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리
[내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관련해서 러시아 혁명의 의의와 교훈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재검토하려는 노력과 시도를 계속하고자 한다.
역사학자인 라스 리(Lars T. Lih)가 <“좌익” 공산주의> 책을 중심으로 볼셰비키와 사회민주주의와의 관계, ‘새로운 종류의 당’에 대한 기존 통설을 재해석한다. 레닌은 독일 사회민주당을 바람직한 모델로 생각했고, 그것과 대립되는 새로운 모델을 개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레닌주의’에 대한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레닌의 재발견: 맥락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책을 썼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links.org.au/node/2905
레닌의 소책자 <“좌익” 공산주의>(그가 마지막으로 쓴, 기사 이상의 분량이 되는 글)는 1920년 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즉 코민테른(Comintern) 제2차 대회의 대표단에게 배포하려는 목적으로 1920년 봄에 저술되었다. 이 당시의 특수한 상황들과 따로 떨어뜨려 놓아서는 레닌이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다.
코민테른은 1919년 봄에 세워졌다. 유럽 전체에 걸쳐 소련과 같은 방식의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엄청난 열광과 희망이 휩쓸던 시기였다.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제2차 대회가 그냥 각국 정당들끼리의 모임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모임이 될 거라는, 엄청나게 자신감 넘치는 예측을 했다.
그에 따라 그런 정당들에는 관심이 거의 모아지지 않았다. 트로츠키가 나중에 말했듯이 “혼란스럽고, 자생적인[초보적인(stikhiinyi)] 타격”이 “계속 솟아오르는 파도” 속에서 더 고조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 지도층의 의식이 더 명료해지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1~2년 정도의 과정을 거쳐 국가권력을 획득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고작 1년이 지난 후 유럽에서의 소비에트 혁명에 대한 희망은 (나중에야 드러났지만, 영원히) 퇴조했다. 그럼에도 1920년 봄에 코민테른 지도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새로운 혁명적 위기의 전야에 있다고 확신했다. 지노비예프는 자기가 1919년에 했던 ‘소비에트 혁명들이 1년 후에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을 언급한 후 이렇게 논평했다: ‘글쎄, 1년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럽에서의 혁명이 2년 또는 3년 후에 일어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잠깐 한숨 돌리게 하자!’ 하지만 제2차 대회의 낙관주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우울한 종류의 낙관주의였다.
사실 전망의 변화는, 다가오는 혁명적 승리를 그저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는 것 이상이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이제, 유럽에서 당분간은 혁명적 상황이 지나갔으며 그렇기 때문에 유익한 실천은 오직 다음 위기를 준비하는 것밖에 없는 단계로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이 새로운 진단은 대회에서 제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레닌의 소책자에서도 나타났다(물론 언제나 가능한 한 가장 긍정적인 해석과 함께).
1920년의 새로운 상황의 본질적인 특징은 자본가들이 공산주의자들을 감옥에 넣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레닌은 자본가들의 이러한 탄압을 겁에 질린 부르주아지의 발악이라고 제시했다.
“역사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부르주아지가 몸부림치고, 미친 듯 원한을 품고, 도에 지나친 짓을 하고,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볼셰비키에게 미리 보복하고, (인도, 헝가리, 독일 등에서) 어제와 오늘의 볼셰비키 수백, 수천, 수십만 명 이상을 죽이려고 기를 쓰도록 내버려두자. 그렇게 함으로써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운이 다한 모든 계급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요점은 “특정한 경우에, 특정한 나라들, 그리고 다소 짧은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가 [탄압에] 성공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거였다.
레닌은 또한 자기가 생각하기에 혁명적 상황(1917년 러시아에서 특히 잘 드러난)의 핵심 요소인 무언가가 부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것은 정상적인 엘리트들이 일종의 사회 전체적 위기에 압도당하여, 지배에 있어서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혁명적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더 핵심적인 지표는 “광범위한 대중”의 분위기였다. 그들은 (레닌이 안타까움을 안고 말하기를) “지금은 상당 부분, 무기력하고, 심드렁하고, 편협하고, 활기가 없으며 잠들어 있다.”
그래서 영국에 대한 레닌의 논평은 유럽 전체 상황에 대한 그의 태도를 요약해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진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얼마나 빨리 거기서 불타오를지, 어떤 직접적 원인이 그것을 깨우고, 불붙이며 지금은 잠들어 있는 매우 광범위한 대중을 투쟁 속으로 밀어넣는 데 가장 적합할지 알 수 없고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는 ‘네 말발굽 모두에 편자를 단단히 박으며’ 우리의 준비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비혁명적(오직 희망사항으로서만 예비 혁명적) 상황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고려해 볼 때, 초점은 더 이상 소비에트를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비혁명적 상황에서 혁명을 준비하는 작업의 수단으로서 당에 있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어떤 종류의 당인가?’ 그리고 레닌은 답한다. ‘전쟁 이전 제2인터내셔널의 실리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주의적인 정당들이 아니라 볼셰비키와 같은 당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당 사이의 수사적 대조가 소책자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그럼에도 레닌이 옹호하는 당의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수사적 대조를 보다 깊이 파 보아야 한다.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실제 모습에 대한 레닌의 거부는 그가 그러한 정당들의 이상을 거부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전쟁 이전 볼셰비즘에 대해 내가 쓴 글에서 나는 종종 “SPD 모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즉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의해 가장 잘 제시된 이상적인 당의 모습이다.
나는 레닌이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을 때 SPD 모델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몇몇 독자들은 이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글쎄, 비록 레닌이 1902년에는 SPD 모델에 영감을 받았을지 몰라도 그는 나중에 분명 SPD에 환멸을 느꼈고 이는 1914년 이후 그의 글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 대답은 레닌이 현실의 SPD를 거부한 이유가 바로, 그 당이 ‘SPD 모델’에 더 이상 부합하지 않게 됐기 때문일 가능성을 간과한다. 그리고 내 생각에 진실은 바로 거기에 있다.
더 나아가,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이라는 포괄적인 이름표는 이 모든 정당들 간에 있었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기회주의” 사이의 오래된 분열이라는 근본적 사실을 간과한다. 제2인터내셔널에서는 기회주의가 이겼고, 그래서 레닌은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인터내셔널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거부는 그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지지자라는 자신의 오랜 정체성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조적으로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에서 엄청난 노력을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는 우리가 항상 옹호해 왔던 견해를 이제 넓은, 세계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스케일로 확증했다. 즉 혁명적인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그런 당의 모습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확증하였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명백해지는 바와 같이, 레닌은 1909년 이후의 논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카우츠키 중 한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1909년까지는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 둘 다가 대변자로 인정받았던,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분파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이에 대해 보다 상세한 것은 아래에서 논의된, 카우츠키에 대한 레닌의 논평을 참고하라.)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소책자의 주요 초점이 “혁명적 상황에서의 당”이나 심지어 “권력을 잡은 당”(전쟁 이전이나 ‘평화 시절의’ 정당들과 대조를 강조해주는 주제들)조차도 아니며 바로 다름 아닌 “비혁명적 상황에서 준비 작업을 하는 당”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소책자가 비판하는 대상(“좌익 공산주의”)은 어떤 시기에든 원칙적으로 당을 거부하는 혁명적 좌파의 견해로 정의된다. 그렇게 보았을 때 소책자는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의 “당에 관한 원칙(the party principle)”에 대한 논쟁에 개입하며 쓰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목받지 못했던 이 논쟁을 살펴보면 <"좌익"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 맥락을 알 수 있다.
이 논쟁의 목적은 무정부주의적 좌파들에 반대하여 “당에 관한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부 오류만 스스로 깨우친다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소중한, 새로 들어온 사람들로 여겨졌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이후의 스탈린주의 역사가들이 쓴 것처럼 “새로운 종류의 당”을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에서 항상 이해되었던 대로의 당에 관한 원칙을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지노비예프는 “좌익”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쓰던 말을 특별히 조롱거리로 제시했다. “(그들이 쓰기를) 우리가 당을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당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노비예프에 따르면 이는 “생디칼리즘과 산업주의(industrialism)의 퇴행적 견해에 대한 지적인 항복선언”이었다. 지노비예프의 이 논평은 이 문제에 대한 대회의 공식 결의안에 들어갔다. 뭐든 간에 “새로운 종류의” 당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것으로 대회 기록을 남긴 것이다.
파울 레비(대회에 참가한 가장 중요한 비러시아인 대표였던 독일 공산주의자)는 당에 관한 원칙 문제 전체가 낡은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서유럽 노동계급의 다수가 수십 년 전에 해결하고 넘어간 문제에 대해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것”을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레비의 생색내기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이제 트로츠키가 이런 식으로 말했을 수 있다. “죄송합니다만 우리는 옛날의 그 똑같은 당의 이상을 옹호하고 있는 게 아니고, 새롭고 쇄신된 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비록 이론에 있어서 당에 관한 원칙을 이해한 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지만 대회에 온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적 대표단이 정신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더 혁명적이라고 하면서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적 대표단을 방어했다.
이 모든 요소들을 고려할 때, <"좌익" 공산주의>에서 레닌이 ‘당에 관한 원칙’을 선전하기 위해 “볼셰비즘”의 혁명적 명망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심이 생긴다. 물론 레닌은 외국인 동지들을 위해 볼셰비즘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 몇 페이지 넘는 분량을 할애한다. 하지만 그 역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셰비즘의 특히 러시아적인 측면이 빠져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즘은 무엇보다도 반(反)짜르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전략으로서 등장했다. 볼셰비키들에 따르면 이 혁명은 오직 사회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에 대해 계급적 지도자로서 역할을 할 때에만 성공할 것이었다. 소책자에서 레닌의 역사적 검토에는 이 시나리오 전체가 빠져 있다. 실제로 레닌은 유럽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는 시나리오를 삭제하기 위해 애쓰기까지 한다.
또한 레닌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 분파 투쟁의 복잡한 내용들을 외국인 동지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실제적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가 이 주제에 관심이 없다는 오해가 생길 정도다. 레닌은 “하나의 정치사상적 경향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정당으로서 볼셰비즘은 1903년부터 존재해왔다”고 쓴다. 마이크 맥네어(Mike Macnair)는 이 말과 비슷한 말들을, 1903년부터 볼셰비즘이 이미 독립적인 정당이었다는 역사적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해석한다.
반면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읽는다. ‘볼셰비즘은 1903년부터 존재해 왔는데, 처음에는 정치사상적 경향이었고 나중에는 독립적인 정당으로서 그러했다’고. 하지만 레닌이 그의 역사적 설명에서 “당”이라는 단어를 매우 모호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볼셰비키들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정치사상적 경향”으로부터 “정당”으로 이행했는지 알 수 없고, 그 점에서는 확실히 맥네어가 옳다.
이것은 레닌이 볼셰비즘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그냥 볼셰비키의 역사에서 이 측면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외국인 동지들에게, 기회주의자들을 숙청하고 분파에서 당의 지위로 이행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러시아 분파 투쟁의 상세한 사정에 대해 적절한 상을 그려주는 것이 짧은 지면에서는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중요한 논점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중요한 논점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SPD 모델”은 SPD 스스로가 자기 얼굴에 먹칠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당한 이유로 불신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과 함께 그 모델까지 거부하는 것은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특히 우리는 지금 아직은 혁명적이지 않은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이 논점을 전달하기 위해 레닌은 이 모델이 모두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이라고 인정하는 당 즉 볼셰비키에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SPD 모델”은 “볼셰비키 모델”이기도 한 것이다. 그 모델의 대표적인 실현체는 바뀌었다. 하지만 그 모델 자체를 거부한 것인가?
‘볼셰비즘’과 당에 관한 원칙
<"좌익" 공산주의> 전반에 걸쳐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을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비웃는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질문은 이것이다: 레닌은 이 정당들을 왜 거부하는 것인가? 당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거짓된 이상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당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스스로가 표방한 공식적인 당의 이상, 즉 레닌 자신이 이전에 명시적으로 공유했던 그 이상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한 당이기 때문인가? 나는 이 소책자를 꼼꼼하게 읽으면 명백히 두 번째라는 것이 확인된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을 하기 위해 우리는 그 공식적인 당의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실례를 무릅쓰고 1902년경의 레닌의 견해에 대한 나의 연구 <레닌 재발견(Lenin rediscovered)>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이 연구에서 나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당에 관한 이상을 묘사하기 위해 “에르푸르트적(Erfurtian)”이라는 용어를 고안해 냈다. 이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의 기초가 되는 모델이다.
에르푸르트는 1891년 독일 사회민주당원들이 법적 지위를 다시 얻고 나서 첫 당대회를 연 곳이자 매우 영향력 있는 ‘에르푸르트 강령’을 만들어 낸 곳이다. 카우츠키의 책 한 권 길이의 해설이 달린 <에르푸르트 강령>의 러시아 내 영향력은 웬만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 “에르푸르트적”이란 단어는 레닌과 같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점을 묘사하기에 적절한 단어로 보인다.
그러한 당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으로부터 온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권력을 잡아서 사회주의를 도입할 역사적 임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의 역사적 임무는 이러한 준비 작업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마르크스 자신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결사체를 통해 단결하고 지식으로 지도될” 수 있도록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당의 임무에 대한 이런 개괄적인 인식은 그것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전략과 기술의 문제를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에 대한 답이 나와야 했고, 여기서 페르디난드 라살레가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라살레는 스스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상시적인 캠페인(“합법적이고 평화롭지만 지치지 않고 그치지 않는 선동”)을 수행하는 데 헌신하는 정치조직의 개념을 생각해 냈다.
내 생각에 이 계획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혁신들 중 하나였고, 이걸 발전시키는 데 라살레가 한 핵심적인 역할은 부당하게 과소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논점에 대한 일탈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1860년대 라살레의 어조와 1920년대 레닌의 어조와의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라살레:
이 요구[보통선거권]를 매일 제기하고, 사회 현실에서 그것이 필요한 근거들을 입증하기 위해 신문을 설립하고 출판하라. 같은 재원을 갖고 같은 목적으로 소책자를 만들어 돌려라. 조합의 재원으로 활동가들에게 급여를 주고 이러한 자각을 나라 방방곡곡으로 퍼뜨리도록, 모든 노동자, 모든 가내 하인, 모든 농장 노동자의 심장을 이 외침으로 고동치게 하라. … 모든 작업장, 모든 마을, 모든 오두막집에서 이 외침을 선전하라. 도시 노동자들의 더 높은 식견과 교육이 넘쳐흘러서 농촌 노동자에게까지 미칠 수 있도록 하라. 모든 곳에서, 언제나 쉬지 않고, 그치지 않고 토론하고 논쟁하라.
레닌:
공산당들은 스스로의 슬로건을 내걸어야 한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조직되지 않고 철저히 억압받는 빈민의 도움을 받아 유인물을 뿌리고 노동자의 숙소, 농촌 프롤레타리아들과 외딴 마을의 농민들의 오두막을 찾아다녀야 한다. … 서민들이 우연히 모이는 자리에 끼어들어 학술적인 (그리고 의회에서처럼 격식을 차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결코 의회에서 “의석을 얻기 위해” 애써서는 안 되며, 어디서든 대중의 생각을 일깨우고 그들을 투쟁에 끌어들이고 부르주아지의 계산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구, 그들이 치르는 선거, 그들이 전 인민에게 하는 호소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부르주아 지배 하에서는) 선거기간이 아니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볼셰비즘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
<레닌 재발견>에서, 나는 ‘에르푸르트적’ 견해를 식별할 수 있는 8가지 특징의 체크리스트를 내놓은 바 있다. <"좌익" 공산주의>를 들고 이 리스트의 항목들을 재빨리 체크해 보자.
이 리스트의 첫 번째 항목은 “에르푸르트에 대한 충성도”, 즉 SPD 모델, 에르푸르트 강령과 에르푸르트적 견해의 권위 있는 해설자로서의 칼 카우츠키에 대한 명시적인 충성의 언급이다. 1920년 레닌과 카우츠키 간 극단적 적대감을 고려한다면 그런 명시적인 언급을 좀처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에르푸르트에 대한 충성도의 매우 현저한 증거가 실제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이던 시절의 카우츠키”에 대해서 레닌은 1902년 카우츠키의 글을 한 페이지 길이로 인용한 후 열정에 차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18년 전에 카우츠키는 얼마나 글을 잘 썼는가!” ‘카우츠키’라는 말을 상스러운 욕으로 생각하던 그런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레닌이 인용한 카우츠키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찾을 수 있다:
지금 불타오르고 있는 러시아의 혁명적 운동은 아마도, 우리 안에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무기력한 실리주의와 중도주의 정치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고 투쟁 의지와 우리의 원대한 이상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이 다시 한 번 밝은 빛으로 타오르도록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좌익" 공산주의> 전체를 요약할 때 여기서 한 단어라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1902년의 카우츠키가 이미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을, ‘그들 스스로의 이상으로부터 타락했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레닌의 소책자의 전체 제목을 살펴보자.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 부제에 대한 표준적인 번역은 어감에 있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소아병”이 멸시하는 비웃음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러시아어 원문 ‘detskaia bolezn’은 “소아기의 질병”을 의미하며 볼거리, 홍역 같은 것들을 지칭한다. 표준적 번역보다 레닌의 논지를 더 잘 전달하는 번역은 이것이다. <“좌익” 공산주의: 성장통의 증상>. 여기서, 당에 관한 원칙에 대한 무정부주의적이고 생디칼리즘적인 거부는, 급성장하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신이 거쳐 가는 실수로 취급된다.
지금 이 번역 문제를 끌고 오는 이유는 그 은유와 밑에 깔린 주장 모두가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카우츠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우츠키의 글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제대로 된 혁명 정신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인내심이 부족한 노동자들이 그 당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당에 관한 원칙도 거부할 것이라는 주장 역시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기회주의적 수정주의는 오래 전부터, 무정부주의적 환상에 일조하는 것으로 간주됐던 것이다.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대목에서 레닌은 시작부터 볼셰비즘에 있었던 “단단한 이론적 기반”을 자랑하는데, 이는 “놀라운 근면함과 꼼꼼함으로 이 분야에서의 유럽과 미국의 모든 말들을 '토씨 하나’까지 다 따름으로써” 갖추어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1914년 및 제2인터내셔널과의 결별 이후에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반 전체가 잘못되었고 근본적으로 개조되어야 함을 깨달았다’는 주장을 종종 듣는다.
글쎄, 만약 레닌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코민테른 대회 대표단에게 19세기 말의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수칙들을 의심해보도록 촉구할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낸 것은 매우 게으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기하긴커녕 레닌은 볼셰비키가 그러한 수칙들을 그토록 꼼꼼하게 소화해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 준다.
나의 에르푸르트 체크리스트의 다음 항목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하나의 격언과 같은 정의이다. 이 공식 뒤에 있는 생각은 오직 대중적 노동운동이 사회주의 강령을 받아들일 때만 사회주의가 쟁취될 수 있고 사회민주주의는 이러한 융합을 이끌어내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테마는 소책자에서, 노동자들이 어디에 있든(설사 “반동적인” 노조와 의회를 통해서만 그들과 접촉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력한 주장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 과업을 떠안지 않는 것은 “노동계급과 농민의 가장 후진층 및 대중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키고, 일깨우고, 새로운 삶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으로 구성되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역할”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마지막 코멘트는 체크리스트의 세 번째 항목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각성한 집단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사회주의적 메시지를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좌익” 공산주의>에서 레닌은 “지도자-당-계급-대중”이라는 공식 속에서 이 확장되는 집단의 범위를 정리한다. 그 메시지가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이라는 매우 넓은 집단까지, 특히 농민에까지 확산될 것이라는 단언과 확신은 내가 다른 곳에서 레닌의 평생에 걸친 “영웅적 시나리오”라고 불렀던 것의 핵심 특징이다.
리더십에 대한 레닌의 강조는 종종 그 스스로의 대단한 혁신으로 간주되지만 <“좌익” 공산주의>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런 주장이 “기초적이고 단순하고 간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레닌을 볼 수 있다. 지도자들의 필요성에 대해 반기를 드는 그의 반대자들은 “완전히 특별한 무엇인가를 새로 발명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똑똑해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 이것을 왜 횡설수설로, 새로운 볼라퓌크(Volapük; 에스페란토어처럼 발명된 언어)로 바꿀 필요가 있는가?”라고 이야기된다.
우리의 리스트에 있는 다음 항목은 ‘독립적이고 계급에 기반을 둔 정당의 이상’이다. 중앙집중화되고, 규율이 잡혀 있고, 강령적으로 순수한 정당이다. 확실히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내전이라는 난제와 국가 건설로 인해 중앙집중화와 규율을 새롭게 강조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던 가치를 쌓아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기회주의자들”을 쫓아내려는 레닌의 추진력 역시 특정한 메시지와 강령에 대한 헌신이라는 오래된 당 모델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 제2인터내셔널도 무정부주의자들을 숙청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기회주의적으로 “줏대 없는” 중심이 되 버렸다.
다음에 이어지는 세 항목은 정치적 목표와 연관된다: 단기적 목표로서의 정치적 자유, 모든 사람들을 위한 당의 지도력, 그리고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지도력이라는 “헤게모니” 전략. 이것들은 1920년의 레닌의 메시지와는 훨씬 더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내가 이 글에서는 다룰 수 없는 주제이다. 나의 체크리스트에서 ‘에르푸르트주의’를 정의하는 마지막 특징은 국제주의이며 이는 물론 이상으로서 남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1902)와 <“좌익” 공산주의>(1920)는 레닌이 걸어온 길의 거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다. 1902년 레닌은 러시아에 맞게 개조된 유럽 SPD 모델을 선전하고 있었다. 1920년 레닌은 유럽에 맞게 개조된 러시아 “볼셰비키” 모델을 선전하고 있었다. 두 모델들은 얼마나 다른가?
우리는 <“좌익” 공산주의>의 특별한 초점을 기억해야 한다. 레닌과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첫 번째로 유럽에 당장 혁명적 상황이 부재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 해야 할 일은 준비 작업이라는 점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보다 무정부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대표단들로 하여금 “당에 관한 원칙”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레닌과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로 하여금 당에 관한 원칙의 부분들 중 전쟁 이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사이에서 공통점들을 강조하도록 했다. 다루어지는 주제가 혁명적 상황에서의 당의 역할이었거나 소비에트 유형의 혁명 이후 당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소책자는 우리로 하여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간과되어 왔지만 기본적인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새로운, 전쟁 이후 시기에 옛날의 당의 이상을 보존했다는 것이다. 당으로 조직된 상시적 캠페인의 정신과 테크닉 모두가 새로운 공산당들에서 기본적인 것이 되었다. 물론 새로운 정당들은 옛 정당들에 비해 더 전투적이고, 덜 “출세주의적”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똑같은 내용의 본질적 과제와 딜레마에 직면해야만 했다: 비혁명적 상황에서 혁명적 정당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상시적 캠페인의 테크닉들을 살펴보면 아마 연속성이 더더욱 현저하게 보일 것이다. 라살레 이후에 한 세대 정도가 지난 후, 사회주의 정당들은 한 묶음의 혁신적 테크닉들을 고안해 냈다: 당이 통제하는 언론, 청원 캠페인, 집회, 정치적 파업, 슬로건과 배너를 갖고 하는 집단 거리 집회. 심지어 영어 단어 “시위”과 프랑스어 “시위(manifestation)”조차도 세기의 전환기 즈음에 현재의 정치적 의미를 획득했고, 사회주의 정당들과 분명히 연결된 단어들이었다. 급진좌파는 이런 테크닉들을 살려놓았고 이들은 오늘날에도 놀라울 정도로 변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어쩌면 소셜미디어가 상시적 캠페인의 테크닉에 있어서 진짜 진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레닌의 “볼셰비즘” 단어 사용에 대한 3부작 연재가 이렇게 끝이 났다. 명백히 “볼셰비즘”은 광범위한 것들을 지칭할 수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광범위한 것들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이다. 레닌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수사적 맥락에 달려 있었다. 1912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세계 내의 한정된 토론에서 “볼셰비즘”은 (레닌이 고집하기를) 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분파를 의미했다.
1917년 레닌은 “볼셰비즘”이 당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대중에 의해 널리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다소 불평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1920년에는 레닌 스스로가 “볼셰비즘”을 러시아 볼셰비즘에 고유했던 것을 강조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리던 것의 대표적 실현체로서 당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보인다.
“볼셰비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수사적 사용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격변기 동안 레닌의 기본 견해는 근본적인 점에서는 변화하지 않았다.
(기사 등록 2016.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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