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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 - 홍콩 민중투쟁의 폭발과 전진/ 이집트 반혁명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6. 21.

전지윤 



더 크고 강력해져서 돌아온 홍콩 우산혁명의 정신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 5년전 홍콩 우산혁명이 79일간의 점거 끝에 실패로 마무리될 때 시위대가 들고 있던 피켓의 문구는 결국 현실이 됐다. 그냥 돌아온 것도 아니라 더욱 더 강력하고 거대한 운동이 돼서 돌아왔다.

 

인구 7백만의 나라에서 2백만이 거리로 나섰다는 것의 의미는 엄청난 것이다. 홍콩인들은 특히 개인주의가 심하다고 하던 말들은 무색하게 됐다. 그리고 이것은 5명중 1명이 빈곤선 아래에 있고 연봉 20년치를 모아도 집장만이 불가능한 홍콩의 현실과 연결돼 있다.

 

이번 투쟁은 또다시 강력한 지도부와 중앙집중적 방식이 투쟁 건설에 필수적이라는 주장들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가장 자율적이고 분권적인 방식으로 가장 거대한 투쟁이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슈아 웡 등 5년전 우산혁명의 주역들마저 이번 투쟁에서 별다른 구실을 못하고 있다.

 

물론 우산혁명은 다양하고 양극화된 유산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에 대한 반감과 자결, 독립의 정서가 일부에서는 본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라는 뒤틀린 정서로도 나타났다. 우산혁명 당시 17세였던 조슈아 웡은 데모시스토라는 정당을 만들어서 개혁을 시도해 왔다.

 

노동권, 성평등, LGBT의 권리를 요구하며 중국 노동자 투쟁에 대한 연대 등으로 우산혁명의 정신을 확장시키려는 사람들도 존재해 왔다. HKFS(홍콩학생연합)이 사라진 자리에 학생노동행동연합(Student Labour Action Coalition)같은 더 급진적 조직이 등장하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관점에서 홍콩 민중 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부 시각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어느 나라가 저런 폭동을 방치하겠나? 노란조끼 때 프랑스 정부도 평화적 시위를 강조했다는 환구시보를 찬성하며 인용하는 것은 안타깝다. 결국 중국정권도 프랑스 마크롱과 다를바 없이 자국 민중들을 억압, 착취하는 집단이라는 인정밖에 안 된다.

 

현재 홍콩당국은 법안 유보, 사과와 함께 일부 시위자들도 석방하고 있다. 하지만 캐리 람의 꼼수가 무엇일지는 누구든 알 것이다. 일단 시간을 끌고 김을 빼다가 틈이 보이면 다시 법안을 강행하려 할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중국 공산당은 캐리 람을 다른 하수인으로 교체한 다음에 다음 입법회 회기 때로 공격의 시점을 늦출 수도 있다.

 

그러면서 일단 이번에 국제 비즈니스 도시에 도움이 안 된다며 법안 철회 요구에 동참한 기업계부터 달래고 다시 자기 편으로 돌려세우려 할 것이다. 5년전 79일간의 중환점거투쟁 때 중간에 시민지도자들의 자진출두로 투쟁의 기가 꺾였던 그런 기회를 또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캐리 람과 중국 공산당은 홍콩 민중이 5년전의 우산혁명 실패의 교훈과 한국 촛불 등의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50여개 시민단체와 노조 등이 결집해 있는 민간인권전선은 5대 요구(조례 철회, ‘폭동규정 사과, 진압 책임자 처벌, 캐리 람 퇴진, 구속자 석방)를 위한 3(노동자 파업, 상공인 철시, 학생 동맹휴업)를 지속하고 주말마다 대규모 결집을 하겠다고 한다. 홍콩 민중 투쟁의 승리를 기원한다.

 


캐리 람을 한발 물러서게 한 홍콩 민중 투쟁

 

중국 공산당 정권과 그 하수인들에 맞선 홍콩 민중들의 투쟁이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 범죄인 인도협정의 통과는 무기한 연기됐다. 캐리 람은 바로 어제까지 민중 저항을 폭동이라고 비난하더니 그것에 한발 물러섰다.

 

지난 주말에 홍콩 역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 명이 거리에 나온데 이어서 오늘은 그 몇배가 모일 것이라는 공포가, 5년전 우산혁명 진압의 일등공신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캐리 람이 일단 물러서게 만들었다.

 

미국이나 친서방 단체들이 배후조종한다는 저들의 비난과 달리, 이 투쟁이 거의 자생적 폭발이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우산혁명의 리더들이 거의 대부분 손발이 묶여있고, 중국보단 미국과 가깝다고 알려진 민주당 등도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민주당 지도자는 이 사람들을 모은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캐리 람이라고 했다.

 

더구나 일주일 만에 커다란 성과를 쟁취한 이 투쟁은 이제 시작으로 보인다. 오늘 검은 옷 시위와 내일 총파업은 예정대로 강행된다고 한다. 더구나 이제 요구는 협정 철회를 넘어서 캐리 람의 퇴진을 향해 높아지고 있다.

 

사실 협정은 방아쇠에 불과했고, 그 밑에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부동산 투기, 집값 폭등, 저임금, 비정규직화, 청년실업 등의 누적된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전형적인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낳는 모순들이다.

 

20세기 최후로 공산화됐다는 홍콩에서 이런 문제가 나타났다는 것이야말로, 중국 반환의 본질을 증명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악명높던 홍콩의 금융투기, 부패, 양극화 등의 문제가 해결되긴커녕 더 악화된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민주적 권위주의와 더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이다. 그래서 홍콩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며 전두환과 박근혜에 맞섰던 한국 민중의 투쟁 정신을 배우자고 한다. 홍콩 민중의 투쟁을 반공주의 선전에 이용하던 태극기 우파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겠지만.

 

30년 전에 천안문 광장에 모인 100만 명 속에서 인터내셔널가가 울려퍼질 때 중국 공산당 지도부도 당혹스러워 했다. 중국 공산당이 공식행사 때마다 연주하는 노래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천안문 시위대의 입을 통해 그것은 권위적인 일당 통치의 상징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향한 아래로부터 저항과 국제적 연대의 노래로 다시 부활했다.

 

지금 중국 정권은 네이버까지 차단하며 인터넷 검열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홍콩의 불길이 중국 본토로 옮아올 것을 걱정해서다. 원래 홍콩은 중국에서 쫓겨간 사람들에게 숨쉴 틈을 제공하던 곳이다. 80~9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홍콩 느와르의 주인공들은 중국에서 도망쳐 온 난민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다. 중국 반환을 앞두고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비관 등의 정서 속에 홍콩인들의 정체성 혼란이 담겨져 있었다.

 

이제 홍콩인들은 눈 앞에 현실로 닥친 어두운 미래와 불안한 삶에 맞서 직접 행동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어제는 캐리 람이 한발 물러선 날이면서 동시에 이번 투쟁의 첫 순교자가 나온 날이다. 첫 사망자는 협정의 전면 철회, 구속 학생 석방, 캐리 람 퇴진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걸어놓고 높은 다리 위에서 시위하다(아래 사진) 경찰과 실랑이 끝에 추락했고 끝내 사망했다.

 

시간끌기와 김빼기를 하며 반격의 틈을 노리는 홍콩당국은 자살이라고 폄하하려 하지만, 홍콩인들은 그가 누구 때문에 왜 죽었는지 잘 안다. 오늘의 검은 옷 시위 속에서 그의 요구는 모두의 요구가 될 것이다.

 

#AntiELAB #WithHKactivists

 



홍콩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중국 천안문 항쟁 30주년이 지나고, 홍콩 우산혁명 5주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홍콩에서 다시 아래로부터 대중 저항이 폭발하고 있다. 동맹휴업, 파업, 광장 점거와 도로 봉쇄가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5년 전에 우산혁명에 대해 썼던 아래 글을 다시 찾아봤다. 지난 주말에는 홍콩시민 7명중에 1명이 거리로 나섰다.

 

이것이 범죄인 인도협정 조례의 통과를 일단 막아내는 1차 승리를 거뒀다. 지금 홍콩정부는 도로와 거리를 점거한 시위대를 폭력 집단이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곧 친중시위대와 깡패들을 동원해서 충돌을 유발하고 그것을 빌미로 또 강경진압에 나설 듯하다.

 

중국정권과 홍콩의 그 하수인들은 5년전의 우산혁명을 진압한 다음에 꾸준히 그 주도자들을 구속해 왔고, 이제 이 양심수들을 중국으로 데려가서 처벌하려는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본토뿐 아니라 홍콩에서도 저항의 목소리와 싹이 다 잘라지면, ‘중국 특색의 억압과 착취가 훨씬 순조로워질 것이라고 봤을 것이다.

 

홍콩을 공산당 권력자들과 억만장자들의 검은돈 도피처로 삼으면서, 중국과 홍콩을 하나로 묶는 불안정 저임금 노동시장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홍콩 행정장관과 입법회를 중국공산당의 꼭두각시와 친중파로 채우면서 이런 계획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하지만 저들이 그토록 불순한 외부세력을 경계하고 그들과 연결된 색깔혁명을 노리는 내부 흑악세력을 단속해 왔는데도, 왜 우산혁명 5년이 지난 지금 그 몇 배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지고 있겠는가.

 

커지는 빈부격차 속에 추락하는 삶의 질에 분노하고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갈망하는 불씨는 외부세력이나 흑악세력이 아니라 바로 홍콩 민중의 가슴 속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 알의 불씨는 언제든 광야를 불태우는 불길이 될 수 있다.

 

물론 결국은 친중파 다수의 입법회에서 협정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번 투쟁은 중국 반환 이후에도 계속됐던 홍콩 민중투쟁의 또다른 변곡점이 될 것이다. 또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돌아다니며 폭발해 온 국제적 저항의 또다른 일부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 수단에서 군부반혁명에 맞서는 민중투쟁과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르 극우정권에 맞서서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수백만의 대중파업과 함께.

 

반혁명의 순교자가 된 이집트 무르시 전 대통령

 

이집트 군부독재에 의해 폭력과 간첩혐의로 투옥돼 있던 무르시 전대통령이 6.17일 사망했다. '아랍의 봄'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를 애도한다. 아래는 미국의 사회주의자 조나선 닐(Jonathan Neale)의 페이스북에서 퍼온 추모글이다.

 

그는 이집트 법정에서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죽었다. 지난 6년 동안 당뇨병과 간질환에 대한 적절한 치료 없이 그를 감옥에 가둔 독재정권에 의해 죽임당했다. 그는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자였고, 이집트 역사상 민주적으로 선출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2013년 그를 끌어내린 군부 쿠데타는 이 지역의 모든 폭군들과 모든 제국주의 세력이 피를 부르며 아랍의 봄을 익사시키기 시작한 전환점이었다. 국제 좌파의 많은 부분은 기껏해야 이슬람주의자와 군부독재 사이에서 중립을 취했고, 최악의 경우에는 세속적이라는 이유로 군부를 지지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꿈의 힘이 수단과 홍콩에서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무르시는 우리 중 최고도 최악의 사람도 아닌 한 사람이었지만, 폭군들이 사라지고 민중의 힘이 회복되면 그의 이름이 기억될 것이다.' 



(기사 등록 2019.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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