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리(Lars T. Lih)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수많은 책과 논문을 쓴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1990), <레닌 재발견: 맥락에서 본 ‘ 무엇을 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우리는 이미 라스 리의 주요한 논문들을 많이 번역해서 소개해 왔는데, 지난해 초에 있었던 이 인터뷰는 라스 리의 주장을 더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라스 리는 또다시 기존의 정설적 해석에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면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분량이 길어서 2번에 나누어 싣고 이 글은 2편이다.(번역: 두견)
출처:
https://newsocialist.org.uk/the-bolsheviks-dared-interview-with-lars-t-lih-on-lenin/
Photo: the Lenin Tribute sketch by El Lissitzky, 1920.
질문: 당신 주장의 중심 부분은 “통합 테제”와 사회주의 의식이 바깥이나 외부에서 온다는 개념의 해석이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 제시하는 정치에 대한 지배적 개념과 달리 이것이 엘리트주의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에서”는 얼마나 다른 삶의 영역에서 얻은 의식의 형태로, 정치의식뿐만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의식 밖으로도 확장 될 수 있는가? 나는 여기에서 “외부에서”의 테제를, 예컨대 사회재생산을 둘러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투쟁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리: “외부에서”. 먼저 나는 이것이 “통합 공식”(“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노동자 운동의 통합이다”)이며, 양쪽 모두에 “외부에서”의 동학을 의미한다고 강조하겠다.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한쪽 측면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은 또한 그들의 관점이 일방적이고 노동자 계급의 전투성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공산당 선언>에 나와 있는 다양한 사회주의 학파들, 특히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보라. 마르크스는 그들이 노동자의 정치적 행동에 반대하며, 이를 통해서 그들 스스로를 무의미한 존재로 만든다고 고발한다.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즉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에 관여하는 노동자 계급”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실질적인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존재한다면, 그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외부에서”의 논리가 필요한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산시키고 실행하려는 분명한 메시지를 가진 운동을 가지고 있다.
물론 (카우츠키 등의 사람들에 의해 정의된) 사회민주주의의 사명 중 하나는 모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분투의 맨 앞에 스스로를 자리 매김하는 것이다. 이것이 “외부에서”를 통해서 당신이 뜻하는 것인가? 당신은 또한 헤게모니와 1917 년에 대한 나의 논의에서 “외부에서”가 덜 중요하다고 시사한다. 그것은 잘 모르겠다.
내 견해로 볼셰비키들은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 긴급한 국가적 문제들을 해결할 정치/사회적 프로그램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주의로 더 멀리 전진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가져온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경우에 핵심은 다음과 같은 주장이었다:
엘리트 정당들이 진정한 해결책을 가로막을 충분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을수록 국가적 위기(파괴적인 전쟁, 경제의 붕괴, 도시와 시골지역에서 급진적인 해결책의 필요성)는 해결될 수 없다. 유일한 대안은 (긍정적으로는)“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이며 (부정적으로는)“연합에 대한 헛된 시도와 ‘합의주의’에 대한 완전한 거부”이다. 이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당장의 국가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반응으로 제시된 정치적 프로그램이다.
<혁명과 반혁명>에서 케빈 머피 (Kevin Murphy)는, 1917 년 9 월 초에 볼셰비키가 “이론적 지식의 어떤 부족을 보완하는 것보다는 혁명이라는 학교에서 노동자들의 경험을 믿는 ‘문 열기’ 조직화 전략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노동자들을 대거 신입 당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
여기에 “외부에서”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요구가 명확해지고, 투쟁을 통해서 가속화되거나 급진화되고, 모순이 더 날카로워지는 지점이 있는가? 또는 이것은 단지 앞선 “외부에서” 선동과 조직으로부터 유래된 의식의 발전인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동맹”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의 “외부에서” 구실이 <레닌 재발견>에서 당신이 분석한 것과 1917년에 계급 역관계에 대한 더 많은 문제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이러한 대안들이 전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나에게 거의 똑같아 보인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이후 1917년의 정치에서 중요한 점은 (산업 노동자보다 더 넓은 범주의) 소비에트 구성원들 거의 전체가 합의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당은 유일한 비합의주의 정당인 볼셰비키였다. 이 중심적 발전이 다른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무장 봉기”의 정확한 타이밍과 마찬가지로, 당과 전체 노동자 사이의 정확한 경계는 의심할 여지없이 중요했지만, 사태의 중심적 논리를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제국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에 관한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1914년은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가 제국주의와 민족우월주의로 넘어가는 결정적 균열이었고, 제 2인터내셔널과 제 3인터내셔널이 갈라지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지노비예프는 “제 2인터내셔널은 흰피부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제한돼 있었다. 제 3인터내셔널은 피부색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루카치(Lukács)는 “1914년에 다양한 사회주의 경향의 서로 다른 태도는 그 때까지의 그들의 이론적, 전술적 그리고 다른 위치들의 직접적이고 논리적인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레닌과 카우츠키의 차이점이 비록 잠복돼 있었지만 항상 존재했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혁명의 신시대”라는 장에서 당신이 너무 “헤겔주의적” 독해라고 비판적으로 논한 주장들이 있다.
그것은 대개, 전쟁의 발발과 사회민주주의의 공모로 충격을 받은 레닌이 헤겔의 <논리학>을 읽기 위해 정치에서 물러났고, 완전히 새로운 정치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당신은 레닌의 “강박적인 비독창성”에 대해 주장한다.
첫째, 당신이 레닌이 충실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정확히 뭔가 사회민주주의의 실재였는지, 또는 실존 사회민주주의에 거스르는 카우츠키의 약속 같은 뭔가 가상적인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둘째, 그렇다면 1914년의 사회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자본가 계급의 노동 부관”이라는 노동귀족의 대표자들의 지위라는 경제적인 문제였는가?
또는, 분명히 여기에 겹치는 문제로, 정확히 제국주의의 핵심에 있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예상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카우츠키의 초기 진정으로 국제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언어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애매모호한 위치가 국제주의를 위해 필요했던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헤게모니에 따르는 보다 부수적인 문제였나?(레닌과 그람시 사이의 간극에 대한 감각으로 되돌아온다면, 레닌에게 헤게모니는 어떤 면에서 내부 관계로서 동맹이나 블록 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방법이고, 그와 비교해서 그람시에게는 외부 관계로서 그 블록이 어떻게 사회를 이끌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로 인해서 기회주의적 또는 후진적 경향이 중도적 또는 중간적 경향을 성공적으로 이겨내고 국제주의자 또는 선진적 부분을 고립시킨 것인가? 당신은 카우츠키의 핵심 사상이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레닌의 반응에서 결정적이었다고 논의하고 있다. 실제로 당신이 쓴 그 장의 제목은 “전쟁과 혁명의 신시대”이다.
또다시, 레닌은 이 모든 것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이고, 강박적인 비독창적 수사 아래 얼마나 변형시켰는가? 레닌에게 전쟁과 혁명의 신시대는 카우츠키가 잘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단계적 결정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 개념이 일들을 안정시키기 때문에 말이다.
레닌 자신은 “카우츠키주의 기본적인 허위를 밝혀내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홉슨(Hobson)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홉슨은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레닌 등에게 영감을 준 당대의 부르주아 경제학자였다.) 제국주의는 경제적 필요성에 기반하지 않았고 따라서 자유무역과 국제 중재에 의해 광범한 개혁주의적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나는 또한 여기서 라클라우와 무페의 주장을 생각하게 된다.
“레닌은 더 이상 하나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필요하고 미리 정해진 포인트로서 혁명적 파열을 상정하지 않고, 계급간 힘의 관계의 이동에 의해 지배되는 특정한 위태로운 국면으로서 그것을 여긴다. 이런 구상의 배경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제국주의적 사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의 가장 약한 고리인 혁명적 파열이 가능한 지점들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이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지점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당신의 질문을 읽으면서, 내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좌파들과 상당히 다른 프레임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 자신의 조사가 낳은 결과인데, 그렇다면 적절히 재구성된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일반적인 관찰부터 시작해보겠다.
우선, 당신은 “단계적 결정론”(stagist determinism)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나는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단계론”이 특별히 도움이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누가 이 개념을 발명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 자신, 엥겔스, 또는 ‘제 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든 “단계론”으로 더럽혀졌다는 것은 언제 확립된 사실이 되었을까?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독서는 그의 견해에 대한 훨씬 더 나은 용어들은 “과업론”(taskism)과 “상호작용론”이라고 나를 납득시킨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로의 여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업으로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모든 나라가 통과해야 하는 불가피한 단계나, 또는 달력에 따른 기간 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필사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 특히 조직하고 의식화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유를 얻는 한 방법이다. 등등.
나는 또한 마르크스가 아주 초기부터 단계를 통해 발 맞추어가는 전진보다는 더 ‘선진’적이거나 더 ‘후진’적인 국가(또는 국가 내 지역)간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사고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정확히 이 문제에 대해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단절된 “후기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를 뭔가가 있다고 주장하는 내가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가 러시아의 옵슈치나(obschina)(* 19세기 러시아의 농민공동체)에 대해 말한 것에서 뭔가 새롭고 엄청나게 혁신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이 과업론과 상호작용론이라는 두 가지 특징은 카우츠키와 레닌이 물려받았다. 또한 이것은 “가장 약한 고리”라는 사상을 포함한다.
당신의 질문은 이 주제에 대한 라클라우와 무페의 긴 인용구를 포함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무엇을 의도한 것이라고 내가 정확히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서유럽 밖에서 먼저 혁명이 일어나서 세계적 혁명 과정을 촉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왜 레닌의 기여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서구의 사회민주당원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에서의 사건들이 정확히 이런 식으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흔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우츠키 자신은 물론은 오토 바우어(Otto Bauer) 같은 ‘혁명적 사회민주당원’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동구’에서의 격변을 적극적으로 고무했다. 나는 1906년이나 1907년 쯤에 이란의 학생들과 카우츠키가 주고받은 인상적인 편지를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레닌과 카우츠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뭔가를 보여 준다. 당신은 레닌이 “카우츠키주의의 기본적 허위”에 대해 말한 것을 인용한다. 우리 모두는 레닌이 “카우츠키주의”라고 번역된 단어로 무엇을 뜻하고자 했는지 알고 있는가?
‘Kautskianstvo’(카우츠키적 태도)는 카우츠키와 관련된 관점의 체계를 매우 분명하게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1차대전의 발발 이후에 카우츠키에 의해 정형화된 종류의 행동을 의미한다. 이 행동은 오늘날의 이런 표현으로 잘 드러난다. 즉 말은 많지만, 걷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Kautskianstvo’는 카우스키의 관점과 별로 관련이 없는 사람들, 예를 들어, 트로츠키에게 퍼부은 비난이었다. 사실, 카우츠키의 자신의 경우에 ‘Kautskianstvo’의 기본적 증거는 - 카우츠키주의(즉 전쟁 전의 그 자신의 사상)에 대한 그 자신의 거부였다! 레닌의 눈에, 카우츠키는 정확히, 배신자였다.
그 좋은 예가 “초제국주의론”이다. 이것은 1914년경에 카우츠키에 의해 발전된 새로운 이론이다.(그런데, 나는 당신이 카우츠키의 새로운 이론을 “제국주의는 경제적 필요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견해로 묘사하는 것은 정확한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그는 적어도 내 기억에 따르면, 전쟁은 제국주의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경우에, 레닌은 제국주의에 대한 1차대전 이전의 통설(카우츠키 자신도 주장했던)을 옹호했고, 카우츠키는 이것에 도전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가 레닌의 조언을 따라야하고, 어떤 의미에서든 통합된 전체로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분쟁 속의 두 개의 흐름으로서 제 2 인터내셔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대 “기회주의”라는.
1914년에 레닌을 놀라게 한 것은 기회주의가 존재한다거나, 심지어 기회주의가 강력한 경향이라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회주의의 부패와 종양이 이미 널리 퍼져나갔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정당들의 공식적 지도부가 “사회적 애국주의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단절이 요구되었다.
이제 당신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첫째, 당신이 레닌이 충실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정확히 뭔가 사회민주주의의 실재였는지, 또는 실존 사회민주주의에 거스르는 카우츠키의 약속같은 뭔가 가상적인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곧 출판될 초기 코민테른에 관한 책에 내가 기고했듯이, 제 3 인터내셔널은 “혁명적 사회 민주주의”의 파생물로서, 그것을 “기회주의”에서 해방시키려는 시도로 여겨져야 한다. 물론, 전쟁 이전 인터내셔널의 한쪽 날개에서부터 러시아에서의 전쟁, 혁명, 국가 권력 속에 태어난 전체로서의 인터내셔널이 되는 여정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여기 방금 언급한 내 글의 한 구절이 있다.
“1922년에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프 카메네프는 그의 전쟁 이전 글들의 광범위한 모음집을 출판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러시아 국내 정치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국제 문제를 다룬 5개의 기사가 실린 짧은 부분이 있다. 카메네프는 이런 언급과 함께 이 섹션을 소개했다. ‘이 글들을 재인쇄하는 목적은 이 분야에서마저 전쟁 이전에 이미 볼셰비키가 전쟁 동안과 이후에 우리가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로 한 기본적 사항들을 이미 정해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우리는 단지 이 점들을 제시하거나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카메네프의 말은 특히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시나리오라는 면에서, 두 인터내셔널 간의 연결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공식을 제공한다: 기본 요점은 이미 거기 있었지만, 이어진 몇 년간의 혁명 동안 그것들은 훨씬 더 집중화되고 기초적이 됐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이렇다: 맞다. 전망과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뭔가 실질적인 것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고 구체화한 조직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는 실제 운동에서 그것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더 허술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그렇다면 1914년의 사회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게 뒤집어 말할 수 있다: “독일은 독일이었고 러시아는 러시아였기 때문에”? 즉, “지배체제”는 단순히 러시아보다 독일에서 훨씬 더 강력했다.(또는 아마도 독일보다 러시아에서 훨씬 더 취약했다.): 경찰, 군대, 엘리트, 노동계급 속에 개혁주의의 뿌리 등등. 그것은 혁명이 한 나라에서는 의제이고, 다른 나라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최근 1917년 러시아에 대한 상당한 양의 자료들을 읽었는데, 거기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엘리트층 붕괴의 속도와 규모이다. 나는 러시아 정치체제의 취약점이 서유럽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볼셰비키가 언제나 진정으로 인식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마지막 코멘트가 보여주듯이, 이 주제에 대한 나의 감상은 더 서쪽의 국가들에 대한 세부적인 지식보다 러시아에 대한 세부적인 지식에서 더 많이 비롯한다.
“레닌과 그람시 사이의 간격을 보자면, 레닌에게 헤게모니는 어떤 면에서 내부 관계로서 동맹이나 블록 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방법이고, 그와 비교해서 그람시에게는 외부 관계로서 그 블록이 어떻게 사회를 이끌 것인가의 문제이다.”
흥미로운 코멘트이다. 그리고 “헤게모니”가 소농을 이끄는 노동자들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가리킨다는 당신의 말이 맞다. 그러나 당신의 대비를 약화시키는 몇 가지 주의 사항들이 차례로 있다. 첫째로, 그 노동자들과 소농들은 매우 분명하게 “러시아 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혁명이 일어나기 전, 블록의 핵심은 국가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위에서 아래로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셋째,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영구적 국가 권력을 가지면서, 이 블록은 다시 사회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레닌은 ‘전쟁과 혁명의 시대’라는 주제를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이고, 강박적인 비독창적 수사 아래 얼마나 변형시켰는가?”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강박적인 비독창적 수사.” 그 수사학(내 생각엔 그의 글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에 대한 나의 관찰과 논평은 실질적 위치의 실제 참신함 정도에 대한 이론적 판단을 뜻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레닌의 견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진심어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문헌들의 적절성과 자신의 생각 모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째,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이고, 그러한 시대의 역사적인 허리케인을 헤쳐 나가기 위해 길을 찾는 것이 또 다른 하나였다.
독창성은, 말하자면, 객관적인 상황에 의해 부과됐다. 나는 또한,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레닌의 전략적 관점의 진정한 수정은, 1919년 쯤부터 관찰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가 가장 의지했던 동맹들(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말이다. 그리고 그가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여긴 동맹(러시아의 “중농”)은 내전에서 결정적인 지지를 제공했다.
맞다. "마지막 분석에서"만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계산된 “마지막 분석”이었다. 레닌은 그의 마지막 기사에서 “내키지 않는 독창성”이라고 불리게 될 것을 이해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나는 최근에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레닌의 생각에서 가장 큰 변화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헤게모니 시나리오”가 그가 처음에 인식한 것보다 훨씬 더 타당하다는 그의 깨달음이었다. 즉, 농민들을 이끄는 노동자들이라는 생각은 특정한 일련의 (거대한) “민주적” 변화에 대해서만 타당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점점 더 그것은 또한 “사회주의적” 변혁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도발적일 이런 생각으로, 나는 끝을 맺는다. 내 생각을 내 자신에게까지 명확하게 해준 면밀한 질문들에 다시 한 번 감사하다!
(기사 등록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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