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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규제를 어기지 않고 살 수 있는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2. 20.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자칭 준법 시민입니다. 꼭 착해서도 아니고 아마도 어떤 '자격지심' 같은 게 강하게 작동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가난한 동구 주변부의 출신의 몸으로 '세계 최부국' 노르웨이에서 사는데, 저 같은 동구 출신에 대한 많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 중의 하나는 바로 '잠재 범죄자' 같은 시각이니다. , 한국인들의 연변 조선족에 대한 흔하디흔한 편견들을 보시면 바로 상상 가시겠죠?

 

그런 편견이 주변에 하도 흔한 만큼, 전 되도록이면 모든 법들을 글자 하나 어기지 않고 지키려고 합니다. 대학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를 하는데, '플라스틱'통에 휴지 조각 한 번 버린 적이 없는 정도의 '준법' 집착이죠. 저뿐만 아니고 제 주변의 연구 노동자들도, 대개 보면 적신호에 불법 도로 횡단 한 번 안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무리 '철저 준법'을 평생의 모토로 삼아도 삶을 살다가 '모든' 규제를 정말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규제가 별로 많지 않은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도 말입니다. 예컨대... 몇년 전에, 그 때 중딩이었던 제 아들은 저의 학교에서 저의 '조수'로 소위 의무적 노동 실습을 했습니다. 본래 모든 노르웨이 학교에서 아이들이 이렇게 며칠 의무 노동을 해야 하는데, 제 아이의 아빠가 학교 있다 보니 제가 제 조수로 며칠 부렸습니다. 저희 학과 사무총장이 미리 발급해준 '의무 노동 실습 확인서'에서는 실습의 시간수는 규정대로 5시간으로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이가 할 줄 아는 게 복사, 스캔 정도인데, 제게 복사해야 할 자료가 얼마 없어서 그냥 2시간 반 정도 부렸다가 집으로 보내버렸습니다. 보시는 분들이 이게 별 게 아니라 하시겠죠? 맞습니다. 별 게 아닙니다. 한 번 쉬지 않고 그 정도 열심히 스캔해주었으면 약간 봐주어도 양심에 크게 걸리지 않았는데... 만의 하나에 이게 노르웨이가 아닌 대한민국이었다면, 그리고 만의 하나에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 조직이 저를 패가망신시키고 싶은 마음이 태산 같았으면 이게 무엇이 됐을까요? 맞습니다. 공문서 위조가 됐을 것입니다. '표창장' 정도로 충분히 침소봉대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런 게 있습니다. 대부분 대학 교원들이 비행기를 자주 탑니다. 대개는 한달에 1~2회 해외 출장 가는 게 북구 교원으로서 보통입니다. 그러다가 마일리지가 쌓이는데, 만의 하나에 제가 어쩌다가 한 번 이 마일리지로 기내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공항 라운지 등을 이용한다면? 제 마일리지 중에는, 연구비를 받아 비행기표를 사가지고 누적된 '공적 마일리지'도 있고 자기 돈으로 휴가 다녀와서 생긴 '사적 마일리지'도 있는데, 카드가 하나인지라 그게 구분될 수 없습니다.

 

구분이 안된 상황에서 마일리지를 개인적으로 써버리면? 이건 말하자면 '회색 지대'입니다. 경찰의 '의견'에 따라서 편/불법이 될 수도 있고 '경미한 문제'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이런 사건을 검찰이 아닌 경찰 조직의 검사관 (politiadvokater)들이 담당을 하고, 그들이 대학 교원에 대한 특별한 악감정이나 정치적인 적의가 없는 이상 제 동료들이 겁을 먹지 않고 그냥 살아갈 수 있는데... 만약 우리가 정치적 갈등의 ''에 위치하고 경찰이 우리에 대해 '처벌 욕망'이 강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한국은 노르웨이보다 규제들이 훨씬 많고 까다롭습니다. 한국을 실제로 좌우하고 있는 대기업 조직 안에서의 일까지 국가가 별로 규지하지 못하지만, 특히 대학가는 규제들이 아주 많죠. 평생 동안 조직 생활을 하면서 그 많은 규제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검찰의 기소 독점이 유지되는 이상, 사실 우리 모두의 공적 생활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다 검찰의 손에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범죄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 적어도 대학가에서는 -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검찰이 일종의 유사 정당화되면 이게 대한민국 최강의 정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공수처가 신설돼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공수처 처리 대상은 7~8천 명으로 한정돼 있을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검찰의 개혁 없이는 이 사회의 앞으로의 개혁 진척은 아마도 많이 어려울 것입니다. 과거의 하나회 해체, 군의 정치 중립화 등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들도 분명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회가 계속 존재했다면, 군 지휘관들이 김대중을 '빨갱이' 취급하는 정치 군인들이었다면, 평화적 정권 교체가 가능했을까요?

 

 (기사 등록 202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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