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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미아들을 낳는 시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2. 8.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이 세계의 어느 사회나 다 위계질서적입니다. 중산 계급의 규모가 커지고 노동자들을 ()중산계급으로 만든 전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위계의 피라미드는 기존의 사회나 오늘날 사회에 비해 덜 가파를 수 있었겠지만, 좌우간 피라미드는 피라미드입니다. 이 구조는 본질적으로 과연 언제, 어떻게 바뀔 수 있을는지, 저는 대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에는 거의 없어졌지만 각종의 '혁명 정당'들이 아직 존재했을 때에 그 '전위당'들의 내부 구조도 결코 평등하지만 않았기 때문이죠.

 

그들이 집권한다고 한들 사회가 수평화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런데 위계의 존재만큼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위계에서의 신분 상승 내지 하강에 대한 각종의 ''들입니다. 사실 이 ''들이야말로 한 사회의 중심적 현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죠. 만약 자신의 신분을 향상시킬 의사가 있고, 그럴 만한 자격 (개인적 자질부터 학력 등까지)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신분 상승의 통로가 있으면, 이 사회에서는 매우 격렬한 가두 운동들이 일어날 수 있어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컨대 구미권이나 일본의 1968'데모 학생'이나 1987년 한국의 '데모 학생'들이 졸업과 함께 안정된 직장과 주택, 자동차 구입을 할 수 있었던 만큼, 즉 신분의 지속적 상승을 할 수 있었던 만큼, 격렬한 데모들이 탈권위주의 내지 제도적 민주화로 이어져도 사회의 기본적 재산 소유 관계를 바꾸는 명실상부한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반면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노동자 출신이 '고급 사회'에 진입할 수 없었던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당으로 합류한 주변적 하급 지식인과 노동자들이 결국 옛 사회를 뒤엎어 본인들이나 본인들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대학에 진입하고, 나아가 장관직이나 대사직을 가질 수 있는 신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사회도 당연히 수직적 피라미드형 사회이었지만, 그 피라미드의 윗쪽 구성원들은 거의 전부 물갈이된 것이었습니다.

 

신분 운동의 차원에서 본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는 참... 양가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전후 자본주의 유산 중의 하나인 대중적인 고등교육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지금 약 50% 되어 '고학력 사회'가 형성되었지만, 사실 영국이나 미국, 노르웨이의 고등 교육 이수율은 대체로 45% 정도 되는 것입니다. '대중화된 고학력의 사회'는 이제 세계 자본주의 체제 핵심부의 보편적 상황에 가깝습니다. 고학력이란 사회 신분 상승을 위한 주요 자원입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기득권'을 한없이 편들어 줍니다. '사교육-명문대 시스템'이 너무나도 잘 돌아가는 한국에서는 그게 훤히 보이지만, 실상 유럽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유럽에서도 취직 경쟁이 치열한 요즘에는 '괜찮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통 짧으면 1년 길면 몇년간의 인턴 경력 같은 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유럽에서도 인턴이 대개 '무급' 아니면 '최저 임금'이라는 사실이죠.

 

이런 인턴 자리들은 유럽 연합 전체에서 지금 약 5백만 개 정도 있는데, 처음으로 정규직 취직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약 절반 정도는 적어도 한 번 인턴을 거치고 나서 정규직이 된 것입니다. 21%4번 이상 인턴을 했고요. 그런데... 무임금 내지 저임금으로 일년이나 몇년 일해야 하는 아이를 지원할 수 있는 가정은, 과연 상류층 내지 중상층 아니면 가능할까요? 불가능하지 않아도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대학을 졸업해도, 중상층 가정의 출신이 결국 인턴을 거쳐 결국 그를 정규직으로 만들 수 있는 직장으로 가는 것은, 중하층 가정의 출신보다는 훨씬 현실적일 것입니다. 사실상 신분의 세습이 이루어지는 꼴이죠.

 

그러면 신분 상승의 자격 (고학력)은 있어도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이 상황에서 '혁명'의 기운이 아직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전혀 보이지 않는 건 아니죠. 미국의 20대들의 다수가 이제 자본주의 아닌 (복지 국가 의미의) 사회주의를 선호한다는 것부터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의식은 좀 급진화되고 가두 행동이 많아져도 그래도 그들의 대부분이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엎을 의사나 능력이 없는 이유는? 제가 보기에는, 사회가 그들을 애당초부터 '혼자 몸'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학생 때부터 말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오슬로대에서는, 데모는커녕 총학생회 선거에 투표권 행사를 하는 학생들은 전체의 20% 정도 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미래의 고용주들이 좋아할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열공'을 하고, 알바하느라 바쁜 것이죠. 어릴 때부터 경쟁과 자아에의 집중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에게는 '혁명'은커녕 기본적인 집단적 '운동'도 아주 쉽지 않고 아예 공공 영역에서의 그 어떤 참여도 어려운 것입니다.

 

또 그런 '운동'을 위해 신자유주의 피해자들이 '같이' 손을 잡지 못하게끔 시스템이 설정돼 있기도 하죠. 신분이 불안한 인턴이나 비정규직 피고용자, 아니면 학계의 박사이후과정생이나 프로젝트 연구자 등등은, 결국 다 미래의 취직 과정에서 서로서로 '경쟁자'가 돼야 하는 설정입니다. 과연 호상적 연대가 쉽겠어요? 그러니까 신분 상승이 막혀도 사회가 거의 큰 동요 없이 '그냥' 돌아갈 수 있는 형국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상황을 '미아'라는 단어로 압축적으로 지칭하고, 며칠 전에 나온 저의 신간 (<미아로 산다는 것>)에서 과연 '미아'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약간의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사실, 기존 세대의 일원으로서 제가 '미아 세대'에 대한 미안함 같은 걸 많이 느낍니다. 세대간의 착취의 먹이사슬에서 제가 속하는 1970년대 초반 출생들의 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에 대해 일종의 착취자로 나오게 되어 있게 때문입니다. 카페에서, 식당에서, 상점에서의 밀레니얼 저임금 젊은 노동자들의 "싸진 노동", 결국 저 같은 사람들의 상대적 '웰빙'의 기반이 되는 셈이죠. 그런데 과연 착취로 일관되는 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웰빙', 즉 잘 산다는 게 가능하기나 하나요?  


(기사 등록 20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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