적한 룩셈부르크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프란츠 메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자신의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을 언급했다.
“일반적으로 나는 그 책이 단기적으로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불행히도 우리의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는 몇몇 통풍에 찌든 늙은 아저씨처럼 어떤 신선한 생각의 산들바람도 두려워하고 있으며, 나는 처음에 많은 싸움을 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레닌은 독일 SPD 내부의 수정주의적 경향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한 사람이 룩셈부르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마르크스를 왜곡했다'고 진술했고 그녀의 작품은 마르크스를 ‘수정’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아류'들을 중심으로 뭉친 사회민주당원들과 사회주의 원칙, 혁명적 행동, 국제주의의 점진적인 해체로 마르크스를 '수정'한 정치적 실천의 기회주의적 흐름에 반대하여, 룩셈부르크는 증가하는 경제 위기와 새롭게 나타나는 경제생활에 대한 사실에 보다 정밀한 응답과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
정치적 조직화, 혁명적 철학, 민족주의 또는 군국주의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작품들은 종종 그녀의 사상에 대한 연구자들에 의해 분석되지만, 룩셈부르크의 경제 이론과 그 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를 제공하거나 동시대의 정치경제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분석을 제공하려고 노력한 저술가는 거의 없다.
잉고 슈미트(Ingo Schmidt)의 말에 따르면 '룩셈부르크의 작업에 관심이 있는 좌파들은 그녀의 정치학을 살펴보았지만 경제학을 위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또한 <자본의 축적>은 원작 이후 38년 만에 영어로 번역(1951, Agnes Schwarzschild가 번역)되었을 뿐이며, 거기에서마저도 라야 두나예프스카야(Raya Dunayevskaya)가 지적한 수많은 생략이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자본의 축적>은 출판과 동시에 기회주의적 개혁주의자들과 SPD의 수정주의적 부류들뿐 아니라 칼 카우츠키가 이끄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서도 혹독한 비판에 부딪혔지만, 표면적으로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에 부합하는지 의심된다고 비판받은 것은 그녀의 작품뿐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비평가들은 종종 룩셈부르크 작품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주의 문헌으로서 서투르고 불충분한 것으로 고발하기 위해 값싼 심리학적, 보수적 주장을 사용했다.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가 이런 종류의 비판의 좋은 예를 제공했는데, 그는 그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Der proletarische Sozialismus)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성난 사회주의자들은 가장 강한 원한에 짓눌린 사람들이다. 이것은 전형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피에 굶주리고 독이 있는 영혼은 여자로서, 외국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장애인으로써 4배의 원한을 품고 있었다.”
독일 공산당 내에서조차 그녀는 '코민테른의 매독'으로 불렸고, 베버는 언젠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동물원에 있는 사람'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두나예프스카야는 이렇게 쓰고 있다. “유해한 남성 우월주의가 당 전체에 스며들었는데, 여기에는 스스로 진실한 페미니스트라는 신화를 만들어 낸 <여성과 사회주의>의 저자인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과 전체 인터내셔널의 주요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가 포함된다.”
두나예프스카야의 젠더-사회학적 분석은 또한 빅토르 아들러(Victor Adler)가 아우구스트 베벨에게 룩셈부르크에 대해서 쓴 편지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그 악독한 계집(poisonous bitch)은 이제 많은 피해를 입힐 것인데, 이는 그녀가 원숭이처럼 영리한 반면에 그녀의 책임감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고 그녀의 유일한 동기는 거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퍼져가는 욕망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분명하게도 문제는 두드러진 여성들을 공격하는 특정한 종류의 보수적 정치 전술이었는데, 이 경우에는 생물학에 기반을 두고 - 즉,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 - 룩셈부르크의 작업을 심각하게 묵살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 및 젠더 역사의 이 중요한 측면은 여기서 더 이상 논의되지 않겠지만, <자본의 축적>과 여성 이론가, 교사 및 혁명가로서의 룩셈부르크의 경험에 대한 이론적이고 수많은 유사 이론적 비판을 논의할 때 그러한 어디서든 나타나는 내용들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룩셈부르크 이론의 페미니즘적 차원을 다룬 텍스트가 거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페미니즘 또는 소위 '룩셈부르크적 페미니즘'에 기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룩셈부르크의 저술에 대한 페미니즘적 분석이 일반적으로 드물다면, 그녀의 <자본의 축적>에 대한 페미니즘적 개입은 더욱 더 드물다.
만약 룩셈부르크의 작업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석에 관심이 그나마 있다면, 그것은 때때로 그녀의 이론과 관련있고 보통은 그녀의 사적인 생활과 연관돼서 규정된다. 룩셈부르크가 '여성 문제'라는 주제에 대해 별로 글을 쓰지 않은 것이 룩셈부르크의 페미니즘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의 주제가 그녀의 삶과 사생활에서 비롯된 사건들과 관련있다는 사실에 확실히 기여했다.
이것들은, 충분히 자연스럽게,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특히 역사학계가 전통적으로 여성과 그들의 경험을 피해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비판에 기초한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에 기여하기 위해 그러한 종류의 해석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룩셈부르크의 몇몇 텍스트들과 '여성 문제'를 다룬 서면 언설들이 우리에게 그녀의 페미니즘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이러한 작업을 통해 정치경제학에 대한 그녀의 비판과 연관성을 세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추론적인 진입 지점을 식별할 수 있을까? 다음 절에서 우리는 소위 '여성 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기본적 입장을 식별하고, 이를 통해서 논문의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고,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의 다층적 과정에서의 자본 축적과 비자본주의 공간성의 구실에 대한 그녀의 테제와 그것의 연관성을 확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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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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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재생산 이론과 맞닿는 공간성의 변증법
룩셈부르크의 경제학에 대한 모든 분석, 특히 <자본의 축적>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은 고전경제학과 자본주의 사회 형성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노동에 대한 그녀의 사회경제적 분석과 노동가치의 이론에서,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을 도입했다. 그러한 한 예는 가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그녀의 해석에서 비롯된다. 1912년의 연설에서 엥겔스를 언급하며, 그녀는 시장 영역의 노동과 가정 영역의 노동을 구별하며, 초기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아이 기르기나 집안 일 등 이런 종류의 일은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아무리 엄청난 희생과 에너지를 쏟아 붓고 수천 가지의 작은 노력이 더해져도 생산적이지 않다. 이것은 노동자의 행복과 축복을 위한 사적인 일에 불과하며, 이러한 이유로 현재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임금 체계가 지배하는 한, 오직 그런 종류의 일만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자본주의적 이윤을 창출하는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녀의 다리가 그녀의 고용주의 호주머니에 이윤을 쓸어넣는 뮤직홀 댄서는 생산적인 일꾼인 반면,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그들의 집 곳곳에서 엄마들의 모든 고역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잔인하고 정신나간 소리로 들리지만, 정확히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의 잔혹성과 광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 잔인한 현실을 선명하고 날카롭게 보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첫 번째 과제이다.“
앞서 언급한 '프롤레타리아 여성'이라는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노동계급 여성의 '정치적 성숙' 문제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개인주의가 가족의 구조조정과 그 안에서 노동의 성별 분업에 큰 영향을 미친 방식에 초점을 맞췄다. 이어서 그녀는 사적 소유권의 확립과 공식화 과정과 나란히 자연스럽게 존재했던 부르주아지 여성들이 '사회적 재생산의 위대한 작업장'의 여성들을 포함시키는 것과 관련된 투쟁에 관심이 없었고, '재산을 소유한 부르주아지 여성에게는, 어떻게 그녀의 집이 세계‘인가를 주장했다.
부르주아지 여성들이 사회의 경제적 기능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가정-가사 노동에도, 시장 생산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룩셈부르크는 생산적 영역에서 여성의 역사적 등장은 매우 보수적 반작용으로 특징지어졌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현재 봉건제도와 관련하여 구체적이고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사회적 재생산을 통해 추가적으로 공식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조이다. 리즈 보겔(Lise Vogel)이 말했듯이, 자본주의에서는 잉여 생산 영역과 가내 영역 사이의 큰 격차가 형성되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계급사회에서 필요노동의 지속적 과업에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공공적 생산의 세계와 분리된 어떤 보편적인 가내 영역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농업에 기반을 둔 계급사회 - 예를 들어 봉건제 - 에서 필요노동의 노동 과정은 흔히 잉여 생산의 과정과 통합됐다. 잉여노동이 행해지는 영역과 가정이라고 적절히 부를 수 있는 영역 사이에 첨예한 경계를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이다. 분석가들이 일부 불변하는 가정 영역의 보편성을 주장할 정도에 이를 때, 그들은 사실 비자본주의적 계급 사회에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산물에 대한 구분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고용된 가족과 고용되지 않은 가족(아이와 노인)을 돌봄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노동계급 자체를 모두 재생산하는 노동력으로서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룩셈부르크는 우리가 여성의 지위의 불리함을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아닌 단지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돌린다면, 우리가 직면하게 될 핵심적인 분석적 문제점을 강조한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이러한 경고는 여성 억압을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의 산물로 해석하는 대신 초역사적으로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환원주의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부르주아지 여성들 사이에서만 잘될 때, 여성 평등에 대한 요구는 물질적 뿌리가 없는 몇몇 미미한 집단의 순수한 이데올로기이고, 남성과 여성 사이 별난 대립의 유령이 된다. 그것이, 여성 참정권(suffragette) 운동의 시시한 본질이다.”
리즈 보겔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에서 매우 유사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론적인 영역에서, 더 나아가기 위한 첫 번째 요건은 소위 여성 문제가 적절한 분석적 범주를 대표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재생산의 문제'로 <자본의 축적>을 시작한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이론에서 사회적 자본 전체의 재생산 문제가 확인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재생산은 반복, 즉 '생산 과정의 갱신'이라고 설명하며, 따라서 그것을 암시한다. “생산의 규칙적 갱신은 정기적 소비의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고 기초이며, 따라서 각각의 역사적 형태에서 인간 문명의 전제 조건이다.”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재생산이 필요하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재생산'이 사회가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생산 조건의 재생산 과정이거나, 인류의 세대 재생산을 뜻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단순화를 위해, 고전적 산업 노동의 예를 이용하면, 그것은 재생산이 기계, 공장 및 원자재에 투자하기 위해 작업 운영, 그것의 규칙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가 고장 나면 그들의 장소에서 수리, 교체 또는 새 장비를 대신 구입해야 한다.
게다가,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노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기계와 유사하게, 노동자가 늙거나 사망할 때 '대체'돼야 하는 반면에, 일할 연령의 노동자는 충분히 일할 준비가 되기 위해 먹고 쉬고 힘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세대 교체는 이 계급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새로운 노동자들을 제공하고, 따라서 여성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은 계급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룩셈부르크와 사회적 재생산 이론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나의 주장을 명확한 방식으로 제시하기 위해, 나는 내가 그것의 핵심 요점과 개념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정교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는 '전체 사회적 재생산의 맥락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을 배치하는 과제를 안게 되는데, 이는 리즈 보겔이 지적한 사회주의 이론의 현대적 전통에서 재생산의 이러한 측면이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 자본가는 공장 운영과 노동자의 임금에 필요한 수단을 시장을 통해 확보한다. 임금 노동을 통해 노동계급은 식품, 의류, 가계 지출 비용과 같은 생활에 필요한 품목과 서비스를 확보/소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시장이 아닌 가정에서 충족된다. 게다가, 먹기 위해서, 사람들은 음식의 준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옷을 산다면, 그것들은 세탁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가족의 아이들의 노인들에게는 신체적 돌봄이 제공되어야 한다. 사회의 '생산적' 영역의 노동과 달리, 가내 노동은 '재생산적' 영역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소비하고, 그들의 옷은 세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른 종류의 재생산적 노동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생산적인 영역에서의 그들의 삶과 노동은 가정 영역에 속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매개된다. 대부분의 문제는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모두가 재생산 활동을 설명이 필요없고 당연한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회의 재생산 영역과 생산 영역 사이의 구조적, 공간적 차이는 자본주의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근본적 이유를 나타낸다. 어떤 근거로 이것을 주장할 수 있는가?
전통에 따라,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의 재생산은 생산적인 영역 밖에서 여성들에 의해 수행되고 무급이다. 이것은 문제의 존재론적 수준을 나타낸다. 노동으로 정의되지 않고(식품 준비, 청소, 돌봄, 모유 수유, 출산) 시장 가치가 결여된 활동은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여기서 계산은 명확하다. 예를 들어, 문제의 노동력이 고용된 직원과 함께 자본가에게 이전된다면 그는, 전통적으로 무급이고 가정에 부담되는 그 시간과 돈을 여성들에게 투자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대안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분배의 문제는 또한 시장에 대해서 상당한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며, 그 변화는 비용이 들고 따라서 실현 가능하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적 재생산 문제를 다루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이중체계 양식 속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을' 캠페인을 지원한 페미니스트는 한 가지 접근 방식을 제공했다. 두 번째 (유물론적) 접근은, 사회적 재생산을 가내 영역 내의 일련의 행동으로서 정의하는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에게서 발견되며, 그녀는 이것을 별개의 생산양식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리즈 보겔은 노동력과 계급 사회의 동시적 재생산을 의미하는 사회적 재생산을 채택하는 '단일' 접근 방식을 제공한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캠페인에 관여한 자율주의 페미니스트들은 1970년대 초에 여성의 무급 노동과 관련하여 논의를 시작했다. 이것은 마리아로사 델라 코스타(Mariaosa Dalla Costa)와 셀마 제임스(Selma James)가 쓴 팸플릿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에 발표되었고, 나중에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의 <가사노동에 맞선 임금>, 레오포르디나 포르투나티(Leopoldina Fortunati)가 쓴 책 <재생안의 비밀>에서 이어지는 토론이 진행되었다. 현재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포르투나티만을 간단히 참조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마찬가지로 레오포르디나 포르투나티도 잉여가치 생산에서 재생산 노동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의 노동가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마르크스의 공식 c+v+s에서 출발했다. 비록 그녀는 (또한 개별적 가정들에 추상적인 모델을 적용하려고 노력했던 '가사노동에 임금을' 캠페인의 경우와 같이) 생산적인 노동과 재생산적인 노동을 동일시함으로써 노동가치 이론의 모델을 잘못 해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장과 가정의 변증법을 지적함으로써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이론 모두에서 진정한 인식론적 도약을 달성했다. 재생산 노동 없이는 축적은 불가능하다.
포르투나티의 정치경제학 이론의 기본적 분석 단위는 (그녀가 말하는) '명백한 대립쌍' 즉 생산/재생산을 통해 기능한다. 그녀는 생산은 가치를 내포하고 재생산은 무가치하다는 이중적 존재론을 고수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그것의 순환을 완전히 분석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게다가 그녀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누락과 방법론적 오류를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생산 노동을 생산 관계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자연화 주장을 비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따르면 그러한 잠재력이 없다는 재생산과 달리 생산만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명제에 의문을 던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포르투나티는 재생산 노동이 가치 생산의 전제 조건이지만 그 자체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가사노동 논쟁’에 대한 대응으로 리즈 보겔은 재생산 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단지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며, 여성 억압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제공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축적 이론을 활용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가사노동 논쟁은 가사노동을 '생산적인 노동 –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재생산이 의존하는 과정과 일련의 활동들'로 보는 관점을 낳았지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측면에서 여성 억압의 사회-물질적 기반에 대한 이보다 더 중요한 공헌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 논쟁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의 발판을 제공했고, 특히 그것이 가사노동을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필수적 부분으로 이론화 하기 위한 '단일한' 분석적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19세기 후반의 다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룩셈부르크가 부르주아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여성 억압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말할 때, 그녀의 축적 이론은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사이의 동역학으로 발전하고, 그녀의 분석은 리즈 보겔의 '단일한' 이론의 결론과 일치하게 된다.
룩셈부르크와 보겔이 <자본>의 핵심 범주에 대한 개념적 범위를 확장하려는 배경적 이유는 유사하지 않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개별적 기여와 <자본>의 확장은 연결될 수 있다. 한편, 보겔은 노동력의 생물학적, 사회적, 세대적 재생산 연구와 관련하여 <자본>의 핵심 범주를 확대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반면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에서 시작하여 공간성의 변증법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이론을 창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여의 두 가지 요소는 각각 더 넓은 재생산 개념 또는 자본 축적을 제각기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가사노동이 사용가치만을 생산하고 교환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므로 잉여가치를 직접 창출하지는 않지만, 가사노동은 '아마도 별개의 전자본주의적 또는 비자본주의적 노동에 따라 작동하는 자체 생산 방식'이다. 가사노동의 상품화는 정치경제학과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한 룩셈부르크적 비판의 핵심 연결 지점을 제시한다. 인구의 많은 부분이 무산자이고 여성 노동력을 포함해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강요될 때에만 자본 축적의 체계적 과정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 축적을 위해, 시장은 전통적으로 시장의 일부가 아니었던 비자본주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생산적 영역의 인구로 통합함으로써 유지된다. 공간성의 변증법의 틀에 재생산 노동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이해를 배치하는 역사유물론적 방법의 특징은 그것이 여성의 노동과 축적의 재생산의 체계적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적 분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잉여 실현에 대한 룩셈부르크적 분석의 렌즈를 통해 재생산적 노동을 살펴보려면 비자본주의 공간으로서 가정에 대한 관계, 즉 그것의 상품화와 과잉 축적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가사노동은 시장의 생산적인 부분이 아니며, 이 논의의 목적상 자본주의 경제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될 수 있다. 그것은 가치나 가격도 없고 존재론적으로 노동의 지위를 갖지 못한다. 룩셈부르크적 틀에서 가사노동의 상품화는 자본주의를 비자본주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전형적 사례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부터, 사회 복지는 시장 유통에 가정을 포함시킴으로써 증가되었다.
이전에는 비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제공되었던 가사노동, 돌봄 및 이와 유사한 서비스에 모든 다양한 경제 활동이 집중되었다. 시간제 노동 계약의 도입을 통한 시장의 신자유주의화, 노동력의 유연화, 노동 및 복지 입법의 규제완화는 부분적으로 여성의 일과 가사노동의 상품화를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가 공식화되고 있던 때인 1970년대의 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과 관련된 모든 현상이다.
보겔은 자신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서 사회경제적 형성물로서 가족이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배타적 단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녀의 역사유물론적인 접근은,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화와 그것의 확산 경향과 재생산의 요구에 대한 '적응'을 강조했던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추적한다. 이와 같이, 사례의 역사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통적으로 생산적 영역의 구성 요소가 아니었던 사회적 단위가 시장의 순환에 통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 이주노동은 확실히 그러한 사례 중 하나이며, 이것은 여성 이주노동이 재생산 노동을 수행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를 보여준다. 사라 패리스(Sara Fa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유럽의 여성들은 유급 노동력에 대거 진입했다. 비록 나라마다 속도와 형태가 다르지만, 대부분의 노동 가능 연령 여성들은 현재 가정 밖에서 어떤 형태로든 고용되어 있다. 게다가, 이민자 인구는 더 이상 남성이 대부분도 아니다. 반대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여성이 이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간병인, 청소부, 어린이와 노인 돌보미, 또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지난 30년 동안 너무 많이 증가하여 이제는 사회적 재생산의 세계적인 위기를 만들어내고 이민의 여성화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 이주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주의 여성화 현상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값싸고 불안정한 노동력인 여성 이주노동은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위한 이상적인 동력이 된다. 이주 문제를 자본주의 분석에 통합시키는 것은 자본의 축적과 제국주의의 불가피한 연결고리를 지적함으로써 '새로운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를 촉진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개념은 자본주의의 시장적 측면과 비시장적 측면을 모두 통합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분석 전체에 기여한다. 이주 여성들이 시장을 통해 생산적인 영역에 통합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국제 노동시장에서 그들의 출현은 결코 남성 노동계급의 경쟁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주로 재생산 노동과 관련된 노동 부문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서구 상류층 여성들은 '해방'을 획득하여 그들의 가사노동을 이주 여성들에게 아웃소싱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그 노동을 아웃소싱함으로써 그들이 노동력을 구매한 이주 여성들을 시장에서 어떤 상품처럼 취급한다. 역사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역설에 의해 반복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 속에서, 가정과 돌봄 노동에서 이주 여성들의 노동은 주로 지구 북반구의 여성 노동력에 '버팀목' 구실을 한다.
가족의 일부로써 그들의 고향과 고국을 떠나던 이전의 경향과 달리, 오늘날 여성들은 종종 아이들을 동반하면서 독립적으로 이러한 행동에 착수한다. 이와 같이, 지구 남반구의 국가적 동역학은 이러한 활기찬 동역학에서 여성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이주 과정의 구체적인 결과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경향의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매우 독특한 배열이며, 부유한 국가에서 나타나는 값싼 여성 돌봄노동을 통해 달성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정치경제학적인 분석은 여성 이주노동의 현상을 끄집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기능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대의 축적 추세가 룩셈부르크가 주장했던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세계의 관계를 사용하여 실현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셀마 제임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관계는 특히 자본과 젠더의 특정한 연결에서 강화된다.
“개발 대 저개발 문제에 동시에 직면하지 않고는 어느 곳에서든 여성 대 자본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대외 무역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그에 따라 그녀의 제국주의 이론에 대한 주장을 전개한다. 비록 제국주의가 불충분한 수요의 문제에 기반하고 있고 과소소비가 자본주의적 위기를 야기한다는 그녀의 주장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체제가 안정화되거나 위기가 극복되는 자본주의 '외부적' 요소와 위기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논란의 여지가 없고 시사적인 논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증가하는 이윤(잉여가치)은 불충분한 총수요로 인해 발생하는 실현의 장벽과 만난다. 즉, 합리적 용도가 없는 축적의 잉여를 창출하거나, 다른 관점에서는 생산제조로 실현되지 못하는 수요 격차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 장벽을 낮추기 위해서는 생산과, 그에 따라 자본주의적 이윤을 실현할 수요를 찾거나 심지어 창출할 필요가 있다. 룩셈부르크는 이러한 (추가적인) 인위적 수요의 원천을 형성한 사례를 제시하였다: 주로 비자본주의적 경제로의 확장, 또한 경제의 군국화와 국제적 대출의 확대.”
이것이 바로 내가 '공간성의 변증법'과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사이의 동역학, 특히 신자유주의적 틀 안에서 그 중요성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같은 유사한 역사적 사례는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생산적이고 비생산적인 노동의 현대적 관계를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재생산의 전환을 통해서도 이것은 전개된다.
“일단 소농들이 망하게 되면, 가내 생산은 종종 남성의 주된 업무가 되는데, 이들은 선대제 (先貸制) 하에서 자본가들을 위해 일하거나 공장에서 임노동자로 일하는 반면, 농업 생산은 전적으로 여성, 노인, 아이들에게 맡겨진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의 비자본주의적 요소를 자본주의적 경제의 순환으로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통합의 방식은 역사의 경로를 통해 다양하다는 것을 고려했다. 특정 시점에서, 경제의 생산적 영역, 또는 그것의 비생산적 '외부' 대응 영역마저도 특정한 방법으로 다양한 인구를 포괄한다. 현대의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긴장은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적 사회 환경 사이의 연결을 통해 고려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축적의 문제를 둘러싼 이론적 논쟁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대내외 시장의 개념을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 및 외부 시장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과정에서 분명히 각각 크고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개념으로서 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 내부 시장은 자본주의 시장이고, 이 생산은 그 자체가 그 자신의 제품의 구매자이고, 그 자신의 생산 요소의 공급자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외부 시장은 비자본주의적 사회 환경으로서, 그것의 생산물을 흡수하고 그 생산과 노동력의 요소를 공급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관계에 어떤 혁신을 가져오는데, 데이비드 하비는 그것을 '창조적 파괴'라고 부른다. 그러한 한 사례는 확실히 가사노동과 여성 이주노동의 상품화이다. 더욱이, 앞서 언급한 인용문이 1913년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냉정한 현실의 도장이 찍혀 있으며, 더 나아가 제3세계 국가의 농업과 그 안에서 여성 노동의 역할뿐만 아니라 생산적이고 비생산적인 노동의 이분법의 실제적 결과와도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역사화와 '신제국주의'로의 경향은 공간성의 변증법에 관한 룩셈부르크 명제의 동시대적 관련성을 나타내는데, 특히 재생산 이론이 여기에 통합되면 더욱 그러하다.
결론
이 논문은 방법론적으로 룩셈부르크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기반한 페미니스트적 분석에 대한 기여로 기능하지만, 룩셈부르크의 유산을 마르크스의 유산과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현대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한 기여로도 기능한다. 룩셈부르크 정치경제학의 양상은 그녀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사회적 재생산 이론 사이의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공간성의 변증법'의 문제로 분석되었다. 룩셈부르크의 공간성의 변증법과 잉여 창출에서 재생산적 노동의 역할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해석 사이의 연관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 논문은 룩셈부르크가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한 개요 또는 그녀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적 기초와 함께 시작했다.
우리는 룩셈부르크의 페미니즘에 대한 기여가 간헐적이고 불완전한 성질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 논문은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대한 그녀의 비평에서 기존 구조에 있는 '틈새'를 채웠고, 따라서 이것은 룩셈부르크의 축적 이론과 사회적 재생산 이론 사이의 연결고리에 기초해 우리가 '룩셈부르크적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한 개념의 도입으로 기능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가정과 시장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위한 도구로서 룩셈부르크적인 비판에 대해 논의했다. 비록 두 틀이 모두 독립적인 분석의 요소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자본 축적 방법과 여성의 재생산적 노동은 서로 연결된 두 가지 과정들이다.
이것은 특히 신자유주의에서 전형적인 그것의 상품화에 대한 관점에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의 사례를 사용하여 이 논문에서 설명된다. 우리는 이주 과정과 사회적 재생산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오늘날의 자본 축적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현대 페미니스트 운동과 관련하여 상품화 문제를 분석하는 것(또는 공간성의 변증법의 '법칙'을 사용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1970년대부터, 사회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에 맞추어, 페미니스트 운동은 유용한 틈새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사회운동의 NGO화는 (국가가 복지 분야에서의 자신의 임무를, 폭력의 희생자들과 함께 일하는 여성 단체와 같은 NGO로 이전하는) ‘아웃소싱’이나 (여성 기업가 또는 자유시장 페미니즘과 같은) 시장의 유통 속에 여성 조직을 직접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통해서, 신자유주의화 과정의 일부로서 적극적으로 국가의 규제를 받게 되면서, 그들이 시장으로 포섭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의미했다.
어떻게 보면 룩셈부르크가 경고한 문제는 계속 흘러가고 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부르주아 페미니즘은 사회운동의 신자유주의화와 체계적인 비평/투쟁이 없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시장의 재생산 과정에 대한 가시적인 지지를 되풀이해서 나타내는 변화를 겪었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계급적 이익을 목적으로 젠더를 성공적으로 착취함에 따라, 우리는 시장과 그 재생산에 대한 저항을 기반으로 한 반자본주의 전략을 설계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에 직면해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틀 안에서 가정의 영역과 재생산 과정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국가적 또는 국제적 수준에서든 시장과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대한 어떠한 단기적-장기적 대안 논의에 필요한 출발점이 될 때, 룩셈부르크의 공간성의 변증법과 그녀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과의 연관성은 유용한 입문적 참조점일뿐 아니라 병렬적 구조들 간의 동맹을 조직하고 그들의 진보적 목표를 나란히 하는 데 적합한 정치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 같다.
(기사 등록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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