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론의 혁신

볼셰비키는 1917년에 ‘사회주의 혁명’을 옹호했는가? (1)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9. 9.

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정강산

 


[이 글은 오랫동안 정설로 굳혀져 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중요한 신화에 도전한다. 그 신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4월에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이 천재적 감각으로 새로운 전략적 혁신을 했다. 그것은 사실상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채택한 것이며 관성에 빠진 볼셰비키들이 반발했지만, 결국 레닌이 논쟁에서 승리해 러시아 혁명이 가까스로 성공할 수 있었다. 4월에 레닌이 노동자 권력인 소비에트 권력을 주장한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 글은 이런 주장이 왜 역사적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지 꼼꼼히 논증하면서 새로운 혁신적이고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또 볼셰비키가 10월에 사실상 단독정권 수립으로 나간 것도 처음의 의도와는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접근을 시도한 라스 리(Lars T. Lih)의 앞선 분석과 같이 보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http://www.anotherworld.kr/494)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은 뉴욕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역사사회학자이자, <() 식민지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차르 국경지방에서의 억압과 혁명 Anti-Colonial Marxism: Oppression and Revolution in the Tsarist Borderlands)>(Brill Publishers, Historical Materialism Book Series)의 저자이다. 그는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해체하는 글을 써 온 것으로도 유명하며, 나아가 적극적인 활동가로서 미국에서 교사파업에 연대하고 새로운 좌파적 정치대안을 건설하는 문제에도 매우 활발하게 개입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 전 그와 차이나 미에빌이 러시아 혁명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번역해 소개한 적도 있다.(http://www.anotherworld.kr/534) 이 길고 결코 쉽지 않은 글을 정성스럽게 번역해준 정강산 님에게 매우 깊은 감사를 드린다. 분량이 방대하여 2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1편이다.]

 

출처:

http://www.historicalmaterialism.org/blog/did-bolsheviks-advocate-socialist-revolution-1917

 


 



과거에 대한 비판적인 개입은 현재를 비판적으로 마주하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수단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100, 1917년과 볼셰비키 당에 대한 우리의 이해 상당부분은 축적된 신화와 통념에 의해 흐릿한 것으로 남아있다. 이들 중 아주 중요한 것은 레닌이 19174월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대신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라고 당을 설득시킴으로써 볼셰비키의 정치를 정비했다는 주장이다.

 

흥미롭게도, 레닌이 어떻게 볼셰비키를 재무장시켰는지에 대한 이 설명은 트로츠키주의자, 스탈린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똑같이 공유되는 몇 안 되는 합의점 중 하나다. 트로츠키의 영향력 있는 반론, 1924년의 <10월의 교훈(The Lessons of October)>에 따르면, 4월에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하려 당을 재무장시키기 전에, 볼셰비키는 스탈린과 카메네프의 지도하에 사실상 멘셰비즘으로 빠졌다.

 

트로츠키는 그들이 러시아가 이 과업[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충분히 성숙했다고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참 볼셰비키지도자들이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음으로써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취했다고 주장했다. 학계의 역사가들 대부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식견을 공유해왔다.

 

비록 표준적인 스탈린주의적 분석은 전략적 불화의 범위와 4월 이전 당의 동요에 대한 스탈린의 책임에 대해 트로츠키보다 덜 강조하고 면제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트로츠키식 설명]와 현저히 유사하다.

 

예를 들면, 볼셰비즘의 역사에 대한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식 요약은 3월의 카메네프와 같은 당 지도자들의 준 멘셰비키적입장을 비난하고,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당은 새로운 노선을 따라 과감하고 자신 있게 발전할 새로운 방향을 필요로 한다. 레닌의 4월 테제는 당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을 위한 명민한 투쟁 계획을 정해주었다.’

 

불행히도, 이 역사기술적 합의는 사실 부정확하며, 1917년 볼셰비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시켜왔다. 이 논설에서 나는, 4월부터 10월까지, 국가 권력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볼셰비키의 태도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보여줄 것이다.

 

러시아, 라트비아, 독일의 1차 자료들에 대한 내 조사에 근거하여, 나는 가용한 증거들이 [레닌이 4월 테제로 혁명의 방향을 극적으로 전환시켰다는] 표준적인 재무장설명을 확인시켜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줄 텐데, 이 표준적 설명은 훨씬 더 복잡한 내부 논쟁과 정치의 전개를 이해하기 어렵게 해왔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그 해 전반에 걸쳐 국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급박함에 맞춰 그들의 정치를 수행했음에도, 러시아 내부에서는 그들의 방향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덜 야심적인 채로 남아있었다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상하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계급지도를 비롯해 여러 결정적 쟁점들에서 볼셰비키는 전체적으로 10월 내내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접근을 유지했다.

 

1917년의 과정에 걸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당의 중요한 정치적 발전이 있었지만, 이것은 균일적이지 않고, 오랜 시간이 들었던 것이었고, 주로 계급투쟁에서의 계속되는 발전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단지 정확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 사례가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에 영감을 주고, 마르크스주의 당의 전형인 볼셰비키 당의 진정한 성격을 더 잘 이해하는데 계속해서 도움을 주기 때문에라도 그렇다. ‘재무장이라는 설명은 결과적으로 간부층의 축적된 경험과 기여를 통해 집단적이고 전투적으로 발전한 조직이라는 영역을 축소시키며, 볼셰비키의 방침을 결정하는 레닌의 능력을 문제적으로 부풀려왔다.

 

게다가 이같은 지배적 역사기술은, 1917년 논쟁들의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예측이 어려운 계급투쟁의 동학에 직면하여 효과적인 사회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것에 내재한 난점과 도전 들을 축소해왔다. ‘재무장해석이 주는 인상과는 반대로, 성공적인 반자본주의적 파열을 향한 공격에 있어서, 혁명적 이론은 필수적이지만 불충분한 기초였다.

 

이 주제에 대한 대부분의 검토들과는 달리, 여기서 초점이 되는 것은 레닌의 저술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중요하고, 흔히들 말해지는 그 내용도 개략적으로 설명될 것이지만,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그 자체로 고정돼 있지 않던) 레닌의 접근이 1917년 볼셰비키의 지도층 혹은 평당원들의 접근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우리가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 지역과 지방의 당 기구들, 공적 연설들, 대중 전단들을 포괄하는 데까지 우리의 자료 기반을 넓히면, 어떤 특정한 정치적 설명이 나타난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분석적 관심을 페트로그라드에서 러시아 제국의 가장자리와 지방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볼셰비즘의 운동장(ballpark Bolshevism)’, 즉 모든 층의 볼셰비키 간부층에 의해 일반적으로 공유되고 그들에 의해 제국 전역의 노동자들에게 투사된 핵심적인 정치적 태도라 부를 법한 것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한다.

 

우리의 논의는 소비에트 권력요구에 대해 볼셰비키에서 비롯한 함의와 러시아에서 혁명적 과정이 전개되는 것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한 그들의 혼동스럽게 넓은 열거를 도표화함으로써 시작될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볼셰비키 내에서 명백한 합의가 있었던 질문으로 향한다.

 

이어서, 볼셰비키가 [작업장에서] ‘노동자 통제가 필요하고 시급하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서구가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전까지 폐지될 수 없다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했다는 것이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가장 즉각적 쟁점 - , 혁명 정부의 정치적 구성 - 에서, 헤게모니를 쥔 볼셰비키의 접근은 그 해 대부분 동안 대수적(algebraic)으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대부분이 다른 사회주의 조류들이 부르주아지와 완전히 관계를 끊는 것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통치를 위한 엄밀한 계급정당의 구성이 10월 혁명 내내 예측하기 힘든 것으로 남아있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우리는 페트로그라드에서 그 유명한 연말의 사건에 관한 개관으로 결론을 지을 텐데, 여기서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길 완고하게 거부한 온건 사회주의자들 때문에 결국 프롤레타리아 주도의 정부로 나갔다.

 

소비에트 권력의 의미

 

4월에 볼셰비키 내부에서 레닌의 개입 효과를 둘러싼 혼란의 상당 부분은, 그 논쟁들이 부르주아 임시정부로 결정적으로 후퇴하느냐, 노동계급을 위한 소비에트 체제로 나아가느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전제돼 왔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라스 리(Lars Lih)가 여러 글들에서 보여줬듯이, 이미 19173월 볼셰비키 지도부가 소비에트 정부가 임시정부를 대체할 것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안에 있어서 실제적 논란은 없었다. 따라서, 4월에 당의 정치적 진전은 일반적으로 주장되어온 것보다 훨씬 덜 파격적인 것이었다.

 

재무장서사에 대한 기록의 토대 대부분은 4월 레닌의 도착을 염려하는 멘셰비키의 표명들로부터 나온다. 허나 우리는 이들을 꽤 걸러 들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멘셰비키는 그들 라이벌의 극단주의를 시종일관 과장했고, 볼셰비키를 항상 레닌의 손 안에든 허수아비로 표현할 길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준적인 설명에 대한 그 밖의 주요 원천은, 레닌의 천재성을 강조하고, 볼셰비키가 4월부터 쭉 사회주의 혁명을 주창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의 모든 분파들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것이 되었던 이후로 나온, 의심쩍은 1920년대 볼셰비키의 잘 쓰인 회고록 문헌들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1917년에 볼셰비키가 실제로 말한 것과 쓴 것을 보면 어떤 상이한 그림이 나타난다. 자칭 고참 볼셰비키지도자 칼리닌(Kalinin)424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전 러시아 볼셰비키 대회에서 주장했듯,

 

혁명 기간 도중의 우리의 첫 번째 기록 - , 227일에 있었던 우리 당의 선언을 읽어보라. 당신은 혁명과 전략들에 대한 우리의 구상이 레닌 동지의 테제들과 뜻을 달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레닌 동지에 의해 개략적으로 묘사된 구상은 더 종합적이고 완결적이지만, 그 사유의 방법론은 고참 볼셰비키의 방식으로 이 혁명의 독창성을 다룰 수 있었다. ‘보수주의자로서 나는 우리 고참 볼셰비키의 방법론이 현재에도 실로 적절하다고 보며, 우리와 레닌 동지 사이에서 어떤 중대한 차이도 찾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가정되는 것과는 달리 레닌도, 볼셰비키도 1917년에 소비에트 권력노동자 권력과 같은 것으로 동일시하지 않았다. 소비에트(평의회)는 노동계급보다는 더 큰 인구의 부분을 대표했다. 4월에 레닌이 썼듯, ‘보다시피, 이들 소비에트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농민, 병사, 즉 프티 부르주아지이다.’

 

비슷하게, 카를 라데크(Karl Radek)9월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05년의) 노동자 대표들의 대회가 (19172월의) 노동자와 병사의 대회로 변형된 것은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투쟁 기관이 혁명적 민주주의 기관, 즉 유력한 - 그리고 심지어 인위적으로 할당된 - 프티 부르주아 다수의 기관으로 변형된 것을 의미했다.’

 

19176월엔 대략 3,700만 명이 평의회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이는 11월의 제헌의회 선거 유권자보다 단지 700만 명이 작은 숫자였다. 소비에트의 계급적 성격을 정의한 것은 그들이 노동자들의 조직이라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명백하게 의식적으로 부르주아의 기관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었다.

 

자신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건너뛰려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물리치면서, 레닌은 4월에 자신이 노동자 정부를 요구하고 있던 게 아니라 외려 노동자들, 농업 노동자들, 병사들, 그리고 농민들의 소비에트 체제를 요구했음을 강조했다.

 

비록 레닌은 개인적으로 소비에트 권력을 어떤 코뮌 단계’, 사회주의를 향한 디딤판이자 민주주의의 높은 형태로 간주하였으나, 1917년 내내 노동자들과 볼셰비키 다수에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는 부르주아지가 없는 정부를 설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명백히 매우 급진적인 관점이지만, 1905년부터 볼셰비키와 그 외 러시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었던 관점이기도 하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대중 선동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당의 간부층에 대한 글에서도,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레닌의 특수한 해석은 눈에 띄게 안보였다.

 

많은 볼셰비키들은 4월 후에 일반적으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을 민주주의 혁명의 요소로 계속해서 간주했다. 그 해 여름에 모스크바 소비에트에게 얘기를 건네면서, 한 볼셰비키 지도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하는 것에 관해 얘기할 때, 이는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농민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이기에,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사회주의 혁명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917년 볼셰비키와 노동계급에 의해 소비에트 권력에 돌려진 실제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선, 그 해 전반에 걸친 당의 입장들과 논쟁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4월에 볼셰비키 회의에서 통과된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결의안을 생각해보라. ‘재무장론에 따르면, 이 회의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요구를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요구로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사실, 그 회의는 어떤 다수결 대의 기관이든 새로운 혁명적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공표했다. , 그 회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 - 모든 국가 권력을 소비에트 혹은 인민다수의 의지를 직접 표현하는 다른 기관(지역 자치기관들, 제헌의회, 등등)에 이양해야 하는 단계로 당이 나아가길 요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소비에트와 제헌의회는 1917년에 민주주의혹은 혁명적 민주주의’, 즉 노동자-농민의 다수를 대변하는 기구로서 역할을 할 것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를 포함하여, 볼셰비키는 10월 혁명 내내 시종일관 소비에트와 제헌의회 양자에게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따라서 4월 전후 사이의 볼셰비키의 접근에서 중요한 차이는 제헌의회에 대한 요구가 버려지거나 부차적으로 된 점에 있는 게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을 제헌의회를 위한 임시적 수단으로서 언급하는 정도가 줄어들었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기관 사이의 정확한 관계는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남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명백히 양자가 구체적으로 정치적-선거적(political-electoral)으로 어떻게 구성돼느냐에 달려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0월 봉기 전야에 볼셰비키 지도층에게 보낸 내부 편지에서, 레닌은 일단 권력이 소비에트의 손에 쥐어지면제헌의회의 성공은 보장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볼셰비키가 수천 번 그리 말해왔으나 아무도 그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고 썼다. 모두가 이 (국가의) “결합된 형태를 인정했다.

 

1917년 이후 볼셰비키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똑같이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의)독재와 대치시켰고, 민주공화국을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치시켰는데, 이러한 개념들이 혁명의 첫 번째 해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요구의 본질에 관해 말하자면, 왜 봄에,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하자는 4월 테제에 반대하는 주요 볼셰비키 관련 의원회가 오직 하나였는지는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심지어 이러한 예외는 일반적 법칙을 증명하는데, 반발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Kiev)에서 나왔으며, 그곳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지도부가 플레하노프(G.V. Plekhanov)당 멘셰비키’[볼셰비키와 협력해 하나의 당을 이루려고 한 멘세비키] 성향의 이전 구성원들에 의해 이끌어진 곳이었다.

 

플레하노프에 의해 지도된 2월과 3월에 키예프의 위원회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략적 관점은, 부르주아 정부가 자신의 요구를 인정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으로 제한되어야만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즉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지도부와는 달리, 키예프 위원회는 민주적 혁명을 쟁취하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이 권력을 잡는다는 관점을 제기하지 않았다. 중요하게도, 4월 테제에 대한 그 위원회의 입장 - 최근 한 우크라니아인의 연구가 기록했듯, ‘그 나라에서 레닌의 생각에 대한 가장 크고 철저한 반발’ - 고참 볼셰비즘보단 좌파 멘셰비즘의 전략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키예프 위원회에 따르면,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민주적, 경제적 요구들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데까지만 제한을 둬야 했다. 멘셰비키처럼, 키예프의 지도자들은 임시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사회주의 혁명과 합체시켰다. , ‘임시정부의 패배와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이를 위한 경제적 전제조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내부의 반발은 외려 얼마 못간 것으로 드러났다. 415~17일 키예프의 지역 볼셰비키 회의에선, 4월 테제에 대한 광범한 논쟁 이후, 참여자들의 압도 다수가 지역 지도자들의 방침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대중적 정서에 굴복하여, 피아타코프(Gueorgui Piatakov)와 키예프의 나머지 지도층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에 반대하길 포기했다.

 

4월은 볼셰비즘에 있어 전략적 파열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진전의 계기를 남겼다. 키예프에서 보인 것과 같은 실제적인 정치적 반발은 좀처럼 드물었으나, 4월의 논의들은 제국 전역에서 정치적으로 볼셰비키가 응집하는 데에, 그 해 초기에 있었던 그들의 우유부단함을 잘라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를 향한 날카로운 공격은 4월 논의 이후로 박차가 가해졌다. 제국을 가로질러 지역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처음으로 계속해서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요구를 중시하기 시작했고, 향후 이는 일시적인 권력으로서는 덜 빈번하게 그려졌다. 그들 스스로를 타협적인 사회주의자들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또한 더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진전의 상당 부분이 얼마나 레닌의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급격히 변화하는 정치적 상황에 달려있었는지는 정확히 측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3월에, 임시정부는 변화에 대한 대중적 요구들과 반대되는 어떤 주요 법안도 공개 발표하지 않았었다. 초기 볼셰비키의 동요는 일반적으로 2월 이후의 도취감에 대한 적응을 반영했고, 러시아에서 이러한 분위기는 한 달을 넘어 지속되지 않았다.

 

4월은 정부가 승리할 때까지전쟁을 지속할 것을 계획했다는 폭로가 낳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항의로 자국이 남겨졌다. 이내 잘 알려지게 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이 4월의 시위들에서 처음으로 시위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소비에트 지도부는 처음에는 임시정부를 앞으로 밀어붙이려 싸웠지만, 4월초 이후로 점차 부르주아 체제에 기대고, 대중의 전투성을 꺾는 데 집중했다. 이는 5월 초 임시정부로의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유입에서 정점에 달한 방향이었다.

 

임시정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례없는 반발과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우파로의 격심한 이동의 한복판에서, 제국 도처의 많은 볼셰비키들이 더 전투적이고 독립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헌의회 소집이 정부에 의해 계속해서 불명확한 지평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노동자들의 눈엔 소비에트의 권위와 영속성이 더욱 높아졌다. 특히 어떤 기존의 국가 의회도 부재하는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의 유력한 민주적 표현기구가 되었으며, 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감응과 열망을 거기에 쏟았다.

 

4월 말부터 계속 볼셰비키는 쉼 없이 리플렛을 찍어내고 연설을 했다. 러시아 전역에서 똑같은 간결한 메시지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인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들과 그들의 동맹은 부르주아지와 갈라서야만 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들의 손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혁명을 방어하고 진전시키는 것은 계급 협력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필요로 했다. 한 볼셰비키 평당원 투사는 우리의 기획은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이다라고 설명했다. 6월에, 군대의 아르메니아 볼셰비키 선동가들은 대중의 요구를 쟁취할 유일한 방법은 부르주아지의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 내내 러시아의 발전에 대한 유일한 선택지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니면 사회주의로 형식화했던 이들은 볼셰비키라기보다는 거의 항상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끊임없이 제국 도처에서 반복되었던 멘셰비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는 고려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러시아에선] 농민들이 다수이고, 노동자들은 충분히 조직되지 않았고 의식화가 덜 이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최종 목표를 성취할 정도로 충분히 교육되고 조직될 동안 부르주아 민주주의 통치와 자본주의 발전의 긴 기간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겁줘서 반혁명의 길을 닦지 않도록, 부르주아지를 제외한 정부를 요구해선 안 된다.

 

멘셰비키의 논객들은 보통 레닌 혹은 볼셰비키의 실제 주장들을 상대하기보다, 볼셰비키 지도자와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명백히 유토피아적 모험을 주창하는 경향을 비난했다. 4월에 레닌이 돌아왔을 때, 페트로그라드의 멘셰비키 신문 <라보차야 가제타[Rabochaia Gazeta: ‘노동자 신문을 의미하며, 키예프 지역 사회주의자들의 자치 신문사였으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당의 기관지로 재구성 된다_ 역주]>는 따라서 레닌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하고 즉각적인 경제적 해방에 관한 약속들을 비웃었다.

 

신문의 49일자 반 볼셰비키적 비판의 제목은 이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아나키즘과 최대강령주의[Maximalism: 비현실적인 정도로 비타협적인 강령을 원칙으로 삼고, 그것을 고집하는 경향. 으레 나로드니키 혹은 사회혁명당에 따라붙는 수식어였으나 멘셰비키가 볼셰비키를 비난하며 사용했던 경우도 적지 않으며, 일반적으론 과격분파를 가리키는 등 부정적인 함의가 짙다_ 역주]의 부활.’

 

그러한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라트비아 볼셰비키 지도자 페테리스 스투치카(Pēteris Stučka)는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사이에 그러한 단단한 이분법을 세우는 것은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요구를 지지하길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필수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트로츠키도, 멘셰비키가 권력을 잡는 것에 대한 그들의 거부를 합리화하기 위해 2월에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강조했고, 3월에는 동일한 논지를 제기하며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정당화했다고 썼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것들이 부르주아지의 특권을 보존하고, 국내 정치그룹들의 계열화로 인한 자격에 따라 정부내의 직책을 배당하기 보다는 정권의 역할로 그것을 할당하기 위한 전적으로 실용적인시도라고 결론 내렸다.

 

볼셰비키와 다른 급진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분석적 프레임 속의 이러한 논쟁에 참여하길 거부했다. 볼셰비키 간부들은 반복적으로 그들이 사회주의를 도입하려 한다는 비난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와 협력할 것인지 단절할 것인지에 대한 진짜 정치적 대안으로부터 주의를 빗나가게 하려는 부정확한 허수아비 때리기였다. 즉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당위를 설명하는 대신, 그들은 사회주의는 국제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하고, 러시아에서는 국내나 제국주의 자본가들 모두와 갈라설 수 있고, 갈라서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누군가는 혁명이 사실상 부르주아의 것이었다고 믿었다 해도, 그들은 이것이 부득이하게 부르주아 정부의 설립을 수반하진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체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중심적인 목표들(토지 개혁, 재헌 의회 등)을 성취하는 데 무능할 뿐 아니라, 러시아의 대부분 사람들이 농민이나 노동자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일 것이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10월 혁명이 제국의 각 도시와 지역에서 전개된 구체적인 방식을 상술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맥락에서 적용된 모든 전략적, 정치적 차이들에 관해 말하자면, 1917년 말에 소비에트 권력을 향한 제정 러시아 전역의 투쟁에서 공통된 기초적 내용이 있었다. 공유된 목표는 노동자들의 긴급한 요구를 시행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확실한 정치적 단절이었다.

 

예를 들면, 10월 봉기의 즉각적인 영향으로, 바쿠(Baku)의 볼셰비키 위원회는 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혁명이 아니면, 반혁명이다. 부르주아지의 집권이 아니면 소비에트의 집권이다. 부르주아 연합 정부를 타도하라! 위대한 러시아 혁명 만세!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페테르부르크 수비대 만세!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들의 소비에트 권력이여 영원하라!’

 

10월 혁명은 국내와 국외의 부르주아지와 갈라섰고, 1차 대전에서 러시아가 빠져나오는 것, 농민들에 대한 토지 분배, 노동자들의 생산 관리, 제헌의회 선거 등을 포함하여 노동자들이 그 해 전반에 걸쳐 싸워온 핵심 열망들을 실행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에 대한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약속을 떠받들고 실행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올 장이 보여줄 것처럼, 4월부터 그 이후로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체제의 설립과 사회주의 혁명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은 별로 사실이 아니다.

 

혁명을 유형화하기

 

1917년에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뚜렷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가 없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되어왔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사이의 정확한 정치적 경계선에 대한 일반적 동의는 없었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의 대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극도로 유동적이고 혼합된 사회정치적 과정들을 유형화시키는 데에 따른 어려움에 근거한이런 개념적 모호함은 실로 1917년의 이야기에 관한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지배적인 이론적 모호함에 대한 한 징후는 볼셰비키의 4월 회의와 6차 당 대회(1917726~ 83) 모두 당의 기획을 갱신하는 곤란한 논의를 연기하기로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적어도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첫 번째는 생산수단에 관련된 것이다. 즉 생산의 완전한 사회화로 나아가면서, 자본주의적 소유에 대한 어떤 현저한 잠식이 이뤄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통제 및 소유가 당장 취해질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1905년 이후 칼 카우츠키(Karl Kautsky)와 다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정교화된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개념에서 몇몇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를 제안했었다는 사실은 이론적 논의(theoretical waters)를 더 흐리게 했다.

 

두 번째 함의는 사회적 계급과 정부에 관련된 것이었다. 민주주의 혁명과 다르게, 사회주의 혁명은 국가권력의 쟁취에 도달하며, 전적으로(혹은 아마 주요하게) 도시와 지방의 노동계급이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유형화하는 방법에 대한 모호함의 상당부분은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계급(소농)의 산물이기도 할 것이며, 아마 전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결과를 낳지도 않을 거라는 전망을 중심으로 삼았다.

 

이러한 개념적 회색 지대를 고려할 때, 볼셰비키의 정치적 입장들과 논의들이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정치, 경제적 문제들에 맞춰져있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혁명을 설명하기 위한 다른 범주들이 이들 논의에 끌어들여졌지만, 그들은 분석적 출발점에 해당하지 않았다. 달리 말해, 혁명에 대한 볼셰비키의 진전된 메타적 유형화는 훨씬 더 실질적인 정치적 입장들과 논의들을 애매하게 반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2월과 3월에 있어, 혁명은 주로 민주주의 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서 설명되어 왔었다. 그러한 명칭은 4월이 한참 지난 후로도 계속되었다. 인용될 수 있는 많은 사례들 중에서도, 7월 말 라트비아의 주요 소비에트 회의에서, 한 볼셰비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러시아 도처의 격변은 세계자본주의 체계가 전복될 만큼 성숙한 시대에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혁명은 우리가 부르주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의 성격을 갖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과 완전히 구별된다. 즉 민주주의 혁명인 것이다.’

 

다른 볼셰비키 최고 지도자들도 여름 내내 이 용어를 계속 사용했다. 심지어 10월 혁명 이후에도, 진행 중인 혁명은 사회주의적이라기보다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볼셰비키 간부층의 다양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레닌도 4월에,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결론에서 주된 결함은 그들이 이 문제를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문제처럼, 너무나 일반적인 어떤 형식으로제기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대신, 그는 구체적인 단계와 방침에 집중할 것을 논하며, 소비에트 권력의 설립은 새로운 이행의 사회적 기간을 시작할 것이라고 강변했다. 러시아가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에 있어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과 함께 예외적인 역사적 과정을 겪고 있다는 이러한 개념은 볼셰비키 간부층 사이에 널리 퍼졌다.

 

4월의 논의 과정과 그 해 전반에서 많은 볼셰비키들이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의 경계에 자리한 어떤 독특한 기획이라는 카우츠키의 영향력 있는 1906년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거론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로츠키가 일찍이 1906년에 당연히 쟁점은 우리의 혁명을 부르주아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기치가 무엇이든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으며 이는 사회주의적 정책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여름 이후로, 볼셰비키는 점차 혁명을 단지 그에 연루된 계급의 힘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 (병사들을 포함하여) 노동자들과 농민들 말이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임시정부의 전복을 표명하는 선언은 따라서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혁명이여 영원하라!’ 제국 전역에서 이와 유사한 어구들은 표준이었다.

 

볼셰비키에게 (보통 10월 훨씬 이후)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들에 대한 담화는 항상 서구 및 세계혁명의 맥락에서 사회적 전복에 착수하는 것과 관련된다.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권력 장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유형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4월에 페트로그라드와 그 이외의 곳에서 있었던 토론과 결의에는 완전히 부재했다). 사실, 4월의 레닌을 비롯하여 볼셰비키 최고 지도부는 그들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꾀하고 있다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34

 

부분적인 예외는 볼셰비키 지도부의 한 분파가 7월의 나날들의 즉각적인 여파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버리면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돌이킬 수 없이 반혁명적 부르주아지에 굴복했고 기존의 소비에트는 더 이상 혁명적 권력 기관이 될 수 없다는 레닌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논쟁에서 승리하였다. 페트로그라드 당 회의, 그리고 다시 제 6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은 임박한 러시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서 설명했는데, 이는 볼셰비키 지도자 중에서 1917년에 그 개념을 명백히 사용한 내가 찾은 첫 번째 사례이다.

 

그러나 V.볼로다르스키(V. Volodarsky) 등의 다른 간부들은 이러한 혁신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거부한다. ‘이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어떤 이행이지, 우리가 우리의 동맹을 잃고 홀로 싸우게 되는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다. 우리와 서방 유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 혁명 이상의 것을 가지지만, 그것이 사회주의 혁명은 아닌 것이다.’ 비슷하게, 또 다른 간부들은 스탈린의 경우가 4월 논의를 통해 취해진 더 온건한 입장과의 단절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에 맞서 주장하면서, 훗날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가 될 Y.A. 프레오브라젠스키(Y.A. Preobrazhensky)는 러시아에서의 성공적인 사회주의적 이행은 서구 노동자들의 통치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으며, 사회주의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스탈린의 날카로운 대립을 거부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이 비변증법적이고, 볼셰비즘보단 멘셰비즘과 관련된 것이라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제 6차 당대회는 그 사건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요소의 증가를 이끌고 있다고 결말을 열어두고 결의했다. 더욱이(여기서 논의한 이유들로 인해) 심지어 이 타협안의 공식화와 그것과 연결된 6차 당 대회의 방향조차 당위원회에 의해 무시되었다.

 

사실상 모든 볼셰비키의 내부 결의안과 문헌, 러시아 혁명을 앞둔 격론, 그리고 1025~26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공표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언급은 오직 국제적 과정에 관련되어있다.

 

10월 혁명이 시작되기 8일 전 당의 이론적 간행물로 출판된, 레닌의 에세이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에서 그가 지나가는 말로 다가오는 러시아에서의 격변을 사회주의 혁명이라 설명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특히 1025~26일의 극적인 사건 이전에, 이러한 구상이 볼셰비키 당 내부에서, 혹은 당을 지탱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데이비드 만델을 인용하자면, ‘사회가 두 개의 해소불가능한 적대적 진영으로 분열된 조건 속에서, 10월은 2월의 실제적이고 약속된 성취에 대한 최초의, 가장 중요한 방어 행위였다. 비록 10월이 사회주의를 향한 길을 여는 것으로 보였다 해도, 10월과 이어지는 달들에서 취해진 모든 방침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거나, 새로운 상황 속에서 혁명을 보존하려는 - 근본적으로 방어적인 행위로 비쳐졌다.’

 

비록 볼셰비키의 여러 최고 간부들은 - 특히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정부에 결합시키는 것, 독일과의 단독 강화에 서명하는 것, 제헌의회를 고려하는 것 등에 대한 토론 과정에서 - 10월 봉기에 이어지는 러시아 혁명을 사회주의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대한 공식적 표시는 1918년 초에야 일반적으로 당과 정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18.9.9)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http://anotherworld.kr/164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