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혁명'이 현실적인 화두가 오른 시기는 딱 두 번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1919년 3월1일, 즉 3.1운동부터 시작돼 1936년 12월 25일에 경성의 전설적인 지하 공산주의 지도자 이재유가 양주군 공덕리역 근처에서 일경들에게 끝내 잡혀 들어감으로서 '공산당 재건'의 시도들이 사실상 패배할 때까지 지속됐습니다. 그 시기의 주인공은 조선공산당을 이룬 여러 정파들, 그리고 그 재건을 도모했던 수천 명의 활동가, 적색 노조, 농조의 수만 명의 활동가와 멤버들이었습니다.
둘째 시기는 더 짧았습니다. 1980년5월 광주의 화염 속에서 태어나고, 1991년 5월 항쟁의 패배 속에서 끝났습니다. 백골단의 살인적 탄압도 탄압이었지만, 1991년 5월의 시위자들이 1987년 6월과 달리 '대중'들이 그들에게 호의적이지만 않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승승장구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준핵심부에 바야흐로 합류한 대한민국의 대중들은 이제 혁명이 아닌 개혁을 원했죠. 그리고 대중을 잃은 혁명자들은 결국 '이념 셔클', 정권으로서 전혀 위험하지 않는 섹트로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조선의 1920~30년대 공산주의자들은 일제 지배자들에게는 정말 명실상부한 '위험'이었습니다. 일단 1980년대 운동권은 국내에서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살았지만, 일제 시대의 공산주의 운동은 가히 '글러벌'했다고 할 수 있죠.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에 유학간 조선 내지 출신의 조선인만 해도 (주세죽, 조봉암, 조두원, 김단야, 권영태 등등을 포함해서) 거의 200명 가까이 됐습니다.
1920년대 말의 상해 망명자 인구만 해도 2~300명이었는데, 그 중에서의 상당수는 공산계열이었죠. 일제 시대의 국경은 그나마 넘기가 가능해 코민테른과 국내 혁명자들이 계속해서 '연결'을 할 수 있었죠. 대조적으로는, 전두환이 시절 병영 국가 대한민국의 국경은 훨씬 더 완벽하게 밀폐돼 있었습니다. 잠수함을 타고 평양에 갈 수 있었던 극소수의 NL계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식민지 시대에 모스크바나 연안, 상해에 갔던 활동가들의 수에 비해 조족지혈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 공산주의자들은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부터 가와카미 하지메 등 동시대 일본 좌파들의 서적들까지 별다른 시간적 갭 없이 바로바로 읽을 수 있었으며, 일본에서 나온 <자본론> 일역본을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지만, 1980년대에 같은 <자본론> 일역본을 지하에서, 초고속으로 배운 일어로 어렵게 읽어야 했습니다. 동시대 좌파 서적의 구입은? 외국 여행이 극소수 특권층의 특권이었던 전두환의 나라에선 아주 힘들었죠.
1920~30년대 공산 혁명가들은 글러벌 연결이 잘 돼 있던 만큼 국내 민심 읽기도 아주 잘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의 운동 사회에서 유일하게 토지 혁명, 즉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들고 나왔습니다. 적색 농조에 수만 명의 농민들이 모일 수 있었던 비결이죠. 그들이 노동자들에게 쏘련과 같은 8시간 노동과 연간 2주 휴가, 여공들에게는 출산 전 8주와 출산후 8주의 출산 휴가 등 복지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대부분 조선인들의 숙망인 '조선 독립'을 최우선으로 한 것입니다.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아주 정확히 읽어 그 실행을 공약했기에 대중적인 기반을 다질 수 있었죠. 그러기에 그들이 반쪽이라 해도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초기 북한의 1945~48년 '민주 개혁'들은 식민지 좌파들의 오랜 꿈들을 실현한 부분은 컸습니다. 나중에 북한 정권은 식민지 좌파가 결코 바라지 않는 쪽, 즉 '수령제' 강화와 군국화 쪽으로 갔지만, 좌우간 짧게나마 1945년과 그 직후에 식민지 좌파는 그 승리의 순간을 봤죠.
반대로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한국 운동권의 '민심 읽기'는.... 말 그대로 대중을 볼 줄 모르는 이념셔클 수준이었습니다. '민족 통일'은 대중 다수에게는 관념적으로만 들렸고, '노동 해방'은 대기업 고숙련 남성 정규직들과 중소기업,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격차'가 깊어가는 상황에서는 역시 '관념'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컸습니다. '현실', '민심'을 못 보는 사람들은 무슨 혁명을 어떻게 일으키겠습니까?
이제는 이게 다 역사입니다. 만고에 빛나는 투쟁을 전개한 진정한 혁명가인 조선 공산당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북한도 이미 사회주의 이상과 아주 아주 다른 사회로 변한 거고, 1980년대 운동권 중에서도 정치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아예 극우로 전향하지 않으면 지금 그 어떤 혁명과도 아주 무관한 자유주의 정권의 요인이 된 것입니다. 계속 '운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죠. 이 역사를 염두에 두고 우리의 현주소를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1920~30년대 시대적 과제가 토지 혁명과 복지 사회, 식민지 해방이었다면 금일은요? 복지 사회의 건설은 여전히 현재형 과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출산 휴가는 90일 정도인데, 이게 레닌 정부가 1917년에 공포하고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에서 실시하고자 했던 '출산 전 8주, 출산 후 8주'보다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복지 사회 건설 이외에는 적어도 4대 과제는 더 존재합니다. 이건 한반도 평화 보장과 불안 노동("비정규직") 근절, 그리고 남녀 평등의 보장과 기후변화/환경 대책입니다.
이 과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1930년대 적색 농조, 적색 노조만큼이라도 많은 대중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정치세력들이 과연 출현될 수 있을까요? 극도로 원자화된 사회에서 그 어떤 대중적 '운동'도 이미 쉽지 않지만, 혁명이 오지 않으면 그 대신 반동이 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계속 그 방향으로 '시도'하는 것은 맞는 거겠죠?
(기사 등록 20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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