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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임신중지가 생명권이다. 낙태죄를 함께 폐지하자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1. 9.

전진한 





지난 9월 청와대를 향한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청원이 23만명을 돌파하면서 낙태('낙태'는 태아 중심적 단어로, 이 글에서는 행위 주체인 여성이 중심이 되는 임신중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문제는 또다시 뜨거운 이슈가 됐다.

 

조국 민정수석은 낙태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혀야 했다. 천주교는 임신중지가 끔찍한 폭력이자 살인행위라고 주장하며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100만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임신중지는 흔히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선택의 대립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추상적 논의는 본질을 가린다.

 

낙태죄는 여성을 죽인다.

 

루마니아에서 극단적인 역사가 있었다. 1966년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낙태금지법을 시행했는데, ‘인력이 국력이라는 기치 하에 이혼, 피임과 임신중지를 법으로 금지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첫째,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급증했다. 둘째 고아원 등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 수가 증가했다. 열악한 지원 때문에 아이들은 영양 결핍에 시달렸고 유아사망률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모성사망비(임신 중이거나 출산 후 7주 이내 사망하는 여성의 비율)가 급격히 증가했다. 많은 여성들이 불법으로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수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차우셰스쿠 집권 기간 동안 약 50만 명의 여성이 수술 도중 사망했다.

 

그의 집권 기간 8배까지 늘어났던 모성사망률은 1989년을 기점으로 다음 해 절반까지 떨어졌다. 루마니아에 혁명이 일어나 차우셰스쿠가 처형당하고 가장 먼저 임신중지가 합법화 되면서다.

 

영화 <4개월, 3, 그리고 2>은 차우세스쿠 치하 낙태금지법이 어떤 현실을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가비타는 불법 시술자 남성에게 수술을 받게 되는데, 남성은 임신 2개월이 아니라 4개월이란 걸 알게 되자 돈과 성관계를 요구한다.

 

고통을 떠안는 사람은 친구 오틸리아다. 일이 벌어진 호텔방에서 가비타는 남성에게 비위생적인 도구들로 수술을 받는다. 오틸리아는 남자친구에게 친구의 임신중지를 털어놓지만 별다른 공감을 받지 못한다. 그녀는 말한다, ‘가비타만이 날 도울 수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5600만 건의 낙태가 이뤄지고 이 가운데 거의 절반은 안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주로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에서 안전하지 않은 방법이 이뤄지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800만 건은 독성물질을 삼키거나 옷걸이 같은 도구를 삽입하는 것이다. 옷걸이는 낙태 합법화 운동의 상징이다.

 

반면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면, 전체 모성 사망의 20~50%가 줄어든다고 알려졌다. 미국에서는 1973년 낙태가 합법화되면서 낙태 사망률이 5년간 6분의 1로 줄어들었다.

 

먹는 낙태약으로 알려진 미프진(성분명 미페프리스톤)은 가장 안전한 임신중지 수단 중 하나다. 전 임신 기간동안 활용할 수 있고, 마취와 수술이 필요 없다는 장점 때문에 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다. OECD 35개 회원국 중 29개 국가에 미프진이 도입됐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렇게 안전하고 손쉬운 약물이 금지된 까닭에 매년 17만 명 이상의 여성이 대부분 불법인 수술대에 올라 위험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는 것은 이를 줄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임신중지가 완전히 허용되는 북미와 북서부 유럽은 임신중지율이 낮고, 반면 대부분이 불법인 아프리카와 남미는 높다. 한국은 OECD 30개국 중에서 아일랜드와 칠레를 제외하고는 임신중지가 가장 어려운 나라인데 임신중지율은 OECD 국가 중 1위다.

 

태아는 생명인가?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이 가장 앞세우는 것은 태아가 생명이라는 것이다. 일부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순간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기 때문에 생명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는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기에, 이 논리대로라면 머리를 자르거나 때를 밀 때, 손톱을 깎을 때마다 살인을 하는 셈이 된다.

 

태아가 정말 생명이라면 강간, 근친상간 등으로 임신했을 때에도 임신중지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많은 반대론자들이 예외를 인정한다. 2012년 낙태죄 위헌소송 판결문은 태아의 생명권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면서도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생명의 기준이 얼마나 임의적인지를 보여준다.

 

공리주의자들은 태아가 고통을 느끼는 능력고통을 피하고 싶은 소망을 가진 존재인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많은 연구들에 따르면 태아는 임신 6~7개월이 되기 전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한국의 많은 중·고등학교에서 성교육 교재로 사용된 임신중지 영상 소리 없는 비명은 대표적으로 조작된 영상이다. 영상에서 태아는 공포에 질려 몸을 피하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임신중절 수술은 태아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임신 12주 이전에 이뤄진다. 임신 6개월 이후 후기낙태 비율은 많은 나라에서 5% 이하다.

 

더 중요한 것은 태아가 여성의 몸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감각을 가진 태아라 해도 임신 여성과 동일한 생명권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 후기 낙태는 대체로 절박한 이유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면서까지 태아를 몸 안에 두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생명선택의 대립은 허구

 

이처럼 허술한 태아의 생명권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재하는 현실 속 여성이 겪어내야 할 삶의 문제엔 관심이 없다. 낙태죄의 존재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문제에서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요구받는다.

 

임신중지를 결정한 이후에도 경제적 부담 없는 안전한 수술을 받을 권리가 없고, 오히려 이것이 발각되지 않도록 숨겨야 하는 입장이 된다. 법은 여성과 수술 의사만 처벌하도록 되어 있어, 이것이 연인 간 결별이나 이혼 과정, 남성의 폭력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악용되기도 한다.

 

"이혼 소송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셋째를 지운 걸 고소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때는 더 나아 키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몸도 안 좋아 결정하게 된 거였는데 자기는 동의하지 않았던 양 얘기하는 걸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있잖아... , 낙태 했어>, 여성민우회)

 

태어나고 죽는 순간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생애의 모든 과정을 생명이라고 한다면, 낙태죄는 여성들의 삶과 생명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성들이 낙태를 선택하는 이유는 생명을 경시해서가 아니다. 여성은 자신의 삶과 건강 뿐 아니라 태어날 아이의 삶의 조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당사자다.

 

애가 건강하지 않을까 봐 가장 걱정됐어요... 이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 애에 대한 어떤 보장이 너무 안 돼 있고 복지가 안 돼 있는거에 대해서, 우리가 나이가 들면 언젠가는 죽을 건데, 그 애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거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있잖아... , 낙태 했어>, 여성민우회)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수정되고 나서 9개월까지는 태아를 위해서는 간과 쓸개도 내 줄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그 생명이 태어난 후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다. 육아는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이고 국가의 지원과 복지는 빈약한 가운데 특히 비혼모는 문란한 여성으로 낙인찍혀 경제활동을 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온전한 선택의 권리를 누려본 적이 없다. 피임 교육과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되고, 비혼모에 대한 부당한 시선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으며, 장애아를 낳아도 차별받지 않고, 육아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마련된 사회에서야 여성들은 비로소 선택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국가의 자궁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여성의 몸은 인구조절 정책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고 한국은 특히 심했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은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출산율을 낮추기 위한 가족계획사업의 일환이었다. 이후 정부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을 대상으로 강제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가는 이 법에 우생학적 낙태 허용 사유를 두어 장애 여성과 남성의 재생산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편견을 반영하고 강화했다. 이는 과거부터 한국 정부가 자행해온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강제 단종 및 낙태시술과 맥락이 닿아있다.

 

이처럼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낙태를 권유했던 정부는 이제 저출산이 문제가 되자 낙태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려 하고 있다. 그 어떤 방향이든 여성의 건강과 삶은 국가의 고려대상이 아니기에 위협받을 수밖에 없어왔다.

 

청와대의 이번 답변을 여성단체들은 어느 정도 의미 있다고 평가했다. 처벌강화 위주인 낙태죄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는 점, 임신중절 불법화로 여성의 생명과 건강이 침해된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가 분명하다고 지적됐다. 청와대는 실태조사를 말했을 뿐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 도입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또한 사회적 논의와 의회의 입법을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조치들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자연스레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 정부는 약자와 소수자, 노동계급을 위한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기보다 많은 경우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를 말하며 책임을 피해왔다. 결국 필요한 것은 수많은 여성들과 대중들의 요구와 투쟁이다.

 

임신중지를 둘러싼 싸움은 생명권선택권의 대립이 아니다. 여성의 생명과 삶의 통제권을 여성 자신이 가질 것인지 국가와 가부장적 사회가 가질 것인지를 둘러싼 생명권과 기본권 투쟁이다.

 

이는 사회가 여성을 재생산의 도구로 삼도록 여길 것이냐, 기본권을 누리는 삶의 주체로 세울 것이냐의 문제다. 낙태죄와 싸우는 것은 뿌리박힌 여성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단연코 여성의 편에 서야 한다. 나아가 안전한 피임과 출산의 권리, 출산 후 제대로 된 양육을 포함한 재생산권 전체가 보장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기사 등록 20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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