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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볼셰비키는 1917년에 ‘사회주의 혁명’을 옹호했는가? (2)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9. 14.

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정강산

 


[이 글은 오랫동안 정설로 굳혀져 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중요한 신화에 도전한다. 그 신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4월에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이 천재적 감각으로 새로운 전략적 혁신을 했다. 그것은 사실상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채택한 것이며 관성에 빠진 볼셰비키들이 반발했지만, 결국 레닌이 논쟁에서 승리해 러시아 혁명이 가까스로 성공할 수 있었다. 4월에 레닌이 노동자 권력인 소비에트 권력을 주장한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 글은 이런 주장이 왜 역사적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지 꼼꼼히 논증하면서 새로운 혁신적이고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또 볼셰비키가 10월에 사실상 단독정권 수립으로 나간 것도 처음의 의도와는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접근을 시도한 라스 리(Lars T. Lih)의 앞선 분석과 같이 보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http://www.anotherworld.kr/494)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은 뉴욕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역사사회학자이자, <() 식민지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차르 국경지방에서의 억압과 혁명 Anti-Colonial Marxism: Oppression and Revolution in the Tsarist Borderlands)>(Brill Publishers, Historical Materialism Book Series)의 저자이다. 그는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해체하는 글을 써 온 것으로도 유명하며, 나아가 적극적인 활동가로서 미국에서 교사파업에 연대하고 새로운 좌파적 정치대안을 건설하는 문제에도 매우 활발하게 개입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 전 그와 차이나 미에빌이 러시아 혁명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번역해 소개한 적도 있다.(http://www.anotherworld.kr/534) 이 길고 결코 쉽지 않은 글을 정성스럽게 번역해준 정강산 님에게 매우 깊은 감사를 드린다. 분량이 방대하여 2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2편이다.]

 

출처:

http://www.historicalmaterialism.org/blog/did-bolsheviks-advocate-socialist-revolution-1917





(1편에서 이어짐) 


국제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자의 통제권(Workers’ Control)

 

러시아 혁명을 범주화하는데 있어 상황을 복잡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무엇보다 1917년 모든 볼셰비키들과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전 세계적 현상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은 비록 러시아 자체 내에선 그 과정이 여전히 주로 전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방아쇠이자 구성요소로 다루어질 수도 있다.

 

실로, 이는 최소한 1914년 이후부터 러시아제국 전역의 볼셰비키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입장이 되어왔었다. 4월 논의에서 이러한 접근을 승인하면서, 바그다테브(Bagdatev)는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 장악에 의해 촉발될 서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 없이는 당의 최소강령을 완전히 이행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슷하게, 라트비아의 볼셰비키 지도자 프리시스 로진스(Fricis Roziņš)7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평화와 자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이론적 이해로부터 모든 [국제주의자들의]실천 행위가 나온다.’

 

러시아 혁명이 1차 세계대전의 맥락 속에서 터져 나왔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편으로 전쟁의 파국은 모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로 하여금 국제적으로 서구에서의 사회주의의 폭발을 자신 있게 예측하도록 이끌었고, 1917년에 이는 몇 년이 아니라 몇 주 또는 몇 개월의 문제로 보였다.

 

더욱이, 평화를 위한 진지한 싸움은 러시아를 외부 제국주의와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 밀어 넣을 것이었기에, 그해 내내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다수의 시각은, 러시아에서의 성공적 혁명은 그것이 해외로 퍼져나가며 이어지지 않는다면 외국 열강에 의해 분쇄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레닌이 4월에 주장했듯, ‘우리는 이제 모든 다른 나라들과 엮여있으며, 우리 스스로 얽힘을 풀 수 없게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자유롭게 되거나, 분쇄될 것이다.’ 러시아 내 사회주의의 객관적 조건의 부재에 관한 멘셰비키의 반론에 있어 볼셰비키의 주요 응답은 세계 혁명의 현실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스투츠카(Stučka)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오직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붉은 깃발을 들어올릴때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러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정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공격에 무너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나중의 옹호와는 실로 반대되게도, 1917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러시아 혁명은 고립된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서구에서의 혁명적 운동과 불가결하게 관련되어 있다 오직 서구 노동자들과의 협력 속에서, 오직 서구에서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듦으로써, 그들[노동자들과 군인들]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트로츠키처럼 그는, 해외에서 혁명의 지원이 없이는 사회주의로 전환 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의 단순한 생존도 불가능 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전 세계적 반자본주의적 격변이 임박해 있다는 생각의 중심성은 1917년 볼셰비키의 선동과 선전에 있어 항상 나타나는 측면이었다. 당의 언론은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국제적인 계급투쟁에 달려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따라서 당의 문건은 해외의 노동자 투쟁과 반전 투쟁이 증가하는 사례를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강조했다.

 

세계혁명에 대한 이러한 도박은 이어지는 10월 혁명 전야와 10월 혁명 기간 동안에 확증되었다. 레닌은 나중에 해외 혁명의 전파 없이는 러시아 소비에트 체제가 3년 동안만 버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은 191710월에 단지 볼셰비키만이 아니었다고 썼다. ‘우리가 우리의 이상을 위한 사업에 착수했을 때, 우리는 전적으로 세계혁명을 기대했다.’

 

이것은 제국 전역에서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급진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핵심적인 전략적 차이 중 하나로 지속되었다. 볼셰비키와 그들의 동맹은 권력을 쟁취할 노동자들의 능력에 있어 자신들의 주장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온건파들은 서구의 혁명이 당장의 의제가 아니며 따라서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기획이 해외로 확산되길 기대하는 전제는 무모한 것이라면서 자신들의 절충주의를 정당화했다. 그들의 눈에 혁명은 주로 개별 국가들 내부에서 일어난 과정이었고, 이들 각각은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 충분히 성숙한조건들을 갖춰야 했다.

 

결과적으론, 러시아 바깥의 자본주의의 생존에 의해 온건파들이 옳은 것으로 증명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은 1917년 이후 국제적인 혁명이 있었다는 사실, 그 패배의 상당부분이 러시아와 해외에서의 절충적 사회주의자들의 계급 협조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못 보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반자본주의적 격변에 관한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그러한 회의주의는 중립적인 분석이긴커녕, 어떤 정치적 개입이자 상당 수준으로 자기 충족적인 예언이었다.

 

국제적 혁명에 대해서처럼, 적어도 10월까진 노동자들의 [공장 및 생산에 대한] 통제와 자본가의 재산 몰수에 관한 볼셰비키의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 볼셰비키는 (서구에서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후자가 아니라 전자를 지지했다. 심지어 4월에 있었던 사회주의를 향한 걸음에 대한 레닌의 주장은 자본주의적 산업의 부분적 혹은 완전한 몰수를 포함하지 않았다.

 

레닌은 러시아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이고, 사회주의에 관한 이념을 가질 수 없는 소농들이기에, ‘우리는 사회주의를 도입할 수 없으며, 이는 터무니없는 말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로서 바그다테브는 레닌에 의해 제안된 특정한 강령에 동의했으나, 이들은 완전히 당의 최소강령의 틀 내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비슷하게, 노동자 통제권(control)을 위한 공장위원회의 움직임은 자본주의적 산업을 사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적 소유 혹은 작업장의 관리에 관해 토론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었는데, 실제 러시아에서 ‘kontrol’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통제보다는] ‘감독(supervision)’이나 검사(checking)’로 번역되는 것이 낫다. ‘노동자 통제권1917년 대부분 동안 주로 고용주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일로 이루어진 방어적인 방침이었다. 그 목표는 사장들이 피고용인들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은 생산을 지속적으로 탈구시키고 방해할 의사가 없었다.

 

그의 고전적인 연구에서, S.A. 스미스(Smith)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권의 정치는 무엇보다도 산업 혼란의 흐름을 막기 위한 공장위원회들의 시도였다라고 쓴다. 아나키스트들과 사회혁명당의 최대강령주의자들은 즉각적인 산업 압류와 공장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완전한 관리를 요구했지만, 이러한 입장은 일반적으로 1917년 내내 (볼셰비키들과 마찬가지로) 공장위원회에 의해 거부되었다.

 

노동자 통제권은 멘셰비키에 의해 그려진 정부의 이중권력구조와 유사하다. 즉 비록 노동자들이 그들 스스로를 위해 완전한 권력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부르주아지들에게 올바른 방향으로 압력을 넣기 위해 부분적인 권한을 요구했던 것이다.

 

볼셰비키가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통제권을 향해 긍정적인 접근을 취하도록 한 그 압력은 레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일반 노동자들과 당의 노동자 투사들로부터 비롯했다. 볼셰비키의 노동자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밀류틴(Vladimir Milyutin)이 제 6차 대회에서 썼듯, 당은 기층에서부터 수행된 자주적 활동의 경험에서 나온노동자 통제권에 관한 요구에 빚져왔다’.

 

일반적으로 노동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헤게모니적 입장은, 산업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관리를 향해 팽창될 노동자 통제권(소비에트 국가의 통제와 함께)에 관한 가능성이 혁명의 국제적 확산에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한 볼셰비키 지도자는 6월 공장위원회 회의에서 어떻게 혁명이 종결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은 자본에게서 그 권리들을 일부 박탈할 테지만, 최대한의 경우 누가 러시아 혁명이 세계혁명으로 나갈 수 없으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10월 내내 지배적이었던, 상대적으로 제한된 노동자 통제권이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작동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는 점은 모두에게 분명했다.

 

비록 봄에 고용주들은 노동자 통제권에 관해 마지못해 굴복했지만, 9월 초 이후로 그들은 자신들의 기업에 관한 완전한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목적으로 공장위원회에 맞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산업의 급속한 혼란과 공장위원회에 맞선 자본가들의 공격으로 두드러진 상황에서, 제국 전역의 작업장은 가을 내내 [공장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싼 격렬한 전쟁의 장소였다. 실로, 노동자들과 고용주들의 상호 비타협적 태도는 레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원했던 것보다 더 멀리, 더 빨리 작업장 투쟁을 밀어붙였다.

 

10월 혁명은 노동자 통제권을 성문화했지만 산업을 국유화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부는 10월 이후 몇 달 동안 산업의 소유자들과 일종의 작업 협정(working arrangement)에 도달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가 1906년에 예견했듯, 선도적인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를 고무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가들의 경제적 사보타주와 정치적 저항, 노동자들의 비합법적인 몰수의 흐름, 내전의 동학은 당이 1918년 하반기에 모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도록 휩쓸었다. 그 주어진 맥락에서 다른 가능한 대안은 없었다 해도, 이 소비에트 국유화의 흐름은 생산의 파국적인 붕괴를 심화시켰고 특권을 부여받은 국가 관료의 대규모 성장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소비에트 권력의 계급적 리더십(Class Leadership)

 

1917년에 세계혁명과 노동자 통제권에 관한 볼셰비키 내부의 불협화음은 거의 없었지만 소련 정부의 당/계급 지도력의 문제는 훨씬 더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혁명의 과정과 실질적인 당의 정치에서 결정적인 것은 이 문제였다. 필자의 선행 연구는 라스 리(Lars Lih)의 선구적인 업적과 중요한 측면에서 겹쳐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1917년 볼셰비키의 연속성에 대한 라스 리의 강조는 그로 하여금 이 논쟁의 중요성을 축소하도록 이끌었다.

 

볼셰비키는 1905년 이래로 줄곧 어떤 계급(그리고 그 계급과 조응하는 당)이 그런 권력에서 헤게모니를 쥐어야 하는지를 명시하지 않고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 해왔다.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를 요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노동자 계급의 중요성과 그 내부의 정치적 대표자를 명시하지 않은 채 혁명적 국가 권력의 일반적인 계급적 내용(content)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것은 볼셰비키의 전략이 여러 가지 다양한 방향으로 구체화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반대로,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정부 내에서든 민주주의적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헤게모니적 흐름이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정당하게도, 이 문제 - ‘누가 정부 자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이를 통해 국가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 할 것인가?’ - 에 관한 자신의 입장은 영구혁명 전략의 가장 근본적 교의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1905년 이후로, 여러 경우에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독특하고 구체적인 정부의 비전을 제안했다. 이들이 때로 사실상 트로츠키의 것과 동일한 프롤레타리아 국가 헤게모니의 형태에 대한 지지를 포함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간과된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엔, 볼셰비키는 정부에서 노동자들의 당이 프티 부르주아의 혁명적 민주주의 정당(예컨대 사회혁명당과 트루도비키(Trudoviks))과 동등한 파트너(혹은 심지어 소수파)로서 행동할 수 있을 거라 제안했다.

 

볼셰비키는 1917년 내내, (프롤레타리아의) 볼셰비키 정부의 리더십이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에 필요한 것으로 증명될 것인지, 혹은 (프티 부르주아지의) 온건 사회주의자들 -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 이 부르주아지와 갈라서도록 강제될 수 있을지에 관해, 이러한 열린 결말의 접근을 유지했다.

 

4월의 논쟁도 볼셰비키 전체로 하여금, 실행 가능한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를 위해서는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가 필요하다는 트로츠키의 오래 지속된 관점을 채택하도록 하진 않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4월 논의의 핵심적인 전언은, 교차하는 계급의 소비에트 정부가 소비에트 내에서 (부르주아지와의 결별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노선의 완고한 개진을 통해서만 설립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레닌에 의해 작성된 4월 결의안에서 이뤄진 몇몇 형식화가, 필수적인 다음 단계로서 프롤레타리아 국가 리더십의 방향에 관해 막연하게나마 지적했지만, 다가올 소비에트 정부의 정확한 계급-정치의 리더십은 여러 면에서 구체화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4월 결의안의 모호함의 근저에 있는 것은, 그 논의 과정에서 넓은 범위의 다양한 견해들이 분명히 표현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레닌의 입장은 카메네프에 의해 가장 분명히 표현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레닌에 따르면,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독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독재가 예상외로 프티 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이 거대한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줬던 소비에트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가 새롭고 다른 과업에 직면했으며’, 그것은 이러한 독재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적요소와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는데 전념해 온 프티 부르주아지적요소(우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도자들) 사이의 분리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분석을 숙고하며, 레닌은 계급투쟁과 미래의 국가 권력에 있어 노동자들의 주요한 동맹은 농민 전체라기보다는 빈곤한 농민들과 농업 노동자라고 제안했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적 정부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방향, 즉 레닌이 1917년 내내 노동자와 빈농의 정부라 묘사하려했던 권력의 형식을 가리켰다. 소비에트 권력의 설립을 사회주의를 향한 걸음이라 본 레닌의 구상 역시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한 강력한 함축을 담고 있다.

 

몇몇 볼셰비키와 압도적 다수의 멘셰비키가 레닌의 입장을 사회주의적 혁명과 동일한 것으로 봤다는 것은 아주 놀랍진 않다. 그러나 레닌이 이러한 명명을 거부했으며, 그가 프티 부르주아지와 그 대변자들 전부가 부르주아지와 결별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권력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실로 가능하다는 점을 여전히 인정했다는 걸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는 만약 이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이를 향한 하나의, 유일한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프티 부르주아지의 요소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적 요소의 즉각적인, 단호한, 결정적인 분리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레닌의 당내 비판자들은 일반적으로 전체 프티 부르주아지와 그 정치적 대표들이 자본가들과 결별할 잠재력에 대해 더 희망을 걸고 있었다. 카메네프는 전체 혁명적 민주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충돌은 불가피하며이러한 임박한 분리를 고려했을 때, 프롤레타리아트와 프티 부르주아지 사이의 연합을 깨지 않을 우리의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4월 논의에서 바그다데프(Bagdatev)는 당내 비판자들이 레닌과 어긋나는 점의 본질은 그들이, 소비에트를 볼셰비키의 입장으로 돌리는 것이 권력 장악의 전제조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 해 내내, 볼셰비키 온건파들의 결정적 태도는 폭넓은 다당제 사회주의 정부를 공동으로 구성하도록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설득하는 일을 가장 일관되게 지향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방향으로 강제되었던 이유도 있다. 노동계급은 러시아에서 소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폭 넓은 소비에트 정부는 노동자-농민의 동맹을 굳게 접합시키고 부르주아지에 일치단결하여 맞서는 다수결의 사회적 기초를 놓는 데에 최선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볼셰비키에게는 농촌의 강력한 지지가 부족했고, (라트비아를 제외하면) 농민 계급의 분화는 레닌이 4월에 주장했던 것보다 덜 일반적이었다. 달리 말해, 볼셰비키 온건파의 접근은 멘셰비키와는 상당히 달랐으며, 공리공론이나 개혁주의로 가볍게 치부되어선 안 된다.

 

이러한 볼셰비키의 독특한 기대는 4월동안 잘 공존했다. 4월 당 토론의 모호성과 레닌 스스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자유주의자들과 결별할 가능성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볼셰비키는 그 잠재적인 계급 지도력에 대한 모든 우발적 사태들에 열려있는 전략적 틀 내에서, 압도적으로 소비에트 권력을 상상하면서 선동을 지속했다. 4월 이후의 내부 토론도, 당의 신문도 볼셰비키가 그들의 당이 월등한 다수가 되는 승리를 통한 소비에트 권력 설립을 분명히 지향했다는 것을 보여주진 않는다.

 

소비에트에서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우세함을 고려할 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구체적으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정부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한 볼셰비키의 선동은 본래 그들의 라이벌을 폭로하는 전술상의 책략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전념하는 폭 넓은 반자본주의적 권력을 형성하려는 진지한 압력이었다.

 

볼셰비즘의 4월 이후 입장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지도부가 부르주아지와 결별하는 데에 무능했다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들이 부르주아지와 결별할 수 있고, 즉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손으로 권력을 잡을 것을 요구한 7월의 요청에서, 바쿠[Baku: 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_역주]의 볼셰비키 지도자였던 스테판 샤우미안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글을 마친다.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들은 삶의 긴급한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혹은 그들은 혁명의 이익에 대한 자신들의 멍청한 오해를 계속 고집할 것인가?’

 

소비에트 권력을 향한 볼셰비키의 선동은 프티 부르주아지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자유주의자들의 지도자였던] 밀류코프(Milyukov)와 구치코프(Guchkov)의 영향으로부터, 러시아와 제국주의 동맹에 대한 그들의 노예적인 복종으로부터 떼어내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욕망을 표명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6차 당 대회에 대해 말하면서, 스탈린은 볼셰비키에 의해 자신들의 유명한 표어에 부여된 의미를 논쟁의 여지없이 설명했다. ‘우리의 슬로건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고, 따라서, 통일된 혁명적 전선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부르주아지와 결별하길 두려워했으며,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볼셰비키의 지배적인 접근은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결별할지 말지를 얘기하기만 하는 정도였다. 반대로, 트로츠키는 6월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 정부의 몰락과 함께 노동자, 군인 대표들의 현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몰락이 이뤄질 것이다. 혁명의 대표로서 소비에트의 권위를 지키고, 지도적인 권력으로서 소비에트의 기능이 존속하도록 보호하는 것은 오직 소비에트의 현 소수파의 권력에 달려있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볼셰비키의 접근 내에서 첫 번째 단절은 4월이 아니라 7월 사태 이후로 생겼다. 노동자들과 그들의 잇따른 급진주의적 공세에 대한 연립정부의 유혈 진압 이후로, 레닌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명백히 혁명의 대의를 배반했으며’, (그의 관점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모든 권한을 부르주아 독재에 양보해왔기 때문에, 더 이상 기존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도록 평화롭게 압력을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당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를 버려야했고, 대신 반혁명적 군국주의 체제에 맞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레닌은 ‘19177월의 경험 이후로, 부르주아지와의 결별은 앞선 시기와 달리 이제 완전히 대중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 등을 돌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국가 권력을 독립적으로 쟁취해야하는 쪽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이고, 이것이 없이는 혁명의 성공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레닌이 노동자와 폭 넓은 농민 대중 모두를 대표하는 다수결주의의 소비에트 체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이 보기에 이제 이 목표를 향한 길은 필연적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에 의한 즉각적인 권력 장악과 직결된다는 것이었다.

 

혁명의 진전은 프롤레타리아가 이끄는 정부를 절대적으로 요구한다는 레닌의 날카로운 주장은, 권력은 기존의 소비에트에서 다수파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 맞서 독립적으로 쟁취되어야한다는 그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급진파의 여러 간부들은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으며, 이는 7월 사태 이후 온건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고립된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강한 의식과 일치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러한 노선은 볼셰비키 지도부와 당원들 사이에서 4월 테제보다 더 논쟁적이었다.

 

레닌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7월 말부터 9월 초까지의 제 6차 당 대회에서 새로운 노선의 주요한 옹호자는 스탈린이었는데, 그는 심지어 서구에서 혁명이 발발하기 전이라 해도 러시아가 이제 사회주의 혁명에 준비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레닌 본인보다 더 나아갔다. 그러나 6차 당 대회에서 볼셰비키 최고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의 본질로서 혁명과 관련된 설명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에 독립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 요구를 날카롭게 논박했다.

 

그들이 보기에, 소비에트를 권력기관으로 변형시키려는 싸움을 중단하는 것은 당과 노동계급을 고립시킬 치명적인 위험이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소비에트를 폐기하는 것과, 이들 기관이 대표하는 프티 부르주아 대중과의 동맹을 폐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훤히 드러난 토론은 역사 편찬에서 매우 간과되어 왔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소비에트 권력에의 요구에 관한 지배적인 오해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6차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 혁명(및 소비에트에 독립적인 권력 장악) 옹호 노선에 맞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이양할 것을 가장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쪽은 볼셰비키 온건파들이었다. 결국, 6차 당 대회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요구를 철회하면서도, 동시에 당의 기존 접근의 상당부분을 재차 단언하는, 레닌의 입장으로 기울어진 일련의 타협안을 통과시켰다.

 

레닌과 (더 약해진 형태로) 6차 당 대회에 의해 옹호된 새로운 노선에 대해 전체로서의 당이 취한 반응을 고찰하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이양하기 위한 싸움을 그만두라는 요구는 기본적으로 대체로 무시되었다. , 그가 누구이든 볼셰비키 위원회는 계속해서 이 요구를 제기했고,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 갈라서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이것은 주요 지방과 국경 도시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도 사실이었다. ‘지역 수준에선 대중의 정서와 어긋나는 방침 변화를 이행하는 것에 대해, 널리 퍼진 거부가 있었다고 악톤(Acton)은 쓴다. ‘그 결과는 소비에트에 기초한 통치의 옹호자로서의 당의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을 조치를 [알아서] 완화하는 것이었다.’

 

8월 말 코르닐로프 반혁명의 패배는 폭 넓은 다수 정당의 저항으로 인해 정치적 상황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지난 달 동안 레닌이 주장해왔었던 것과는 달리, 반 코르닐로프 투쟁은 기존의 소비에트가 쇠퇴하지 않았으며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반혁명적 부르주아지에게 분명하게 순종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러한 단결된 승리의 각성 속에서,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에 걸쳐 많은 이들에겐 소비에트의 지도부가 결국 자유주의자들과 결별할 것으로 보였다. 핀란드의 그의 은신처로부터, 레닌은 또 다른 뜻밖의 정치적 반전을 꾀했고 이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지도부가 소비에트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는 볼셰비키 지도부의 요구에 힘을 쏟았다.

 

그의 즉각적인 목표는 여전히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였기 때문에, 레닌은 개인적으로 볼셰비키가 기존에 제안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소비에트 정부에 참여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31일의 소비에트 집행부 회의와 914일부터 22일까지 이어진 전 러시아사회민주당 회의를 앞두고, (이제는 트로츠키가 포함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의해 만들어진 반(anti) 연립정부 안은 이러한 가능성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셰비키 지도부는 91일의 페트로그라드 시 의회(Duma)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오직 진정 혁명적인 민주주의가 위대한 혁명적 페트로그라드의 관리를 맡게 하자. 그러면 우리 역시 세계혁명 중심지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사심 없이 일하기 위해 그 행렬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72] 2주 후, 지도부의 사설도 비슷한 입장을 표명했다. ‘볼셰비키와 함께 통일된 전선을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케렌스키 정부와 결별하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소비에트를 지원하라. 그러면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타협이 받아들여졌다면, 카메네프와 그 동료들이 가진, 노동자들의 민주적 독재에 대한 전망과 닮은 체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지도부는 양 당들 내부에서 반 연립파의 강력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또 다른 정부를 세웠다.

 

볼셰비키 지도부가 온건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제안한 타협안이 나온 지 며칠 만에, 어떤 중요한 새로운 진전이 정치적 방정식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것은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지도권을 쟁취하게 된 것이었다. 제국 전역의 소비에트들이 이내 그 뒤를 이었다. 이제 볼셰비키는 이들 조직들 내에서 가장 강력한 흐름이었으며,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요구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내용을 취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제부터 아마도 볼셰비키에 의해 지도되는 정부를 의미했다. 즉 볼셰비키의 계급 분석 용법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헤게모니를 잡은 체제가 될 것이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볼셰비키가 이끄는 소비에트 체제의 정당성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의 폭넓은 사회적 기초는 인구의 광대한 다수를 대표할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비에트 권력을 노동자, 농민, 군인, 좌파 인텔리겐치아,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대표자들을 대의하는 다당제의 체제로 상상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계속된 반발은 볼셰비키가 이끄는 소비에트 정부가 근본적으로 (혹은 배타적으로) 노동계급에만 근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일으켰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좌파들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어디서 그들의 정치적 동맹이 완전히 끝날지는 불분명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사회주의 조류들의 동의가 없는 소비에트에 의한 권력 장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고립과 내전이라는 잠재적인 위협을 가져왔다.

 

그런 상황에서, 임시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볼셰비키의 지도부가 즉각적으로 무장봉기를 조직해야한다는 9월 중순이후로 제기된 - 레닌의 권고는 처음에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제안된 타협안에 대한 온건파들의 처음의 거절 이후 몇 주 동안, 볼셰비키 간부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회주의 조류들의 동의를 얻어 다당제의 노동계급 정부를 평화적으로 수립할 방안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협상과 압력 발의를 했다.

 

이러한 입장은 단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전선을 가능한 폭 넓은 기반으로 보존하겠다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혁명적 민주국가를 위한 단결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지속적인 압력으로부터 또한 나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셰비키의 정치적 성공은 그들이 온건파들에게 단결의 지반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1010일에, 온건파들과의 협상이 처한 난국은,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케렌스키 정부의 새로운 발의와 결합하여, 중앙위원회 다수가 결국 무장봉기의 필요성에 대한 레닌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다. 당은 다른 사회주의 조류 및 그들의 지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통치의 설립을 향해 밀고나가야만 할 것이었다. 당의 다수는 레닌처럼, 이제 권력을 쟁취하는 데 있어 그들이 계속해서 광대한 농민 대중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과, 성장하는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의 연합에 의해 예시된 희망찬 동학에 내기를 걸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가오는 제 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있기 몇 주 전에 당이 봉기를 조직해야 한다는 레닌의 무분별한 압력에 볼셰비키 지도부가 동의했음을 뜻하진 않는다. 대신에, 트로츠키의 지도하에서 볼셰비키는 무장 행동을 소비에트와 그 기관들, 2차 소비에트 대회의 정당성에 결합하는 더 신중하고 방어적인 접근을 통해 정부 전복을 시도하려 했다. 비록 10252차 대회가 열리기 몇 시간 전에, 계속돼온 군사 작전계획을 더 공격적으로 밀어붙인 데 레닌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지만, 결국 우세했던 것은 후자의 방법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두 소수파였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1010일의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으며, 비 볼셰비키 언론을 통해 무장봉기에 반대하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들 입장의 핵심 - 제국 전역의 많은 볼셰비키 간부들이 공유했던 - 은 무장으로 권력을 잡는 일을 성공시키기엔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당이 여전히 너무 약하다는 것이었다.

 

다가오는 제헌의회 선거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그들은 (특히) 앞으로는 프티 부르주아지 정당의 지위가 틀림없이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시간은 노동자의 편이라고 주장했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은 그들에게 전에 없이 강력한 압박을 줄 것이고, 그들이 입헌민주당에 의해 대표되는 토지소유주들과 자본가들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과 동맹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즉각적인 무장 봉기에 대한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트의 반대는 1010일 이전까지 볼셰비키 내부에서 지배적이었던 주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지난 몇 달 간의 논쟁이 시사했듯이,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합의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포기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분명한 해답이 없었다.

 

더욱이 191710월의 구체적인 상황에는 소비에트 권력을 향한 투쟁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에 대한 볼셰비키 당의 원칙적 주장과, 폭 넓은 기반을 둔 노동계급 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동자와 당 활동가들의 요구 사이에 매우 중대한 긴장이 있었다. 레닌, 트로츠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후자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 실현은 정치적 확신보다는 미래의 진전에 대한 도박에 가까웠다.

 

아마도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에 맞서 퍼부어질 주요한 비판은, 그들이 봉기의 조건이 보장 되었을 때 정치적 전환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이 현실적인 정치적 딜레마와 위험을 지적했지만, 봉기에 대한 그들의 처음의 반발은 단순한 전략상의 차이로 축소될 수 없다. 온건 사회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소비에트 정부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취급하는 그들의 경향은 스스로 자본에 굴복한 채 남아 있는 정치적 힘에 볼셰비키가 굴복하도록 위협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로츠키는 10월의 소수 지도부의 반발은 부르주아 사회의 머리 위에 죽음의 위협이 커지고 있었을 당시에 부르주아지의 공적 의견에 의해 당에 가해진 압박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며 이 점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점은 과장되어선 안 되는데, 왜냐하면 무장봉기의 개시에 대한 그들의 초기 반발에도 불구하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모두 결국 1025~26일 사이에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의 설립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메네프는 소비에트 중앙 집행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지노비예프는 1025일에 대해 다수의 선구적인 볼셰비키 논설들을 썼고, 소비에트 지도부의 신문인 이즈베스티야(Izvestiya)의 편집 발행인이 된다. 실제 10월 봉기가 상당히 방어적이었고, 소비에트의 정당성과 상당히 결합되었었다는 것은, 넓은 범위의 사회혁명당 및 멘셰비키와 일치를 볼 수 있으리라는 볼셰비키 온건파의 희망이 아직 박살났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의미했다.

 

비록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진영은 고참 볼셰비즘의 중요한 전략적 측면에 기대고 있었지만, 이러한 전통을 그들의 동요(wavering)로 축소시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10월 중순에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반발과, 관련된 내전 위협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 주도의 소비에트 정부 설립이 필수적이고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우리가 보았듯, 소비에트 통치에 대한 당의 대수적인 입장은 다른 방향들로 발전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즘이 덜 열린 결말의 전략에 근거했었다 해도, 당은 여전히 외부의 강렬한 정치적 압력에 종속될 것이었으며, 여전히 최고의 순간에 도박에 도전하고 권력을 추진할 수단과 씨름해야 했을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전복한 1025일의 무장 행동에서 선도적인 조류였지만, 그들이 압도적 다수파가 될 것인지, 혹은 제 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거대한 최다득표를 차지할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알려졌듯, 비록 볼셰비키 자신들은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지만(670명 중 300), 대표 대다수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들이 원했다면, 비 볼셰비키 조류는 (카메네프가 의장직을 맡았던) 소비에트와 새로운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비록 레닌은 분명히 볼셰비키 내각의 설립을 주창했었지만, 대회 개회에서 볼셰비키의 대표자들은 폭 넓은 다당제 사회주의 권력의 설립에 대한 마르토프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넓은 소비에트 체제의 어떤 형식을 만들기 위한 가능성은 곧 온건파들의 사보타주와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다른 정치적 조류들의 거부로 인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고립을 막으려는 볼셰비키의 바람은 무엇보다 사회혁명당의 토지 강령에 대한 새 정부의 즉각적인 수용과, 몇 주후 사회혁명당 좌파를 정권 내 소수 파트너로서 통합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지역과 지방의 수준에서, 새롭게 설립된 소비에트 정부는 보다 넓은 대열의 정치적 조류들, 즉 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회혁명당의 최대강령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을 아울렀다. 다만 1918년의 과정에서, 이들 동맹은 외국의 개입, 내전, 경제적 붕괴의 광풍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었다.

 

결론

 

1917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볼셰비키의 입장에 관해 보다 많은 것이 논해질 수 있으나, 바라건대 앞선 논의가 그 입장의 전개에 대한 주요 윤곽을 명확히 하는 데에 충분했으면 좋겠다. 10월 혁명은 그것이 경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를 역설하고 자본주의의 국제적 전복을 적극적으로 진전시키려 했던 -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주도되는 국가를 설립한 한에서만 사회주의 혁명으로서 정당하게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볼셰비키 조류가 19174월부터 이러한 목표를 혁명의 필수적인 다음 단계로 간주했다거나, 볼셰비키가 그러한 정부의 설립을 사회주의 혁명과 동일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결국, 볼셰비키의 전략 내부의 긴장과 모호함은 경제적으로 후진적이며 전쟁으로 황폐해진, 원래 농업 사회였던 곳에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증진시키는 일의 현실적인 사회, 정치적 모순을 반영했다. 사태의 진전은 노동자-농민 동맹의 필요성과 민주적 요구의 중심성에 대한 '고참 볼셰비키'의 강조를 크게 입증했다. 동시에, 1917년의 경험은 또한, 이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부 지도가 필요하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확인시켜줬다. 마찬가지로, 사태는 그 결과로 생긴 체제가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들의 기초를 공격해야만 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증명했다.

 

사회주의는 러시아 범위 내에 홀로 건설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가 대면한 내적 모순을 확실히 해결할 유일한 방향은 노동자들의 통치가 널리 확산되는 것을 통해 구해질 수 있었다. 세계혁명의 절박함과 필요성에 대해, 1917년에 모든 볼셰비키는 완전히 수렴했다.

 

물론 패배는 스탈린주의적 퇴보라는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이뤄졌으나, 만약 고립된 채 남게 된다면 러시아 혁명은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자명한 이치는 증명된 셈이다. ,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의해 그 유효함이 증명되었으나, 레닌이 어떻게 볼셰비키를 재무장시켰는지에 관한 그의 논쟁적인 설명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는 없다.



(기사 등록 20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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