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리(LARS T. LIH)
번역: 두견
[이 글에서 라스 리는 다시 한번 신화와 정설에 도전한다. 그것은 레닌은 일찍부터 무의식적으로 카우츠키와 단절해서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켰고, 특히 1914년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그랬다는 주장들이다. 반면 치밀한 조사와 탐구를 통한 라스 리의 결론은 전혀 다르다. 레닌은 카우츠키가 던져버린 사상과 전략의 충실한 수호자로 끝까지 남았다는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수많은 책과 논문을 쓴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1990), <레닌 재발견: 맥락에서 본 ‘ 무엇을 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출처: http://www.isreview.org/issues/59/feat-lenin.shtml (이 출처의 맨 마지막 꼭지를 선택해서 번역한 것이다.)
라스 리
오늘 나는 레닌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즉 1914년부터 1924년까지의 레닌과 칼 카우츠키와의 관계에 대해 최근에 내가 수행한 몇몇 연구의 결과를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자 한다. 먼저 답하고 싶은 질문을 설명한 다음, 답을 하기 위해 설정한 방법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해 낸 답을 요약할 것이다.
칼 카우츠키는 누구였는가?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한 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이나 심지어 독일 사회민주당의 공식적인 이론가는 아니었고, 그는 종종 공식적인 결정에 비판적이거나 심지어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독일 당에서 마르크스주의파의 대변자였고, 급진주의자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던 1910년경 전까지 당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급진파'의 목소리였다.
카우츠키에 대한 레닌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1909년까지, 그것은 극도의 존경심과 열정을 담은 것이었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레닌의 태도는 훨씬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1914년 이후, 카우츠키가 전쟁에 대해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다수 지도부와 결별하기를 거부하자, 레닌의 태도는 극도로 부정적이 되었고, 끝까지 그렇게 남아 있었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은, 1914년 이후 레닌은 일찍이 카우츠키에 대해서 보냈던 자신의 찬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됐을까? 당신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급진적으로 생각을 바꾸면, 당신은 현재의 신념과 이전의 신념 사이에 인지 부조화의 시대로 들어간다. 동일한 대상에 대해 매우 다른 두 개의 의견을 가지면서 발생하는 긴장을 줄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사례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결정할 수 있었다.
a. 카우츠키는 변했다, 즉 카우츠키는 이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카우츠키는 배신자다.
b. 나는 변화했다, 즉 나 레닌은 이제 내가 틀렸음을, 이전의 나의 존경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레닌의 눈에서 가리개가 사라진 셈이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914년 이후의 레닌의 어떤 태도가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가? 말하기 전에, 나는 당신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싶다. 왜 이 문제에 관심있는 것인가? 왜 답이 분명하지 않은 것인가?
왜 이 문제에 관심있는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된 이유는 카우츠키에 대한 레닌의 1914년 이후의 태도가,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제2 인터내셔널과 레닌과의 관계에 대한 더 큰 문제에 필요한 빛을 던지기 때문이다. 레닌은 "카우츠키주의"로 대표되는 초기 정통파와 결별한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을까? 아니면 (어느 정도 다른 방법으로 묻는다면) 그런 식으로 자신을 제시한 적이 있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카우츠키의 "기계적", "수동적" 그리고 "숙명론적"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의 변증법적이고, 능동적이며,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심오한 괴리가 있는 것일까? 그런 괴리(단절)의 존재는 적어도 1924년의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영향력 있는 사상 학파의 중심적 주장이다.
이러한 사상의 추종자들은 내가 최근에 한 레닌의 <무엇이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비판해 왔으며, 나는 이 비판이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게 된 하나의 동기였다고 고백한다. 내 책은 1894~1904년의 레닌의 관점과 카우츠키의 권위 있는 주장 사이의 매우 강한 연관성을 보여준다.(그렇게 자주 논의된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나오는 카우츠키의 인용구보다 훨씬 더 많은 연관성들)
카우츠키와 레닌의 단절을 보는 비평가들은 레닌의 전망이 이미 1902년에 이르러 '카우츠키주의'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전쟁 전에 레닌 자신이 자신의 견해와 카우츠키의 견해의 완전한 호환성을 주장했다는 풍부한 증거에 직면하여서는, 그들은 그 둘 사이의 단절은 '의식하지 못한' 혹은 '의식이 부족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그런 '단절'은 존재했지만 레닌 자신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만약 이 갈라짐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레닌(카우츠키의 가장 부지런한 독자 중에 한 명)은 그가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레닌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몇몇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봐라. 우리 모두는 레닌이 1914년에 카우츠키와 결정적으로 결별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 모두는 이 결별이 일반적으로 카우츠키주의에 대한 철저한 거부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리는 레닌이 아직 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길이 갈라지기 시작했을 때, 그 초기 상황의 논리적인 곤란함에 대해 그렇게 무거운 날씨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 리가 이 초창기에 독점적으로 집중한 것은 두 사람의 전망의 유사성을 강조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막대기 구부리기'를 하도록 만들었다. 나중의 단절을 간과함으로써 그는 근본적으로 레닌-카우츠키 관계를 왜곡한다.'
이 비평가들은 이 점에 대해 나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정당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책에서 나중에 레닌과 카우스키의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이 도전에 응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 남는다.
왜 답이 분명하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왜 이 문제에 대한 증거를 캐내기 위해 특별한 연구가 필요한가? 레닌의 1914년 이후의 말뭉치는 쉽게 구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자료를 재빨리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리로 질문을 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a. 레닌은 1914년 이후 카우츠키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는 특히 카우츠키를 맹비난하는 데 헌신하고 있는데, 그 효과와 함께 대를 이어가는 좌파에 속한 일부 사람들은 카우츠키의 첫 번째 이름(성)이 ‘배신자’라고 생각하며 자랐다고 한다. 레닌이 그 주제에 대해 한 거의 모든 말은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뛰어난 권위자가, 마르크스주의를 팔아넘기는 기술에 있어서 일급의 위선자이자 사기꾼임을 스스로 드러냈다”는 강박적으로 부정적인 공격이다.
b. 레닌은 카우츠키뿐만 아니라 그가 "카우츠키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비난한다. 예를 들어 1920년에 그는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카우츠키주의자[kautskiantsy]들이 실천적 정치적 측면에서 현재 (제2나 황색 인터내셔널을 통해) 극단적 기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한 부르주아 연합정부를 통해) 부르주아 정부와 함께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c. <국가와 혁명>(1917년)에서 레닌은 자신이 이전에 크게 감탄했던 카우츠키의 일부 전쟁 전 저작들(1902년의 <사회혁명>, 1909년의 <권력으로의 길>)을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관찰은 질문을 해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관측 모두 사실이지만, 다양한 이유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a. 만약 우리가 레닌이 1914년 이후에 일반적으로 카우츠키를 언급하는 글들부터, 카우츠키의 전쟁 이전 글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들을 체로 걸러낸다면, 아주 다른 그림이 등장한다.
b. 레닌의 1914년 이후의 신조어 "카우츠키주의"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카우츠키와 연관된 사상 또는 전망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주의(ism)"를 지칭하지 않는다(러시아 용어로는 kautskianstvo[카우츠키스럽다]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전쟁 발발 이후 카우츠키의 행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애매모호함과 절충." 따라서 이 딱지는 카우츠키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예를 들어 트로츠키에게도!). 따라서 레닌의 '카우츠키주의'에 대한 비난은 카우츠키의 전쟁 전 사상에 대한 그의 태도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방금 인용한 "카우츠키주의"를 비난하는 문장 직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우츠키와 그와 같은 사람들의 경우, 이와 같은 견해는 이들이 수십 년 동안 옹호했던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토대를 완벽하게 포기한 것이며, 다른 주제들 중에서도 특히 사회주의적 기회주의와의 투쟁에서 더욱 그러하다."
c. <국가와 혁명>에서 카우츠키에 대한 논의는 레닌이 그가 비판한 바로 그 글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좋게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많은 강력한 진술들을 담고 있다. 어쨌든 1917년의 <국가와 혁명>의 글은 카우츠키의 전쟁 이전 저술에 대한 레닌의 긍정적인 언급의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때 얼마나 글을 잘 썼는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 카우츠키의 전쟁 이전 글에 대한 레닌의 전쟁 이후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 나는 1909년까지, 카우츠키가 쓰고, 말하고, 행한 모든 것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드러내는 모든 인용문을 포함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카우츠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1909년을 마무리 일시로 선택한 이유는 레닌 자신이 그 해에 출판된 카우츠키의 <권력으로의 길>이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의 마지막 견고한 저작이었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데이터베이스에는 또한 우리와 관련된 질문에 적절한 맥락을 제공하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주제들에서, 목적은 포괄적이기보다는 정확하게 대표하는 것이다. 이 자료에서 발생하는 중심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a. 우리의 요구조건에 맞는 재료가 많이 있다. 레닌은 그 문제에 대해 전 시기에 걸쳐 여러 번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항목은 그저 지나가는 말일 뿐이지만 1914년, 1917년, 1920년에는 더욱 광범위하고 흥미로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레닌의 논의는 문제의 카우츠키 자료를 [그 당시에] 최근에 다시 읽은 것에 근거한 것이 가장 많다. 그 주제는 분명히 레닌에게 아주 중요했다.
b. 거의 모든 언급이 긍정적이다. 레닌이 사용한 중심적 수사는 '그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옛날, 카우츠키가 얼마나 잘 답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단지 그가 과거의 카우츠키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딱지 붙였다는 사실부터가 레닌이 동시대의 카우츠키를 부르던 것에 비교하면 강력한 찬사다. 레닌이 예전의 카우츠키를 단지 마르크스주의자일뿐 아니라 탁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충분히 분명하다.
레닌의 언급에 대한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1914년부터 1920년까지 매년 하나씩 대표적인 인용구를 선택했다.
1914년: 레닌은 카우츠키의 <권력으로의 길>(1909)의 주요 주장과 논평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며 논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권위 있는 저자가 쓴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과제에 대한 가장 완전한 설명을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독일 사회민주주의이고, 또는 나아가 그것이 약속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경할 수 있고 또 존경해야 할 사회민주주의다."
1915년: 1915년에 쓰여진 기사에서, 카우츠키는 1904년에 쓴 자신의 초기 기사를 언급했었다. 1904년의 이 글에서 카우츠키는 (레닌이 다듬은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주적인 러시아'는 동부유럽에 있는 국가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레닌은 비록 카우츠키가 1915년에 이 진정한 전제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은 방어할 수 없지만, 이 원래의 전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1916년: 전쟁 중 유럽 사회주의 내에서 레닌의 집단은 (그 마을에서 열린 회의 이후에) "짐머발트 좌파(Left Zimmerwald)"라고 불렸다. 레닌은 이 집단과 카우츠키의 사상 사이의 연속성을 끄집어냈다: "짐머발트 좌파로서 우리 모두는, 예를 들어, 카우츠키가 1914년에 마르크스주의에서 국수주의 방어로 전향하기 전에 확신했던 것, 즉 사회주의 혁명이 가장 가까운 미래에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한 때 바로 카우츠키가 그것을 표현했던 바대로 '지금 어느 날이라도'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인 1917년 레닌은 스위스 청중에게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해 강연했는데, 이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운동의 물결이 높아질수록 [1905년에] 그 반동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에너지와 결단력으로 혁명에 대항해 무장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사례는 칼 카우츠키가 1902년 그의 저서 <사회 혁명>에서 쓴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그런데, 그는 당시에 여전히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현재와 같이 사회애국주의와 기회주의의 옹호자는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가오는 혁명은 … 정부에 대항하여 갑자기 일어나는 것과는 덜 유사한 오래 끄는 내전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이 다가오는 유럽 혁명에서 일어날 방식이다!”
1918년: "마르크스주의자인 카우츠키가 1899년 농업 문제에서 소농의 점진적 사회주의적 전환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처분 수단의 문제에 대해 쓴 모든 것, 이 모든 것은 1918년 배신자 카우츠키에 의해 잊혀졌다."
1919년: 제8차 당대회에서 혁명적인 볼셰비키들인 청중들에게 농민 정책 전환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하려 했을 때, 레닌은 카우츠키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발언을 시작했다.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바르게 제시하고 이 분야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권위자로 인정받았던 당시를 되돌아보면, 그 시기에 농업 문제에 대한 카우츠키의 저서가 쓰여졌다.”
1920년: <좌익 공산주의>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카우츠키의 폭넓은 구절을 소개한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에, 카우츠키가 배신자가 아니었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시절에, 그는 역사학자로서 이 문제에 접근하여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본성이 서유럽의 모델로 도래할 가능성을 예견했다. 이것은 1902년, 카우츠키가 혁명적 <이스크라>에게 '슬라브와 혁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을 때였다." 이 구절을 전한 후 레닌은 다음과 같이 탄성을 지른다. "칼 카우츠키는 18년 전에 얼마나 글을 잘 썼는가!"
1914년 이후의 레닌의 선언에 전적으로 바탕을 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카우츠키'에 대한 설명으로 끝내자. 내가 제거한 것은 "그리고 지금의 그를 봐라!"라는 성난 비아냥 뿐이다.
칼 카우츠키는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권위 있는 이론가였으며 한 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스승이기도 했던 뛰어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가 <자본론>을 대중화한 것은 역사에 남을 위상이다. 그는 기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반박(공격에 앞서 다소 망설이긴 했지만)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으며, 기회주의가 독일당의 공식 경향이 된다면 분열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정력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레닌 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에게서 전술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법을 배웠다. 우리는 오직 국가와 마주할 때만 그 자신이 스스로 일반적 진실에 제한하고 구체적인 논의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관찰한다.
카우츠키는 또한 20세기 초의 혁명적 발전에 대한 믿을 만한 안내자였다. 농업 문제에 대한 그의 권위있는 연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는 반대되게) 민족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했다. 그는 서유럽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무르익었다고 주장하면서 전쟁과 혁명의 연관성을 예고했다.
카우츠키는 러시아 및 볼셰비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 그 자신도 러시아의 발전에 큰 관심을 가졌고 1905년 혁명에 대한 볼셰비키의 기본적 견해를 지지했다. 다른 한편,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그를 열심히 읽었고 그의 저술은 그 어느 곳보다 러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최신의 주장'에 대한 이러한 열정적인 관심은 볼셰비즘이 나중에 혁명적 기량을 발휘한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나는 내가 방금 카우츠키에 대해 들려준 묘사가 1914년 이후의 레닌 그 자신의 견해라고 강조하는데, 이는 이 기간 내내 언급된 바와 같다.
c. 많은 작가들은 1914년 이후 레닌의 사상에 중대한 돌파구나 전환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레닌 자신이 공격적인 비독창성의 수사적 입장을 채택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독자들에게 1914년 이전 카우츠키가 -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모든 존경받던 마르크스주의 작가들과 정치인들이 - 했던 말을 들어보고, 부끄럽게도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부응해서 살아가지 못했는지 봐 달라고 거듭 당부한다.
레닌은 자신이 과거의 진리를 위해서 굳건히 서 있는 사람으로, 모두가 그것을 잃었을 때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것은 1902년에 레닌과 카우츠키의 '의식하지 못한' 분열이 있었다고 보는 이들을 향해 내가 제시한 딜레마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레닌과 제2인터내셔널의 결별에서 근본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람들, 1914년 이후 레닌이 일찍이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를 철저히 거부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레닌 자신이 그런 생각에 강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d. 마지막으로, 이 데이터베이스의 가장 놀랍고 흥미진진한 함축은 레닌이 카우츠키와 분명하게 결부시킨 생각들이, 그가 그 자신을 발견한 혁명적 상황에 대한 레닌의 전체적 정의를 계속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음과 같은 역설적이고 믿기 어려운 결론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레닌은 그가 카우츠키와 공유한 많은 사상들과 결별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측면에서 이러한 생각들은 1914년 이후에 실제로는 그에게 더 중요해졌다. 이 논의에서, 나는 이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진술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1915년 1월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일련의 기사와 그의 저서 <권력으로의 길>(1909년 출간)에서, 다가오는 제3시대의 기본적 특징을 최대한 빈틈없이 명확하게 기술하고, (지난날인) 제2시대와는 다른 그 근본적 특수성을 지적한 인물은 그 누구보다도 다름 아닌 카우츠키 자신이었다. 그는 이것이 당면 과제의 변화, 그리고 이와 함께 현대 민주주의 투쟁의 조건과 형태의 변화, 즉 객관적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서 비롯된 변화임을 인정했다.”
나는 질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닌은 1914년 이후에 카우츠키를 배신자로 보아서(카우츠키가 바뀌었다), 아니면 자신의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진 것을 인정함으로써(레닌이 바뀌었다) 피할 수 없는 인지 부조화를 해결했는가.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답은 명확하다. 레닌은 그 자신이 아니라 카우츠키가 변했다고 느꼈다. 그는 그의 눈에는 사건들이 그것을 완전히 정당화한 바로 그 시점에 그가 카우츠키와 공유했던 관점을 버릴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이 짧은 논의에서 나는 데이터베이스의 표면과 그것의 함의만 스케치했다. 내가 수집한 인용구들은 아마도 결정적이기보다는 시사적이다. 나는 이 자료의 함축적 의미와 그의 마르크스주의 선배들과 레닌의 관계에 대한 더 큰 문제들 대한 토론과 논쟁을 기대한다.
(기사 등록 202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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