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리(Lars T Lih)
번역: 두견
라스 리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배신에 대한 레닌의 반응을 자세히 살펴본다. 이 글에서 라스 리는 또다시 역사적 기록을 치밀하게 살펴보면서 정설에 도전한다. 레닌과 트로츠키 등이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혁신했다고 하는 많은 아이디어들이 사실은 카우츠키에게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수많은 책과 논문을 쓴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1990), <레닌 재발견: 맥락에서 본 ‘ 무엇을 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출처: https://weeklyworker.co.uk/worker/784/lenin-kautsky-and-1914/
우리는 모두 레닌이 독일 사민당의 독일의회(Reichstag) 대표단이 전쟁 공채 발행에 투표했다는 뉴스를 받았을 때 레닌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알고 있다. 처음에 레닌은 그것이 전쟁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기 위해 부르주아지가 내놓은 위조품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것과 다른 충격들을 좀 더 정확한 맥락에 넣고 싶다.
1914년 8월 1일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당시 레닌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던 폴란드의 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가 SPD 대표단이 전쟁 공채에 투표한 것을 발견한 것은 8월 5일이었다. 그들은 기권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것은 그를 완전히 낙담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당국은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프랑스 돈을 가지고 있고 언덕을 산책하는 이 수상한 인물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또 다른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레닌은 간첩 혐의로 수감되어 8월 8일부터 19일까지 구금되었다.
그가 그렇게 (10년 전 체포와는 반대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제 높은 곳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인데, 즉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지도자 빅토르 아들러(Victor Adler)가 내무부 장관에게, 결국 차르의 가장 큰 반대자 중에 하나인 레닌을 석방해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나오기 전에 그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 군대에 자원 입대한다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프랑스 전단이 발행되었다. 전쟁 열기는 일부 볼셰비키도 그 속에 휩쓸고 들어갔다. 나는 이 몇 주가 레닌에게 얼마나 힘든 시기였는지 강조하고 싶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죽어가는 장모의 건강 악화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했다.
그는 지역 볼셰비키와의 회의를 위해 9월 5일 [스위스의] 베른(Bern)에 도착하여 향후 2~3년간 그의 강령적 원리를 그들에게 제시했다. 그가 이 짧은 시간 안에 어떤 종류의 다시 생각해보기를 할 수 있었거나 아니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 시기와 세부 사항들의 개요를 설명함으로써 나는 그것이 후자였음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충격은 끝나지 않았다. 가장 개인적으로 그를 화나게 한 것은 칼 카우츠키(Karl Kautsky)와 관련된 일이었다. 레닌이 거리낌 없이 그의 글들을 찬양했던 멘토였던 카우츠키는 이제 휘청거리고, 흔들리고, 뒤뚱거리며 레닌이 생각하기에 그가 말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에 부합하지는 않는 기사들을 쓰고 있었다. 레닌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1914년 9월에 이러한 카우츠키의 기사가 나오기 전에, 레닌은 ‘기회주의의 위험성은 오랫동안 모든 나라 노동운동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고 썼었고,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노동운동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들’이 주로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Luxemburg)였다는 것은 꽤 명백하다.
그러나 지금 이 두 명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 중 한 명은 독일의회 의원들이 한 일을 근본적으로 정당화하는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의 동료들 중 한 명에게 보낸 편지의 유명한 설명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카우츠키의 이 더럽고, 비열하고, 자기만족적이고, 우쭐대는 위선을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내가 한두 마디를 빠뜨렸을지 모르지만 그의 강하고 감정적인 반응은 분명했다.
레닌이 일주일 후에 같은 수신인인 슐라프니코프(Shlapnikov)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실패하지 말고 구해서 카우츠키의 <권력으로의 길>을 다시 읽고 그가 우리 시대의 과제에 대해 거기서 말하는 것을 보라. 그리고 이제 그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부인하면서 행동을 하는지!" 그가 이렇게 화를 내고 속상해 하는 이유는 이 책과 카우츠키의 견해가 너무나 옳았기 때문이다. 그 책에는 무엇이 들어있었고 "우리 시대의 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강박적 비독창성
이것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좌파의 전통적인 방법은 독일의회 그 투표와 다른 충격들이 레닌을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과정으로 이끌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 버전의 잘못된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뿌리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이론들을 내놓았다.’
한 가지 이야기는 ‘레닌이 헤겔을 읽고 변증법을 재발견한 다음 그것을 당대의 과제에 적용시켰다’는 것이다(물론 그는 헤겔을 읽었지만, 당시의 정견 때문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Bukharin)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등등. 나는 이것을 1914년의 레닌에 대해 보는 '다시 생각하기' 방식이라고 부른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내 용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강박적인 비독창성’이다. 왜? 1914년과 1916년 사이의 기간에 레닌의 글을 읽으면 레닌은 당신의 멱살을 잡고 말할 것이다. '나는 독창적이지 않아, 알겠어? 나는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던 말을 할 뿐이다. 이것은 교육을 받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는데, 지금 배신당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수사법일 수도 있지만,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깔끔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를 이 시대의 상황에 대한 레닌의 강령, 전망, 정의로 이끌 수 있고, 둘째로 그러한 사상의 이념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이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1914~1916년을 '짐머발트(Zimmerwald) 좌파'의 시기라고 부른다. 짐머발트는 스위스의 작은 마을로, 1915년 9월에 여러 나라의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들의 대표들이 모여 3일간의 회의를 열었다.
'짐머발트 좌파'는 레닌이 그 운동 내에서 주도했던 분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더 혁명적이었고 더 급진적이고 패전주의적이며 비타협적인 입장을 원했는데, 이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두드러지게 했다. 이것은 매우 작지만 잘 알려진 그룹에 대한 지도적인 주장을 내세우며 레닌이 처음으로 유럽 규모의 지도자로써 나선 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레닌은 모든 짐머발트 좌파가 카우츠키가 1914년 이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혁명은 전쟁에서 비롯될 것이며 우리는 새로운 혁명적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강박적인 비독창성'의 사례인 것이다. 레닌은 카우츠키가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말했던 것과 가장 강력한 연관성을 가진 것이 자신들의 그룹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 몇 마디 해야겠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책은 80~90페이지의 팸플릿에 가깝다. 1909년에 나왔으며 1902년 <사회혁명>이라는 책으로 시작된 발전의 결말 부분이다. 수정주의자들에 맞서, 이 두 책들은 혁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혁명이 점점 더 필요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고히 했다. 모순이 첨예해지고 우리는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지도부에서 당의 이름으로 제작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이 책을 출판하려고 했던 경험은, 당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카우츠키에게 알려주었다. 이것은 대반역죄로 기소될 위험이 있다는 핑계였다. 이 변명은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근거는 상당히 희박했다. 그래서 카우츠키는 문 뒤 편에서 싸워야 했고, 타협안은 만약 그가 이상한 단어를 한두 개 바꾸기로 동의한다면 책이 출판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대한 것들은 바꾸지 않았다.
당의 후원으로 독일에서 출판되기 거의 전에 이미 러시아를 포함한 다른 곳들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가 그것을 다시 읽어보자고 호소하기 시작한 1914년 전까지는 레닌이 그것에 대해 논평한 기록이 없다. 나는 그가 슐라프니코프에게 한 자신의 충고를 스스로 따랐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말 그대로 <권력으로 가는 길>로 가서 길을 따라가며 카우츠키가 이전에 했던 말을 지적하면서 인용문을 뽑아내는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시작한다.
“수십 년 동안,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는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심지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그랬다. 따라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정확히 정의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배외주의(social chauvinism)에 대한 지적 태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옛날엔 그것이 어떠했는가? 오늘날 그것은 무엇인가? 미래에 그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 중 첫 번째 질문의 일부는 1909년 카우츠키가 쓴 팸플릿인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찾을 수 있으며, 우리 시대의 과제에 대한 가장 완전한 설명을 담고 있는 이것은 여러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제 이 이상들이 너무 뻔뻔하게 버려져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한다.”
레닌은 결론적으로 주장한다. "이것은 가장 훌륭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약속했던 독일 사회민주주의고 이것이 바로 존경할 수 있고 또 존중해야 할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다." 나는 그가 이것을 얼마나 강하게 느꼈는지 뿐만 아니라 이 "가장 훌륭한 사회민주주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그의 믿음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레닌은 이것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는 이 기간 내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내 생각에 그러한 언급의 마지막은 1918년 또는 1919년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혁명>에서 그는 국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권력의 길>을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카우츠키의 저서 중 최고라고 말한다. 그는 카우츠키가 말한 어떤 것도 실제로 비판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국가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문제인데,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 주장에 동의한다.
요약
나는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 책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할 것이다. 이 요약은 레닌 자신이 그 책을 다시 읽을 때 꺼내온 인용문으로만 구성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레닌에 의한 그 책의 요약본이다.
"우리는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특히 ... 세계대전이 임박했고 전쟁은 또한 혁명을 의미한다." "혁명적 열정의 시간이 오는 것에 따라서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는 것 때문에 "이러한 혁명적 상황은 사회적 양극화의 가속화로 이어질 것이다."
"우선 첫 번째로 농민 같은 소부르주아 세력이 집단적으로 우리 편으로 넘어올 수 있다." "서유럽은 사회주의를 향해 무르익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시기상조적인 혁명을 말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오래 기다려온 프롤레타리아 독재야말로 가까운 미래에 진짜 가능한 일이 됐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정당의 임무는 "일관되고 흔들리지 않으며 화해할 수 없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레닌이 선택해서 활용한 이 책에는 세계혁명의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점도 언급해야겠다. 올바른 변증법적 방식에 따라서 나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옮겨갈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것은 혁명적인 상황의 개념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발전의 시기와 전혀 다른 혁명적인 시기를 번갈아서 보고 있다.
평화적인 상황과 혁명적인 상황은 그것의 논리와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이 서로 다르다. 즉, 촉구되는 전술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한 차이점 중 하나는 발전 속도에 관한 것이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말했다(레닌을 비롯한 많은 혁명가들이 왜 카우츠키를 존경했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격동의 시대가 오면, 단번에 발전 속도가 빨라진다. 이러한 시기에 다수 대중들이 얼마나 빨리 배우고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대해 명료성을 얻는지는 아주 놀라울 정도다. 그들의 용기와 투쟁에 대한 열망은 물론 정치적 관심도 그들의 노력에 의해, 가장 어두운 밤으로부터 그들이 일어설 태양이 눈부신 영광의 시간이 그들을 위해 다가 왔다는 의식에 의해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자극된다. 가장 게으른 자도 부지런해지고, 가장 비겁한 자도 대담해지고, 지적으로 가장 제약된 자도 더 넓은 정신적 이해를 하게 된다. 그런 시대에는 그렇지 않으면 한 세대를 필요로 할 대중들의 정치 교육이 몇 년 만에 이루어진다.”
레닌 또한, 우리가 수십 년간의 평화적 발전에서보다 혁명적인 상황에서 몇 달 동안에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이런 생각을 그의 글에서 여러 번 접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혁명적인 상황은 당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정당이 혁명적이더라도, 혁명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객관적인 힘들이다. 당신은 단지 준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는 새로운 전술이 필요하다.
<권력으로 가는 길>을 집필할 당시,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논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중파업은 혁명적인 상황이라면 좋다고 주장했지만, 우리는 지금은 혁명적인 상황이 아니니 지금 당장은 그것을 사용하지 말자고 했다.
나는 실제 직면했던 상황을 평가하지 않고 혁명적 상황에 대한 구상이 당의 대응 맥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강조할 뿐이다. 그것이 가장 추상적인 생각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혁명적 상황을 인식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들의 또 다른 상당히 추상적인 집합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것에 대해 꽤 잘 알려진 레닌의 인용구가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카우츠키가 제시한 것과 매우 강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1. 인민에게 적대적인 정권, 2. 화해할 수 없는 반대 정당, 3. 당에 주어지는 대중적 지지, 4. 정권의 신뢰의 위기라는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레닌 자신의 정의에도 네 가지 부분이 담겨 있는데, '강박적 비독창성'의 수사법은 레닌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그것은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다 - 여러 번 발전되어 온 이 견해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우리 러시아인들에게는1905년의 경험에 의해 특히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확증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자신의 정의를 위해 독창성을 부인한다.
카우츠키는 세 시기 중 하나로 이동한다는 생각을 가진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 1871년까지의 혁명적 시기, 2. 1871년에서 1905년 사이의 평화로운 발전의 시기, 그리고 3. 1905년 이후 - 혁명과 불온 그리고 가속화된 혁명적 발전의 새로운 시대였다. 레닌은 이 생각을 채택했고, 그것은 제2인터내셔널에서 일어난 일, 즉 평화의 시대에 그것이 퇴보했다는 그의 설명의 일부이다.
이제 [추상에서] 구체로 눈을 돌려 카우츠키가 말한 것과 레닌이 유럽에서 예상되는 혁명적 상황에 대해 알아낸 것을 살펴보자. 서유럽에서는 베른슈타인같은 사람들을 둘러싼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계급 모순이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첨예화되고 있었다.
사회주의라는 틀과 전제조건이 갖춰져 있어 혁명이 섣부르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느 순간에 레닌은 이에 대해 "서유럽의 객관적 조건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성숙해졌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이는 모든 선진국의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전쟁 이전에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인용문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로, 카우츠키가 주역을 맡고 있을 때 레닌은 분명히 '선진국의 모든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로, 내 생각에 "우리가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진술은 이러한 ‘강박적인 비독창성’의 수사적 사용을 보여준다. 그는 어떤 급진적인 러시아인만이 당신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문가들의 잘 알려진 합의사항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믿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카우츠키 자신은 <권력으로 가는 길>에는 새로운 것이 없으며, 그것은 단지 지난 7~8년 동안 자신이 주장해 온 것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었다.
그 때 거기에는 내가 '국제적인 상호작용의 혁명적 시나리오'라고 부르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카우츠키의 한 측면이다. 그리고 그는 식민지 정책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1890년대의 유명한 논쟁으로 이어진 에드워드 베른슈타인(Edward Bernstein)에 대한 그의 첫 공격은 식민지 정책을 가로질렀는데, 베른슈타인이 윤리적 혹은 '좋은' 식민주의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지난번 강연에서 언급했듯이, 카우츠키는 특히 러시아에 대해 관심과 지식이 많았고, 그리고 볼셰비키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도 이 국제적인 시나리오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것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로, '상호작용'(interactive) 공식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사건이 다른 나라의 사건들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며, 카우츠키는 우리가 이해해야 할 어떤 것으로서 그것을 강조한다. 그는 이 그림을 어떻게 작성하는가? 먼저, 여러 나라의 계급투쟁들 사이에는 온갖 종류의 연관성들이 있다.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유럽의 사건들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 러시아의 경우가 그렇다. 오늘날의 어떤 계급투쟁도 어제의 그것들과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알고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부르주아 혁명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외부적 지배와 싸워야 할 새로운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할 수가 없다. 셋째로, 여러분이 '압축적(syncopated) 발전'이라고 부를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여러분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후진성은 실제로 이점이 될 수 있다. 그가 이를 보여주는 한 사례는 봉건제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이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생각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 '상호작용' 공식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또한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러시아의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후진국이기에, 더 편협한 서유럽 국가들 중 하나로서 보다 사회주의 유럽의 맥락에서 더 빨리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민족주의 혁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중국, 터키,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상황을 뒤엎을 새로운 발전을 대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어하며, 이러한 나라들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카우츠키에게 이것은 그들이 자본주의를 약화시키고 있고 전 세계에 정치적 불안의 요소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 즉, 그는 이러한 운동들이 민족적 압제에 맞서 싸우고 있고 또한 유럽 열강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응원하고 있다.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과 '윤리적' 식민주의자들에 맞서서 논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 정책은 유럽 국가만이 발전이 가능하다는 - 다른 인종의 사람들은 멍청이들이나 짐 나르는 짐승들이다 -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고 심지어 사회주의자들조차 윤리적 식민지 팽창 정책을 추진하기를 원하며 이러한 가정 아래 행동했다. 그러나 현실은 곧 그들에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우리 당의 강령이 단순한 화법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인 힘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카우츠키는 사람들이 완벽하게 저항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 선언을 쓸 때는 서유럽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장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전 세계가 그렇게 되었다. 오늘날, 전체 노동자의 해방 투쟁과 착취당하는 인류의 싸움은 슈프레강(Spree)과 세느강(Seine)의 둑뿐만 아니라 허드슨강과 미시시피강(Hudson and the Mississippi), 네바강와 다르다넬레스강(Neva and the Dardanelles), 갠지스강과 황화강(Ganges and the Huangho)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여기서 나는 페테르부르크 근처의 러시아 강인 네바강에 주의를 환기한다. 카우츠키는 세계적 불온에 대한 이러한 생각에 러시아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나는 이제 제국주의, 전쟁, 혁명의 주제로 넘어가고 싶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카우츠키가 '초제국주의'(ultra-imperialism) 이론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별로 정확하지 않다. 첫째는 초제국주의는 카우츠키가 앞서 자신이 말하던 것과는 떨어져서 [나중에] 의식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전개한 새로운 이론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고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카우츠키다. 그리고 옛 정설을 옹호하고 있는 사람은 다시 한 번 레닌이다. 그래서 레닌이 카우츠키로부터 시대적 과제에 대한 정의를 얻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제국주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초제국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에 격분했다.
이것에 대해 두 번째로 할 말은, 카우츠키가 지금 당장 초제국주의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강력한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국주의자들이 어느 순간 쉽게 모여서 모든 사람을 한 팀으로 착취할 수 있을 때 왜 서로에게 총을 쏘아야 하는지 의아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정확히 예언이 아니었고 미래의 가능성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레닌을 그토록 격노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함축적 의미였다. 그는 만약 당신이 제국주의와 함께 평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기대를 져버리는 것이고 어쨌든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고, 그래서 우리의 현재 쟁점들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카우츠키의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발견한다. 첫째,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그의 말은 사람들이 절박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막다른 골목으로 보지만, 하나의 위대한 갱신의 아이디어가 있다. 나라에서 출발해, 세계에서 만들고, 인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스스로 잘 헤쳐가는 제국주의.
그러나 그는 이 터무니없는 생각이 한번 깨지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세계가 완전히 분열되고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제국주의는 세계를 분열시켰다는 점에서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제국주의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지배계급이 혁명을 두려워해 전쟁을 꺼려하는 상황에 우리가 놓여있지만 저들은 스스로 총에 불을 당길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인도가 가져다 준 수익 때문에 영국이 사회혁명을 피했다 - 그리고 이것은 ‘부르주아적 노동자 당’[인도 지배에 침묵한 영국 노동당에 대한 비판] 개념과 연결된다 - 는 것도 또 다른 그의 발상이다. 내가 보기엔, 그가 ‘노동 귀족’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가 다른 곳에서 그것에 대해 논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국이 인도를 착취하여 양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인도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영국에게 위기를 의미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인도가 떨쳐 일어나고 나서도 영국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정말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게 한다.
나는 1904년쯤에 쓰여진 이런 생각들을 평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혁명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유로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생각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게다가 레닌과 카우츠키 모두 그 피해를 제한하면서 영국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찾으려 하고 있다.
내가 한 말을 모두 요약하면, 즉 점점 커지는 국내외 계급 모순에 근거해 예측하면 격변기와 불안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함께 끝날 것이라는 것이다. 1906년에 카우츠키는 이렇게 말한다(나는 그가 러시아 혁명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출범을 약속하고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어질 새로운 유럽 혁명의 시대로서,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 구축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전술과 '새로운 레닌'
내가 카우츠키에게서 이러한 주제들을 강조해온 이유는 레닌이 그것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전술적인 결론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레닌이 이 격변의 시대에서 끌어내는 두 가지 주요 전술적 결론은 어느 정도는 다소 모호하더라도 카우츠키에게도 담겨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가 1914년 9월에 이미 다가가고 있던 두 가지 전술이다. 즉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에서 기회주의를 추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의 첫 번째로, 나는 레닌에게 매우 중요했고 그가 여러 번 언급했던 1912년의 바젤 선언문(Basel manifesto)으로 여러분의 관심을 끌고자 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자 국제회의의 일련의 성명서 중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외교적 위기 때문에 만들어진 특별한 것이었다. 이 선언문은 그것을 여러 번 언급한 레닌에게 중요한 것이었는데, 내 생각에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모두가 서명한 엄숙한 문서였지만 실제로 실행된 것은 적었기 때문이다.
바젤 회의에 참석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자들은 "전쟁으로 야기된 정치경제적 위기를 이용해 민중을 각성시켜서 자본가 계급 통치의 몰락을 앞당기겠다"는 1907년의 결의를 반복했다. 그것은 레닌이 깨달은 것보다는 조금 더 회피적이다. "민중을 각성시켜서 자본가 계급 통치의 몰락을 앞당기겠다"는 문구가 어떻게 쓰여 있는지 주목하라.
그가 이해한 것은 정당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즉 부당한 전쟁을 혁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들 자신의 선언의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카우츠키도 서명한 엄숙하고 구속력이 있는 의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바젤 선언이 사회주의 전통 안에 정확하게 들어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강박적인 비독창성'의 또 다른 부분이다.
레닌에게 그것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시대 전체에 걸쳐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발표한 수많은 변론, 수많은 선언, 기사, 책, 연설들의 총합이었고, 선언문을 한쪽으로 치우는 것은 사회주의 역사를 한쪽으로 치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들이 이것을 한쪽으로 치우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배반자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그것이 다음 전술적 결론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국제적 당들로부터 기회주의를 추방하자는 것이다. 레닌이 이것으로 이루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카우츠키를 처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사실상 카우츠키를 인용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첫째로, 그는 기회주의 개념을 개발하고 투쟁한 것에 대해 카우츠키에게 전적인 공로를 돌린다. 카우츠키가 비록 1914년에 배신자가 되고 기회주의자가 되었지만, 1920년에도 레닌은 여전히 그가 기회주의와의 싸움에서 훌륭한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로, 레닌에게는 새로운 사회배외주의(social chauvinism) - 즉, 국익을 옹호하는 사람들 - 는 다시 태어난 낡은 기회주의일 뿐이었다.(그런데, 가장 과격한 사회애국주의, 사회배외주의인 사람들이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좌파에 있었던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이 주장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레닌은 자신과 카우츠키가 옛 제2인터내셔널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 즉, 기회주의 대 정통주의 - 라는 측면에서 1914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레닌은 실제로 기회주의가 너무 지배적이 되면 분열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카우츠키를 인용한다. 카우츠키는 기회주의가 단순한 분위기나 위험이 아니라, 장악을 위협할 정도의 경향이 되면 분열할 것을 충고했다.
그리고 나서 - 이것은 꽤 놀라운 일이다 -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의 이름을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 카우츠키가 말한 것을 인용한다. 카우츠키는 제3인터내셔널을 호소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그 아이디어는 레닌이 카우츠키로부터 얻은 것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내가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은 1914년과 1916년 사이에 레닌은 새로운 전술을 필요로 하는 특정한 특징을 가진 혁명적 상황과 세계적 불안을 근거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들에 대한 그의 이해와 그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을 옛 인터내셔널과 칼 카우츠키로부터 얻었다.
나는 또한 레닌이 이런 종류의 가정을 하는 것에는 수사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만약 그가 가서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생각해야하고 지난 30년 동안 모든 사람이 잘못했다’면서 그것을 근거로 사람들이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면, 그는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가 한 일은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말하던 것을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나는 그가 옳았다고 생각하지만, 설령 그가 틀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수사적인 것일 뿐이고 그가 진정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레닌이 카우츠키와 그의 <권력으로 가는 길>이 우리 시대의 과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레닌의 마음속에서 정치지도자의 일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폭넓은 정의를 내리고 그 원리에 충실하고 상황에 적용되는 전술을 짜내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가 변증법을 이야기할 때 의미했던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순간 그는 카우츠키가 우리에게 변증법을 가르쳤다고 말하지만, 1914년에 이르러서는 그것들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14년은 새로운 레닌으로 이어졌을까? 나는 그것이 한 가지 방법으로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레닌이 자신을 유럽적 규모의 노선으로 올라가게 했다. 그는 지금 유럽적 프로그램을 가진 유럽의 지도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아마도 '카우츠키가 더는 카우츠키가 아니었기 때문에 레닌이 카우츠키가 되어야 했다.'
(기사 등록 20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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