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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감히 시도해 본 볼셰비키: 라스 리와의 인터뷰 - 1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12. 22.

라스 리(Lars T. Lih)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수많은 책과 논문을 쓴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1990), <레닌 재발견: 맥락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우리는 이미 라스 리의 주요한 논문들을 많이 번역해서 소개해 왔는데, 올해 초에 있었던 이 인터뷰는 라스 리의 주장을 더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라스 리는 또다시 기존의 정설적 해석에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면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분량이 길어서 2번에 나누어 실을 것이고 이 글은 1편이다.(번역: 두견)

 

출처:

https://newsocialist.org.uk/the-bolsheviks-dared-interview-with-lars-t-lih-on-lenin/



Photo: the Lenin Tribute sketch by El Lissitzky, 1920.

 

 

 

질문: 우리는 <레닌 재발견>이 예외적으로 유용하며 문제를 새롭게 비춘다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씌여진 거의 700페이지에 달하는 괴상한 책처럼도 보인다. 새로운 번역에 따라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의 적이나 추종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덜 중요했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왜 그런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은 분명한 것인가?

 

: 당신은 <레닌 재발견>에 담긴 생각 중 하나를 올바르게 식별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지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무엇을 할 것인가>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이다. 다만, 오른쪽과 왼쪽에서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교과서적 설명에 의해 얻어진 어마어마한 의미는 없다.

 

한 미래의 역사가가 미국 정치를 공부하지만 그 혹은 그녀 자신의 관심을 아주 작은 범위의 문서들로 제한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 혹은 그녀는 누군가가 수정헌법 1조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을 읽는다. 그 역사학자들은 그 연설자가 자유로운 표현의 핵심적 구실에 대해 새롭고 논쟁적인 강조를 한 위대한 혁신가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지만 훨씬 더 광범위한 종류의 문서들을 읽고 나면, 사실 그 사람이 평범한 가치에 충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신임을 확립하고 있다는 것을 역사가는 깨달을 것이다. 논쟁하는 양쪽 모두에게 공통된 명제였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 다음 연설자는 계속해서 수정헌법 제1조에 대한 합의를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보다 구체적인 주장, 즉 설득력이 있기를 바라는 주장과 연결시킬 것이다.

 

1902년에 레닌도 마찬가지였다. “자생성의식성에 대한 요점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레닌은 그의 경쟁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그들이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한 챕터와 구체적 논쟁을 다루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레닌은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지 않았다.(실제로 아이러니하게도 멘셰비키는 의식성의 필요를 가장 강조하며, 레닌과 그 동료들이 미숙하고 의식이 낮은 노동자들에게 선동적인 방식으로 의지한다고 비난하곤 하는 분파였다.)

 

하지만 이런 공통점들의 수사적 역할을 보기 위해서는, 단지 레닌의 책 한권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문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연구 방법이었다. 나는 단순히 레닌이 그의 책에서 칭찬하거나 비난하기 위해서 언급한 모든 글들을 찾아서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가 그의 대화 상대와 어떤 점을 공유했는지, 그리고 어떤 점이 그 자신의 프로젝트에 더 특별했는지 볼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윌리를 찾아라방법론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그림을 상상해보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기존 사회주의 진영에서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논리를 문화에 억지로 적용하려고 한 시도로 악명높다.) 거기에는 마오와 스탈린이 악수를 하고 있다. 거기에는 큰 들판이 있고 다른 아무도 없다. 오로지 바람에 따라 오버코트를 날리고 있는 두 영웅만이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역사에 대해 쓰는 방법인데, 이것은 위대한 인물들의 승계에만 독점적인 초점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에서 아마도 카우츠키, 그리고 레닌, 어찌됐든 그 다음에 영웅이 되는 사람은 트로츠키 또는 스탈린이다.

 

반면에, 나는 커다란 그림을 하나 보여주고 싶다. 가까이에서 보면, 레닌을 찾을 수 있고 그의 개인적인 특성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엔 정말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나를 또 다른 초점으로 데려간다. 나는 때때로 왼쪽의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돌아볼 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레닌이 옳다는 것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에게는, 레닌이 통찰력 있는 정치 지도자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뒤엎는 매우 독창적인 이론가여야 한다. 내 책을 읽고 그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레닌에 대해 말하는 내용보다, 카우츠키와 카메네프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 때문인데, 즉 내가 그들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비마르크스주의적 멍청이들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 자체가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레닌과 그 동료들에 의해 바로잡혀져야 했다는 식으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좌파의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부터 1917년까지의 마르크스주의 전통 전체를 엉망이라고 구획하고 확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평가를 비사회주의자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을 잘 해냈다. 그들 자신을 볼세비즘의 옹호자로 묘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레닌을 제외하고는 1917년 이전의 거의 어떤 볼셰비키 리더에 대해서도 좋게 해줄 말이 하나도 없다.(심지어 레닌 자신도, 우리가 말했듯이 [정치적으로 옳아지기 위해서는] 1917년에 스스로를 재무장해야만 했다.)

 

이것이 나를 1917년에 대한 최근의 작업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내 메시지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접근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4월 테제는 그렇게 중요하지않지만,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지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917년 가을, 무장봉기의 시점에 대한 볼세비키의 논쟁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지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각의 경우에, 그 논쟁의 중요성에 대한 과대 추정은 양측을 하나로 묶어주며 더 구체적 결정에 대한 토론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더 일반적 뼈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에 기초한다. 사실, 이 인터뷰에서 영감을 얻어 지금 나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1917년에 대해 기획한 책의 제목을 생각하고 있다. 맥락을 통해 본 볼셰비키의 논쟁, 이를 통해서 내가 전에 탐구했던 것과의 연관성을 강조한 것이다.

 

레닌(그리고 지노비에프)의 헤게모니의 개념이 그람시의 그것보다 얼마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다르거나 더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레닌 재발견>110쪽에서 이것을 논의한 유난히 인상적인 단락을 발견했다. 특히 자신감있는 레닌주의자 버전에서 비관적인 그람시주의자 버전으로 미끄러짐과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전보다는 그 후에(현재 영국과 관련해서) 헤게모니 문제들의 중요성을 말하는 게 유난히 인상적인데, 이것을 더 풀어서 말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프롤레타리아와 그 동맹: 볼셰비키의 헤게모니 논리논문에서, 헤게모니와 정치적 동맹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어떤 면에서는 꽤 시기적절하게 느껴진다. 연결된, 그러나 동일하지는 않은 정치적 적대감으로 구성된 헤게모니적 동맹들의 문제를 만들어갈 때 라클라우(Laclau)와 무페(Mouffe)하고 볼셰비키의 유사점이 있는가? 그들의 동맹세력에 대한 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 문제의 중요성이 볼셰비키와 라클라우, 무페와의 중심적 차이점인가?(*라클라우와 무페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 주장들을 해체하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들로서 유명하며, 특히 근래에는 좌파 포퓰리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그람시에 대한 어떤 전문지식을 가진 것처럼 말하지 않겠다. 그래서 나의 언급은 다소 일반적일 것이다. 나는 페리 앤더슨이 최근 출판한 책인 <H 워드>에서 제시된 볼셰비키의 헤게모니 개념에 대해 곧 논평하기를 희망한다고 언급하고자 한다. 나는 또한 <역사유물론> 잡지에 실릴, 마르크스의 글들에서 헤게모니 관점의 뿌리를 다루는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는 지배적 계급들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라는 두 가지 시각에서 헤게모니를 볼 수 있다. 각각의 경우에, 이것은 기본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에 기초해 다른 계급들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기만라고 믿어야 하고,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는 실제 이익에 대한 진정한 통찰에 바탕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람시가 그들에게 언론, 교육, 지적, 문화적 삶 등을 통한 엘리트들의 지배가 사회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제기한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부르주아 군대보다 부르주아 언론이 더 위험한 위협이라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말을 어디선가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전쟁 전의 사회민주주의는 이용 가능한 수단들을 가지고 부르주아 헤게모니(이 개념 자체는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에 도전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그 수단들을 나는 끝없는 캠페인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나는 <레닌 재발견>을 쓸때 아직 이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기본적 개념은 이미 나타나 있었다.)

 

이러한 수단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자유가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볼셰비키가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그것을 얻는데 그렇게 열심인 이유였다. 그렇지만 레닌은 - 아마도 누군가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들의 사이렌 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을 걱정했겠지만 - 또한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지하에 있도록 강요된 상황에서 단지 빈약한 수단으로도 차르 전제와 부르주아 지배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가 정치적 자유를 얻는다면, 사회민주주의 메시지는 다음 단계로 뛰어올라서 도약하며 확산될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투쟁한 정확한 이유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볼셰비키들은 집권한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공식적으로 덜 낙관적이게 됐고, 예를 들어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 신문은 부르주아 언론의 불가항력적 힘에 대해 거의 무기력하다고 주장했다.

 

끝없는 캠페인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집권여당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정하는 '국가 독점 캠페인 운동'(또다른 신조어)으로 변형됐다. 헤게모니는 이제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작동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볼셰비키는 이 용어를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농민들에게 행사하는 지도력에 기반한 구체적 전략을 논의하는데 사용했다. 그 지도력은 토지 문제와 차르 전제 정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전략은 앞서 독일의 카우츠키와 러시아의 레닌에 의해 제시된 경험적 발견에 기반했다. 러시아의 소작농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는 상당한 공동의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전략의 맥락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러시아의라는 형용사를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 특정한 전략 속에는,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그 특정한 논리에는 마르크스에 뿌리를 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자신들의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기적 과제(핵심적으로, 민주주의 혁명과 정치적 자유의 획득)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과제에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능한 동맹세력을 찾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단기적 목표는 목적이 아니며, 바로 정확히 이러한 이유로 이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아주 철저한 리더십을 제공할 수 있다.(당신이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동맹이라는 내 논문은 이 논리를 더 자세하게 제시한다.)

 

이 논리는 세기가 바뀔 무렵 러시아의 특정한 상황과는 관련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을 당신에게 돌리겠다. 혁명 이전과 이후의 연속성 문제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끝없는 캠페인에 대한 1차대전 이전의 생각은 남았지만, 그것의 형태는 정치적 자유의 끔찍한 적으로 돼버렸다. 1차대전 이전의 소농에 대한 계급적 리더십에 대한 생각도 남았고, 심지어 확장되었다. 그 주장은 이제 소농들이 사회주의를 향한 모든 길로 온전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레닌의 마지막 글을 보라.)

 

우리가 레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짓말에서 당신은, 혁명에 대한 지지자에 의해서든 반대자에 의해서든,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사이의 동맹과 헤게모니 문제를 포함한 논쟁에서 이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어떻게 가장 큰, 최고의 실수나 최악의 거짓말이 되는지 정말 강조한다.

 

멘셰비크들은 부르주아지 혁명에 대한 교리적인 딱지 때문에 그들의 전략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은 러시아가 부르주아 혁명에 직면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르주아지를 없애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 교육받고 훈련된 전문가들을.(또는 '스패시(spetsy)',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그들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깨달았을 때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그리고 볼셰비크들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교리적 이유로 스스로를 먼저 설득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략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즉각적인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더 일반적으로, 레닌에 대한 당신의 연구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강력한 감각과 그것들 안에서 이용 가능한 제한된 선택을 보여 준다.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러한 감각과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이 없는 비극으로서 혁명에 대한 당신의 묘사를 감안할 때 혁명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거기에 아직 살아있는 뭔가가 있는가?

 

당신은 우리가 레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내 기사를 언급했다. - 그 제목은 내가 정한 것은 아닌데, 나라면 그렇게 강하게 쓰진 않았을 것이다 - 거기서 나는 1917년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에 의해 제기되고 오늘날 반복되는 높은 수준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의 토대가 아니라 그보다는 상부구조라고 주장한다.

 

각각의 정치적 전략을 실제로 추진되게 만든 것은 복잡하고 모순된 현실에 대한 경험적 인식이었다. 아무튼, 나는 두 분파를 칭찬하면서 이 말을 한 것이다.(나는 최근 글에서도 이것을 언급했다: “러시아 혁명의 성격: 트로츠키 1917 vs 트로츠키 1924”. 여기서 나는 19178월의 트로츠키 기사를 인용했는데, 거기서 그는 멘셰비키에 관해 우호적이진 않지만 다소 비슷한 언급을 한다.)

 

하지만 나는 단지 1917년의 경험적 현실만이 사람들의 정치를 스스로 결정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10년 넘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왔고, 둘 다 여전히 자신들이 충성하고 있는 정치적 전략을 가지고 1917년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전략은 그 자체가 러시아의 계급 상황의 뿌리를 읽는 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멘셰비크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은 재앙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그리고 볼셰비크들은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농의 동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리더십을 제공과 함께) 혁명을 끝까지 몰고 갈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내가 위에서 헤게모니에 대해 논했듯이,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구체적 상황과 연결된 구체적인 답변들보다는 던져진 질문에 더 많이 담겨있다.

 

사실, 나는 볼셰비크들이 1917년 러시아에서의 그들의 뜨거운 경험으로부터 과도하게 일반화했기 때문에 서유럽에서 혁명적 가능성들을 일관되게 잘못 읽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진보적인 부르주아 세력과 협력하려는 온건 사회주의자들인 합의주의세력에 대한 대중적 불신으로 드러난 극단적으로 빠른 양극화 등. 이런 시나리오는 서유럽에서는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1917년에서 배워야 할 뭔가가 있는가라는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는, 내 친구 데이비드 만델(David Mandel)의 답변을 인용하겠다. “그들은 감히 시도했다.”(“they dared.”) 데이비드의 공식에 대한 내 의견은 볼세비키와 노동자, 군인, 소농들 속에 있던 그 지지자들이 사회의 주권자로서 권력 장악을 과제로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엘리트들은 정치적 통치의 최소한의 책임조차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이 충분히 명백해졌다. 맞다. 여러가지 면에서 새로운 권력은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면했던 끔찍한 제약에 대해 우리가 더 명확하게 이해할 때 우리는 아마 또한 그들에게 약간의 (내키지 않는?) 존경을 보내고 싶어질지 모른다.

 

특히 설득력이 있고 우리가 계급을 어떻게 개념화해 왔는지에 대해 더 폭넓은 고민을 요구한 것은 노동계급(working class)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worker class)을 사용하겠다는 당신의 강조였다. 이 번역/개념이 왜 그렇게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레닌 재발견>에서 내가 노동자 계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주된 동기는 번역의 정확성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어인 Arbeiterklasse와 러시아어인 rabochii klass 모두 다 단지 노동자라는 일반적 개념을 계급에 맞서서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생각해보니, 이 발화의 진행이 자신의 구상과 관점을 가진 개인들로 구성된 대변자같은 계급의 감각을 반영한다고 느꼈다.

 

대조적으로, “노동계급은 사회적 기능의 측면에서 계급을 정의하며, 따라서 다소 수동적이며 사회에 대한 보수적 관점과 일치한다.(“노동계급이라는 어구가 언제 어디서 소개되었고 영어로 표준화됐는지에 대해 내가 연구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가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해보자. ‘노동자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프로젝트가 노동계급에게 이 임무를 부여하는 것보다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을 말하면서, 나는 <레닌 재발견> 이후 나의 저술에서 대체로 이것을 구별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왜 내가 노동자 계급과 같은 익숙하지 않은 문구를 사용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글에서 다른 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어렵게 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독자들에게 그렇게 많은 새로운 용어를 강요하는 것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신의 질문은 내가 이 특별한 용어상의 부정확성의 두드러짐을 다시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나는 지금 마무리 중인 마르크스 관련 글에서 독일어 Arbeiterpartei노동자 정당으로 번역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더구나, 또는 아마도 특히, 그것의 출발에서, 당신은 영국의 노동당이 독일 사회민주당과 레닌의 당시 헤게모니 시나리오를 거부했다고 생각하는가? 독일과 영국은 그들의 계급 구조와 한편으로 헤게모니적 지평을 가진 정치를 생산하는 노동계급의 조직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레닌이 노동조합주의 정치(tred-iunionist politics)라고 부른 정치, 부문만 지키려는, 리더십을 거부하고 종속적 위치에서 부르주아지와 동맹하려는 정치에서 어떻게 달랐는가?

 

나는 영국과 독일의 사회구조의 어떤 대조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각 나라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자유가 승리한 날부터 발생한 역사적-정치적 대조에 대해 말해 보겠다. 그리고 우리는 러시아를 이 목록에 추가할 수 있다.

 

아주 일반적으로 말해, 우리는 이 나라들을 이 순서로 배열할 수 있다. 영국, 독일, 러시아. 우리는 또한 각 나라의 정치적 자유의 정도가 같은 목록을 내림차순으로 따른다는 것에 주목한다. 영국에서는 꽤 실질적이었고, 독일에서는 의미 있었지만 제한적이었고, 러시아에서는 심지어 1905년 혁명 이후에도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이 시간이 늦어질수록, 특정 국가의 노동자들은 더욱 더 사회민주주의적 전투성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내 의견은 정치적 자유가 가장 부족하고 늦어지는 나라일수록 헤게모니가 가장 강력하면서 사회민주주의적 전투성이 가장 새롭고 위대하다는 것이다.

 

첫째, 정치적 자유의 부족은 그 자체로 이런 종류의 전투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 계급을 정치적 혁명이나 민주주의의 급진적 확장에 의해 이익을 가진 모든 집단들의 타고난 옹호자로 만든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1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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