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가끔 가다가 한국 현대사를 강의하면서 이런 유의 질문을 받곤 합니다. "남한은 민주화 운동이 이미 4.19 학생 혁명으로 시작돼 결국 군사 독재 타도로, 1987년 이후 민주화로 이어졌는데, 북한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느냐"라든가, "왜 한국과 대만은 민주화로 이동했는데, 싱가포르는 권위주의 통치 시스템이 영구화됐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아주 간추려서, 이 질문들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답변을 시도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계급 사회의 구조도 안정화되자면 3가지의 기본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즉, 통치의 대상자/경제적 착취의 대상자가 되는 '민'은 1. 통치자들의 명분/정통성(legitimacy)을 신뢰해야 하며 2.정치에의 참여의 기회가 아니더라도 '민'에 대한 동원(mobilization) 시스템이 작동되고 그 시스템을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신분 상승의 기회가 부여돼야 하며 3.경제적인 재분배를 통한 '민'의 포섭(co-optation) 등이 필요합니다.
즉, 만약 치자와 피치자들이 공동의 이데올로기적 명분을 공유하고, 피치자들의 일부에게라도 '출세의 길'이 열려 있고 적어도 일부의 잉여가 피치자들에게 재분배되면, 이 계급사회가 아무리 악질적이고 아무리 반인륜적이지만, 꽤나 오래 갈 수 있습니다.
학생 운동권은 군부 독재자들을 '파쇼'라고 비칭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사실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학도호국단만 해도 Hitlerjugend, 즉 파쇼 독일의 청년단을 모방해서 만든 조직이었으니까요. 젊은 박정희의 애독서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었고, 정권이 일으킨 상당수 관제 운동들의 계보는 일제말기의 파쇼화 시기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새마을 운동만 해도 우가끼 가즈시게 총독 시절의 '농촌 진흥 운동',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심전 개발 운동'을 그 사실상의 모델로 삼은 것이죠. 그런데 박정희나 전두환은 (주변부, 종속적) '파쇼'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들과 '진짜 파쇼 종가'인 히틀러 사이에는 커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히틀러와 같은 자급자족 경제도 아닌 수출 본위의 경제를 '개발'해야 하는 주변부의 종속적 파쇼들의 이데올로기적 주문 ("총화단결!", "유비무환", "한 손으로 싸우며 한 손으로 건설하자!" 등등)들의 효율은, 재분배로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최저임금제마저도 1986년까지 없었던 나라에선 '재분배' 이야기하기도 민망할 정도이었죠.
민주공화당이나 민주정의당은 군부쪽 사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된 '정치 참여'의 기회를 폭넓게 주는 것도 아니고 관제 동원의 도구로서도 극도로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결국 명분도 서지 못하고 재분배로 '민'을 포섭하지도 못하고 '민'들에 대한 동원에도 실패한 군부를, 일부 젊은 중산층 (학생)과 노동자들의 연합이 몰아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죠.
북한의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일단 정권의 (기원 차원에서는 좌파적) 민족주의 명분은 꽤나 강고합니다. 대부분의 국제 정치 전문가들은, 비교적 가난한 소국으로서 독립적인 지정학적 주체로 기능하는 의미에서 북한이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 입을 모으는 것이죠. 그 지정학적인 주체로서의 입장이 북한의 '민'들에게 요구하는 '대가'는 (전국 요새화, 남성들의 10년 군 복무 등) 엄청 크지만, 일단 그 지정학적 독립성/주체성을 뒷받침하는 주체 이데올로기를 '민'들도 공유하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유명무실화된 부분은 크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 여전히 무상 의료와 같은 재분배의 형태가 존재하며, 이외에는 교육과 국가에서 배정하는 주거 등은 여전히 무상입니다. 그리고 군 복무하면서 입당에 성공하면 하급 관리직에 진출할 수 있는 등 당-국가 동원 메커니즘은 여전히 제한적으로나마 '출세'의 가능성을 제시하긴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민주화 등의 형태로 이 정권이 무너지거나 물러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즉, 1987년 이전에는 남북은 공히 '독재'이었지만, 당-국가 시스템의 독재가 남한식 군부 독재와 그 성질상 다르다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참, 싱가포르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거기에도 마찬가지죠.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선진국 싱가포르'식 민족주의가 싱가포르의 저임금 자국민 노동자들에게마저 먹히는가 하면, 공공임대주택의 보급이나 공공연금 등의 재분배는 정권의 동의 기반을 공고화시킵니다. 그러니 이광요-이현룡(李顯龍, 현직 총리)과 그 가신/주변 집단의 통치도, 당분간 큰 동요 없이 이어지리라고 봅니다.
사실, 저로서는 '혁명의 3가지 조건'에 대한 이 이야기는 좀 슬픈 이야기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제 러시아의 정권이 물러나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위에서 말한 내용으로 봐서는 그럴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 본 레바다(Levada) 여론조사센터의 자료로는, 누구에게나 분명한 사실로 보일 만한 나발니의 '의도적 독살'을 믿고 있는 러시아 국민은 25%에 불과하고, 푸틴을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59%입니다.
푸틴의 반서방(anti-Western)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러시아 사회에서 '민'들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으며, 푸틴 지지층의 상당 부분은 국가적 재분배와 직접 관련된 부문 (교육, 행정, 군수공업, 군 등 국가 폭력 기관)에 종사하거나 공공 연금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 정권과 이 정권을 이을 다음의 후계 정권은 아마도 적어도 수십년 간 버티리라고 봐야 합니다. 대단히 아쉽지만, 현실을 현실로 직시하는 게 중요하죠.
(기사 등록 20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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