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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레닌주의를 넘어서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1. 27.

루크 쿠퍼(Luke Cooper)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관련해서 레닌과 레닌주의의 문제도 쟁점이 되고 있다. 이 글은 레닌주의라고 정식화돼 많은 좌파들이 지향해 온 조직 이론과 모델이 어떤 심각한 문제를 낳아왔는지 다루고 있다. 러시아 혁명 초기에 엄혹한 상황 속에서 정치적 다원성을 차단하고 당과 지도부의 하달식 지도를 통해 혁명을 지키고자 한 시도가 권위주의라는 문제를 낳았고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와 어긋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레닌주의를 둘러싼 여러 논란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이 글의 필자인 루크 쿠퍼(Luke Cooper)는 영국의 사회주의자로서 사이먼 하디(Simon Hardy)와 함께 <자본주의를 넘어서: 급진 정치학의 미래> 등을 썼고, ‘반자본주의 경향’(Anticapitalist Initiative)에서 활동하며 좌파들이 분파적인 과거와 단절해 힘을 모아 민주적 좌파 조직을 건설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서 관련된 글을 지속적으로 다룰 계획이다.]

 

출처: http://anticapitalists.org/2013/05/23/beyond-leninism/




 

오늘날의 급진 좌파는 다양한 사회운동에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해 왔지만, 이러한 경험들을 급속한 정치적 성장으로 전환시키거나 사회주의 정치를 부활시켜 정치적 주류 안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라는 글을 통해,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 오늘날 좌파의 위기는 여전히 종파의 위기이다.

 

이것은 정치 영역에서의 독점을 제각기 주장하는 조직들이 민주적, 참여적 정서가 강력하게 지배하며 정치적 다원성이라는 특징을 지닌 새로운 대중운동과 유기적으로 관계 맺지 못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종파적인 조직에서 자신과 적대적인 사상을 억압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sine qua non)가 되는 것처럼, 교조주의의 특징은 정치적 권위주의로 쉽게 경도되는 이데올로기적 불관용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딱히 참신한 주장이라곤 할 수 없지만, 요즘 급진 좌파를 둘러싸고 정치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는 시의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역사상 가장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는 위기로 인해, 이 같은 재평가는 한층 더 극적으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가 한 중앙위원이 저지른 성폭력 혐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행태로 인해, 당내 민주주의를 둘러싼 일련의 정치적 문제들도 제기되었다. 예컨대, 많은 논평가들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이 트로츠키-레닌주의를 지지한 것이 그러한 병폐를 낳은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오웬 존스(Owen Jones: 영국의 진보 논객)는 이와 관련해서 널리 퍼진 견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인데, 그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레닌주의 종파라고 딱지 붙이면서, ‘이 당이 내부 민주주의라고는 거의 없으며, 오로지 거의 1세기 전에 반봉건 국가에서 일어난 혁명을 복제하는 데 집착한다고 주장했다.

 

과거 SWP 저널리스트였던 톰 워커(Tom Walker)는 성폭력 혐의 은폐 의혹과 당의 내부 체제를 연결지으면서, ‘민주주의와 성차별주의의 문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전자가 결여되면 자연스레 후자가 자랄 공간을 만들어 주는데, 그렇게 자랐을 경우, 그것을 뿌리 뽑는 것이 훨씬 더 어렵게 된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글을 통해 그 사건을 세부적으로 비판하고 검증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말하건대, 이 글은 분명 SWP가 처한 위기를 다루려고 쓴 기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워커가 묘사한 바와 같이, 특별히 트로츠키주의나 레닌주의 조직이 그런 유형의 정치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논제에 대해 논하고 싶다. 당의 엘리트가 평당원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자적 위치를 누리고,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근거에서 정당화된다는 테제 말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에서 우리는 정치 영역에서의 독점으로 인해 초래된 정치적 결과를 다루었다. 예컨대, 긴축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이 고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변화 되어 있는 좌파 말이다. 반면, 이 글에서 나는 다양성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결과, 그것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나는 이 질문들을 1920년부터 1921년에 이르기까지 일당 지배의 창출로 이어진 러시아에서의 논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탐구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필자가 ‘1세기 전에 ... 일어난 혁명을 복제하는 데 집착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트로츠키주의 좌파에게 혁명적 행동이 무엇인지에 관해 완벽한 모범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논지는 세 부분으로 전개될 것이다. 첫 번째로, 나는 최근 차이나 미에빌(China Mieville: 저명한 소설가이자 사회주의자)컬트적 사고의 본질에 대해 개진한 주장을 돌아보면서, ‘종파에 대한 분석을 검토할 것이다. 두 번째로, 1921년 일당 지배의 창출을 초래한 러시아 공산당 내의 논쟁을 개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의 트로츠키가 생각해 낸 대리주의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좌파 권위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좌익 종파들

 

많은 사람들이 좌파에서 벌어지는 분열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맞는 생각이다. 다원성과 아울러 관점과 전통, 전망, 그리고 전략에서의 차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한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일부를 이룬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은 역사유물론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에 속해 있다.

 

실제로 인간들이 어떻게 해서 지식과 상상된 기억’, 그리고 전통을 세대에 걸쳐 전달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을 지니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과정은 사회 변화가 전반적으로 가속화되면서 강화되는데,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질서가 잠식당하고, 세계를 둘러싼 지식을 전용하기 위한 경쟁적인 시도들이 매우 다양하게 창출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 사상이 거쳐 온 역사적 진화를 보면,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내는 관념에서 이 같은 다원성과 복잡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역사가 한 해 한 해 누적되면서, 경험과 교훈은 물론이고, 새로운 생각을 위한 재료와 현상 유지적인 전제들을 잠식하는 불안정한 힘들도 더 많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차이점들이 정치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오히려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될 때 좌파의 단결이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더 나아가 같은 역사적 과정 내에는 여러 다양한 세계관들이 일련의 표준화된 지식들 중심으로 경직화될 위험성도 아울러 존재한다. 성공의 정도야 각기 달랐지만, 좌파와 우파에 속한 전통들은 모두 이러한 행태를 보여 왔다. 심지어 커다란 사회변동의 시기에조차 과거 역사는 우리의 주관성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맑스가 적절하게 이야기했듯이,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이 때문에 산 자의 머리를 마치 악몽처럼 짓누른다.’ 왜냐하면 심지어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는 순간에조차 우리는 과거의 영령을 간절하게 자신의 의식으로 불러오며, 케케묵은 가면과 빌려온 언어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그리기 위해 과거의 영령들로부터 이름과 전투구호, 그리고 옷을 빌려오기때문이다.

 

이를 통해 맑스가 환기시키고자 했던 것은, 현대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변화의 속도 그 자체가 익숙한 것으로 물러서려는(‘구관이 명관이라고 부르는 정치) 경향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변화 되어버린 상황에 처한 좌파적 종파는 특정 이데올로기적 전통과 맺는 관계로부터 새로운 자신감과 의미를 끌어내려 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그들의 세계관이 자신들의 주변화를 정당화하고, 그로인해 뚜렷하게 구별되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을 조직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그러고 나서는 바로 이 고립 탓에 해당 조직이 사회변화로부터 단절된 채 남겨질 위험이 있다. 그 결과, 그들이 지닌 사상들은 경직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전통을 향한 단순한 경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급진 좌파가 익숙한 것으로 보수적인 후퇴를 감행할 때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특정 조직, 구체적으로는 지도적 성원들이 자신들의 경험들로부터 총체성이라는 교훈을 추출했고, 그것들을 해석학적으로 포장된 교리들 속에 구현해냈다고 주장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접근에 이론적인 영감을 제공한 것은 분명 게오르그 루카치의 <레닌: 그 사상의 통일성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최근에 데이빗 렌턴(David Renton)이 언급했듯이, “할 드레이퍼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에 경도되는 이들이 이 팜플렛에서 발견한 장점이 있는데, 즉 그들이 이 책을 통해 무소불위일 뿐만 아니라, 오류를 범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지식인층이 지도하는 당에 관한 완벽한 철학적 정당화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루카치에게 당은 그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과(그리고 실제로 그 역사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레닌이 가진 특별한 힘은 혁명의 현실성’, , 역사적 과정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순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이처럼 루카치의 저작은 어떻게 이데올로기적 독점주의가 당원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엘리트 문화를 자라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데, 그러한 엘리트 문화에서는 당의 관점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에 대해 경의를 보내는 것이 당 생활의 기본이 된다.

 

최근 차이나 미에빌(China Mieville)은 좌파 정치조직들이 지닌 컬트적 사고의 본질에 대해 다루는 기고문을 하나 쓴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논점들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기사에서 그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의 최고 권위를 혁명적 지도부에 할당하는 경향을 적시하고 있는데, 그 후 이러한 과정은 민주적 책임성과 회원들에 의한 통제 같은 종류의 살아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공동화시키거나, 그런 메커니즘의 단순한 부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이다.

 

미에빌에 따르면, 이것이 이상주의(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물질적 현실에 대한 부정)를 구성하며, 그로 인해 역사에서 위대한 사람들(Great Men)’ 이론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가 침식되는데, 엘리트가 자기들이야말로 사태의 균형을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당의 임무를 정식화할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상향식의사 결정과정에 내포된 참여적 형식의 유용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접근법을 취할 경우, 지도부가 규율 문제에 있어서 자신들이 이해 상충이라는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도덕성에 근거하여 기피(recuse; 법관 등이 재판에서 불공정한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을 때 그 법관을 직무집행으로부터 배제하는 제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루카치가 레닌의 천재성에 대해 논의한 것을 검토해 보면, 미에빌이 무척 잘 묘사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동일한 방법론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레닌은] 천재적 통찰력을 가지고,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다가오는 혁명)를 그것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장소와 시간에 바로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는 이 관점에 기초해서 국제적인 사건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까지 모두 이해하고 설명했다. , 혁명의 현실성이라는 관점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멈춰 서서, 이 부분에서 그가 실제로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황한 말들을 떼어놓고 보면,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예측하고, 그 전제 위에서 사건들을 분석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닌이 굉장히 독창적인 천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왜냐하면 짜르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은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이라면 모두가 공유한 것이었고, 그들이 벌이는 모든 논쟁의 기초였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분명 당 엘리트에 대한 경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부한 것들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그의 주장이 점점 더 부풀려지면서 보다 분명해진다.

 

따라서 맑스주의가 레닌을 통해 겪은 발전은, 단지 - 단지! - 개인적 실천과 전체적인 운명 사이에 놓인 긴밀하고, 가시적이며, 중대한 연결, , 전체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명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루카치가 사용하는 언어는 거의 의도적으로 모호하며, 그가 사용하는 정식화는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혼란스럽다. 그가 사용하는 과장된 언어를 무시할 경우, 그의 기본적인 주장은 개인적 실천(정치적 개입의 주관적 요소)과 착취 받는 노동계급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공산주의적 변혁이 지닌 객관적 잠재력 사이의 연결로 설명할 수 있다.

 

루카치는 레닌이 공산주의적 목표를 실현하는 데 적합한 구체적인 전술을 정식화하는 데 특히 능숙했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 철학적 기초와 레닌의 능력 말이다. 첫 번째와 관련해서, 역사유물론의 근본 원칙(‘주체와 객체의 통일, 그리고 사회변화에서 정치투쟁이 하는 중심적 역할)맑스주의의 [새로운] 발전으로 여겨질 여지는 거의 없다.

 

대신 두 번째 부분, 즉 현재 레닌의 페르소나(persona: 인격)미래 레닌의 페르소나와 나란히 혁명적 전술을 만들어내기 위해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인데, 바로 이 부분이 핵심적인 것이 된다. 이런 방식을 통해 평범한 것에서 경의를 표하는 쪽으로 어떤 이동이 발생하는데, 미에빌에 따르면, 이는 컬트적 사고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종의 현혹된 신성화(deluded sanctimoniousness)’로 요약된다.

 

레닌이 구체적인 상황에 기반하여 전술을 만들어내는 특수한 능력을 가졌다는 주장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레닌 이후의 레닌주의에서 이 점에 극단적인 강조점이 부여되면서, 토니 클리프가 레닌에 대해 쓴 평전에서 옹호했던 막대 구부리기모델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개입주의적 당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정치적 상황을 분석하고, 이에 기초해서 단호하게 필수적인 전환을 하도록 조직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를 통해 아마도 빠른 성장을 이루어냄과 동시에 노동계급에게 지도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주변부에 있는 좌익 종파들이 이 모델을 적용했으나, 결과는 그다지 시원치 않았고, ‘관점을 형성하는지도자들을 활동가평당원들보다 위에 놓고 특권화하는 한, 이는 공산주의적 원칙과 긴장 관계에 있는 권력 위계를 만들게 된다.

 

루카치가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조롱하는 것은 쉽다. , 그는 이 소책자를 스탈린이 소련에서 자기의 독재를 강화하고 있었을 때인 1924년에 썼는데, 이 책에서 그가 보인 민망할 정도의 정식화는 분명히 이 시기에 발생한 새로운 레닌 컬트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다. 일부 사람들은 루카치의 이 같은 작업을 두고 아직도 혁명정당에 대해 이제까지 발전시킨 것 가운데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한 설명이라고 칭찬하고 있지만, 루카치의 작업은 확고하게 스탈린주의 학파 내부에 있는 것으로 분류된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반스탈린주의자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트로츠키는 1923년에 스탈린의 강화되는 전제주의에 도전하기 위해 반대파 쪽에 합류했고, 보다 건강한 노선에 기초한 공산주의 운동을 재건하기 위해 여생을 보내다가 1940년에 소련 요원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이 같은 반스탈린주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1920년과 1921년 사이에 일당 지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던 일은 언제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 기간, , 1920년부터 1924년 사이의 시간은 전 지구적 현상으로서 부상한 레닌주의개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1920년부터 1921년 사이에는 볼셰비키 모델을 중심으로 결집해 있었고, 그 후인 1923년부터 1925년까지는 이 모델이 레닌주의로 정의되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레닌주의가 (명시적으로 주창된 교리로서는) 스탈린주의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불편한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923년에 확연히 드러났던 당의 컬트적 성격이 보다 이른 시기인 1920~1921년에도 맹아가 있었는가의 여부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다룬 많은 문헌들 가운데 다수는 이것을 단지 국제적 상황의 맥락이라는 관점에서만 설명하고 있는데, 예컨대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유럽에서 고양되던 노동자 운동의 물결과 뒤이어 통일 전선전술로의 전환으로 귀결된 안정화 시기 등을 예로 드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는 1921년에 독재적 질서가 수립되었던 러시아적 맥락을 분석에서 지워버린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새롭게 등장한 권위주의를 정당화하기

 

한때 산업적 근대화라는 충격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던 차르 러시아의 피폐한 경제적 상황은 세계 대전의 압박을 받으며 날로 악화되어 결국 권력이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혁명적 순간이 지닌 비극은 사회주의 변혁으로 가는 경로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이 그와 동시에 어떻게 그것이 지향하는 유토피아적 목표와 열망을 실현하는 과정을 방해하는가에 있다.

 

러시아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기로 합의했지만, 그 이후에도 소비에트 정권은 주요 식민 열강들이 부추긴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미 전쟁으로 파탄이 난 사회에 내전으로 초래된 사회적 비용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에 대해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플레이션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였고, 국가 재정은 극단적인 기능 장애상태였다. 그 결과,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임금이 현물로 지급됨에 따라 사실상의 물물교환 경제가 생겨났다. 1919년 중반부터 1921년 초까지 국가는 예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분배에서 독점을 관철시키려고 했지만 총체적인 실패만을 맛봤을 뿐이다. 그 이유는 암시장이 식료품 공급의 2/3을 차지했고, 식용곡물의 경우엔 정부 공식 물량의 4배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산업 생산은 1913년 수준의 21%로 추락했으며, 농업 산출량은 1913년 수준의 60%에 불과했다. 지방 행정 중심지가 소재한 40곳의 인구는 1917년 이래로 평균 33%씩 감소했다. 특히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같은 도시 심장부에서 이 수치는 각각 44.5%57.5%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존립 자체는, 그 과정에서 비록 관료화되고 있을지라도, 점점 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피폐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자연스럽게 권위주의적인 통치 형태로 향하는 경향을 만들어 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붕괴에 직면한 상황에서 질서의 필요성으로부터 나오는 유혹이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비극은, 사회주의의 일반적인 전망이 고도로 권위주의적인 일당 지배를 동반한 채, 일반적 원칙에 따라 확립되고 정당화된 방식에 있다. 그것이 러시아처럼 척박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상황은 정치-경제 권력을 극단적으로 집중시켰던 정책이었던 전시 공산주의기간에 형성되었다. 많은 공산당원들은 국가 권력을 확장하면 신속한 근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1921년에 당이 국가 주도 자본주의적 발전의 한 형태를 복원한 신경제정책(NEP)으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그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이러한 경제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스탈린주의화 현상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그보다 우리는 어떻게 일당 지배라는 정치적 구조가 나타났으며, 어떻게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내전은 산업에 대한 노동계급 통제의 물질적 기반을 침식했는데,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규모 면에서 대량으로 섬멸되고 심각하게 궁핍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곧 노동 규율이 일련의 강압적인 노동법을 통해 위로부터관철되었고, 이는 1920년에 사회주의적 원칙과 명백히 모순되는 강제 노동 제도로 귀결되었다. 노동조합들은 운영상 국가로 통합되었고, 노동조합 가입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의무가 되었다. 소비에트 내에 존재했던 다당제적 요소도 살아남지 못했는데, 1918년에 볼셰비키들이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SR)원들을 전쟁 기간에 백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추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정당 중 어떤 정당도 내전 이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완전히 불법화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볼셰비키 당이 입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트라우마는 아이작 도이처가 쓴 <트로츠키: 무장한 예언자>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그 이유는 트로츠키가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권위주의적인 통치 형태의 확립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많은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비극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소책자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를 번역한 미국인들은 원래 그 저작의 제목을 <민주주의 대 독재>로 출간했는데, 그 텍스트의 실질적인 주장을 고려했을 때, 그렇게 한 것은 분명 꽤 일리가 있었다. 트로츠키는 루카치가 레닌에 대한 자기 소책자에서 썼던 것과 거의 동일한 말을 써서 당(그리고 당내에서는 지도부. ‘최종적 결정은 당의 중앙위원회에 속한다.’)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상황 하에서 공산당이 가지는 배타적인 역할은 상당 부분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계급독재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계급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요소들과 이질적인 경향들, 그리고 각기 다른 수준의 발전 단계가 포함된다. 그런데 독재는 의지와 방향, 그리고 행동의 일치를 전제로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우선성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체 내부에, 명확한 행동 강령과 무오류의 내부 규율을 가진 당의 정치적 우선성을 전제한다. 따라서 연립 정부라는 정책은 혁명적 독재 체제와 내적으로 모순된다. 우리는 당연히 입도 뻥긋하지 않을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연립 정부가 아니라, 노동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후진성과 편견을 대변하는 다른 사회주의조직들과의 연립 정부를 계획하고 있다.

 

여기에 데이빗 렌턴(David Renton)이 루카치의 소책자에서 찾은 요소들 하나하나가 모두 들어 있다. , ‘행동 강령과 무오류의 내부 규율에 힘입어 어떤 것이든 성취할 수 있는 당, ‘이질적인 경향들에 대항해 혁명적 의식을 책임지고 있다고 자임하기에 틀릴 수 없는 엘리트, 그리고 민주적 소비에트 체제 내에서의 연립 정부 원칙(레닌이 한때 <국가와 혁명>에서 묘사했으며, 1917년과 1918년에 추구했던 종류와 같은)에 대한 거부 등 말이다.

 

이처럼 미에빌이 컬트적 사고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던 이상주의가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 글에서 트로츠키는 공산당이 지닌 무오류의 규율과 도전받지 않는 권위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자주 정치적 도덕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혁명을 위해 다행스러운 것은’, 그에 따르면, ‘우리 당이 두 가지 자질 모두를 같은 정도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여기서 마주 하게 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위인이론이 아니라, ‘위대한 당이론인 셈인데, 이는 당 위계질서에 내재적인 인간적 오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도 특히 사회 붕괴가 첨예하게 벌어지는 시점에 말이다. 실제로 트로츠키는 연이어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강력한 혁명적 조직을 유산으로 이어받지 못한 채, 갈등이 거대하게 구조화되어가고 있는 다른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생할 때에 그만큼 권위 있는 공산당이 만들어질지 여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주 많은 부분에서 이 문제는 각국의 사회주의 혁명이 어느 정도로 진전되는가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1920년부터 1921년 사이의 트로츠키는 (당시 그는 내전 시기 정치를 반영하여 선전적인어조로 말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성격을 가진 두 가지, , 당의 규율과 도전받지 않는 권위에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이행하는 원동력의 지위를 부여한다.

 

요컨대, ‘만약 당신이 충분히 뛰어나다면’, 미에빌이 말했다시피, ‘당신은 스스로의 의식도 사실상 자유 의지에 의해 형성할 수 있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자연히 사회경제적이고 계급적인 모순들인데, 이를 통해 한 사회를 부패시키는 수많은 물질적 인센티브들이 도입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한 조건으로서 온전한 민주적 통제와 권리는 필수 불가결해진다.

 

도이처는 후일 트로츠키가 마치 고전 비극의 주인공마냥 그가 지닌 권력의 바로 그 정점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스스로의 원칙을 반해 행동하고, 가장 엄숙한 도덕적 헌신을 무시한 방식에 대해 개탄스러워했다. 이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도이처는 어떻게 상황과 혁명의 보존, 그리고 그 스스로의 자존심에 의해 그가 그런 곤경으로 이끌렸는지덧붙이면서, ‘하지만 그는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서 있던 기반 자체를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트로츠키는 그가 한때 옹호했던 일당 지배가 얼마나 해로운 잠재력을 지녔는지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19213월 제10차 당 대회에서 일당 체제의 공식화에 찬성하던 트로츠키의 입장은 거부당했고, 그 대신 레닌의 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레닌은 그러한 조치를 경제 회복을 위한 단기간의 비상조치로만 간주했다.

 

이조차 말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충실할 것을 약속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그것의 정상적인 운영을 보장할 그 어떤 공식적인 통제와 책임성을 강제할 메커니즘도 없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다당제 소비에트 선거는 치루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볼셰비키들은 경제를 파멸에 이르게 한 황폐함의 정도나 그로 인해 생겨난 불만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자유 선거를 치를 경우, 자신들이 다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의 이런 입장들에 대해 당 내외부적으로 전혀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0년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이끄는 노동자 반대파가 볼셰비키 당에서 소수 분파로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온전히 독립적인 기구가 되어야 하며,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가 복원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기술 관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계층이 국가 안에서 어떻게 유착되고 있는지를 드러냈다.

 

중요한 것은, 콜론타이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격을 하향식 통제로 인해 조장된 도시 생활의 사회적 붕괴와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관료주의의] 해악은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의 공개적인 차원의 의견 교환이나 즉각적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중앙 기구들로부터 내려온 공식적 결정을 통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데 있다.’

 

생산 라인의 노동자들은 그들 위에 있는 ‘1인 또는 극도로 제한된 집단의 지배를 위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사상과 의견의 자유자주적 행동을 고취하는 것은 사실상 금지되었다. 예언과도 같은 논평에서, 그녀는 소비에트 국가의 민주적 삶이 이처럼 침식되는 것은 미래에 공산당 자체의 존재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콜론타이가 관료집단의 내부로부터의 당 장악을 상상했든, 아니면 새로운 엘리트가 외부에서 당을 타도하는 것을 상상했든 지에 상관없이, 혁명의 해방적 전망이 소진되어가고 있다는 그녀의 기본적인 우려는 선견지명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도 이와 매우 유사한 요구안들을 제기했고(특히 소비에트 내 자유선거의 복원), 마침 이는 제10차 당 대회 회기 중에 발생했다.

 

소비에트 국가는 이를 분쇄했고, 이로 인해 봉기를 지지했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완전히 불법화되었다. 당내의 다른 모든 조직된 반대파들과 마찬가지였고 (봉기를 지지하지 않고 이에 대한 당의 진압을 지지했던) 노동자 반대파까지 역시 금지되었는데, 이로써 비록 이 단계에서도 모든 반대파나 표현의 자유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는 관료적 통제가 완연해졌다.

 

트로츠키주의를 경유한 레닌주의를 넘어서?

 

소비에트 체제가 권위주의로 주저앉은 것은 NEP 정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볼셰비키 당 지도부 그리고 그들이 수장으로 앉아있던 국가의 무력은 새로운 정책 속에서 되살아날지 모를 자본주의적 경향을 통제할 수 있는 주된 힘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실제로 당은 강력한 사회주의 노동계급이 부재한 상황을 자신들로 대체하고는 했다. 이는 레닌주의에 대해 루카치가 쓴 소책자의 기본적인 역사적 배경을 제공해 주는 것인데, 당 지도부를 역사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지닌 이해관계의 수호자로서 바라보는 것이 그 중심 테마이기 때문이다.

 

데이빗 렌턴이 말했다시피, 루카치는 심지어 레닌이 어려운 상황을 피하고자 당 지도부의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대변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계급 전체의 이익을 저버리는상황을 말한다. 실제로 루카치는 명시적으로 당이 정치적 다원성을 부정하고 이데올로기적 획일성(monolithism)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 지도부의 관리와 규제로 유지되는 사상과 실천에서의 동질성그들의 프롤레타리아적 계급의식에 기반하여 당원들을 가장 엄격하게 선별한다는 원칙의 준수라고 말이다.

 

이 모든 논쟁들은 한 가지 문제, , 볼셰비키들이 옹호했던 당 조직 형식은 스탈린주의를 내재하고 있는지 여부를 둘러싼 질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이런 조직 형식이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당 엘리트(‘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을 수호하는 사람들로 전제된)에 복종하는 컬트적인 구조를 창출하는 경향을 지녔는지에 관한 것 말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점점 더 많은 문헌들이 드러난 덕분에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 당이 엘리트 조직이었다는 위와 같은 설명은 도전을 받았고, 그 대신 어떻게 해서 당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정치적 다원성을 지닌 대중조직으로 발전했는지에 강조점이 가게 되었다. 이러한 논점을 앞장서 제기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라스 리(Lars Lih)에 따르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요약된 것으로 유명한 레닌의 정치적 기획은, 당시 그가 일반적으로 지향했던 맥락 속에서 고려해야 하는데, 그것은 당시 국제 노동운동을 이끌던 독일의 대중정당 모델에 기초하여 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 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의 관점에서 보면, 루카치의 주장은 쉽게 반박할 수 있는데, 여기서도 그는 늘 그랬듯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 어떤 언급은 없이 추상적인 단언의 형태로 주장했다. , 볼셰비키 당은 목적의 단일성과 보편성이 특징이며, 이는 멘셰비키 분파와 대조적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서로 다른 이익 집단들이 혼란스럽게 뒤엉켜한데 묶여 있는 터라, ‘어떤 행동이든 내부적인 타협을 거쳐야만 간신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1917년 이전까지의 볼셰비즘 역사를 살펴보면, 당 내에 존재한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조류들 사이에서는 수많은 타협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먼 하디(Simon Hardy)에 따르면, 볼셰비키 당에서 제명조치는 사실 거의 취해지지 않았고, 적어도 실천 측면에서만큼은 정치적 다원성을 상당히 존중했다. 그는 볼셰비키 당내에서 이루어진 몇 가지 타협 사례들을 들면서, 볼셰비키 당이 완전한 동질성을 지녔다는 루카치의 중심적인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예컨대 니콜라이 부하린은 <꼬뮤니스트(Kommunist)>라는 대중적 저널을 발간했고, 이를 통해 민족 문제와 반전 운동, 그리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둘러싸고 소수파 입장들을 적지 않게 옹호했다.

 

<병사의 진실(Soldiers Truth)>이라는 간행물을 출간한 일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회원들은 19177월에 벌어진 모험주의적 봉기를 선동한 책임이 있었지만, 당시에 당 지도부는 이러한 그들의 활동을 전혀 제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볼셰비키 당 지도자들 중 소수파는 권력 장악 직후 부르주아 신문을 억압하는 조치에 대해 반대투표를 했으며, 심지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191710월 봉기 계획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들 가운데 그 어떤 경우에서도 당 중앙 노선을 위반한 이 같은 소수파 조류들이 당에서 제명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그들 역시도 당 지도부였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사실들은 오히려 루카치의 주장을 분명하게 반박하는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노선을 어느 정도까지 표명했느냐에 따라 당 성원이 엄격하게 선발되었다는 그의 주장 말이다.

 

이런 설명들이 레닌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 모두가 만들어 낸 근거 없는 신화, , 강철같이 단련된 중핵 조직으로서 볼셰비키 당이 지닌 철의 규율에 관한 신화를 해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설명들은 그 자체로 문제를 한 층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설명들은 한 가지 다른 문제, , 심지어 반쯤 비합법 상황에서조차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이었던 정당이 어째서 매우 권위주의적 국가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갔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볼셰비키들이 정치적 다원성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이론화 작업에 실패한 데 있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내부의 이념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가 이처럼 광범위하게 규정된 정치적 통일을 유지해온 것은 그저 실용적 타협일 뿐이라고 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 그들이 혁명 이전에는 대규모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그러한 타협을 필수적이라고 간주했지만, 혁명이 벌어진 이후에 권력을 장악하고 그것을 유지해나가는데 있어서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 역사에서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실제 사실 관계들이 루카치의 주장을 반박하기 때문인데, 이것들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필연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고, 해석적 논쟁을 피할 수 없으며, 원칙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미묘한 차이까지 포함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한 다원성을 인식하는 것은, 맑스주의가 정치적 행동을 뒷받침하는 다면적이고 다양한 사회재생산 이론으로 발전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임에 틀림없다.

 

혁명 이전과 이후에 볼셰비키가 보인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은 레닌이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각기 다르게 부여한 의미에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최근에 리(Lih)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1917년 이전과 이후에 볼셰비키가 겪은 경험 사이의 관계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레닌이 그 용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한 것은 두 차례 뚜렷이 구별되는 시기뿐인데, 1906년에서 1907, 그리고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의 시기가 그 때라는 것이다. 전자의 시기에 레닌은 선거와 민주적 원칙에 대해 확고한 강조점을 두었고, 두 번째 시기에서는 확고한 강조점이 중앙 집중주의에 있었다는 것이다. 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라는 말은 늘 실제로 적용되는 부분과 단순히 수식하는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1906~1907년에는 실제로 적용되는 부분이 민주적인 부분이었고, 이것은 당내 선거와 아래로부터 통제, 그리고 기타 등등을 의미했다. 반면에 1920~1021년에는 이렇게 작용하는 부분이 중심주의였고, 이는 집권 정당으로서 요구되는 단일한 정책들을 주로 의미했다.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는 본질적으로 동음이의어인 것이다. , 같은 말을 사용하곤 있지만, 두 가지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 말이다.

 

1920~1921년 즈음에 벌어진 논쟁에서 레닌은 노동자반대파나 민주집중제 분파를 비판했는데, 이들은 당내 활동을 민주화하고 정부 행정 분야에서 1인 지배 정책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분파 금지 조치는 [상명]하달식 통제 시스템으로서 신성화된 버전의 레닌주의가 부상하는데 일조한 일련의 조치들 가운데 일부였다.

 

실제로 하달식 정당이라는 전망은, 그저 트로츠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고, 당시 인터내셔널 전체에 걸쳐 정치조직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논쟁 속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 유명한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21개 조건도 민주주의를 중앙 집중주의로 동화시키려는 이 같은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에 속한 정당들은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의 원칙에 기반 하여 건설되어야 한다. 치열한 내전이 벌이지고 있는 작금의 시기에 공산당은 오직 가능한 한 중앙 집중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되고, 내부에서 철의 규율이 지배하며, 당원들의 신뢰에 의해 유지되는 당 중앙이 최대한의 권리와 권위, 그리고 가장 광범위한 권력을 가져야만, 그 때에야 비로소 제 임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분명히 트로츠키의 무오류의 규율과 도전받지 않는 권위라는 정식화를 메아리처럼 반복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사회주의 변혁에서 중앙 집중화된 당 지도부가 재차 제1 원동력으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는 동일한 문제를 안게 된다. 루카치와 트로츠키의 저작, 그리고 ‘21조항을 담은 문건, 마지막으로 러시아 볼셰비키 당 내의 민주주의 친화적인 분파들을 대상으로 한 당내 공격 등의 사례에서, 어떤 패턴이 모습을 드러낸다.

 

, 지도부로의 권력 집중화가 레닌주의조직을 둘러싸고 새롭게 등장하던 개념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거푸집으로부터 빚어진’ ‘비분파적인’(즉 이념적으로 획일화된) ‘새로운 유형의 당이란 개념이 등장한 것은 혁명 이후의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그러고 나서 이는 그레고리 지노비예프의 <볼셰비키 당의 역사>(1923)나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1924)와 같은 정전류의 저작들을 통해 볼셰비즘의 역사에 소급적으로 적용되었다.

 

블라디미르 네프스키(Vladimar Nevsky)1925년에 이를 매우 루카치적인용어로 요약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각 조직에 속한 모든 이들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이것이 모두가 기꺼이 인정하며, 그 지침을 가장 엄격하게 집행하는 단일한 중앙의 단일한 의지와 공존한다.’ 이러한 정식화는 이 같은 일종의 세속 종교가 창시되는 과정에서 그 일부가 되었다. , 전제적인 엘리트의 단일한 의지에 복종함으로써만 개인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속 종교 말이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정전(正典)처럼 묘사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서 에릭 홉스봄이 개진한 주장은 전적으로 타당했는데, 그에 따르면,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 당은 군대 참모 조직이라기보다는 쉴 새 없이 논쟁을 벌이는 모임과 더 가깝게 행동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조직적 모색은 대체로 당이 한 층 더 전진할 수 있는 방도를 궁리하고 있던 소규모의 혁명적 활동가들 사이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마련된 대응이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특별히 효율적이고 규율 잡힌 직업 혁명가들의 중핵은, 중앙 지도부가 그들에게 할당한 임무들을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구성되면서, 잠재적으로 권위주의가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로 맞다. 실제로 로자 룩셈부르크를 필두로 한 많은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이 점을 지적해 왔다.

 

이 점에서 레닌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엘리트주의의 지지자로 간주했다. 예컨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적 문제라는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일보 전진, 이보 후퇴>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 사이에서 나타나는 초중앙 집중주의적인 발상들을 방법론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을 보여 준다며, ‘이 경향은 가차 없는 중앙집중주의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녀의 비판에 답하면서 레닌은 기본적으로 룩셈부르크가 그의 입장을 오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선거 원칙, 즉 당 지도부가 전국 협의회(national conference)에 종속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점, 따라서 결국 주권은 기층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접근 방법에는 중앙 집중화 경향이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리에 따르면, ‘레닌은 선거 원칙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한에 있어서는 그것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중앙 집중주의야 말로 그가 혁명 이전 시기에 진정으로 얻어내고자 투쟁한 목표였다.’ 하지만 이것이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에 의미했던 바는 그 이후에 그것이 의미한 바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실상 레닌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자기가 지지하는 다수 노선을 집행하지도 않고 있는 중앙 기관들을 옹호하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중앙 집중적 경향이 심각한 사회적 붕괴라는 조건 속에서 어떤 군사적 상황과 결합되자, 그 결과로 레닌 자신은 결코 실현하고자 꿈을 꾸지 않았던 전제주의를 키우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조직적 원칙들은 분명 하달식 조직에서 관료주의가 나타날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 충분히 민감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대리주의를 공격한 청년 트로츠키

 

1920년과 1921년에 트로츠키가 제시했던 극단적인 중앙집중화는 이 점에서 비극적인 아이러니였는데, 이것은 청년 시절 이 문제와 관련해 그가 표명했던 보다 자유의지론적(libertarian) 입장에 비춰봤을 때 급격한 방향전환이었기 때문이다. 1904, 러시아 맑스주의가 첨예하게 분열하고 있던 와중에 트로츠키는 레닌의 전위당 모델이 노동계급의 민주적이며 자주적인 활동을 소멸시키고, 그것을 당 엘리트의 명령으로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것이 그와 동시대인인 레닌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그럼에도 그가 한 말들은 1920년대에 급격하게 전개된 소련 관료화의 과정을 예언적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들은 당 조직이 당을 대리하고,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리하며, 마침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리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한편, 이로 인해 사람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각급 당 위원회들이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온다.

 

트로츠키는 당 지도부를 기층의 민주적 통제에 종속시키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않은 정치적 조직 형태는 전제주의로 흐르게 될 것이라는 기본적인 진실을 포착했다. 그로 인해 양성되는 엘리트들은 기층 풀뿌리 조직이 통제할 수 없고, 그 결과 이들은 지도층 내에 보다 상위에 있는 자들의 선의 덕분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

 

전제주의로 흐르는 이러한 경향(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을 엘리트로 대체하는 것)20세기 스탈린주의 당-국가 구조의 초석이 되었다. 예를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런 정치적 지배형태를 채택한 몇몇 정권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1982년에 전면 개정된 중국 공산당 당헌 제 2 을 보면, 젊은 시절에 트로츠키가 경고했던 대리주의 논리가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실제로 이 문서에서 공식적으로 서술되고 있는 바는 트로츠키의 예언을 거의 문자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조직에 대한 개인 [당원]의 복종,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 상층에 대한 하층의 복종, 그리고 중앙위원회에 대한 전체 당의 복종

 

이는 십중팔구 청년 트로츠키가 가졌던 두려움이 무엇인지는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그가 한 말을 되풀이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 당헌에 담긴 이와 같은 구절은 젊은 시절의 트로츠키가 우려했던 가장 근본적인 지점들을 강조하고 있는데, , 어떤 무자비한 논리가 확립되는 것은 바로 아래에 있는노동자 계급이 해당 구조 내에서 자신들보다 위에 있는정부 당국자들과 당 지도자들에 대해 아무런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을 때란 점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라는 글에서 트로츠키는 보다 젊었던 시절에 자신이 펼친 주장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을 거의 감추지도 않은 채, 이 점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이렇게 당의 힘이 노동 계급의 힘을 대리하는 것은 전혀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사실 대리라는 것 자체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근본적 이해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의해 그런 이해관계가 거대한 규모로 일정에 올라갈 때, 공산주의자들이 전체 노동계급을 위한 대표로 인정받는 것은 꽤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당 엘리트가 취하는 행동 사이의 관계를 매개물이 존재하지 않는 직접적인 것으로 상정한 것은, 20세기 내내 스탈린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게 될 방법이었다. 이는 루카치가 1924년에 적용했던 공식의 전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일단 정치적 다원성이 거부되면 권위주의로 나아갈 위험성이 있다는 점도 명확히 보여준다.

 

청년 시절의 트로츠키는 바로 이 주장 자체를 재차 직접적으로 공격했던 바 있다. 왜냐하면 그는 두 영역’, 즉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이행중인 노동계급의 객관적 이해관계와 그들이 이것을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정도 사이에 삶에 내재하는 영역이 있는데, 충돌과 충격, 실수와 환멸, 그리고 우여곡절과 패배의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은 그저 이론적으로 만들어진교의적 지지만을 가지고 자신이 역사적 사명을 표현하고 있다고 자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주의 사상을 노동자 투쟁과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한데, 그 내용은 운동이 직면한 정치적 과제와 더불어 변화하고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이념적으로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프로젝트에는 수많은 다양한 관점들이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는 노동 계급의 자주적 활동이라는 원칙 위에 건설되는 노동계급정당의 본질적인 핵심을 이룬다.

 

좌파에 대한 재고찰

 

이 모든 논의를 그저 협소한 탐구, , 오늘날의 반자본주의 이행 기획과는 관련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이 권위주의로 무너진 역사가 주는 교훈을 비판적으로 반추하는 것은 분명 핵심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전 시기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연구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전반적인 결론들을 상대화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아주 오래전에 트로츠키 전통으로부터 출발한 많은 조직들이 정치적 다원성과 민주주의와의 관계 문제에서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재고찰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창립자인 토니 클리프는 아직 레닌주의자로 전향하기 이전의 더 젊었던 시절에 이미 대리주의 문제에 대한 청년 트로츠키와 후기 트로츠키 사이의 간극을 파악한 바 있다.

 

사회주의 정치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탈로의 끊임없는 유혹을 인식한 그는 혁명정당이 계급을 대리하게 되고, 그 결과로 혁명정당이 보수적 세력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과 투쟁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계급 자체의 실천과 함께 계급이 가하는 압력인데, 그 압력은 노동계급의 사회적 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행위자(agent)인 당에 대해서도 가해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실로 비극적이게도, 최근에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보여주고 있는 난관은 이처럼 선견지명이 있었던 그의 논평을 확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클리프도 트로츠키가 보여준 동일한 악순환’, ,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의 정신에 확고하게 입각한 당 위계제도를 창출하려는 유혹에 어떻게 굴복하게 됐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지금의 단계에서는 다소 뒤늦긴 하지만, 일부 조건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최소한 러시아 혁명이 전 세계에 진정한 희망과 급진적인 전망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데이빗 윗저리(David Widgery)가 오래 전에 주장했듯이, 공식적인 맑스주의 정당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잔인한 대학살에 연루되어 가망이 없어졌을 때, ‘러시아 혁명은 맑스주의의 영광을 구해냈.

 

하지만, 마찬가지로 소련은 그것을 다시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역시도 비극적인 사실이다. 볼셰비즘 안에서 원래부터 위계적이고 불가피하게 독재적인정치밖에 보지 못하거나, 혹은 스스로를 기만하며 매해 붉은 광장에 핵미사일을 배치한 국가수반들도 결국 그 가운데서도 나쁜 종류의 혁명가들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분법에 맞서서, 윗저리는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지닌 복잡성에 주목한다.

 

러시아 혁명이 압도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대중적 사회혁명이었다는 것과,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진정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는 것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정치 조직을 둘러싸고 벌어진 룩셈부르크 대 레닌 혹은 청년 트로츠키 대 후기 트로츠키라는 식의 대립구도에 관한 정전학(正典學)적 논쟁을 부활시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맑스주의자들 가운데 정치조직이 참여적이고 다원적인 형태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자본주의에 맞선 성공적인 투쟁과 해방적인 생산양식으로 이행하는데 필요한 조건으로까지 충분히 이론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트로츠키와 룩셈부르크가 러시아 혁명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관료화를 각각 예언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뿐인데, 그들이 파악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온전히 발전시키지는 않은 채 말이다. 레닌도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에 완전히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옹호했던 코뮌-국가의 전망이나 어떻게 경쟁을 조직할 것인가?’와 같은 글에서 나타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불행히도 내전 이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생존하려는 신생국가가 벌이고 있던 더 냉혹한 투쟁에 자리를 내주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주의적 개입으로 인해 러시아 국가가 감내해야 했던 잔인한 빈곤은, 설사 이 때문에 권위주의가 불가피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순 없다 해도, 많은 부분 이 과정을 형성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21개 가입 조건이 담고 있는 혁명조직에 대한 위계적 관점 역시도 현저하게 역사적 상황과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찰리 포스트(Charlie Post)에 따르면, “그들이 계획한 기획의 중심에는 기회주의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당, 즉 혁명적 노동자 활동가들과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독립적 조직이 있었다.” 그들은 선거에서 경합하는 정당과 단체교섭에 관여하는 노동조합 사이의 해묵은 분리를 거부했고, 그 대신 자본주의에 맞선 의회 밖에서의 저항에 뿌리를 둔 정치투쟁의 개념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것이 오랜 유산이며 중요성을 가진 정당하고 필수적인 기획이라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오류가 생긴 것은 하달식으로 중앙 집중화된 통제(지도부에 이상주의적인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는)가 개혁주의를 막아 준다고 상상한 데에 있다. 지난 20세기에 공식적 공산주의 운동이 반복적으로 저질렀으며 종종 재앙적이었던 기회주의와 개혁주의의 오류는 그런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실제로는 그런 조직형태가 오히려 혁명적 정치와 상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가정의 정반대가 진실이었던 것이다. , 엘리트가 아니라 구성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완전히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조직만이 개혁주의적 유혹을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포스트가 계속해서 주장했듯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거부한 탓에 혁명적 대의가 저해됐다는 것은 명백하다.

 

1923년 이후 코민테른 지도부는 20세기 좌파에게 레닌주의적 조직 규범이라고 알려진 것(책임지지 않으려하는 민주 집중적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운영되는 지역 차원의 당 세포들과 내부 경향과 분파에 대한 금지, 그리고 당 지도부에 대해 보이는 정치적, 조직적 충성이라는 관점에 따라 제한된 중핵’, 마지막으로 극단적으로 협소한 정치적, 조직적 동질성)을 강제했다. 이러한 조직적 변화들에 뒤이어 기층의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조직의 정책과 실천, 그리고 지도부에 대해 행사할 수 있었던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오늘날, 대안적인 관점을 통해 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틀림없이 유지하되, 그것을 덜 위계적인 정당 조직의 전망과 연결시킬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고취된 세계적 차원의 저항 물결이 고조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더 좌파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정치를 재발견해야만 한다.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오랜 여정이 될 것이지만, 이러한 노력을 돕기 위해 우리는 지난 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혁명 정치가 좌파 권위주의의 유혹에 다시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진정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 같은 역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지 않는 좌파 정당들은 미에빌이 경고하는 컬트적인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종파적 생활세계 내에서 그것을 다시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관점에서 나오는 몇 가지 원칙들은 새로운 좌파를 건설하는 데 틀림없이 쓸모있게 기여할 수 있다.

 

(i) 대리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착취 받는 계급들의 자주적 활동의 중심성을 분명히 하는 것. 이는 전제주의를 막는 데 핵심적인데, 이러한 전제주의는 책임지지 않으려하는 당 간부 계층과 평당원들 사이에 권력 불균형이 존재하는 조직을 건설할 때 불가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ii) 자율성(autonomy)에 대한 맑스주의적 설명. 만약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전망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사회라면, 우리는 이 전망을 오늘날 우리가 벌이는 실천에 따라 재정비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건설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맞선 일관된 도전을 발전시키려는 것이긴 하지만, 이는 또한 구체적이고 실행가능 해야 하며, 그저 교리문답서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iii)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 대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혁명 조직을 둘러싼 논쟁의 범위를 넘어서는 함의를 가진다. 관료주의에 직면한 구성원들을 원자화되고 무력화된 상태로 내버려 두는 소외된 구조가 오늘날 노동운동의 근본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iv) 혁명적 정치에서의 다원성. 만약 다원성이 인간의 생활에서는 기정사실이고, 맑스주의가 살아 있는 이론으로 발전하기 위해 복수의 관점들과 경향들을 필요로 한다면, 사회사상의 진화에 조응하지 못한 채 굳어진 전통을 창조하는 것은 분명 공산주의 기획과 상충한다. 이처럼 다원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는 것은 컬트적 사고를 몰아내는 데 핵심적인데, 이 사고야 말로 조직이 권위주의적 형식으로 전락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들은 모두 고전 맑스주의 전통에 속한 조직이 가진 예시적인(pre-figurative)’ 성격을 둘러싸고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점거하라(Occupy)’ 활동가들이 자주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고,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에 걸 맞는 방식으로 지금부터 우리가 스스로를 조직화하려 애써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자칭 레닌주의자들은 자주 이 점을 비웃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작업하는 방식과 우리가 미래에 성취하고자 하는 것 사이에 극단적인 구별을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이러한 결론을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최근에 좌파가 겪은 경험들을 보면, 이런 태도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이것이 진정으로 억압받는 집단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가 되고자 하는 조직에게 어떤 특별한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지배적인 레닌주의적사고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재앙적일 수 있는지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모든 레닌주의들이 다 똑같지는 않고, 이 점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특히 심각한 관료적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방식에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이든 간에, 21세기에 활동할 혁명적 조직들이 다원성과 차이를 이전 세기에 그랬던 것보다 상당히 더 큰 수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는 개량주의를 거부하지만 전통적 급진좌파보다 더 개방적이고 덜 위계적인 노선에 입각하여 운영되는 급진적 흐름과의 일치점을 만들기 위한 길을 열어 준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이런 입장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쉬운 부분에 속한다. 우리가 쟁취하려고 하는 사회가 지닌 민주적 성격에 대해 진정으로 확신을 주기 위해서는 말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 행동에 반영되어야 하는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면서 진정으로 민주적인 기풍을 발전시키는 행동 말이다. 또한, 그런 접근법은 고전적인 결합 공식(merger formula)”, , 사회주의와 반자본주의 사상이 서발턴(subaltern: 하위·종속) 계급들의 투쟁과 융합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진정으로 적용하는데도 필수적이지만, 이런 과정이 바로 그 본성상 혼란스럽다는 점도 인식한다.

 

하지만 이 같은 혼란스러움 속에서 창의성과 상상력의 여지가 생기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조직과 전략, 전술을 실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대중운동의 형태로 등장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다원적이고 다차원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계급 위에 서서 그들의 의식성을 방어하는 지도부가 아니라, 참여한 개인들 스스로에 의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면 집단적이고 일관된 전략이 이 과정으로부터 나올 수 있고, 그것이 다원적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분명 보다 의미 있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1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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