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생명 만들기, 자본주의와 팬데믹 - 여성 노동과 페미니즘

생명 만들기, 자본주의와 팬데믹

- 여성의 노동에 대한 페미니즘적 사상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티티 바타차리야(Tithi Bhattacharya)

번역: 두견

 

 

수잔 퍼거슨, 티티 바타차리야와 함께 어떻게 팬데믹이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중요성에 빛을 비췄는지 이야기했다. 여성의 해방은 모든 노동의 급진적 재구축에 달려 있다고 제안하면서, 포괄적 페미니즘 정치를 위한 강력한 근거로서 새로워진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뼈대를 옹호한다. 유튜브 생방송에서 청중들과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발전시키며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Women And Work: Feminism, Labour, and Social Reproduction - Pluto, 2020)의 저자이다.

 

티티 바타차리야(Tithi Bhattacharya)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겸 활동가로서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에 적극 참가해 왔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 계급의 재배치, 억압의 재중심화 >(Social Reproduction Theory: Remapping Class, Recentering Oppression - Pluto, 2017)를 편집하고 주요 글을 썼다.

 

출처:

https://www.plutobooks.com/blog/life-making-capitalism-and-the-pandemic/?fbclid=IwAR0kisEDNZBiUHXVwVeeOp9tcABLetwhdhdiTtxgMNCbLLGz8qDPW-B_OlA

 




 

# 자본과 삶, 이윤 창출과 돌봄의 모순은, 때로는 어떤 돌봄이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다는 사실(, 당신은 이것으로 이윤을 거둘 수 있는가)로서 완화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상품화된 돌봄 업무(: 맥도날드 요리사 또는 영리 목적의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사람)의 경우, 노동자들은 노동으로 이윤을 얻는 자본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착취된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노동 과정은 가치 법칙에 의해 부과되는 시장 규율에 따라 관리된다. , 노동자로서 그들의 분명한 목표는 가능한 한 "생산적으로" , 그들의 일을 최대한 저렴하게, 그리고 해당되는 경우에 가능한 한 빨리 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삼성이나 구글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품화된 사회적 재생산 노동은 그것이 생명을 만드는 것을 축적에 잠식시키는 한 삶의 생산과 자본주의적 가치 생산 사이의 모순을 완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순은 그러한 생산 과정의 가장자리에 맴돌고 있는데, 생산되고 판매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 삶의 양육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사실은 상품화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시장 규율의 부과에 한계를 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현재의 민간 탁아 시설보다 아이들을 돌보는 더 값싼 방법(자본주의적으로 더 생산적인)들을 찾을 수 있다: 센터는 각각 텍사스와 인디애나의 법적 요구 조건과 같이 11명 또는 5명당 1명 대신에 2살 이상 20명당 1명의 돌봄 근로자를 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비율을 줄이는 것에 국가가 개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진화하고 사회적으로 구체화되는 한계를 시장 논리에 부과하는 것은 그 제품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컴퓨터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건강과 안전 기준을 부과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주로 제품이 아닌 그 공장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국가가 보육 운영에 부과하는 기준은 주로 그 사업의 상품인 인간의 삶이 위험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다른 상품화된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과정은 비시장적 고려사항에 의해 유사하게 조건화된다. 예를 들어, 음식의 저장과 조리 방법에 관한 식당 점검과 규제 또한 가치 생산이 소비자의 영양과 행복에 대한 특정한 요구를 충족시킬 필요성에 의해 활성화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재생산에서 삶 만들기와 이윤 창출의 모순은 완화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 자본은 착취와 억압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부분적으로 재생산하는데, 사회적 재생산 이론(SRT)의 삶 만들기에 대한 헌신은 삶 만들기를 넘어서 공산주의적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SRT의 삶 만들기에 대한 헌신은 사실상 무엇보다도 인간의 필요를 우선시하겠다는 다짐이다. 만약 당신이 말하는 게 사회적 재생산 노동을 공동체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을 암시하거나 요구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비판은 강탈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사유재산과 상품화 체제의 폭력적인 부과를 통한 생계수단으로부터 인류 대중의 초기부터 지속돼 온 강탈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사회적 재생산이 어떻게 그리고 왜 처음부터 대체로 사유화되고 개인화되는지의 핵심이다.

, 노동자들이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임금과 그들 자신의 사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재생산 노동에 의존해야 하는 이유다. 이것이 (자본주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사회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해 온 양 부모의 가부장적 가족이 아닐 때에도)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특권적 현장으로서 사적 가족을 강화하려는 경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인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대안은 반드시 공동체적인 사회적 재생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국가는 자본주의에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적 재생산을 사회화하며, (우리는 아니지만) 일부에서는 전적으로 국가가 조직한 포스트 자본주의의 사회적 재생산 체제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국가적 사회화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적합하지 않은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가가 (의료·교육 등 복지 제공과 공공 서비스를 통해) 인간적 요구를 최소로 충족시키는 만큼 특정 집단의 인간적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 것도 필수적이 된다.

 

이민과 국경 통제, 내외부적 식민지화, 치안유지, 주택 정책, 그리고 그 목록은 계속된다이 모든 것들은 어떤 사람들의 삶(주되게 인종화된, 원주민화된, 여성화된, 퀴어적인, 장애인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값싸게 재생산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폭력의 위협을 받도록 만든다. 그래서 SRT는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 생명 생산이 사회화되는 것을 배제한다.

 

그것을 넘어서, 투쟁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회 변혁이 규정된다는 마르크스주의-아래로부터 관점을 SRT가 공유하기 때문에 상황은 조금 덜 확실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자본 생산보다 생명 생산을 우선시하는 억압받는 자들의 공통성을 인정하는 투쟁으로 보는 한, 나는 생명을 만드는 노동의 재편성이 사유재산의 제거를 전제로 하고,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적으로 조직될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모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것을 미리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사회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아직까지 상상할 수 없는 조직이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선택은 사유, 국가 통제 및 공동재산 관계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런 미래 시대에 대해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회의 노동이 단순히 삶을 만드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삶의 번영을 위해 조직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욕구를 제한하고 규율하는 조건 하에서의 생명의 재생산 및 유지와 그러한 욕구를 집단적 방식으로 충족시키고 확대하기 위해 조직된 사회제도 하에서의 매우 동일한 행위와 제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가 삶을 만드는 노동 및 제도를 옹호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얻는 어떤 이득도 항상 일시적이고 삶에서 자본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이지, 그것들을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노동이 추출된 노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탈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가 생산의 방식과 형태를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노동은 교환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사회적이 되는 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사회적일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 삶을 만드는 것은 마지못해 하는 뒷궁리가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목표가 된다.

 

생산의 요구가 의식적으로 설정되고 "생산자들의 연합"에 의해 수행된다면, 사회는 삶의 유지를 위한 생산에 정해진/제한적인 시간만 소비하면 된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사회가 옥수수, 가축 등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수록 다른 생산, 재료, 또는 영적인 것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머지 사회적 시간은 삶의 번영 쪽으로 향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생명 만들기에 대한 SRT의 의지가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 감각적, 창조적, 지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약속으로 유기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삶의 총체적 인 표명'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헌신이다.

 

# SRT와 상호교차성 이론(intersectionality) 사이의 차이/유사성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 주겠는가? 티티의 책에 이에 대한 에세이가 있다는 걸 알지만, 둘 다를 조합해서 써야 하는 것인가?

 

첫째,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교차성 페미니즘의 판본도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차성 페미니즘 내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작업은 상호구성되는 권력(젠더, 인종, 섹슈얼리티 등)의 뚜렷한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권력관계의 '교차'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하나의 사회로 재생산하는지에 대한 통일적 논리의 외부 또는 그 너머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SRT는 권력관계가 상호구성적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자본주의가 우리를 재생산하는 매우 중요한 조건을 설정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이를 설명하기를 고집한다. 그러한 조건은 첫째로 우리가 생명생산과 삶의 수단에서 배제된 사실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 생산과 삶 만들기 사이의 모순된 관계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생명과 자본의 필요하지만 모순된 관계다. 티티의 저서 에 실린 (데이비드 맥낼리가 쓴)에세이는 SRT 비평이 교차성의 통찰에 기초하는 동시에 복합적이면서 통일된 사회적 논리를 이론화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 당신은 이 팬데믹 동안에 사회적 재생산 이론과 관련하여 예술 노동자들을 위한 역할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첫째, 예술 노동자들은 이 팬데믹 동안에 단지 생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고 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고 삶에 대해 희망을 갖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들은 팬데믹 기간 전체에 걸쳐서 예술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고집을 통해 그렇게 하고 있다. 휴스턴에서는 지역 제작사가 우리에게 매주 공연을 보내주는데, 주로 피아니스트들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그 작품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토론이 뒤따른다.

 

그리고 휴스턴 미술박물관은 사람들에게 팬데믹 관련 주제를 이용하여 가정에서 걸작을 되살리도록 도전하게 했다. 토론토에서는, 한 극단이 아이들과 함께 줌(zoom) 수업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 곳에서 아이들에게 연극의 일부를 연기하도록 코치한다. 모든 종류의 독립적이고 소규모의 예술가들이 노래, , 영화 등을 제작하고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팬데믹이 일상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패러디하고 소위 '지도자'를 비꼬는 만평들을 잊지 말자.

 

이것들은 모두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예술의 필요성, 그리고 우리의 당면한 물질적 상황을 넘어선 세계로 우리의 심신을 달래고 끌어올리는 그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 노동자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일상 생활의 사회적 재생산의 작동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는 정확하게 누가 제작하고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제작하는지, 이 시기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다루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등 이 기간 동안 제작되는 예술과 그 예술에 대한 반응과 관련하여 수행되어야 할 꽤 흥미로운 연구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의 끔찍하고 슬프게도 예측 가능한 부분은 많은 예술가들이 또한 공간적 거리 두기 정책으로부터 엄청나게 그리고 아마도 영구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기획에 있어 서 몇 달, 때로는 몇 년이 걸린 주요 축제와 콘서트에서부터 일회성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예술 행사의 제작이 꽤 빨리 종료된다. 폐쇄된 갤러리들과 박물관들은 이제 일정이 밀리고 있다.

 

정부가 팬데믹 지출에 대해 "지급"하기 위해 허리띠를 조르는 긴축 모드에 돌입함에 따라 독립 예술가들에 대한 보조금은 의심할 여지없이 줄어들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규범과 기대에 도전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기성 제도들에서는, 예술에 대한 국가 지원이 여전히 적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팬데믹 내내 우리를 길러주고, 즐겁게 하고, 고무했던 많은 바로 그 예술가들은 아마도 자본주의 하에서 보통 그렇듯이 삶(그리고 예술 생산)의 사회적 평가절하와 직면하게 될 것이다.

 

# 생명과 생명 생산을 격하하는 이러한 경향은 그것의 가치증식에 필요한 종류의 생명을 자본이 생산하는 방법인 것인가?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해서는 잉여가치의 창출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노동자가 그녀의 임금을 통해 보상받는 것보다 자본가를 위해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달려있다.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경향이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자본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재생산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할 (그리고 확장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이 충분히 하락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SRT는 나아가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명 생산은 계급에 따른 억압적 관계(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능력, 국가성, 나이 등의 선과 함께)로 묶여 있기 때문에, 자본의 자기증식을 위한 생명과 생명 생산의 가치절하만이 아니라, 생명과 생명 생산의 차등적인 가치절하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 예를 들어서 백인의 삶에 비해 상대적인 흑인의 삶의 사회적, 역사적 가치절하(저임금, 사실상의 분리, 열악한 의료 서비스, 높은 수감율 등을 통한)는 자본을 위해 노동력의 한 부분을 공고히 하면서, 그 노동력이 더 가난하고 위험한 노동의 조건과 더 큰 감시와 불안정성을 수용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한 자본을 위해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는데, 이것은 이윤 폭이 높지 않은 산업에 특히 중요하다. 따라서 그러한 노동자들이 반드시 더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경우는 아니다(: 자본을 위해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수익성이 없을 수도 있는 산업에서 자본이 이윤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경우가 그렇다.(: 건설, 농업, 의료, 요양원 및 육아 센터).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삶의 차등적인 가치절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수익이 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산업에서 자본의 가치증식을 용이하게 한다.

 

# 자본주의가 삶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무관심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사실 어떤 역사적 순간에서는 자본주의가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삶을 촉진시켰다.

 

맞다. 무슨 말인지 알겠고 실제, 자본주의가 삶에 무관심하다는 감각이 있다. 당신의 상사, 빌 게이츠나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도 당신이 집에서 무엇을 먹는지, 얼마나 많은 아이를 갖는지, 만약 당신이 동성관계를 맺고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많고 건강한 노동력을 확보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무관심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자본을 삶의 옹호자로 만드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삶을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삶을 만드는 것에 대한 마지못한 의존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것을 용이하게 착취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게 다다. 그것은 사실상 삶에 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삶 자체가 가치 있다는 생각에 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본 축적의 동역학이 조직적으로 삶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압력과 경향은 항상 강탈의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팬데믹에서 보았던 것처럼) 실존적 위협에 직면했을 때에 생명을 구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고 하려고 할 때조차도 임금과 세금을 낮추기 위해 노력한다.

 

# 당신들은 복지 국가를 망치면서 사람들이 '생산적''노동'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정신 건강 서비스가 상품화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 정신건강 서비스가 공개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는 한 국가가 필수적인 사회적 재생산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실패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의 질문은 아마도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착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건강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제공하려는 모순에 대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시장에서 나오든 국가에서 나오든 간에, 우리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질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특히 작업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위험할 때?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한 차원에서는 교육과 의료와 같은 주요 사회적 서비스는 사람들을 안정적인 좋은 일꾼으로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동시에 교육 부족이나 (정신과나 다른 것에서)열악한 보건의료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로 안정된 국가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지지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회 복지 서비스의 의뢰인들이 서비스의 공급을 정의하고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운동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학생들, 정신 건강이나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필요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창의적인 방법을 더 잘 찾아내기 위해 이러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일반적으로 더 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다시 일터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지금 여기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두 가지를 분리해서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안전하지 않은 일터로 기꺼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서는 아니어야 한다.

 

 

# SRT는 주로 생명의 재생산과 상품 생산의 냉혹한 구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일부 여성의 역할은 둘 다일 수 있을까? 그걸 어떻게 이론화할 수 있는가?

 

이것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 다소 답해졌다. 상품화된 사회적 재생산 산업에서 노동하는 여성들 또한 인종화되는 경향이 있다(예를 들어서 간호, 가정 돌봄 직원, 계약된 가내노동자 등). 그리고 이것은 반인종주의와 반성차별 정치가 계급 저항에 관한 어떤 논의에서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말하자면, 경찰 폭력에 대한 전투적이고 성공적인 사회적 저항은 양로원에서 일하는 흑인, 히스패닉계 또는 필리핀계 미혼모가 야간 근무를 하는 동안 자녀들에 대해 걱정할 필요를 덜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캠페인과 가사노동 노조들 사이의 결속력을 형성하는 것은, 또한 그들의 저임금이 자본에게 더 많은 이윤을 얻게하는 인종화된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며 거리의 불안정과 불안정한 삶을 더 일반적으로 몰아가는 인종주의 방식을 강조하기 시작할 수 있다.

 

# 자본주의가 삶과 죽음을 만드는 데 있어서의 전제조건에 대해 SRT가 초점을 맞추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 SRT는 우리가 어떻게 대안을 상상하도록 도와주는가?

 

SRT는 마르크스주의적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은 노동을 통해 - 세계와의 실천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감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 우리가 우리의 삶과 사회,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문제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능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계수단을 빼앗고, 또한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서 세계 만들기 활동을 조직하는 실천적 능력도 빼앗는다.

 

우리는 특정한 개인적 저항 행위, 대안적인 공간과 프로그램의 창조, 그리고 항의 그 자체를 통해 우리의 생명 생산에 자본이 부과하는 한계에 대항할 수 있고 또 그것을 밀어붙일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조직하는 다른 형태의 가능성(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죽음이라는 사회적 재생산마저 조직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순간들이다.

 

우리는 우선, 삶 만들기가 개인화되고 사유화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먹여 살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고 위안하고, 예술을 창조하고, 그 밖의 수많은 일들을 하기 위해 자원과 재능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실천적인 세상 만들기 활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외된 관계를 포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SRT는 이에 대한 관심을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대안을 상상을 할 수 있는 근거라고 부른다. 동시에, 그것은 자본이 인간의 삶을 가차없이 훼손하는 방식이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이고 가혹한 현실인 것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개혁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더 친절한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어떻게 해서든 그 가차없이 팽창하는 역동성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맞서고 궁극적으로 초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기사 등록 20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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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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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율 2020.08.21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해 갑니다. https://onyeul.tistory.com/101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