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뉴질랜드 총격테러가 보여준 야만
얼마전 뉴질랜드 총격테러 사건으로 우리 곁을 떠난 분들과 지금 커다란 충격과 슬픔에 잠겨있을 모든 무슬림, 난민, 이민자 분들에게 애도와 연대와 사랑을 전해야 할 시간이다. 편견과 혐오로 똘똘뭉쳐서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있는 모든 백인우월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이슬람포비아들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순간이다.
총격테러범은 이슬람사원 2곳을 연쇄테러하면서 그것을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했고, 70쪽이 넘는 선언문도 남겼다. 테러범은 스스로 자신이 '평범한 노동계급 출신의 백인남성'이라고 했다. 테러범은 ‘백인의 땅이 무슬림 침입자들에 의해서 점령되고 있고, 백인과 그 아이들이 노예가 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점령군에 맞서서 게릴라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것은 백인의 복수’라고 했다. ‘독처럼 퍼져나가기 전에 무슬림 이민자들의 아이들도 죽여야 한다’고 했다. ‘백인의 정체성을 바로 세운 사람인 트럼프를 존경한다’고 했다.
어제의 충격과 슬픔을 몇배로 더 크게 만들어준 것은 네이버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었다. ‘다문화가 문제다, 우리도 난민이 늘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역시 이슬람은 막아야해...’ 지난 겨울에 ‘난민의 시대: 혐오의 정치에 맞서서’ 토론회 때 반난민 단체들이 토론회를 방해하려 했었다. 토론회는 별 문제없이 끝났지만, 토론회에 왔다간 것으로 보이는 한 반난민 단체 사람이 그후에도 계속 ‘매국노, 워마드 지지자, 정신병자, 사탄...’이라며 ‘두고보자, 경고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이번 비극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공포스런 방식으로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고 있다. 트럼프같은 정치인이, 이언주같은 국회의원들이 이 사회와 체제가, 도대체 어떤 야만과 위험을 키우고 있는지 말이다. 이 체제가 낳은 전쟁, 기후변화, 빈곤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 희망을 찾아 온 땅에서 또 어떻게 절망에 직면하고 삐뚤어진 분노와 불만의 표적이 되고 있는지 말이다. 차별과 혐오가 또 어떤 비극을 만들지 두려울 뿐이다.
● 영국 브렉시트와 좌파의 대응 논쟁
얼마전 영국 런던에서는 100만 명이 참가한 브렉시트 반대 시위가 있었다.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였고,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민자에 우호적인 다인종적인 집회였다고 한다. 반면 어제 영국의 극우 인종주의 정치인인 나이젤 패라지는 고작 200명이 모인 브렉시트 찬성 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브렉시트 철회를 요구하는 의회 청원 서명에는 4일만에 서명자가 500만 명에 달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동당원의 대다수와 노조원의 대다수도 브렉시트에 반대하고 있다. 인종주의적 우파들에 의해 반이민 선동 속에 이뤄진 브렉시트가 영국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자각과 반감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좌파들이 이런 아래로부터 열망에 공감하고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레미 코빈조차 어제 집회에 불참했다. 2016년 국민투표 때 심지어 우파와 같이 브렉시트 찬성 투표를 선동했던 일부 극좌파들은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브렉시트 투표 결과가 ‘유럽연합과 정치엘리트들이 주도한 긴축과 신자유주의에 기층 민중이 한방을 먹인 통쾌한 사건’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민자들이 투표 결과에 경악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이런 평가를 내놓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스스로 오류를 돌아보면 좋으련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이들은 브렉시트를 철회하기 위해 제 2국민투표를 하자는 요구(‘민중에게 맡겨라!’)도 반대한다. ‘좌파가 분열하니’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재투표를 하면 자신들이 또다시 찬성 투표를 선동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브렉시트가 반이민 인종주의라는 것이 너무 분명해졌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면 2016년에 찬성 선동한 것이 과연 옳았는지 돌아봐야할텐데, 그게 아니라 재투표를 거부하고 있다. 오류를 인정하고 거기서 배운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노동당 안팍의 블레어 후예들은 이런 일부 좌파들의 무능과 오류를 이용해 브렉시트 반대 운동의 주도권을 쥐며 노동당을 분열시켜 제 3당을 만들 기회로 이용하려 한다.
인종주의적 우파가 주도해 반이민 선동에 이용돼 온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영국 기층민중 속에서 커지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영국 좌파의 무능과 혼란은 참으로 안타깝다. 항상 탁월한 통찰을 제시하는 미국의 사회주의자 조나선 닐이 얼마전 기후변화에 대해 쓴 글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정치인들이 우리를 인종주의적 브렉시트로 이끌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국제주의가 중요하다. 많은 좌파들마저 인종주의적 우파의 꽁무니를 쫓고 있다. 그들은 다수가 유럽연합 잔류에 투표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세상을 오로지 우리 자신의, 우리가 가진, 우리의 작은 섬에서만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유럽연합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착오다.”
정말 적절한 지적이다. 한국이 신자유주의와 긴축 정책을 추진하고 있을 때 제주도에 살고 있는 좌파라고 해서 ‘제주도가 한국에서 이탈하자’고 주장하진 않는다. 한국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한 전국적 운동을 건설한다. 마찬가지로 유럽연합이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와 긴축에 맞서는 길은 유럽연합을 변혁하기 위한 국제적 연대와 투쟁을 건설하는 것에 있지, 반이민 선동에 이용되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있지 않다.
● 첼시 매닝을 석방하라
미국의 전쟁범죄를 고발했던 첼시 매닝이 얼마전 교도소에 재구속됐다고 한다. 매닝은 이라크에서 정보분석병으로 있으면서 취득한 수많은 영상과 문서들을 위키리크스에 넘겨줘 미제국주의가 중동에서 저지른 범죄와 학살을 정면으로 고발했다. 이것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패배하고 결국 철군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제국의 패권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댓가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매닝은 간첩죄, 반역죄 등으로 무려 35년형을 선고받았고 7년을 수감돼 있다가 가까스로 조기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권력자들의 증오심과 보복은 끝나지 않았다. 트럼프는 “결코 석방돼서는 안 되는 배은망덕한 배신자”라고 매닝을 저주한 바 있다.
그리고 매닝은 이번에 관련 사건에서 동료들에게 불리한 공개 증언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로 재구속됐다. 매닝이 고발한 전쟁범죄에 책임있는 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고 있는데 말이다.
이 소식을 들으니 2000년대 초반에 내가 국가보안법 재판 법정에서 동료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고 묵비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수십만원의 벌금을 받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당시 가난한 활동가에게 수십만원은 커다란 타격이었다.
물론 매닝이 지금 겪고있는 공격은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난 것이다. 그만큼 혼자서 거대한 제국주의의 패권과 권력기관 전체에 정면으로 맞서 진실을 말한 매닝의 용기는 정말 놀랍고 대단한 것이다.
매닝이 구속 기간 중에 스스로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선언하며 강요받았던 (브래들리 매닝이라는) 남성성을 거부해버린 트랜스젠더라는 것은 더욱 매닝의 용기와 당당함을 빛나게 하고 해방을 꿈꾸는 소수자들의 자부심을 높여준다.
한편으로 미국 국방부조차 결국은 수감중에 성전환을 위한 호르몬 치료를 허락해 줬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뒤쳐진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넷플릭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도 여성교도소에서 생활하는 소피아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듯이. 물론 그것은 미국 소수자들의 오랜 힘겨운 투쟁이 낳은 성과일 것이다.
지금도 호르몬 치료 부작용으로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매닝은 하루빨리 석방돼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는 데서, 정보인권을 지키는데서, 매닝의 엄청난 용기에 빚지고 있다.
● 미국 좌파 조직의 위기가 보여 준 교훈
오랫동안 관심있게 지켜보던 미국의 중요한 급진좌파 단체에서 최근 스스로 공개한 사건은 다소 놀랍고 서글프다. 국제사회주의조직(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 ISO)에서 2013년에 성폭력 사건이 있었고, 이것을 지도부가 은폐했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https://socialistworker.org/2019/03/15/letter-to-the-iso-membership) 그러면서 그동안 곪아온 잘못된 관행과 문화도 계속 드러나고 있다. #MeToo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주장을 펴오던 좌파 내부에서 그와 어긋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들여다보면 여기서도 조직에 중요한 기여를 해온 훌륭한 동지가 성폭력 가해자일리 없다는 신화, 피해자가 불순한 의도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신화, 피해여성의 호소보다 가해남성의 변명을 더 믿어주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성폭력에 대한 주장과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은 조직파괴주의, 페미니즘과의 타협이라는 식의 낙인이 찍혔던 것 같다.
성폭력을 은폐한 책임자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에 헌신해 왔고, 억압과 차별에 맞서 싸워온 우리를 감히 누가 비판하냐’는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조직의 중요한 자원이고, 이 조직이 혁명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라는 생각, 따라서 조직을 보존하는 것이 혁명을 보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결국 6년 동안이나 성폭력을 은폐하고 피해자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착취, 억압, 차별에 반대한다는 급진적 좌파들도 ‘강간문화’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간문화는 지배적 규범이고, 이 사회에 사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성폭력은 일부 괴물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며, 진보적 활동가들도 얼마든지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가 있다. 좌파라고 해서 처음부터 면역이 주어질 리가 없고, 오히려 위험한 것은 그런 오만한 착각이다.
지배계급이나 권력자의 성폭력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처럼 엄격한 잣대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에서 가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에 커다란 신뢰와 공감을 보내던 사람이 막상 자신이나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에서는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래서다.
더구나 국제사회주의 경향(IST)에서 발전해 분리해 나온 ISO도 채택해 왔던 정치와 조직 모델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모델은 집단명부 지도부의 간접적 선출, 지도부의 중앙집중적이고 독점적 권한, 교체되지 않는 핵심 지도자들, ‘행동통일’이란 이름으로 비판과 이견 차단, 분파 금지 등으로 특징지어져 왔다.
100여년 전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경험에 대한 일면적이고 무비판적인 해석에 기반한 이 모델은 ‘레닌주의’와 ‘민주집중제’라는 이름으로 많은 극좌파들에게 정당화되고 받아들여져 왔다. ‘혁명조직이 있어야만 투쟁이 전진하고 혁명이 승리할 수 있고, 우리는 그런 혁명조직의 맹아’라는 (근본적으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와 어긋나는) 엄청난 자부심이 눈을 가려 왔다. 그러면서 갈수록 조직이 경직되고, 정치적 혁신에 어려운 문화가 만들어져 왔다.
더불어 조직된 산업노동계급이 계급투쟁의 중심 주체이고 작업장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요구들이 우선적이라는 관점이 억압과 차별에 맞선 소수자들의 문제를 주변적이고 부차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나아가 페미니즘적 관점과 문제의식은 남성과 여성 노동계급의 단결을 저해하며 마르크스주의에서 어긋난다는 오도된 인식이 감수성을 더욱 무디게 한 것이다.
IST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도 비슷한 성폭력 사건과 은폐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ISO는 그나마 더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수용해 오긴 했지만, 여전히 스스로 어느 정도의 선을 설정해 왔고 근본적인 고민이기보다는 다소 유행적인 수용에 머물렀다고 보인다.(그 ‘유행적 수용’을 주도해 온 사람이 바로 이번 잘못의 핵심 책임자인 것이 보여주듯이)
그럼에도 ISO의 활동가들이 최근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와 과정을 보면 상황이 절망스럽지만은 않다. 기존 지도부가 은폐해 왔던 이 문제가 불거지자, 이 치부를 조용히 덮고 쉬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정보를 드러내 공개적으로 반성과 평가를 하고 있다. 늦게나마 단호하게 가해자를 조치하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연대를 약속하고 있다.
조직을 창립하거나 오랫동안 핵심적 지도부 구실을 했던 사람들까지 과감히 징계하면서 지도부도 재구성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피해를 낳는 정치문화와 관행’이 존재해 왔다고 인정하면서, ‘최고의 정직성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 비판적 평가를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다. 잘못을 부정하고, 피해자를 공격하고, 조직을 보존하는데 매달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 주변을 향해서 자신들에게 쓴소리와 비판적 질책을 아끼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다. 실망해서 조직을 떠나는 동지들에게도 사과하면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내부에서 등장한 것부터 의미가 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철저하고 근본적인 쇄신을 통해 피해자가 치유되고 건강한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응원하고 싶다.
특히, 이것을 지켜보며 IST와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는 이 곳의 노동자연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자신들이 책임있는 성폭력 사건에서 완전히 잘못된 대응을 해 왔다. 잘못을 인정하며 피해자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를 괴롭히고 비난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가해자인 조직의 중앙간부가 사과하는게 아니라 피해자를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반성과 성찰이 아니라 그런 권유를 하는 주변 동지들에 대한 저주와 비난을 했다.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전혀 볼 수 없었고 오로지 조직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잘못된 집착만이 존재했다. 아직까지 피해자들에 대한 공격말고는 어떠한 사과도 없다. 더욱 더 좌절스러운 것은 이런 상황이 벌써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데 회원들 속에서 내부적인 자성과 쇄신의 목소리나 움직임조차 전혀 없다는 것이다. 조직의 핵심간부와 지도부가 저지른 성폭력과 2차피해들은 모른 척하면서 안희정과 정준영만 열심히 비난하고 있다.
내부적 혁신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고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미국 좌파 동지들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노동자연대 사람들도 제발 스스로를 돌아보고 뭔가를 배웠으면 좋겠다. 운동사회도, 좌파도 다르지 않았다는 경험을 통해 좌절과 환멸로 빠져들었던 피해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헛된 기대가 될 것인가.
(기사 등록 20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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