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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차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1. 29.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직업적으로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해마다 제 학생들에게 왜 동아시아가 아닌 유럽이 18세기말에 선수를 쳐서 먼저 공업화로 나갔느냐를 수업 시간에 설명하곤 하는 일입니다. 사실, 유럽의 이와 같은 '도약'... 예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본래는 유라시아의 경제, 교역, 기술상의 중심지는 당연히(!) 동아시아권이었습니다. 로마제국과 한나라가 동시에 존재했던 시기에 로마의 귀부인들이 한나라 생산의 비단을 즐겨 입곤 했지만, 한나라로서 로마로부터 수입할 만한 것은... , 은이나 유리잔 정도이었습니다.

 

당나라 시대에 경교 (景敎) 형태로 시리아계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오는 등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는데, 당나라 사학자들이 인식을 하는 유럽의 유일한 나라는 비잔틴 제국(大秦) 정도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그저 별 볼일 없는 야만인들의 국가쯤으로 보였죠. 송나라 때에는 중국은 이미 화기부터 지폐, 그리고 주식회사 시스템까지 다 갖추고 있었지만, 이와 같은 자본주의 맹아가 북부 이태리나 화란국에서 생긴 것은 그것보다 몇세기 뒤의 일이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利瑪竇)의 라틴어 기록들을 보면, 그가 명나라를 세계 최강의 국가라고 적고 이 나라가 왜 유럽을 정복하지 않았을까, 마음만 먹었으면 충분히 가능했으리라고, 이렇게 적습니다. 그러니까 명말청초 만 해도 유럽인에게는 중국은 여전히 한 수 접고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도대체 이 관계가 18세기말 영국의 공업화로 어떻게 해서 전도됐을까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지만, 나머지 요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회로 미루고 오늘은 역사지리적인 요인만을 적어보죠. 전성기의 로마 제국의 지도와 한나라의 지도를 한 번 펼쳐보시고 비교해보시죠. 로마가 영토화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의 '전부'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금일의 독일을 라인강까지만 통제했으며, 스칸디나비아나 오늘날 동유럽의 대부분은 전혀 로마 군인들의 군화가 밟지 않았던 땅이었습니다. 스칸디나비아에 대해서는 로마 지식인들이 정확한 정보도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유럽의 밀림은 교통 내지 교역, 정복을 크게 방해했습니다. 반대로 한나라는... 중원을 다 평정하고 심지어 돈황에서 서역도호부((護鄯善以西南道)를 설치하여 서역 지역까지 간접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과 북월남을 쳐서 적어도 몇 세기동안 그 땅의 일부를 영토화하기도 하고요. , 동아시아에서는 '중앙의 제국'은 처음부터는 상당한 포괄성과 자기 완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나라 이후 동아시아 역사를 통틀어 보면 대부분의 시기에는 중국은 통일돼 있었고 중국 이외에는 월남, 조선, 일본, 유구, 토번 등 그다지 많은 독립적 정치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제국의 세계'. 반대로 유럽은 한 제국에 의해 완전하게 통일된 적도 없고 부분적 '제국적 통일'의 시기도 거의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그리고 16세기의 서반아와 오지리(墺地利)의 합스부르그 왕가 등이 해낸 것은 아주 부분적 일부 유럽 영토의 통합이고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는 단명의 제국적 통합이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통념적으로 '통일'은 좋은 일이고 '분열'은 나쁜 일처럼 배우고 인식하고 그렇지만, 사실 역사적으로는 '제국'에 의한 통일보다는 차라리 분열 상태가 더 재미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강한 제국은 애당초부터 도시들의 자율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짓밟을 수 있는 것이죠. 중국의 행정 제도를 본딴 조선에서는 육의전(六矣廛) 등 국역을 부담하는 한성의 어용 상인들은 '도중'(都中)이라는 자체 의결 기관을 가지고 내부적으로 길드식의 나름대로의 '자치적 운영'을 했지만, 한 도시의 거상 등 부유층이 도시 규모의 지방 자치를 한다는 것은 중국, 조선, 월남의 왕국 행정 체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만큼 중국, 월남, 조선은 '강성 군주국'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훨씬 행정력이 약했던 유럽의 중세 왕국들은 불가불 거상 내지 수공업자들의 길드에 의해 운영되는 자치 도시들을 그냥 눈감아주고 관용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공업화 시대를 이끌 '부르주아'계층의 뿌리가 숙성된 것이죠. , 굳이 그리 이야기하자면 종로쪽에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육당 최남선의 아버지 최헌규(崔獻圭) 같은 조선 말기의 중인들도 말하자면 조선의 자생적인 '부르주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구와 달리 그들에게는 자치 도시 운영 참정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즉자적 계급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죠.

 

그리고 지리적으로 '통일 제국'이 불가능한 것은 또 한 가지 잇점이 있었습니다. '유럽'을 이룬 봉건, 절대 군주국들은 사활을 건 호상 경쟁에 몰두해야 했으며, 그 경쟁에 있어서의 제일 중요한 수단은 바로 잉여 수취가 가능한 유럽 밖 자원 지대의 획득이었습니다. 북구의 덴마크, 스웨덴마저도 카리브해나 인도에서의 약간의 식민지 경영을 했으며, 유럽의 '대국'이라면 1492년 이후로는 '해외 식민지 보유'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었습니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신대륙까지는 항해하기에는 너무 멀고 시베리아로 진출하기에는 기후 적응 등은 힘들어 불가능했습니다.

 

청나라는 토번과 서역을 직접 지배하기에 이르렀지만, 그쪽은 고산, 사막 지대가 많아서 잉여 수취할 만한 게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유럽인들이 종사했던 대서양 노예 무역이나 카리브해 사탕 농장 경영, 북미에서의 목화 농장 경영, 남미에서의 은 채굴 등에 비해 조족지혈이었죠. 결국 1492년 이후의 노예 무역과 노예 농장, 인디언 농노들이 일했던 볼리비아 보토시와 같은 은 채굴 광산으로부터의 잉여야말로 맑스 말대로 유럽 원시 축적, 즉 공업화를 이루는 과정의 '본전'을 형성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역사를 '흠모'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역설이지만, '자유 노동'을 그 대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로의 전환의 가능성을 제공한 것은 바로 극단적인 '비자유'의 극치인 흑인 노예 무역, 노예 농장의 경영, 그리고 식민지 약탈이었습니다. 핵심부에서의 '자유'로의 발전을 수반하는 것은 식민지에서의 '비자유'의 심화 과정이었죠. 최근 BLM 운동이 보여준 것은, 유럽 역사의 이 '원죄'를 피해자들의 후손들도 전혀 잊은 바가 없으며 구미 사회의 '주류'도 딱히 변명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극우들이 '75년 전의 일제 징용을 왜 이제 와서 끄집어 내느냐'라고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다니지만, 구미권의 BLM운동이 본격적으로 문제로 삼는 것은 16세기 초반 이후의, 나중에 구미 자본주의 발전의 '본전'이 된 노예 무역의 이윤입니다. 결국 이 이윤으로 흥한 구미권의 자본주의 사회들이 피해자들의 후손들에게 보상을 행하지 않는 이상은, 현재 구미권의 사회 갈등의 국면을 본격적으로 무마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공업화, 자본주의 발달의 궤도는 이처럼 '역사'이면서도 현재의 문제가 되는 셈이죠


(기사 등록 202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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