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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마르크스주의의 체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5. 11.

이정인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이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적인 해석을 비판하면서 현실의 변화 속에 그 합리적 핵심을 적용하면서 혁신해야 한다는 글을 소개한다. 이 글은 이미 2012년에 좌파 매체들(<포커스>(사회주의노동자신문), <붉은글씨> 1)에 실렸던 글인데 필자가 다시 다듬어서 기고해 주었다. 좋은 글의 재게재를 허락해 준 이정인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 1930년대 이후 소련에서 창조된 이론 체계이다. 스탈린주의에 비판적인 마르크스주의자라도 변증법적 유물론·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이라는 소련 교과서의 기본 체계까지 부정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다음은 스탈린주의 이론체계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소위 마르크스주의라고 알고 있는 이론 체계다. 한국에 나온 마르크스주의 개론서들은 거의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체계의 구성 부분들은 모두 보편과 특수의 관계로 규정된다. 물질 일반의 운동 법칙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사회와 역사에 적용되면 역사적 유물론이 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적용되면 정치경제학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체계는 각기 부르주아 학문분과 체계와 대응하는데, 변증법적 유물론은 철학에,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학과 역사학이 합쳐진 사회과학에, 정치경제학은 경제학에 대응한다.

 

이러한 체계의 형성은 스탈린 시대에 이루어진 마르크스주의 교과서 편찬 작업의 결과였다. 혁명 이후 소련 정부는 곳곳에 흩어져 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고를 수집했다. 이렇게 모아진 원전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편찬하고 1930년대 말부터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체계화해서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당시 최고 권력자 스탈린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1938년 소련 정부는 소련 국민들로 하여금 볼셰비즘을 완전히 체득하고 레닌과 스탈린의 당이 추진하는 위대한 과업의 완전한 승리 및 전세계에서 공산주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강화 시키기 위해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사 단기 과정>, 흔히 <소련공산당 약사>라고 불리는 대중용 교과서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이라는 스탈린의 논문이 포함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만물의 상호의존성, 자연과 사회에서의 운동·변화·발전, 양질전화,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을 변증법의 기본 법칙으로 제시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이 인간 사회에 적용된 것을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규정했다. 소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교과서 체계는 스탈린의 이 논문에 기초했다.

 

스탈린은 1950년대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 작업에도 깊이 개입하여 소련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라는 논문을 썼다. 여기서 그는 경제법칙의 객관성을 강조하며 사회주의 상품경제라는 개념을 제시했고, 이는 그대로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의 기본 관점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이론 체계의 문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거의 모든 저작은 논쟁 과정에서 나왔으며 그 역사적 맥락을 모르면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소련 교과서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글을 순서와 맥락과 상관없이 인용해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텍스트 자체를 신화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최고의 철학 저작으로 극찬하며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주요 근거로 인용한 <자연변증법>은 엥겔스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쓴 원고들로 출판한 적이 없는 글이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한 페이지 안에서도 거의 20년 간격을 두고 쓰여진 원고들을 짜깁기 하는 방식으로 이 저작을 재탄생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탈린주의 이론 체계는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들의 혁명적 이론에서 지배계급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재구성 된 결과였다. 스탈린이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쓴 1930년대 말에는 소련에서 권력 투쟁의 최종적 승자가 명확해졌다. 반대파는 전부 숙청됐고 1928년부터 시작된 두 번에 걸친 경제 계획의 결과, 대공황으로 혼란에 빠진 서유럽을 능가하는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을 이룩했다.

 

1936년 새로 개정된 소련 헌법은 소련이 계급이 사라진 전()인민 국가가 되었으며 마침내 사회주의 사회에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가 계급의 폐절과 함께 국가 일반이 소멸된 사회이며 상품과 화폐가 폐절된 사회라고 생각했다. 현실의 소련 사회와 마르크스·엥겔스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사회주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은 1930년대 이후 소련 사회의 지배권을 확고히 굳힌 국가 관료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흔들 수 있는 내외부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의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를 재구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소련의 새로운 지배층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저작을 성서적인 절대 권위를 가진 텍스트로 만들고 그 구절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내 조각조각 낸 다음 자기 입맛에 맞게 재구성해서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확보하려 시도했다.

 

이런 교과서 체계는 완전한 이론주의의 형태를 취했으며 엘리트주의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숙지하면 역사 발전 법칙을 알게 되는 것이고 사회 운영은 그런 법칙을 통달한 당 관료들에게 위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는 대중 투쟁적인 요소보다는 단계론적이고 점진적인 사회 발전을 강조하는 이론 체계로 변형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구성 부분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완결된 이론체계로 이해하는 경향을 온전히 스탈린의 것 만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제 2 인터내셔널 시기에도 강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인터내셔널 사민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 방식은 1913년 레닌이 쓴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이라는 소논문에 잘 드러난다.

 

레닌은 이 짧은 논문에서 철학적 유물론과 정치경제학, 사회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구성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세 가지 원천은 독일 고전철학과 영국 고전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이런 설명 방식이 갖고 있는 문제점 중 하나는 사회주의 이론의 발전을 현실 운동과 독립적인 이론적 발전의 산물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 사민당의 지배적인 이론가였던 카를 카우츠키에서 기원한 것으로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운동이 각각 독립적인 발전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에 의하면 부르주아 학문이 최고 형태로 발전·완성된 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며 그 이론이 노동운동과 결합한 것이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사회주의는 논외로 친다 해도 독일의 철학과 영국의 경제학은 부르주아 학문이었는데, 카우츠키 식의 이해 방식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부르주아 학문이 가장 완성적인 형태로 일관되게 발전한 것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정치의식의 외부 도입을 얘기하면서 카우츠키의 이런 생각을 근거로 인용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나란히 발생하는 것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낳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전제조건 아래에서 생겨난다. 현대의 사회주의적 의식은 깊이 있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실로 현대의 경제학은 현대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생산의 조건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이 아무리 원하여도 양자 중 어떤 것도 창출하지 못한다. 둘은 모두 현대의 사회 과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과학의 담지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지식인이다. 현대 사회주의는 이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의 머릿속에서 생겨났으며, 그들에 의해 지적으로 탁월한 노동자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사회주의 의식은 외부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도입된 것이지 그 투쟁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자라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현실과 분리된 이론의 독자적 발전이란 존재할 수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말을 채택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이 체계적인 사회주의 이론을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급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이론의 주요 원칙들은 그 운동의 기본적인 경향 속에 존재했던 것이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은 이런 현실 운동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론이 독자적으로 발전한다는 카우츠키 류의 논리는 지식인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할 뿐 아니라 이론을 먼저 숙지해야 한다는 계도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라는 논문을 쓴 영국의 사회학자 사이먼 클락은 플레하노프와 레닌이 제기한 철학적 유물론은 사실상 부르주아 철학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인민주의자, 즉 혁명적 민주주의자(급진적 부르주아)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공장 내 노동조합적인 투쟁만으로 사회주의 의식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정치적 의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사실 그 정치적 내용은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차르 반대·보통선거제 쟁취 같은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플레하노프와 레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 사민주의자 전반의 문제였다. 사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사회·역사에 대한 일종의 과학 법칙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으며 그로 인해 이들의 실천적 태도는 상당히 수동적이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사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는 어차피 붕괴할 테니 그 결정적인 시기까지 노동자 계급은 힘을 보존하며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충분히 발전해야 사회주의 혁명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것을 경계하고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대중의 무정형적 투쟁을 무정부주의라고 꺼려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어디까지나 교육의 문제, 먼 미래의 문제였으며 실천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발전을 주장하는 선을 넘어서지 않았다.

 

러시아와 서유럽 사민주의의 전개 양상이 달랐던 이유는 레닌과 플레하노프가 인민주의자라서 라기보다는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평화롭게 성장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민주주의를 주장해도 러시아 사민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혁명적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혁명적 경향의 사회주의자들이 소수파였던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레닌을 비롯한 혁명적 전투파가 사민주의 내부에서 다수파까지는 아니라도 대등한 세력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만들어진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완결된 체계적인 이론이라는 사고는 이미 제 2 인터내셔널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인식이었다. 단지 철학·정치경제학·사회주의라는 체계가 소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 체계로 변형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변증법적 유물론·역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들은 제 2 인터내셔널 시대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플레하노프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마르크스주의에 독립적인 철학적 영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사민당 이론가 프란츠 메링은 1893<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응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있다는 사고는 훨씬 더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역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는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거의 사용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독일의 노동자 출신 철학자 요제프 디츠겐이 1880년대에 썼다가 잊혀 진 말이었다. 이 단어는 1890년대 들어 플레하노프가 다시 사용하면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적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헤겔 철학에 경도된 플레하노프의 용어 사용과 달리 어떤 철학적 내용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개념과 실재의 불일치를 파고드는 방법의 측면을 강조한 말이었다.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단어 역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말이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말 중에 가장 비슷한 것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라는 말이었다. 마르크스가 죽은 뒤 말년의 엥겔스도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말을 만들어서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은 독일 사민당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역사학에 관심이 많았던 프란츠 메링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메링이 사용해서 유행시킨 말을 엥겔스가 따라 쓴 것이 아닐까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라고 했던 것은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의 문제로 이 역시 일련의 역사법칙들과 동일시되는 오늘날의 역사적 유물론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기묘한 일은 정치경제학이란 말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가리키는 용어로 둔갑한 것이다. 정치경제학이라는 말은 원래 부르주아 경제학을 뜻하는 말이었다. 초기 고전경제학자들은 유럽 언어에서 경제(economy, Ökonomie )”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어원상 한계 때문에 자신들의 이론을 가리킬 때 경제앞에 정치국민같은 접두사를 붙였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이란 본래 그냥 부르주아 경제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때문에서 <자본론>의 부제는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비판이 되었던 것이다.

 

오이겐 뒤링의 과학혁명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체계가 철학·정치경제학·사회주의라는 세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레닌의 주장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마르크스주의를 이런 식으로 처음 제시한 것은 흔히 <반뒤링론>으로 불리는 엥겔스의 저작 <오이겐 뒤링의 과학혁명>이었다. <반뒤링론>은 긴 서설과 함께 1부 철학, 2부 정치경제학, 3부 사회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반뒤링론>이 이런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은 비판의 대상인 오이겐 뒤링이 자신의 이론 체계를 그렇게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서는 1860년대부터 대중적인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863년 독일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자조직 <전독일노동자동맹>이 창설되었을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잘 알고 있던 법률가 페르디난트 라쌀레가 지도자로 옹립되었다. 흔히 라쌀레 파로 불리던 이 조직은 곧 독일 노동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한편 1864년 첫 번째 인터내셔널이 창립되고 마르크스가 그 총평의회 서기로 활동하면서 독일에서도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지지자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1869년 아이제나흐에서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 파 혹은 아이제나흐 파로 불리며 라쌀레 파와 함께 독일 노동운동의 양대 정파가 되었다.

 

1875년 이들 두 정파는 고타에서 통합 당 대회를 개최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통합에 부정적이었지만 고타 대회이후 새로 등장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비스마르크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성장했다. 이처럼 사민당이 막 형성되던 시기에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이 운동에 신진이론가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베를린대학교 강사인 오이겐 뒤링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보다 열 살 정도 젊은 오이겐 뒤링은 처음에는 마르크스에게 제자를 자처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1870년대 들어서자 나름의 독특한 사회주의 이론을 창시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맹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뒤링은 1870년대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을 설명하는 세 권의 방대한 책을 연달아 내놓았는데, 1871년에 <국민 경제학 및 사회주의의 비판적 역사>, 1873년에 <재정정책의 주요 문제를 포함한 국민경제학 및 사회경제학 코스>, 1876년에는 <엄밀한 과학적 세계관 및 생활 형상으로서의 철학 코스>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세 권의 책은 각기 나름대로 독창적인 사회주의관과 경제학적·철학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결과 뒤링은 철학과 경제학을 망라하는 이론적으로 완결된 하나의 체계적인 사회주의 이론을 제시했다.

 

당시까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이론 전반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책을 쓴 적이 없었다. 나중에 중요한 원전으로 자리 잡은 <경제학·철학 수고><독일이데올로기> 같은 문서는 당시에는 아예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저작이었다. 그때까지 정식 출판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은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 <신성가족>, <철학의 빈곤>, <공산당 선언>, <프랑스혁명사> 3부작과 <자본론> 1권 정도가 전부였다. 그것도 1865년에 출간된 <자본론>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2030년 전에 나온 책들이었다. <자본론>조차 마르크스의 문체가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닌데다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 탓에 당시 널리 읽힌 책이 아니었다.

 

반면 철학·경제학·사회주의라는 체계성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해설한 뒤링의 책들은 큰 인기를 끌며 신생 독일 사민당 내에서 급속히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그러자 사민당 내의 마르크스 지지자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뒤링을 비판하는 책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 역할은 이미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마르크스 대신 엥겔스한테로 넘어갔다. 그래서 엥겔스는 1877782년에 걸쳐 독일 사민당 기관지에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혁명> 즉 흔히 소위 <반뒤링론>이라고 불리는 책을 연재했다.

 

뒤링의 승리

 

따라서 <반뒤링론>의 편제는 원래 뒤링의 저작을 하나씩 비판하는 체계였다. 1부 철학은 뒤링의 <철학 코스>, 2부 정치경제학은 <국민경제학 및 사회경제학 코스>, 3부 사회주의는 <국민경제학 및 사회주의의 비판적 역사>를 비판하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만일 레닌의 생각처럼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철학·정치경제학·사회주의로 구성돼 있는 체계라면, 우연찮게도 마르크스주의의 체계는 뒤링과 동일한 체계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반뒤링론>의 구성방식은 뒤링을 비판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선택된 것에 불과했다.

 

오히려 엥겔스는 서문들과 일반론 서설에서 이론적 체계화의 위험성을 거듭 제기했다. 엥겔스는 뒤링이 워낙 완결된 체계로 책을 써 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도 이번 기회에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체계적으로 개진해 보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책이 뒤링의 체계를 대신하는 새로운 체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체계를 철학·경제학·사회주의로 분류하는 사고가 본래 그 창시자들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철학에 자기 이론 체계의 기초를 두는 뒤링과 달리 <반뒤링론>에서 엥겔스는 철학의 역할이 사멸했다고 주장하는 것만 보아도 명확하다. 그가 제기하는 유물론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렸다. (반면 스탈린주의 교과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프롤레타리아트 철학이자 세계관이라고 주장한다.)

 

엥겔스는 유물론적 역사파악과 잉여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의 폭로가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공로이고 이 두 가지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는 과학이 되었다고 말했다. , 철학·정치경제학·사회주의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과 잉여가치의 발견이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자본론><공산당선언>도 아닌 <반뒤링론>이었다. 이전까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로 개종 한 경우가 많았다.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 같은 사람들도 <반뒤링론>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의 올바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오히려 <반뒤링론> 덕분에 마르크스 붐이 일면서 188090년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다른 저작들이 재출간되기 시작했다.

 

<반뒤링론>이 독일 사민당 당원들에게 필독서가 되면서, 뒤링은 망각되고 <반뒤링론>의 생명은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불멸성을 획득했다. 이와 함께 <반뒤링론>이 나오게 된 역사적 맥락은 사상되고 <반뒤링론> 자체가 자기완결적인 교과서적 텍스트로 자립해서 서게 되었다. 그 결과 레닌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반뒤링론>의 편제 방식은 다음 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대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기본 체계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스탈린은 죽었지만 스탈린주의는 살아남다

 

2 인터내셔널 사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우월함이 체계적이고 완결적인 이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이후 스탈린주의와 같은 이론 체계가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다.

 

스탈린주의 이론 체계는 엥겔스가 말하는 유물론과 달리 가장 일반적인 것부터 가장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수미일관한 논리가 관통하는 내적으로 빈틈없이 구성된 이론 체계이며, 그 기초는 물질 운동의 일반적 법칙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체계는 실제 현실에 들어맞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현실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가 되기 십상이다. 소련에서 이런 이데올로기가 과학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예로 멘델의 유전자 법칙을 변증법적 유물론에 맞지 않는다고 부정하다가 유전학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이 죽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장악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격렬히 비판했지만, 스탈린주의 이론 체계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스탈린이 당의 좌익(트로츠키), 우익(부하린), 철학과 언어학에 있어 관념론들(데보린, 마르)과 벌인 사상투쟁은 여전히 총노선(General line)으로 유효하다고 인정되었다.

 

1956년 스탈린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담긴 비밀연설에서 흐루시쵸프는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 우익주의자들 그리고 부르조아주의자들과의 격렬한 투쟁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레닌주의의 모든 적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무력화시켰다는 것이 확정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효과적인 결과는 당을 강화시키며, 단련시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탈린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비교적 자유로웠던 1960년대에는 제한된 형태이긴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도 기본 이론 체계에 대한 논쟁이 있긴 했다. 예컨대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엥겔스가 <반뒤링론><자연변증법>에서 제기한 '부정의 부정' 법칙을 임의로 삭제한 것은 수정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다시 '부정의 부정' 법칙이 소비에트 교과서에 복원되는 과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변증법적 유물론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까지는 나아가지는 못했다.

 

동독에서는 서구 좌파에서 유행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몇몇 철학자들이 변증법적 유물론이 인간의 실천을 경시하는 객관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하며 실천이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논쟁들은 1968'프라하의 봄'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다시 보수적으로 변하면서 더 이상 발전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동구권 내부의 이론 논쟁은 사실상 80년대 후반까지 그 몰락이 올 때까지 중지되었다.

 

마르크스를 만나면 마르크스를 죽여라

 

소련 교과서 체계는 한국에 80년대에 그대로 수입되어 한 세대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소련 아카데미나 동독 아카데미에서 발행한 변증법적 유물론·역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 교과서들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학습되었다.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철학에세이><철학의 기초이론> 같은 개설서들 역시 스탈린주의 교과서의 해설에 불과했다. 최근까지도 마르크스주의 개설서라고 나오는 몇몇 책들은 여전히 스탈린주의 교과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현실은 사회주의라는 문제의식이 가진 여전한 유의미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입지와 실천의 지평을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

 

1990년대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고 그 실상이 드러나면서 소련이 사회주의가 아닌 것 같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살리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했다. 1992년 이진경이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이런 논의는 주로 죽은 마르크스와 산 마르크스를 가리는 문제,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소위 마르크스주의 정통의 계보를 어디까지 살리고 어디까지 죽여야 하느냐에 집중되었다.

 

레닌을 살리기 위해 스탈린을 죽였더니 레닌과 스탈린의 연관성을 부정하기 어려워 레닌까지 죽이게 되었다. 레닌과 스탈린 모두 제 2 인터내셔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인식이 생겨났으며 그럼 제 2 인터내셔널에 영향 끼친 사람은 엥겔스니 엥겔스까지 죽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마르크스라도 살리자고 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연관성을 도저히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마르크스까지 죽이고 나아가 사회주의 이론 전체를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인간인 이상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억지로 산 마르크스와 죽은 마르크스를 가리고 소위 진짜 마르크스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라는 방법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자체에 적용시키고 그것이 가진 시대적 한계 속에서 합리적 핵심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 속에서 마르크스조차 과감히 죽일 수 있어야 우리 운동이 죽은 이론과 과거의 영광에 대한 물신숭배를 넘어 현실 속에서 한 단계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기사 등록 201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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