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
번역: 두견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모든 낡은 관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새롭고 혁신적인 분석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글이다. 맥낼리는 캐나다 ‘뉴 소셜리스트’(New Socialist)의 주요 활동가이면서 세계 경제, 여성 억압, 변혁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많은 책과 글을 쓴 학자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와 위기, 사회재생산 이론 등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을 위한 많은 이론적 기여를 해 왔다. 현재 휴스턴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출처: http://newsocialist.org/karl-marx-revolutionary-heretic/
이단자로서 마르크스를 기념하자. 그람시가 말했듯이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지금의 국제적 시점에, 그가 처한 역사적 순간에 완전히 몰두한 마르크스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는 모든 문제를 기껏해야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여겼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마르크스는 새로운 증거와 경험에 비추어 오래된 문제들을 재검토할 것을 고집하며, 끝없이 다시 생각해보는 예언자이다.
우리의 마르크스는 1865년의 그의 “고백”에서 가장 좋아하는 모토를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고 선언한 반교조적인 사상가이다. 이 정신을 바탕으로 나는 마르크스의 초기 문헌 중 하나로 돌아간다.
‘독-불 연보’에 실린 1843년 5월에 아놀드 루게에게 보낸 그의 편지이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역사와 정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이론을 위한 그의 프로그램을 시작한 첫 글이었다. 나는 그 편지에서 네 가지 흥미로운 주제를 강조하고 싶다.
루게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힌 이론적인 프로그램을 먼저 생각해 보라. 마르크스는 추상적인 논평이나 독단적인 선언과는 반대로 역사적으로 내재적인 비판의 사례를 만든다. 이 젊은 급진적 이론가는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독단적으로 세상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래된 것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찾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 새로운 경향의 장점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그들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멍청하고 통속적인 세상은 완벽한 지식을 가진 구운 비둘기들이 그 속으로 날아들 수 있도록 입을 열고 있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미래를 건설하고 항상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라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더욱 더 명확하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만들어낼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당대 권력과의 충돌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도 모두 가차없는 것이다.”
이런 반교조적인 지침은 그의 나머지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 혁명적 변혁을 위한 진정한 (추상적 유토피아와 대조적으로)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기 위해 실제 투쟁의 사회적 동학으로부터 배웠다.
민족해방을 지지하게 되면서 1860년대에 아일랜드 독립에 대한 그의 견해가 바뀐 것이든, 1871년 파리 코뮌에 비추어 국가 해체의 필요성을 재조명한 것이든, 혁명가로서 마르크스는 “낡은 것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 번째 중요한 주제는 이 급진적 프로젝트가 단지 사유재산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방이라는 것을 그가 상기시키는 것이다. 해방된 사회는 소외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롭고 급진적인 민주주의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소유형태의 변화 이상을 포함한다. “사유재산의 폐지와 공산주의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혁명적 사회주의의 미래가 있다면, 그것의 일부는 단지 재산의 형태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실내용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셋째로, 똑같이 중요한 것은 ‘철학’에서 ‘정치’로의 전환이며, 위에서 묘사한 반교조주의 정신에서 행해진 전환이다.
“종교가 인류의 이론적 투쟁의 기록인 것처럼 정치는 인류의 실천적 투쟁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비판자는 이러한 정치적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며 정치에 대해 비판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비판의 출발점이 되는 실제의 투쟁, 그리고 우리의 비판과 실제의 투쟁을 일치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새로운 원칙을 가진 채 ‘여기 진실이 있으니,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는 식의 교조적 방식으로 세상과 마주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세상 자체의 원리에서부터 세상을 위한 새로운 원리를 개발한다. 우리는 세상에 ‘그것은 어리석으니, 투쟁은 그만둬라. 우리는 당신에게 투쟁의 진정한 슬로건을 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세상에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혁명적인 정치는 그것이 선호하는 상태로 현실의 상황들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주장을 본다. “이것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세상에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대신, 해방 정치는 아무리 기초적이더라도 현재 일어나는 상황을 넘어서려는 실질적인 투쟁들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의 투쟁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리석다”는 식으로 통보하지 않는다. 그들을 무시하는 대신, 그들 내면의 깊이를 찾고 그것을 혁명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과거와 미래의 변증법적인 섞어 짜기로 나아간다. “이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커다란 정신적 분할 선을 그으려는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생각을 실행하는 것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여기 역사적 시간에 대한 비선형적 개념이 있다.
해방을 향한 아직 이뤄지지 않은 투쟁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불완전하며, 새로운 상황에서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티 혁명, 파리 코뮌, 10월 혁명, 1968년의 세계적 격변은 여전히 살아있다. 오늘날의 주역들에게도 계속해서 영감을 주는 해방을 향한 꿈의 구현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실현하는 것은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 레닌 혹은 누구로부터든 우리 시대에 적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청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서 비롯한 생각과 투쟁을 실현하는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는 과거의 투쟁에 보다 적합한 새로운 조건에서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방을 향한 과거의 꿈을 자라게 하면서도, 우리가 운영하는 변화된 환경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해방의 이론과 실천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인 핵심을 키우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마르크스의 정치적 사고의 핵심은 변증법적 비판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진정한 비판은 그의 견해에 있어 언제나 역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인 문제와 씨름하는 것은 그것의 역사를 통해 작업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또 더 이상 어떻게 되지 않을 것인지를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언제나 반드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발전, 수정, 정정의 지속적인 과정이 있거나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이전의 문제와 오래된 공식들을 재검토하려는 마르크스의 노력은 오늘날 좌파에게 귀중한 유산이다.
세계혁명을 위한 새로운 시나리오
이런 접근법은 마르크스 자신에게도 결정적이었다. 특히 1848년의 실패한 혁명 이후에 그는 세계 혁명의 동역학을 재고찰했다. 1850년대 중반까지, 마르크스가 1857년 그의 '그룬트리세' 노트에 적혀있는 역사에 대한 교차방정식 개념으로 옮겨간 것이 분명하다.
케빈 앤더슨(Kevin Anderson)은 마르크스가 역사에 대한 단선적이고 유럽중심적인 철학에서, 교차방정식에 가깝고 점점 더 반식민주의적 철학으로 변화한 것에 대한 많은 지적 자원들을 통찰력있게 탐구했다.
최근, 티에리 드라페오(Thierry Drapeau)는 차티스트인 어네스트 존스(Ernest Jones)가 이 시기에 마르크스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했다. 드라페오는 차티스트 급진주의자로서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존스의 아일랜드의 독립에 대한 격렬한 지지(마르크스의 딸인 엘레노어Eleanor도 생각을 공유한)를 기록했다.
그는 또한, 특히 “신세계, 민주주의의 시”라는 글에서 두드러진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존스의 비타협적인 반대를 드러낸다. 그것은 아프리카와 이어서 아메리카로 번지기 전에 먼저 인도에서 일어나는 세계 혁명을 그리고 있다.
드라페오는 1850년대를 걸쳐 존스의 혁명적인 반식민주의가 마르크스에게 미친 강력한 영향을 추적한다. 이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정치는 점점 반식민주의가 됐다. 이 기간에 걸쳐, 마르크스는 존스의 신문에 약 30개의 기사를 기고했고, 종종 그의 차티스트 동지가 그것들을 함께 썼다.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가장 전투적인 부위를 대표하는 선구자들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아일랜드, 인도, 중국의 반식민주의 투쟁들에서의 교훈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어질 수십 년 동안 그는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와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들의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로 배우게 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비록 노동계급이 그것의 완성에 결정적 요소로 남아있긴 했지만, 세계 혁명이 자본주의 핵심부 밖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접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자본>(1867)에서 마르크스는 은근히 1850~64년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을 그런 사건인 것처럼 언급했다.
“누군가는 기억할 것이다”고 그는 썼다. “다른 세계가 가만히 서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중국과 주변 사람들은 춤추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을 고무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 이것은 자본주의 심장부 밖에서 혁명의 발화적 구실을 가리킨다.
이러한 시나리오에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은 반식민주의 반란이 수반되는 복잡한 과정이 된다. 농민 반란과 노동계급의 봉기 — 이 모두가 국제적으로 통일된 과정으로 수렴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는 비유럽의 사회 주체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는 세계 혁명을 위한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계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원리로 가지고 세계를 교조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한 그의 알레르기를 반증해 준다. 그것들은 자기 시대의 실제 사회적 투쟁으로부터 배움에 대한 그의 소신을 보여준다.
새로운 대중의 한가운데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구성에 맞서며, 좌파가 자신을 재창조하려고 분투해야 하는 이 시대에,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마르크스이다. 이단자 마르크스를 기념하자!
(기사 등록 201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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