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새로운 헤게모니를 위한 시도다
70년대 미국식 급진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한계는 남성 적대 따위에 있는 게 아니라 기존 질서를 대체하는 데 실패했다는 데 있다. 아무리 급진적인 수사를 남발해도, 이윤 본위의 엘리트 지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원리 어떤 체제로 사회가 조직되어야 하는지 전망을 제출하고 관철시키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는 그저 기존 질서의 부분 부분을 지엽적으로 수정하는 ‘만년 야당’ ‘비판자로만 존재하는 비판자’ 포지션을 벗어날 수 없다. 기존 체제의 논리를 꺾지 못하는 이상, 여성 집단 내부의 상대적 다수자인 비장애 백인 중상류층 여성을 중심으로 판이 돌아가는 것도 거의 필연적이다.
진실로 급진적인 운동은 남성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과격한 언설이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고 세상을 새로 만들려는 의지와 역량으로 만들어진다. ‘나’의 억울함을 푸는 걸 넘어, 전 인류가 살아갈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내 운동, 내 삶으로 제시하겠다는 의지. 인류의 다수가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그 전망에 동의하여 그 의지가 실현되면 우리는 그것을 두고 ‘헤게모니를 잡았다’고 한다. 오래 집권하는 모든 ‘여당’은 어떤 식으로든 그런 헤게모니를 구축한다. 그것은 약자에게만 요구되는 이중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지배의 필요조건이다.
물론 제2물결 페미니즘의 성취를 폄하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것은 여성들만의 한계가 아니라 패퇴와 분열의 시기에 대부분의 운동이 비슷하게 밟았던 길이었고, 한계적이었을지언정 그들의 성취를 발판으로 (물론 민권운동, 구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과 탈식민화 과정, 68을 비롯한 반자본주의 운동의 영향 또한 지금보다 좀 더 중요하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이제 그 수준을 넘을 만큼 성장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힘이 헤게모니를 노릴 만큼 증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인 동시에 그 자체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시도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 이르러 페미니즘은 더 이상 여성(내부의 다수자 중심의) 이익집단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 인식론, 정치이념이자 사회 조직의 원리가 된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것은 보편 이념으로서 페미니즘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요약하는 동시에 기존 질서의 반명제에서 새로운 헤게모니 블럭으로 전화한 페미니즘의 위상 변화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약자들에 대한 연민 따위는 물론 심지어 내가 겪은 성별주의의 폐해 때문도 아니었다. 이 흐름은 강력하고 해방적이며 이미 그것을 입증할 만큼 했으므로 그것을 거역하기는 지금에 와서 불가능하다는 걸 어렴풋하고 막연하게나마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와서 페미니즘을 다시 주변으로 돌려보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이 사회에서 계속 살고 싶지 않고 페미니즘의 원리에 따라 재조직된 사회에서 살고 싶다. 그조차 폭압적이라고 생각한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어차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진공이란 없으며 문제는 누구를 위해 어떤 폭력이 어떤 식으로 조직되고 행사 되는가 일 뿐이라고 믿고 그런 맥락에서 페미니즘적 권력을 지지한다. 그게 가장 급진적인 입장이라 생각한다.
● 차이와 단결에 관한 단상들
1.
관용의 정치는 강자의 미덕, 현명한 지배자의 자질이다. 사회적으로 약자여도 판 내에서는 강자거나 판 내에서는 약자여도 미시관계에서는 강자거나 뭐 그런 식으로 한 사람의 위치도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달라져서 그렇지, 자기를 지키고 존재증명을 하는 것 자체가 과제인 사람들일수록 적대의 정치(독자적 정치세력화, 자기 이익의 분명한 규정, etc.)가 귀중해지는 건 대개 어디서나 타당하다.
복수의 페미니즘, 복수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그것이 미래의 헤게모니, 집권 여당의 정치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도식적인 구분이지만, 그러한 자신감을 가지기 힘든 문제들에 있어(성소수자 억압, 식민주의, 장애 문제 등) 나는 여전히 보다 선명한 적대의 정치를 지지한다. 다만 그 적대가 상호 멸절이나 배제가 아니라 거래, 협상, 타협, 계약, 전략함으로써 지양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
자본이나 국가, 낡은 체제와 구습들과 싸우는 것보다 내 눈에 차지 않는 동지들과 싸우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더 정력적으로 몰입하는 사람들, 미숙함·후진성·불완전성과 계급적대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실이 낳는 참상들과 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슬프게 한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버린’ 운운하려는 게 아니다. 민중의, 여성의, 식민지 주변부 인민들의 투쟁이 아무리 타락하고 변질됐어도 이 지배체제만큼 거대하고 끔찍한 악을 양산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양비론을 펼치는 것은 십중팔구 전쟁과 학살과 강간과 굶주림을 몸으로 받아본 적이 없는, 자신의 매우 특권적인 위치성에 매여 있는 매우 개인적인 도덕감정으로 사물의 경중을 판단하는 자들이다. 나는 그런 목소리가 보편적 이치를 자임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꼴보기 싫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악덕들이 그럼에도 현실을 바꾸는 싸움을 무력화하는 데는 현실의 압력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억압과 폭력은 우리를 부수고 일그러뜨리지만, 또한 그 고통의 크기만큼 현실에 맞서는 동력을 낳기도 한다. 지리멸렬한 분열에는 그러한 전화의 가능성이 없다. 세계를 바꾸는 데 써야 할 에너지를 서로 죽이는 데 사용하게 될 뿐이다.
지금 동맹하고 있는 관계라고 모든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는 없고, 차이가 나는 부분에서는 드러내고 싸우는 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비뚤어진 세계에 대한 분노를 다른 동지들(동지로도 안 보인다면 다른 운동들이라고 하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분출하는 것은 시비선악을 가리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방식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과오보다 그런 방식이 낳는 해악이 백만 배는 더 크다. 나는 그 해악이 결정적인 싸움에서 우리를 패배하게 할까봐 두렵다.
● 자기의식화로서의 윤리적 소비
‘윤리적 소비’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채식이나 에코백이나 쓰레기 분리수거, 안 쓰는 케이블 뽑기 같은 소비자 운동이나 일상적 실천으로는 작은 일부조차 상쇄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환경 파괴가 기업이나 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의도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나, 나는 윤리적 소비가 바로 그것을 스스로 상기하는 ‘자기의식화’의 수단으로서, 즉 생태계가 당면한 거대한 위기를 외면하기를 거부하는 자세와 신념을 다지는 실천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짐과 선언은 일상에서 금방 퇴색되고,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일상적으로 작게라도 효능감을 느끼고 자기 행위성을 재확인하는 계기들을 만드는 건 신념을 유지하는 데 상상 이상으로 중요하다. 물론 소비자적 실천은 실제로 소비력이 있는 중상류층에게나 가능한 경우가 너무 많기도 하고, 그걸 안 한다고 해서 죄인 취급받을 이유는 없다. 자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나의 경우엔 거식증이 심해져서 먹을 수 있을 때 어떻게든 최대한 영양가 높은 걸 최대한 밀어 넣어야 하는 때를 제외하면 돼지고기•소고기•양고기•오리고기를 먹지 않고, 가죽 제품은 되도록 사지 않고(사실 돈도 없다), 낡은 옷이나 재활용할 수 있는 물건은 최대한 버리지 않고 오래 입고 쓰고, 이면지 활용하고 재생잉크와 재생지로 다중인쇄하기, 너무 피곤하거나 계단이 너무 높은 경우가 아니면 되도록 엘리베이터 안 타고 계단으로 다니기, 가급적 유기농•지역 생산품•친환경 인증마크 있는 제품 사기, 체인점보다 동네 카페 가기, 쇼핑백이나 파일철 재활용하기, 섬유유연제 안 쓰기 정도가 지금 하는 실천인데 각종 집회며 선전전, 회의를 돌아다니느라 돈과 시간, 체력이 모두 부족했던 시절에는 많이 포기했었고 좀 더 자원이 많아지거나 요령이 붙으면 여기서 더 해볼 생각이다. 그게 정치적 운동을 대체하거나 방해한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건 내가 조정에 실패한 탓이지 윤리적 소비의 필연적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첨언하자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상황 지금 시점에서 소비자 개인에게 주어진 권력이 너무 작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기업 독재 하의 구조적•체계적 생태계 파괴와 동물 학대가 중단되고, 가령 복지 보장된 상태에서 살다가 자연수명이 다한 동물을 고통없이 도축해서 먹는 것이 육식의 표준이 된다면, 그 때는 개인의 소비에 돌아가는 책임이 훨씬 커질 것이다. 그런 시대에는 단지 미식을 위해서 동물을 억지로 살찌우거나 자연수명 이전에 고통스럽게 죽이는 행위가 지금 밀렵이나 반려동물 학대처럼 실제로 범죄로 규정될 수도 있고,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이 옳을 터이다.
(기사 등록 201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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