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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에 관한 단상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11. 23.

윤미래 

 

 

 

 

 

이 시대에 진보는 무엇인가

 

<오빠는 필요없다>에서 전희경은 진보가 특정한 사회세력이나 집단의 전유물이라는 관념을 비판하면서 한, “진보는 진보하려는 에토스다라고 말했다. 그 비판 자체는 매우 타당하고, 그걸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노동자의 이익이면 그저 일단 주장하고 노동자의 입장이면 지지하고 보는 것이 옳은 일인 줄 아는 노동자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그 대안이 진보하려는 에토스? 그것은 평상시에는 진보를 상상할 여유조차 없는 수많은 근로 계급의 극빈자들보다 선량한 중산층 화이트칼라나 인텔리를 더 진보적인 주체로 놓게 되는 사고다. 그것은 자기 계급 특권과 지식 권력을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주체의 특성을 곧 진보 그 자체와 등치한다는 점에서 남성 조직노동자와 그 동맹자들이 주장하는 노동자주의와 다르지 않다. 주관주의적이고 초역사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노동자주의보다 심지어 더 나쁘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진보는 도대체 무엇인가, 노동자계급도 사회주의 혁명도 진보의 기반이나 수단에 불과하다면 진보 그 자체는 대체 무엇인가?

 

이 시대의 진보는 압제를 떨치려고 싸우는 피억압자들이 담지하게 되는 당파성, 즉 모든 불평등과 예속,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현실적 움직임이다. 모든 계급, 사회세력, 주체들은 이 속성을 담지하는 만큼 진보적이고 이 움직임을 거스르는 만큼 반동적이다. 압제와 착취가 인간과 생태계에 가장 큰 고통과 위협이 되는 시대에는 아직까지 그러하다. 그 시대가 지나고 나면 진보는 새롭게 정의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여전히 그 당파성을 현실에 구현하고 실제로 그것을 구현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가장 강력한 수단이지만, 현실의 사회주의 운동과 활동가들, 사상가들이 이 당파성을 거부하고 외면한다면 그들은 그 지점에서만큼은, 그리고 딱 그러한 한도 내에서 여느 수구 세력과 다르지 않게 진보의 적이 될 것이다. 그러한 싸움은 현실에서 이미 나날이 벌어지고 있으며, 사회주의는 지금의 사회에서는 진보적인 사상이자 운동으로서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싸움에서 진보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선은 전희경이 암묵적으로 긋는 것처럼 진보와 사회주의 사이에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안팎에서 진보와 수구 사이에 쳐져야 한다.

  

 

김남주의 <민중>을 다시 읽으면서

 

그대는 충분히 먹고 있는가

그대는 충분히 입고 있는가

그대는 충분히 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대는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먹고 있다

그대는 가장 따뜻하게 만들고 가장 춥게 입고 있다

그대는 가장 오래 일하고 가장 짧게 쉬고 있다

이것은 부당하다 형제들이여

이 부당성은 뒤엎어져야 한다

 

-김남주, <민중>

 

이 시는 일단 교차성에 대한 관점이 포함되지 않은 계급에 대한 시고, 김남주는 형제만을 호명하고 저 뒤에도 전형적인 남성 직종만을 열거했지만, 그 자리에 밥을 안쳐놓고 틈틈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레이스를 짜는 동남아시아의 가내 노동자들, 제 아이를 떼어놓고 국경을 넘어 독일이나 미국 가정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구 동구권의 유모들, 종일 코코아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는 거의 노예상태에 놓여 있는 아프리카의 아동 인부들을 가져다 놓으면 낡기는커녕 여전히 인식을 쪼개는 도끼날과 같은 시다.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쉬는 사람들의 나라가 가장 가난하고 저개발된 후진국이라면, 이것은 부당하다, 형제자매들이여. 이런 세계는 뒤엎어져야 한다.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먹는 자들의 눈으로 세계를 다시 읽으면, 서구와 민주주의를 자연히 연결짓는 우리의 상식도 재고해 보게 된다. 차티스트 시대의 영국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면 계급 착취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열망과 달리 서구 사회는 지금 꽤 높은 수준의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면서도 체제를 안정되게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자유로운 자본주의의 생명력이 독재적 사회주의보다 강했기 때문에? 그랬다면 CIA가 그 많은 종교근본주의자들이나 군사독재 정권을 후원할 필요가 없었겠지. 독일, 프랑스, 미국 따위의 나라들이 체제를 유지하는 비결은 지구의 나머지를 초과착취해서 내지의 백인 노동자들에게 저가의 생필품을 공급하고 공해산업을 국내에서 배제하고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부에서 행여 반란을 일으켜서 이 토대를 허물어뜨려서는 곤란하다. 여차하면 군사 쿠데타나 유혈낭자한 집단학살을 벌여서라도 주변부 인민은 계속해서 억압해 둘 필요가 있다. 본토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양립하기 위해서 주변부에서 독재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조차 중심부 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 없이는 불가능했을 소중한 성과이고 진보의 기반이지만, 주변부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것은 민주화보다는 독재와 빈곤의 외주화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세계에서 한국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혹은 가해자(공범자)가 된 것 자체가 또 피해이기도 한, 반주변부 특유의 독특한 위치에 있다. 박유하류의 삼류 해체주의자들은 일방적 피해 서사를 해체한다며 그 자리에 낡아빠진 화해의 서사를 집어넣기를 좋아하지만 사실 가해와 피해는 원래부터 곧잘 이렇게 교차하고 중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너도 가해자이고 나도 피해자이니 서로 그만 화해하고 좋게좋게 지내자는 자세가 아니라 이러한 가해와 피해의 결들을 섬세하게 잡아내고 하나하나 정확하게 평가하고 단죄하거나 위로하는 것이다. 절대화나 악마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폭력의 직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한 올 한 올 정성껏 풀어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항헤게모니로서의 교차페미니즘

 

북반구서구권에서 조직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의 관계를 조야하게 요약하면 남성 노동자와 중산층 여성이 서로 여성 민중을 대변한다며 싸우는 형국이고, 이는 근본적으로 여성퀴어유색인소수민족장애인 노동자들 그 자신이 주력으로서 끌어가는 사회운동이 아직 가시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난국이다. 혁명을 먼 미래에 존재하는 이상적 가능성으로 사실상 미뤄버리고 있는 후자는 물론이고 전자 역시 혁명을 이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람시가 헤게모니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듯이, 혁명은 주도적 계급이 다른 계급이나 사회세력의 이익을 찍어누르거나 옆으로 밀쳐두고 독주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 이념으로 표현되는 이해관계의 동맹(연대)를 맺고 그 속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자기 해방의 사업을 마음껏 전개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에 좌파는 이러한 헤게모니 블럭을 건설하는 데 상당 부분 실패해 왔다.

 

이러한 방식의 연대와 단결을 이끄는 것은 결국 둘 중 어느 운동으로도 환원될 수 없으면서도 두 운동 모두의 합리적 핵심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가져가야 해방될 수 있는 사람들, 소수자이면서 피착취 계급인 사람들일 것이다. 미국의 흑인 여성들과 남반구의 여성들이 최근 밀어올리고 있는 새로운 여성운동의 물결 속에서 그들은 이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교수나 연구원이든 현장 실무자이든 사회적 인식과 담론의 생산유통에 관여하는 모든 자들의 소임은 이 헤게모니 블럭을 결속시킬 수 있는 사상, 이론, 서사, 감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역사는 이미 블럭을 둘로 갈라놓고 한 편에서 다른 편을 백안시하며 언젠가 그들을 배제할 날만을 꿈꾸는 지난 시대의 지식인들을 제치고 전진하고 있는 바, 지식인 계급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이것은 시대에 적응하는 능력과 자세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의 물신화에 반대한다

 

‘-이즘이 해방의 기치 자체와 동일시될 만큼 물신화될 경우의 문제는 특정 시기 특정 상황에 페미니즘이나 사회주의라고 다수에게 규정된 내용에 반대하면 반여성주의자나 자본주의 반동으로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나 다양한 의견의 경합을 통한 운동의 발전에 치명적으로 해가 된다.

 

나 자신은 주로 페미니즘 전통의 언어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스스로 교차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할 때가 많지만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말이 비난의 이유가 될 정도로 페미니즘이 물신화되는 상황에서는 성별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원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급진적이고 필요한 실천일지도 모른다.

 

운동이나 이념은 해방으로 가는 뗏목이고, 그래서 운동이나 이념과 선을 그으면서 해방되겠다는 건 뗏목 없이 강을 건너겠다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조리에 안 맞는 얘기지만 징검다리를 놓거나 배를 타겠다는 사람에게 강을 안 건너겠다는 것이냐!!”라며 질겁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많은 걸 판단하고 예측해볼 수 있지만 어떤 운동, 이념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결국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페미니즘이든 사회주의든 해방의 수단이 아니라 해방 그 자체와 동일시되면 곧 바로 그로 인해 해방적인 성격이 침식되어간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기사 등록 20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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