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블랑(Eric Blanc)
[맑스주의의 역사는 비록 약점이 있기는 했지만, 단지 ‘백인 남성 공장 노동자’만이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을 옹호하며 함께 투쟁해 온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글이다. 특히 그 악명과 달리 카우츠키가 앞장 서 이런 방향을 제시했었고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이것이 실천에 적용됐었던 점을 지적한다.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Eric Blanc)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이자 역사학자이며 볼셰비키와 민족문제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16/08/marxism-class-white-workers-socialists-race-anticolonial/
20세기 초 폴란드에서 유대인 분트의 회합 장면
“레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필터로 걸러진 맑스주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중 한정된 부문, 즉 백인 성인 남성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왔으며 그들이 자본주의 산업 생산의 선도적인 부문에서 일한다는 사실로부터 그들의 힘을 주로 이끌어내 왔다.”
페미니스트 학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렇게 말하면서, 맑스주의 전통이 오로지 특권을 가진 산업 노동자들하고만 관계가 있다는, 많은 활동가들이 공유하는 우려를 표현하였다. 그들은 해방을 위한 오늘날의 투쟁이 좌파의 오래된 이같은 배제적 전략에 의존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노력의 실제 역사에는 이와 다른 정신이 있었다. 앞선 시기 맑스주의의 진짜 한계는 인정해야 겠지만, 그 정치와 실천을 백인 남성 공장 노동자 옹호로만 축소시킬 수는 없다.
이론상으로 맑스주의자들은 항상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광범위한 노동자 운동을 전망했다. 실천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회주의 정당들은 비산업 노동자들, 여성, 농민, 그리고 식민지 민족들을 포함한 다양한 주변화된 집단들의 투쟁을 고무했고 그런 집단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하지만 인간다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백인 남성 공장 노동자” 신화에 근거하여 맑스주의 정치를 기각한다. 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것은 더 힘차고 폭넓은 운동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계급과 억압
1892년에 칼 카우츠키는 <에르푸르트 강령>을 출간하였다. 그 소책자는 얼마 안 가 영향력 있는 텍스트가 되어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러시아 볼셰비키들을 포함한 맑스주의자들의 한 세대를 훈련시켰다.
카우츠키는 노동계급에 대한 폭넓은 그림을 그린다. 그는 “사회주의가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기반은 재산이 없는 이들의 계급이다”라고 쓰면서, 노동계급을 (공장이나, 기업이나, 토지처럼) 먹고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재산을 갖지 못한 사람들 전부로 구성된 것으로 묘사한다.
산업 노동자들은 중요하지만, 모든 임금노동자들(가게에서의 피고용인들, 이발사나 웨이터나 택시기사 같은 서비스 노동자들, 그리고 지식인, 교사, 예술가를 포함한 “교육받은 프롤레타리아”)이 이 계급에 속한다.
카우츠키는 노동계급이 이미 자본주의 국가들의 인구 대부분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직업들이 프롤레타리아화를 겪으면서 그 숫자는 늘어만 갈 것이다. 비록 그가 산업 노동자들을 여전히 분석의 중심에 놓기는 했지만, 그는 또한 “해적질, 밀수, 노예무역과 전쟁을 통한 타국 토지의 약탈”과 자본주의의 연관성을 주목한다.
더욱이 그의 정치 전략은, 계급의 나머지를 희생시켜서 자기들의 특수한 이익을 추구하려는 가장 특권을 가진 노동자들의 경향(그가 “노동귀족”이라고 부른)을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상층에 대해 배타적으로 중점을 두는 것을 어떤 것이든 거부한다. 노동운동은 “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는 자본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을 조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간다. 카우츠키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더욱 더, “모든 노동하는 그리고 착취 받는 계급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인구의 절대 다수”의 대표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에르푸르트 강령>은 맑스주의자들이 “임금노동자가 받는 착취와 억압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느 계급에 대한 것이든, 어느 정당에 대한 것이든, 어느 성별에 대한 것이든, 어느 인종에 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에” 반대한다고 선언한다.
카우츠키는 사회주의 운동이 미국 노예제 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과, 폴란드와 아일랜드 민족 해방 투쟁을 옹호한 것을 사회주의 운동의 보다 넓은 주안점의 구체적인 사례로 든다.
마찬가지로 그 소책자는 “성별의 구별 없는” 보편적 참정권과 “남성과 비교했을 때 여성을 불리한 위치에 놓는 모든 법의 폐지”를 요구한다. 이어서 카우츠키는 사회주의가 가사노동을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삶에서의 온전한 젠더 평등을 확립하고 여성을 “가내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당은 미래에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자본가계급이 아닌 모든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착취 받는 층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착취와 억압을 끝내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와 억압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상관없이 그것들의 철천지 원수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 받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투사이다.
물론 그 시대의 산물로서 그 텍스트는 중요한 약점들을 갖고 있다. 그 텍스트는 (압도적으로 남성인) 산업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항상 선도적인 부문일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것이 당시 독일 및 보다 넓은 유럽의 경험에는 부합했을지 몰라도, 그 이후의 역사는 대중투쟁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꼭 전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마찬가지로, 계급에 대한 카우츠키의 넓은 시각 및 그의 폭넓은 정치적 지향과, 그가 프롤레타리아들의 전형으로서 남성 공장 노동자들을 묘사한 것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비록 여성에 대한 동등한 임금 요구가 1889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창립 대회에서 채택되기는 했지만, 이 요구는 카우츠키의 소책자에는 주목을 요할 정도로 부재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과 다른 약점들이 넓은 반자본주의 운동에 대한 <에르푸르트 강령>의 요구를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카우츠키는 성인 남성 산업 노동자들을 넘어서 일련의 피지배 집단들과의 연대를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사실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 프레임을 명확히 표현하였다. 물론 정치에서 말과 실천은 종종 괴리된다. 하지만 카우츠키의 관점은 그것이 출간된 지 15년도 채 지나기 전에 구체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1905년 혁명
러시아 제국만큼 카우츠키의 글이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곳이 전 세계에서 어디에도 없었으며, 여기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그의 강령을 그냥 일상 투쟁에서가 아니라 대규모 혁명 기간 동안 실천에 옮길 첫 번째 기회를 얻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카우츠키의 넓은 정의는, 세계의 1/5까지 뻗어나갔던 전제적 다민족 국가인 차르 제국을 흔들어 놓은 1905년의 격변의 동학에 들어맞았다. 제정 러시아 노동계급의 대부분은 산업에 고용되어 있지 않았지만, 광범위한 집단들이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정치에 참여했다.
주로 사회주의의 지도력이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전투적 파업 물결은 공장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 확산되었다: 가정부, 농업 노동자, 미용사, 음악가, 약국 종업원, 시종, 등대지기, 병원 직원, 웨이터, 소방대원, 교사, 판매직원, 신문 판매원, 택시 기사, 극단 단원, 그리고 심지어 유대교 회당에서 일하는 노동자까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모스크바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비록 우리가 깨끗하고 풀을 먹인 린넨 옷을 입지만 우리는 저 연기에 그을리고 먼지가 묻은 프롤레타리아들과 마찬가지로 노예일 뿐이다”라고 선언하는 맑스주의 신문을 출판하였다.
이런 실천들과 조직들은 전체 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05년 가장 큰 맑스주의 당은 유대인 분트였고, 이 당은 종교 때문에 대규모 산업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던 불안정한 위치의 장인들과 수공업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혁명의 핵심 전환점들 중 하나는 11월, 제국 전체에 걸친 우편, 전신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그리고 라트비아(제국에서 가장 전투적이었던 지역)에서는 학교 교사 평의회와 농촌 대표자 평의회가 노동자, 농민 그리고 민주주의 활동가들을 이끌어서 지역 전체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계급투쟁이 작업장에 국한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맑스주의자들은 바르샤바에서 지대를 인하할 것을, 바쿠(Baku)에서 실업자를 위한 구호를 제공할 것을, 그리고 제국 전체에 걸쳐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삶을 민주화할 것을 요구하는 주요한 전투들을 이끌었다.
11~12월 혁명의 정점 기간에 노동자들의 민주적 대중조직들은 차르 당국의 붕괴를 이용하여 대부분의 마을과 도시들을 지도하고, 교통과 조세와 식료품 가격과 지대를 규제하고, 공동 식사장을 건설하고, 민병대로 경찰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반란에 함께한 것은 비단 임금노동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학생들은 운동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 키예프의 한 자유주의적인 교수는 “대학이 평화로운 학문의 전당으로부터 이상한 정치 클럽으로 점점 타락했다. 혁명 발언이 이루어지고 급진적 혁명 결의안이 통과되는 불법 정치 집회 때문에 강의가 계속 끊기고 있다”고 한탄했다.
몇 달 동안 실천이 고조되다가, 전환점은 가을에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오데사까지 학생들은 대학을 점거하여 노동자들과 혁명 조직에게 열어 주었으며 그곳을 대중 집회, 대중 교육, 급진적 연극, 시, 음악, 공연을 위한 공적인 중심지로 바꾸었다.
차르 니콜라이는 그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불평했다: “대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온갖 건달패들이 거리로부터 거기로 들어갔고, 공공연하게 반란이 외쳐지고 있고, 아무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등학교와 대학이 하나의 중심지이기는 했지만, 9세부터 14세까지의 유대인 아동들은 리틀 분트(Little Bund)라는 그들의 자체적인 사회주의 그룹을 만들었다. 차르와 자본주의와 시오니즘을 비난하며, 그들은 “모든 도시의 청소년들이여, 단결하라!”라는 슬로건을 들었다. 벨로루시에서 유월절 기간 동안에, 리틀 분트는 주요 간선 도로를 점거하고, 리볼버 총을 쏘고, 적기를 흔들고, 혁명가를 불렀다.
러시아 제국 인구 중 농민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많은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은 도시와 농촌의 봉기를 연결하고자 노력했다.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지역에서, 맑스주의자들은 농민 혁명을 이끌었고, 종종 귀족과 차르 당국에 맞선 게릴라전에 참여했다.
이렇게 했던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조지아의 “구리아 공화국(Gurian Republic)”이었고 이는 중국, 베트남 및 다른 곳에서의 사회주의 세력이 이끈 농민 반란의 전조가 되었다. 지역 맑스주의 정당의 지도력 하에서 구리아의 농민들은 차르 당국을 쫓아내고 자신들 스스로의 혁명적 통치를 수립했다.
정치권력은 토지에 대한 권리부터 교육과정과 인민재판의 운영까지 지역의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결정했던 전체 촌락 회의(남성과 여성 둘 다로 구성된)가 장악했다. 구리아의 사례는 러시아 전체에 걸쳐 확산되었고 많은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농민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기존의 회의주의를 조정하도록 만들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190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카우츠키는 농민의 혁명적 지도력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말한다. 그 점에서 그는 코카서스에 이미 존재하는 상황을 그저 묘사하기만 한 것이다. 구리아는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 당 사이의 혁명적 관계에 대해 완성된 모델이다.
지배적인 민족(러시아인)이 인구의 소수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에서 예상될 수 있듯이,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도 또한 1905년에 일어났다. 실제로 혁명은 지배받는 비러시아 주변부에서 가장 멀리 전진했고 사회주의 정당들도 가장 강했다.
카우츠키의 글에 의존하여, 이러한 변경 지방의 혁명가들은 반제국주의적 맑스주의에 대한 정교한 이론과 전략을 계발해 냈고, 이런 것들은 보다 잘 알려져 있는 1920년대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반식민주의와 1960년대와 70년대의 제3세계 맑스주의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석유 도시 수도인 바쿠의 무슬림 사회민주당(Hummet)은 역사적으로 보다 중요했던 비러시아계 정당들 중 하나였다. 무슬림 집단의 그리고 무슬림 집단을 위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으로서 1904년에 세워진 Hummet의 역사는 사회주의가 비유럽인들과는 무관할 것이라는 널리 퍼진 전제들을 반박한다.
이슬람 신자들이 “계급투쟁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비판하며, 무슬림 노동자들은 보편적 의료 서비스, 동등한 임금, 유급 기도시간, 어머니의 출산 휴가, 그리고 수유를 위한 휴식시간을 요구하는 피켓 라인에 참여했다. Hummet은 특히 가부장적 관습을 규탄하고 여성을 위한 대중 교육 강좌를 이끌고 무슬림 여성의 자치적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도우면서 여성의 평등에 중점을 두었다.
여성과 남성 Hummetist 모두 바쿠 소비에트에 참여했고, 무장한 정당방위대를 건설했고, 차르와 부르주아지(지역 자본가들을 포함한)에 대한 저항과 모두의 동등한 권리와 노동자들 및 혁명가들의 전지구적 연대를 요청하며 무슬림 노동자들의 대중 집회를 조직했다.
지역 볼셰비키 그룹들과 협력하여(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며), Hummetist들은 종종 그 지역의 극좌파를 대표했다. Hummet의 지도적인 저술가였던 마흐메드 아민 라술자데(Mammad Amin Rasulzade)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회민주주의 조직은 언제나 인민의 행복을 위해 싸우고 그 이익을 보호한다. 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류를 깨우며, 이 조직은 세상으로부터 폭력과 억압을 없애는 것, 가난한 이들과 불리한 위치에 놓인 이들을 착취자들과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조직은 낮고,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고, 참정권을 빼앗긴 인민들의 당이다.
혁명이 패배한 후 많은 Hummetist들은 러시아 남부 국경을 건너 이란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이란 사회민주당을 세우는 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1909년에 영국과 러시아가 뒤를 봐주던 압제자 샤(Shah)를 타도한 “입헌 혁명”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대부분의 유럽 맑스주의자들이 식민주의를 지지했다는 신화와 달리, 유럽의 주요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란의 반제국주의, 반전제주의 혁명을 옹호했다. 1905년 혁명의 여성 참여는 Hummetist 운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여성 노동자, 지식인, 그리고 주부들은 사회주의 운동의 모든 측면, 모든 층위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부분 이런 역할들은 노동자 운동과 혁명적 운동의 광범위한 실천과 조직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운동은 파업이 여성을 위한 동등한 권리(보편적 참정권과 법적, 제도적 차별의 종식과 같은)와 여성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요구(육아 및 의료 서비스, 관리자들의 성적 학대의 종식과 같은) 양쪽 모두를 요구하도록 이끌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또한 자율적인 여성 조직, 출판물, 그리고 투쟁을 건설했다. 예를 들어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투사이자 폴란드 사회당의 지도자인 에스테라 골데(Estera Golde)는 1905년 폴란드 여성 평의회를 함께 조직했고 로보트니카(Robotnica: 여성 노동자)라는 신문을 편집했다.
당시에 가장 중요했던 자율적 조직은 핀란드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이끄는, 여성 노동자 연맹(League of Working Women)이었다. 이 조직은 가정부들, 주부들, 그리고 광범위한 노동계급 여성들을 단결시켰다. 핀란드 사회민주당과 협력하여, 연맹은 1906년에 온전한 여성참정권을 쟁취했으며 이로써 핀란드는 세계 최초로 이 요구를 수용한 국가가 되었다.
이 역사적인 승리의 서곡은 10월에 핀란드와 제국 전체를 모두 흔들어 놓은 총파업으로 시작되었다. 연맹의 신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파업 주간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각성의 주간이었다. …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여성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를 토론하는 특별한 회의를 열기 시작했고, 이런 회의에 사람이 넘쳐났다. 마치 여성의 지위가 개선될 것인지 아닐지의 여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여성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총파업의 발발이 필요했던 것처럼 보였다.
연맹은 보편적 참정권을 요구하기 위한 대중 집회와 수백 개의 회합을 개최함으로써 파업을 따라가고 이어갔다. 연맹은 만약 여성들이 투표권에서 배제된다면 새로운 총파업이 시작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가정부 연합의 사회주의 지도자인 미나 실란패(Miina Sillanpää)와 연맹은 남성들에게, 아내들이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집에 남아 아이들을 보라고 요청했다. 연맹의 신문이 지적하기를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평등을 지지했지만,
오직 정해진 한계 내에서만 그러했다. 여성들의 노력이 어머니들을 가정이라는 협소한 범위 내에 묶는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게 되자, 저항에 직면했다.
상당 부분 SPD는 투표권을 여성에게 확장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몇몇 당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연맹 지도자들은 여성의 참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을 부르주아지의 부역자로 보아 규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몇몇 여성 노동자들은 회의적인 남편들이 자신들의 투쟁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음식을 하지 않는 파업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SPD의 남성 당원들 그리고 당 전체는 결국 모두를 위한 투표권이라는 그들의 약속을 지켰다. 1906년 7월 20일 차르는 핀란드에 보편적 참정권을 마지못해 허락했고, 이것은 제국 전체에 걸쳐 계속된 혁명적 격동이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맑스주의자들은 1905년 혁명 기간 동안 수많은 대중 조직들 속에서 확산되었던 이 투쟁을 카우츠키의 정치적 지향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그 지향의 적용으로 보았다. ‘백인 남성 공장 노동자’ 신화는 이 중요한 경험을 지워버린다.
투쟁과 전략
하지만 우리는 초기 맑스주의의 역사를 이상화하거나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차르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노동계급의 어떤 부문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어떤 비프롤레타리아 부문이 동맹군으로 신뢰받을 수 있을지, 어떤 요구안이 제기되어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에 참여했다.
위에서 묘사한 가장 좋은 정치적 접근법이 오늘날까지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에 활기를 더해 오기는 했지만, 다양한 정당들이 실제로 농민이나 억압받는 민족들의 투쟁이 갖는 정치적 중요성을 부정했다. 또는 그런 운동들을 지지한다고 주장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비록 사회주의자들이 여성을 위한 중요한 즉각적 요구안들을 내세웠고 “가내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그들이 상상하는 미래의 한 부분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배적인 젠더 규범과 관계를 수용하고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핀란드에서 볼 수 있듯이 심지어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남성 사회주의자들조차도 가족 관계를 더 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또한 차르 국가가 혁명에 대한 유혈 탄압을 한 이후에 반대 방향의 오류를 저질렀다. 패배에 의해 사기가 저하되어서, 많은 정당들이 노동계급과 대중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1905년 이후 민족주의가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 다양한 사회주의 정당들은 반식민주의 투쟁을 노동계급 단결 및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분리했고, 이는 상층 계급들과의 동맹을 초래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범위는 혁명이 1917년에 다시 분출했을 때 명백히 보였다. 이제 많은 좌파들은 종종 민족해방의 이름으로, 바리케이드의 잘못된 편에 섰다. 운동은 그런 투쟁들을 서로 분리하는 것의 함정을 곧 깨닫게 됐다.
예컨대 사회주의자들이 지도하는 우크라이나 정부는 1917년에 토지 재분배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민족주의 블록을 유지했다. 이후에 우크라이나 맑스주의 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비니첸코(Volodymyr Vynnychenko)는 계급투쟁보다 민족적 단결을 우선시함으로써 초래된 해악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일한 구제책은 대중의 정서에 역행하지 않고, 정부와 그 사회정책을 바꾸고 싶어 하는 그들의 열망에 동의하고, 그렇게 하면서 우크라니아 민족 정부를 유지하고, 대중 속에서 민족적 관념과 사회적 관념 사이에 충돌을 만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양보는 또한 아제르바이잔, 에스토니아, 폴란드 등지에서의 혁명을 옆길로 새게 했다.
오늘날에는 노동계급을 이상화하는 경우보다는 기각하는 경우가 훨씬 흔하다. 자유주의적인 정체성 정치가 너무나 널리 확산되어서 심지어 힐러리 클린턴처럼 기업을 대변하는 정치인도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상호교차성을 논의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가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선 노동운동의 투쟁의 숨겨진 역사를 재발견할 것을 요구한다.
앞선 시기의 맑스주의의 결점들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정당하다. 전체 노동계급과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은 행동보다 말이 쉬웠고,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오래된 정치 전략이 언제나 단순한 계급 착취의 종식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아 왔다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카우츠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사회 변혁은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해방을 의미한다.”
(기사 등록 201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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