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한국학에 대한 최초 학술 논문을 26년 전에 썼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적어도 하나 이상 계속 써왔습니다. 한글로 쓰면 참고문헌 목록에서는 출판사만 적으면 되고 출판한 곳을 적을 필요가 꼭 없지만, 구미권이나 러시아의 학술지들은 대개 '출판한 곳'도 꼭 적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파주에서 출판 단지가 생겨 예컨대 한길사를 "파주: 한길사"라고 적어야 하는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나온 문헌들의 출판처는... 너무 간단했습니다. 천안의 독립기념관에서 나온 독립운동사 관련 서적만 빼면 거의 전부 '서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파주를 '수도권'이라고 생각하면, 서울에서의 과도 집중이라기보다는 수도권에서의 출판업의 과도 집중은 여전히 '문제'로 남습니다. 물론 부산의 산지니 출판사 등 '시골'에서도 하나 둘씩 괄목할 만한 출판사들은 나오긴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출판업은 서울 아니면 수도권의 독점 업종입니다. 참고로, 책들이 대부분 다 평양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우리의 하나의 '거울', 북한의 사정도 거의 매한가지지요.
출판업만 그런가요? 북한도 '평양'과 '나머지 나라'로 양분되듯이, 대한민국은 세종시가 건립되고 나서도 여전히 서울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독과점'의 나라죠. 나라 국내총생산의 84%를, 주로 수출에 의존하는 64개의 주요 대기업 집단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19%나 삼성그룹이 차지하는 것이고요. 그러면 나라 경제를 사실상 통제하고 있는 이 64그룹의 본사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 중의 하나인 한진중공업의 본사는 부산이긴 한데, 이건 사실상 거의 유일한 예외입니다. 등기상으로는 포스코의 본사는 포항이긴 하지만, 실제로 강남 테헤란노 포스코 센타는 본사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 중공업의 등기상의 본사는 울산이지만, 건설 부문의 본사는 용산이고요. 하림은 본래 전북 익산에 기업 본사가 있었지만, 최근엔 강남의 논현동에서 사옥을 지었습니다. 그러니 사실 하나만 빼면 '모든' 대기업들의 본사들은 '다' 서울 아니면 적어도 수도권입니다. 강남구만 해도 5군데나 있는 것이죠. 그러면 그들의 거래처, 그리고 그 거래처들의 거래처, 그리고 그 모든 셀러리맨들이 늘 이용하는 서비스업체, 그리고 그 자녀들이 다녀야 하는 명문 학원, 유치원, 사립 학교들은 다 서울에 모아지게 돼 있는데... 이런 판에 무슨 '국토 균형 발전'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사실 이와 같은 수도권에의 '과도 집중'은 근현대사뿐만 아니고 전근대사에서도 나름의 '계보'를 갖고 있습니다. 근대적 계보야 뻔합니다. 국가 주도로 '개발'이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재벌의 본사는 당연히(!) 모든 자원의 분배를 총괄하고 있는 청와대와 무조건 가까워야 했습니다. 전근대적 계보는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의 전통입니다. 사실 이미 조선후기에는 양반사대부 지배층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로 군림했던 사람들은 소위 '경화벌족'(京華閥族), 즉 한양이나 그 근방에 그 근거지를 갖고 있는, 대대로 청요직을 독차지하는 세도가들이었습니다.
경화벌족의 대열에까지 들어설 정도는 아니었지만, 윤치호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같이 무관직으로 나가는 지주 토호들은 논밭을 지방(아산쪽)에 갖고 있어도 집은 한양이었습니다. 사실,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서의 과거를 가진 다른 사회들도, 아주 비슷한 현상을 늘 보입니다. 예컨대 주요 프랑스 사상가들 중에서는 '파리에서 거주하지 않은 사람'을 한 번 찾아보시지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절대 왕권 국가이었던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위상 역시 절대적이었습니다. 러시아 같으면 1703~1918년간의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그 (레닌그라드)이며 그 전과 그 후는 모스크바이었는데, 역시 한 번 누구나 다 아는 러시아 '문호'들 중에서는 이 두 도시와 인연이 없는 '순 지방 사람'을 한 번 찾아보시지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농장을 지방에서 가질 수 있었고, 건강관리상 크림반도 등에서 휴양할 수 있었지만 '주요 지성인'은 이 두 수도 밖에서는 지성인으로서 '기능'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죠.
우리는 역사를 이미 바꿀 수 없습니다. 미국처럼 절대 왕권의 시대를 거치지 않았거나, 독일이나 이태리처럼 비교적 늦게 통일 국민 국가를 만든 경우에는 '서울'과 비견될 만한 '절대적 중심'은 없지만... 한반도 역사는 한반도 역사입니다. 서울공화국과 평양공화국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사정이 상당한 '세계성'이 있는 역사적 맥락 위에서 생겨났기에 그렇게 쉽게는 바뀔 수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강준만 선생의 아주 적절한 말대로 지방이 '식민지'로 살아야 하는 이 상황을 가만 두는 것도 전혀 좋은 건 아닙니다.
우리 지식분자들이 경향의 차별, 즉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차별 해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은 무엇일까요? 일단 취업시 지방대 출신들에 대한 차별의 철폐에 노력해야 할 것이고, 예컨대 공사, 공기업에서 지방대 출신 인재들을 위한 '할당제' 도입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한 학생 당 정부 지원금이 서울대가 경북대보다 4배나 되는, 말도 안되는 대학 지원에 있어서의 '수도권 명문대 편향'부터 시정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학술 행사를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진행하고, 대중 강의도 되도록 수도권과 지방에서 '균형적으로' 하고, 상당수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 지방 언론에 자주 기고하고... 지방의 '식민화'는, 엄청난 젠더 불평등과 과도한 군사화, 재벌의 군림, 그리고 경쟁과 격차의 브레이크 없는 증폭과 함께 이 나라의 주요 문제입니다. 어떻게든 이 해결을 부분적으로라도 모색해야지요.
(기사 등록 20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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