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성폭력 개념의 무한 확장, 운동의 유사사법화, 피해 서사의 범람은, 외부에서 종종 짐작하는 바와는 달리 기실 그 누구보다도 여성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삶과 세상을 납작한 가피해서사의 끝없는 변주들로 환원하고, 세계를 바꾸어야만 가능할 치유와 해방을 가해자 한 사람(대상이 '2차 가해자들'이나 '가해 단체'로 확장되더라도 본질적으로 상황은 같다)을 단죄함으로써 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서 누구보다 가혹하게 지는 것은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 기본적으로 완전하고 자유로우며 누군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개인이 나약하거나 누군가 그 개인을 ‘침해’했기 때문 둘 중 하나라는 믿음을 우리의 머리속에 단단하게 새겨놓음으로써 사람은 원래, 본질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사회적인 존재이며 무수하고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하여 거기서 발생하는 가해와 피해로 환원되지 않는 무수히 다양한 고통과 상처들을 은폐한다. 그러한 믿음은 사람들이 위험천만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그럭저럭 안전하고 ‘정상적’이라고 믿게 하는 데 대단히 핵심적이다.
박탈, 고립, 배신, 실망, 불신, 환멸, 상실, 결여·결핍, 갈급, 의존, 고착, 좌절, 혼란, 공허, 정서전염, 공감, 조종, 기만, 배제, 타자화 ... ‘성적 침해’ 또는 ‘성폭력’과 곧잘 겹치기는 하지만 성폭력으로 환원되거나 성폭력과 동일시할 수 없는 수많은 종류의 고통들이 있고, 잘못된 이름으로 그것들을 부르는 건 적어도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결국은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 모두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하는’ 종류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권력관계는 거시, 미시를 가리지 않고 삶의 모든 면에 침투한다. '침해'에 의한 고통만큼 극명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사회가 우리에게 갖게 만드는 욕구, 욕망, 기대, 믿음, 인지도식, 관계, 습성, 언어들과 결코 무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올올이 권력관계가 새겨져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침해’는 언어의 표면 아래에 잠겨 있는 이 거대한 고통의 해류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너무 자주 그런 류의 고통들이다. 심지어 성폭력 사건에서조차도 가해자보다는 주변인과 사회가 더 많은 상처를 낳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통은 본래 삶의 일부고, 이러한 고통들이 전부 없어지는 것은 인간과 사회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가 생산하는 고통의 양과 질은 명백하게 과도하고, 고통의 분배는 극도로 불평등하다. 우리는 ‘침해’의 틀로 포착되지 않는 고통들에 대해 ‘그건 다들 안고 사는 거니까 참아야지’라고 말하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그것들 하나하나를 집어들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관리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가해자 개인에 대한 단죄를 벗어나는, 더 급진적이고 더 포괄적이며 훨씬 더 다양한 투쟁의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에 피억압자들이 억압을 떨쳐내고 승리할 수 있게 하는 동력, 피억압자들이 더 많이 가진 단 한 가지의 자원은 바로 이 고통들이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MeToo 비판 선언에 대한 단상들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 피해호소만으로 진실을 선규정하고, 가해자를 악마화하거나 매장하고, 계급·소득·나이·지위·지식권력·미시적 관계양상 등 관계를 관통하는 다양한 결들을 무시한 채 성별권력관계로 모든 것을 환원하고, 남성에게는 100%의 행위성이 있고 여성은 자원이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성별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을 개별 관계에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피해’와 ‘공포’ 이외에 여성의 관점에서 성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피해자중심주의 담론에 대해서 몇 년째 비판해온 입장에서, 예술계 일각에서 확산되는 소위 ‘MeToo’ 비판 선언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성적 접촉을 실제 또는 잠재적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일차원적인 관점으로는 피해자의 치유도, 가해자의 반성도, 정의의 회복도, 사회의 변화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섹스와 피해를 동치하는 페미니즘이 섹스와 가해를 구분하지 않는 사회의 반작용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이런 비판은 필연적으로 가해지목인 - 남성의 현실을 말하느라 피해호소인 - 여성의 현실을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남성’은 성의 향유자·소비자·정복자로, ‘여성’은 그런 남성에게 소비되는 물건으로, ‘유혹’은 ‘남성이 여성을 정복하기 위해 여성의 주체성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규정된 상태에서, MeToo 비판 선언에서 말하는 “유혹의 자유”란 여성의 입장에서는 ‘성폭력의 자유’밖에 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의사소통의 실수(또는 ‘물어보는 것’을 어색하거나 남성다운 주도성이 부족한 ‘찌질함’으로 치부하는 문화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의사소통의 체계적 방기), 그리고 불평등한 성별권력관계로 인한 권력의 낙차와 결합할 때, 우리가 그토록 익히 경험해 알고 있는 ‘한 쪽은 연애인 줄 알았던 성폭력’이 발생하게 된다.
후안무치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극히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도리어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성폭력은 정상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정상적 성각본’의 극단이고, 이 사회에서 평범하게 사회화된다는 것은 어쨌든 다소간에 강간문화를 내면화한다는 의미다. ‘성폭력 가해자’라는 명명이 ‘변태 죽일놈’과 동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하고 누구도 단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반드시 단죄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동들, 행위자의 선택으로 귀인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이 세상에는 분명히 있다.), 가해자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그런 위치와 경험의 간극을 만들고 의사소통을 방기하도록 가르치고 그것이 폭력과 착취로 이어지게 하는 권력 낙차를 생산·재생산하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경우가 특히나 성폭력 사건에서는 너무나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폭력이나 피해자화의 함정은 많은 부분 이 사회 구조가 너무 거대하고 막연하다는 이유에서 손댈 수 있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다 물으려는 정치적 안이함에서 비롯된다. 성폭력 문제가 사회, 공동체의 문제라는 립서비스는 꽤나 확산되어 있음에도, 실제 성폭력 사건에서는 가해자 개인이나 기껏해야 소속 공동체에 책임을 묻는 데서 논의가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해당사자 개인에게 실제 이상의 악의적 해석이 덧씌워지고 도무지 양형이 맞지 않는 비난과 폭력이 난무하게 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를 바꾸는 지난하고 근본적인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모든 악을 덧씌우고 모든 것을 ‘가해자의 악의에 의한 침해’로 소급하는 방식은 이제 탈피해야 한다. 다른 한편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쪽에 더 많은 책임이 따르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고, 기득권을 성찰하고 스스로를 단속할 책임으로부터 가해당사자를 면제하고 모든 문제를 구조에만 소급하는 반편향에 빠져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성을 관계적 책임을 지고 관계를 꾸려가야 할 동등한 인간으로, 여성을 자기 욕망과 의사가 있는 주체로, 유혹을 ‘상대로부터 동의를 선택받기 위해 상대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의사소통이 성의 있고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관계를 ‘섹시한’ 것으로 재정의하는 새로운 성각본과 관계의 문법이다. 이와 더불어, 혹은 이를 위해서, 고발하고 응징할 수 있는 ‘침해’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사생활’의 이분법을 넘어, ‘신뢰의 훼손’ ‘기대의 좌절’ ‘관계의 단절’같은 방향으로 미시적 관계에서 권력과 폭력이 나타나는 방식들을 표현하고 분석할 수 있는 언어들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도 있다. 이러한 언어들은 ‘침해’에 비해 양쪽 모두에게 행위성을 열어두고, 단죄와 징벌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현실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좀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 등록 20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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