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변혁적 정파들로부터 배운 것: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수기
존 클락(John Clark)
번역: 윤미래
[저자주: 이것은 2017년 6월 3일에 열린 PM Press 저자 모임 “행동을 위한 아이디어들: 급진적 변혁에 적절한 이론”을 위해 준비했던 글에 다소 살을 붙인 것이다. 이 글은 내 PM Press 블로그(http://www.pmpress.org/content/article.php/20170611202416213 )에 올라와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지난 50년 동안 급진적 변혁에 관해서 배운 교훈들 몇 가지를 불충분하더라도 짧게 간추리려고 노력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들 일부를 가르쳐 준 사람인 뉴올리언즈 세븐스 워드(7th Ward)의 훌륭한 공동체 지도자 Mama D에게 이 글을 바친다. 그는 이 글을 쓰기 조금 전인 2017년 5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역자주: 존 클락은 뉴올리언즈에 있는 로욜라 대학의 철학 명예교수이다. PM Press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변혁에 관련된 각종 글, 그림, 영상 등을 유통시키기 위해 2007년에 만들어진 플랫폼이다. MaMa D는 뉴올리언즈의 변호사이자 활동가였던 다이앤 프렌치 콜(Dyane French Cole)의 애칭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아래의 기사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http://www.theadvocate.com/new_orleans/news/article_b0e17566-3d7f-11e7-b88b-c7a4d2da0418.html]
1960년 말에서 1970년 초까지 나는 조금 막연하게 “운동”이라고 불렸던 무언가에 동참했는데, 나에게 그것은 무엇보다도 풀뿌리 민주주의적인 공동의 기획들(grassroots democratic and cooperative projects)을 위한 운동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육아 협동조합, 식품 협동조합, 대안학교, 자유대학, 노동자 협동조합,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미국 시카고에 본부를 둔 급진 좌파 국제 노조로 노동자들이 매니저를 선출하는 제도를 비롯한 작업장 민주주의 시스템을 주창했다), 반전·반핵 운동, 다양한 생태주의·여성주의·포스트-상황주의적 무정부주의 단체들과 무정부주의 연관 단체에 참여한 경험과 다른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풀뿌리 조직의 잠재성과 한계에 관해 점차 모종의 교훈들을 배우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상호부조와 연대, 평등, 존엄성과 자유, 평화, 사랑, 돌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떠올랐다. 여기에서 그리는 새로운 세계에서는 생산과 소비뿐만 아니라 개인적 인간관계와 가정 생활, 교육, 육아, 심신의 돌봄, 예술, 음악, 놀이를 비롯해 삶의 모든 영역들이 이러한 가치에 맞게 변혁될 것이었다.
이 시기의 운동은 결국 우리 중 많은 수가 가지고 있었던 사회의 즉각적이고 근본적 변혁에 대한 전망을 충족해주지 못했지만, 많은 장애물을 돌파했으며 급진적 변혁의 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내주었다. 나는 역사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짧은 시간 내에 변화에 마음을 열게 되는 광범위한 운동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소규모의 변혁적 공동체나 기획(project)들이 확산되어 대규모의 사회변혁 운동에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급진적인 사회적 상상과 변혁적 열정(ethos), 또는 일상을 [보다 변혁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의 힘을 배웠다.
1974년에 나는 워싱턴의 아담스-모르간(Adams-Morgan) 지역을 방문했다. 거기에서 나는 특정한 시점의 특정한 지역에서, 그 자신의 예술, 음악,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를 갖춘 해방적 문화의 부상이라는 맥락 속에서 공동체 기술, 지역의 자립, 동네 자치, 공동체 협동조합, 그리고 공동체적 생활에 관한 시도(initiative)들이 융합되는 것을 보았다. 그 곳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이런 융합을 다양한 정도로 관찰한 결과 나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자유와 연대에 기초한 새로운 문화와 조직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또한 1970년 말 나에게 그렇게나 영감을 주었던 건설적인 사회적 기획들 대부분이 사그라들거나 체제내화되는 것을 보고 힘겨운 교훈을 얻었다. 한편으로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는 우리가 곧잘 저평가하거나 무시하곤 하는 강력한 장애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장애물들이 물질적이거나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루어낸 것과 같은 종류의 혁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진지하게, 그리고 사실상 훨씬 더 급진적으로 자아와 성격 구조, 인간관계와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 조직의 형태,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통제의 성격, 그리고 (내가 특히 상황주의자들로부터 배운 것처럼) 상상을 둘러싼 전투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1980년대가 되면 나는 사회생태학이라는 이론적·정치적 경향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나는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들에 대한 분권화된 직접민주주의적·공동체적 통제의 역사와 잠재성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이행의 문제를 인지하는 사회변혁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나는 우리가 단순히 착한 일을 한 다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조직 형태들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고 낡은 것을 대체할 수 있을지를 신중하고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다소 당연한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정치적 종파주의의 함정에 대해, 진리와 계몽의 다양한 원천들에 대해 열려 있을 필요성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쌓은 경험들에 열려 있을 필요성에 대해 배웠다.
이 시기에 나는 또한 중앙아메리카 연대 운동에 참여했다. 이 운동들에서 나는 내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지배와 세계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더 강하고 폭력적인 지배의 형태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배웠다. 나는 해방과 연대를 위한 투쟁이 지역적인 동시에 세계적이어야 함을 배웠다. 이 배움의 과정은 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서(西)파푸아와 동티모르에 대한 지원에 일상적으로 참여하면서, 특히 서(西)파푸아의 초국적 광산업체에 맞선 투쟁에 동참하면서 내 정치 사상은 심대하게 변화했던 것이다.
나는 동티모르에서 지금 이 순간 진행중인 학살에 대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그렇게 하기 매우 쉽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파푸아 사람들에게서 자연의 부가 가장 풍족한 곳들이 착취적 산업의 손에서 어떻게 질병, 사망, 억압, 빈곤과 파괴의 현장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지 배웠다. 나는 특히나 파푸아 사람들에게서 전통적 토착 공동체들이 우리가 다시 배워야만 할 잊혀져 있는 근본적인 진실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우리가 내 정치적 [입장] 형성에 불가결했던, 정치적 조직과 혁명에 대한 유럽중심적 모델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 시기에 나는 또한 생태 운동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생산수단의 지역적 통제와 지방 자치(local control and municipalization of utilities), 정치적 분권화(decentralization of political power), 마을텃밭 사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경과 인간을 학살하는 초국적 기업과 그들이 전세계에서 지역의 정치체제와 공동체에 행사하는 강력한 영향력에 맞선 싸움과 같은 기층 현안에 관련된 일을 했다. 나는 반주변부에서 우리가 하는 지역적 투쟁이 아주 많은 방식으로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투쟁들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 시기에 중요한 기점은 미시시피 주 걸프 만의 숲에 있는 Bayou La Terre에서 토지 구매를 시작하기로 한 일이었다. 나는 생태지역주의(bioregionalism)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한 참이었고, 재정착(reinhabitation), 즉 장소에 대한 인지와 그 땅과 그것의 일부를 이루는 생물들에 대한 지식에 기반한 문화와 생활양식을 만드는 법을 배우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부터 나는 La Terre에서 25년 이상 지내면서 자연의 방식이 가진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개리 스나이더가 대지의 선과 야생성, 신성성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천천히 배워갔다. ‘지구’와 ‘대지’를 모두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이 장소는 내 가장 위대한 스승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에 나는 또한 전직 네오나치이자 KKK 단원(Klansman)인 데이비드 듀크의 강력한 정치적 기획에,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네오파시즘의 부흥에 반대하는 운동에 매우 활발하게 참여했다. 나는 현대 사회에서 오랫동안 무관심과 부인 속에 묻혀 있던 권위주의, 인종주의 경향들이 얼마나 깊고 침투하기 쉬운지를 배웠다. 나는 또한 또다시 발흥하고 있는 종교 근본주의와 기독교 광신도(televangelist)들과 그들의 미디어 제국이 점점 더 권력과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글을 썼다. 나는 종교적 우익이 대중매체를 활용하는 데 능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몇몇의 주목할 만한 예외를 제외하면 주로 60년대에서 70년대 초의 민권 운동, 블랙파워 운동, 학생 운동, 반전 운동, 지역 자치 운동 때부터 좌파가 이야기해오던 기층 조직화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나는 인도에서 지내면서 정복, 대량학살(genocide), 그리고 현재진행중인 억압과 식민화로 점철된 그들의 비극적인 현대사로부터 도망친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공동체의 힘, 그리고 자비와 이타성을 헌신적으로 실천하는 전통에 대해 더한 층의 가르침을 얻었다. 나는 또한 불교 철학과 ‘삼진’ 개념을 보다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고, 급진적 비판과 혁명적 사회변혁과 그것들이 가진 연관성을 발견했다.
나는 우선 완전히 각성한 정신, 즉 몇몇 보살들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해 배웠다. 둘째로 나는 그것이 어떤 길로 이끌지라도 진리를 따라가려는 완전한 헌신, 그리고 세계와 자연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열린 자세로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셋째로 나는 승가, 즉 사랑, 자비, 돌봄의 깨어있는 소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나는 위대한 무정부주의자 지리학자인 엘리세 레클루스(Elisée Reclus) 또한 사회변혁의 과정에서 “작은 애착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공동체에 직접 참여하거나 그들과 접함으로써 많은 배움을 얻었다. 몇 해 동안 나는 퀘이커 교도들의 회합에 참석하면서 만장일치 의사결정, 인격과 개인의 양심에 대한 존중, 평화와 정의에 대한 헌신, 그리고 공동체적 실천에 대한 참고할 만한 긴 전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카톨릭 노동운동에 참여했거나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친구들에게서 평화 만드는 일상적 실천에 기반한 작은 공동체가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특히나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나는 또한 선 명상 그룹과 승가들에게서 깨어 있는 의식의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닫게 되었고,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데서 부딪히는 장애물들과 강박적 소비와 축적의 세계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강박과 산만함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일원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곧 더 낫고 더 행복한 사람이 되는가가 공동체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서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급진적 변혁에 대한 내 관점을 바꾸는 데 가장 중요한 기점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뉴올리언즈의 많은 부분을 파괴한 홍수가 남긴 외상과 카트리나 이후 도시가 기업 자본주의적이고 구조적으로 인종주의적으로 재개발되는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카트리나 이후 재해 복구를 위한 기층 공동체들에 참여하면서 나는 가장 중요한 교훈들을 얻었다. 나는 개인적, 집단적 변화에서 트라우마가 하는 역할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공동체가 사활적인 순간에 그저 관성적일 뿐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옆으로 치워놓고 그것이 당면한 가장 크고 절실한 필요에 진심으로 감응하는가 역시 공동체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뉴올리언즈의 상부 나인즈 워드(upper 9th Ward)의 작은 재해 복구 공동체와 함께 일하면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나는 공동체의 가장 실질적이고 긴급한 욕구에 봉사하는 작은 공동체와 줄곧 함께 생활하고 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람찬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나는 전설적인 공동체 지도자 Mama D와 세븐스 워드 자경단과 긴밀하게 협업하면서 “이웃이 이웃을 돕는다”는 단 한 가지 원칙만을 따르는, 모성 중심적(matricentric)이며 라스타파리아교적인(Rastafarian-influenced) 지역 기층 공동체의 경이로운 힘에 대해 배웠다.
무정부주의적인(anarchist-inspired) Common Ground Relief의 자원봉사자들과의 만남은 – 그들 중 일부는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지냈다 – 우리가 과소평가해온, 이 세계에 존재하는 광대한 자비의 저량에 대해 깨닫게 해주었으며 기층에서의 재해 복구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협력적이고 공동체적인 의욕을 불러일으키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Common Ground로부터 “자선이 아닌 연대”를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유익을 가져오는지를 배웠고, 그리고 내 친구 스콧 크로우가 “긴급 인정(Emergency Heart)”라고 부르는 값을 따질 수 없는 인간의 심성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돌봄의 소공동체들의 감탄할 만한 힘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공동체들이 내재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말로 신성하고 값을 매길 수 없다고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더 깊이 받아들이도록 도울 수 있음을 배웠다. 동시에 재해, 애도, 그리고 재생의 경험은 내게 점점 더 현재 세계의 역사가 따라가고 있는 비극적인 궤도를 송두리째 바꾸어야 한다는 긴급한 감각을 심어주었다.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고통과 상실의 규모를, 그리고 우리가 이 자본주의적, 국가주의적, 가부장주의적 문명의 자살적이고 생태계 파괴적인 경로를 계속 따라간다면 그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상실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인지하고 염려하게 되었다. 2010년대가 되면서 이 모든 교훈과 감정들은 BP 기름 유출 사고가 불러온 황폐, 파괴, 생태계 훼손로 인해 상처가 더해지면서 한층 강해졌다.
최근의 약 10년 동안 나는 (내 인생의 다른 어떤 것 못지 않게) 한부모 되기라는 만만치 않은 도전에 예상찮게 착수하게 되어 얻은 경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술이나 약물 중독, 정신적‧영적 질병, 그리고 가족과 가까운 이들의 고통과 일상적으로 씨름하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허무주의적 사회 때문에 무너지는 것을, 물질과 약물, 공상과 몽상에 탐닉하고 집착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가치관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절실한 교훈을 얻었다. 내 가까운 이들을 비롯해서, 공감적인 공동체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이 못지않게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 모든 경험과 교훈들 때문에 나는 비위계적(non-hierarchical)이고 비의학화된(non-medicalized) 치유 공동체(therapeutic communities)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이 연구된 치유 공동체에 초대받아, 그 곳을 방문하여 무조건적인 사랑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완전한 수용에 기초한 상호 부조와 자기변혁이라는 놀라운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를 얻었다. 나는 그 곳과 다른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치유와 재생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올바른 실천(good practice)과 돌봄(care), 가능성에 대한 신뢰(openness to possibilities)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이 지배체제는 굶주리고 만족을 모르는 자기파괴적 자아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세계를 변혁하고 해방할 해방과 연대의 공동체는 또한 치유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렇게 천천히 얻은 깨달음들로부터, 나는 몇 년 전 내가 수십 년간 가르쳐왔던 강단을 떠나 사회적‧생태적 재생을 위한 보다 직접적인 활동에 모든 시간을 쏟기로 결정했다. 나는 라 테르 공동체와 생태 연구소(La Terre Institute for Community and Ecolog)라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 공간은 그 사이에 87에이커(약 352,000 제곱미터: 옮긴이)까지 커졌다. 나는 또한 이 사업을 위해 뉴올리언즈에서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이 사업의 초기 단계에서, 나는 사업이 성공하려면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강하게 의지가 있는,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작은 그룹을 구성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지금 세계의 현실에서 어떻게 이 자본주의적, 국가주의적, 가부장적 지배 체제와 단절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전지구적 위기를 막아낼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러면서 동시에 자유롭고 정의로우면서도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caring)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에 천착해왔다. 나는 “가장 중요한 조치는 무엇인가?” 혹은 좀더 정확하게는 “가장 중요한 과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조심스럽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년 전, 카트리나 이후의 경험을 담은 <불가능한 공동체 The Impossible Community>라는 책에서 나는 모든 주요한 사회적 영역들을 모두 동시에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회적 제도적 구조, 사회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상상, 그리고 사회적 에토스를 포괄한다. 나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긴급하고 절실한 과제는 해방과 연대, 각성과 치유의 소공동체들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다년간 사회운동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공동체들에 미시공동체(micro-communities)들의 풍부한 역사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 개의 예만 들면 무정부주의 계열 그룹들(anarchist affinity groups), 해방신학에 기초한 라틴아메리카의 기층 공동체, 인도의 Sarvodaya 운동의 “ashram” - 이것들은 젊음이 가득하고 변혁적인 생태마을들로, 인도의 모든 마을과 지역에서 만들어질 예정이다 – 등이 있다. 이에 더해, 지금 치아파스에서 사파티스타가, 로자바의 민주주의적 자율주의 운동이 만들고 있는 공동체들도 본보기가 된다.
나는 치아파스 원주민들의 가치관과 실천이 상호 부조와 연대, 공동체적 인간형에 대해 주류 사회(dominant society)의 어떤 급진적 이론보다도 풍부하고 급진적인 개념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로자바의 혁명 운동이 단순히 중앙집권국가와 자본주의, 권위주의적 종교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대중적 사회운동보다도 성공적으로 가부장제와 가부장제에 기반한 지배적이고 착취적인 초남성주의 자아(hyper-masculinist ego)를 파괴해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배우고 겪은 모든 일들에 함축된 몇몇 핵심 질문들로 몇 번이고 되돌아온다. 변혁적이고 젊은 기층 공동체나 친목 집단(affinity group)에, 해방과 연대, 각성과 돌봄의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들에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운동은 어떤 모습일까? 이렇게 사회를 재생하는 운동이 참여민주주의적인 동네나 마을, 혹은 도시 의회나 평의회, 위원회 등으로 점차 옮겨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운동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주의, 가부장제 지배체제를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지구의 모든 생명들과 역동적인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정이 있는 인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이 그것이다.
(기사 등록 201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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