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D. 팔머(BRYAN D. PALMER)
노동계급은 강탈의 다양한 형태에 의해 분열되어 왔지만, 노동계급의 강력함은 집단적인 단결과 연대의 힘에서 나온다. 이 글은 임금노동과 작업장을 중심으로 보는 기존 좌파들의 협소한 관점을 넘어서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계급과 계급투쟁을 분석하려 시도하고 있다. 비임금 노동 등을 분석해 온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도 연결되는 이런 포괄적인 관점이 맑스의 원래 취지에 더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불안정성을 주목하는 프레카리아트론도 이런 분석 속에 비판적으로 종합하고 있다. 이 글의 저자인 브라이언 D. 팔머는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고 주요 저서로 <혁명적 팀스터: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운전사 파업>(Revolutionary Teamsters: The Minneapolis Truckers’ Strikes of 1934)가 있다. 번역에 수고하고 친절한 역주까지 달아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www.leftforum.org/sites/default/files/panel_documents/PalmerSR2014.pdf
2011년 이집트 혁명에서 청년 실업자들
한 개인이 이처럼 무방비한 상태로 노동자가 된 것 그 자체가 역사의 산물이다.(칼 맑스)
1917년~21년, 1934년~37년, 그리고 1946~48년에 그토록 뚜렷하게 경험했던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동원, 그리고 계급의식의 형성은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Socialist Register>가 설립되던 1960년대 중반에도 매우 많이 발생하면서 재차 20세기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이 당시 영국에서는 상당수의 좌파들이 직장위원회 운동(shop steward movement)과 노동자 통제를 둘러싸고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 정권을 잡은 노동당의 전략을 소득정책(역자: 임금 상승폭을 줄임으로써 물가 상승을 억제하려는 정책)으로만 제한하려는 개량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회주의적 강령을 발전시키기 위한 열띤 토론도 벌어졌다. 당시 미국과 캐나다의 노동 부문에서 점증하던 불만들은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1960년대 중반에 벌어진 살쾡이 파업(역자: 노동조합 지도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아래로부터의 파업) 물결은 결국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이어 1970년대 초반에는 당시 확산일로에 있던 오하이오 주의 로즈타운(Lordstown)에 소재한 조립라인 단지 같은 제네럴 모터스 공장의 ‘블루 칼라 블루스(blue collar blues)’(역자: 1970년대 자동차 산업에서의 이른바 과학적 작업관리로 인한 노동자들의 소외와 불만, 투쟁을 의미한다) 현상을 둘러싼 논의가 많이 벌어졌다. 심지어 디트로이트에서는 혁명적 흑인 노동자 연맹(League of Revolutionary Black Workers)이 탄생하기도 했다.
벤 햄퍼(Ben Hamper)가 명명한 바 있는 ‘Rivethead’ 현상, 즉, 생산 현장에서의 대항계획(counter-planning)은 작업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개인주의적 동기보다는 날카로운 계급적 적대감에 영향을 받았다. (역자: 벤 햄퍼는 1970~80년대에 본인이 제네럴 모터스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Rivethead: Tales From the Assembly Line>이라는 책으로 썼던 사람으로, 1991년에 출판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대규모 연대 시위를 벌였고, 해협 건너편 영국에서는 1974년에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가 이끌던 보수당 정부가 무너졌다. 1970년대의 첫 4년 동안에 벌어진 계급투쟁 덕분에 반노조 법안이 철회되고, 임금동결 기도가 무산되었으며, 공장폐쇄에 맞선 전투적 공장점거 운동이 촉발되었다. 마침내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광산노동자 파업(1972년과 1974년)이 보수당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 파업들 덕분에 노동당은 재집권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노동당 지지자들 사이에선 ‘계급 권력의 근본적인 이동’이라는 전투적인 레토릭이 제기되면서 이에 대해 미온적인 노동당 지도부는 눈에 띄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처럼 1965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계급투쟁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지던 ‘장기호황’이 비틀거리며 끝나가고 있는 것이 명백했던 경제상황에서 노동 측이 취한 최후의 저항이었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 중반부터는 계급전쟁을 둘러싼 조건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전투에서 거둔 승리나 의회 밖에서 벌어진 전투적인 계급투쟁 동원에 참여한 수, 그리고 표면상으로는 ‘예외주의’의 보루라고 여겨진 미국에서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한때 35%까지 올라갔던, 노동조직을 구성한 비농업 노동력의 퍼센티지 증가폭이 느려지거나 정체되다가 결국은 시동을 멈춰버렸다.
이에 저항하는 다양한 정치조직들 (‘밀리턴트’ 경향과 무정부주의 공동체, 그리고 장차 ‘새로운 공산주의자들’의 전위가 되려는 사람들 등)이 생겨나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지만, 이내 이들 모두는 너무 자주 해체되어 버리곤 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템포는 느려지더니 전환기에 이르렀는데, 수 십 년이 흐른 뒤에는 노조 조직률이 그 이전 더 나았던 시기의 3분의 1로 떨어지게 된다.
적대 계급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자 대다수 노동계급 투사들이 지녔던 전투적인 활력이 사라졌고, 노동 부문(labor circles)이 지녔던 자신감도 흔들렸다. 1975년부터 지금까지 자본은 노동뿐만 아니라 모든 반대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던 일련의 위기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는가 하면, 그 과정에서 국가의 막대한 힘에 의존해 전례 없을 정도의 광폭한 물질적-이데올로기적 공격을 전개하여 서구 선진자본주의 경제내의 계급관계를 재구축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즉, 전체적인 수준에서 노동계급의 물질적 수준이 후퇴한 것. 그리고 한때 전투적이었던 노동조합 조직이 양보교섭 기구로 길들여진 것. 마지막으로 계급적 소속감을 박탈당했고, 미래는 불안정함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고용 전망 역시 불안정하다고 생각되는 젊은 노동자들 세대의 등장. 수 십 년에 걸친 긴축 정책 이후, 이 당시 노동계급이 겪은 연이은 패배는 누적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그 결과 노동계급은 외관상 싸울 능력을 너무 자주 박탈당했으며,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이전보다 더 몸을 사렸을 뿐 만 아니라, 경직된 관료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분명히 전 지구적 차원에서는 이러한 침체상태를 깨뜨릴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노동계급이 결집하고 있다는 징후들이 있다. 예컨대,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2억 명에 이르는 중국의 공장 노동자들, 광산 노동자들, 그리고 건설 노동자들이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계급’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이 그러한 거품으로부터 완전히 깨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지구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세계가 가능할지 여부를 판가름 지을 수도 있다.’
데이비스가 펼치는 낙관주의는 신선하긴 하지만, 이런 그의 주장은 모종의 비관주의와 상통할 수도 있다. 중국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계급의식과 전투성은 일련의 요소들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로는 중국이 과거의 계획경제 기반으로부터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보조를 맞추고 편입하면서, 스탈린주의-마오주의 국가의 용광로에서 만들어진 계급관계에 특징적인 노동계급의 주체적 한계가 포함된다.
어쨌든 개발도상국과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 형성에 내포된 성격은 확실히 오늘날 프롤레타리아가 겪고 있는 불안정성이 지닌 중요성을 강화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발표한 최근 추산에 따르면, 세계 산업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가 현재 생계를 위해 전적으로 임금노동에 의존하고 있는 약 14억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보다 더 많다고 한다. 이 예비군은 이제 약 2억 1천 8백만 명의 실업자들은 물론이고, 17억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숫자도 족히 넘어서게 되었다.
이 중 상당한 부분이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부불노동을 통해 얻어낸 것들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주변적인 가정경제 부문이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의 빈민가나 판자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된 기타 불법적인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 가운데 일부는 종종 비공식경제 부문에서 일하면서 근근이 먹고 사는데, 이 부문은 생계를 위해 임금노동과 유사한 것만큼이나 보잘 것 없고 자기착취적인 기업가 정신이라는 덫에 의존하는 곳이다.
당연히 이들의 고용상태는 불안정하다. 데이비스가 ‘세계적인 비공식 노동계급’이라고 명명한 이들(그에 따르면 ‘슬럼 인구와 중첩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사회경제적 계층)은 이제 숫자상으로는 10억이 넘어서, ‘지구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가장 유례가 없는 사회 계층이다.’ 하지만 불안정성(precariousness)이 그 자체로 분리되고 구별되는 계급 구성(formation)을 나타내는가?
만약 그렇다면 불안정 고용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영역들에 걸쳐 파편화되면서 특정한 계급들을 구성하게 되고, 이는 불가피하게 서로 다른 계급적 위치들을 점하게 될 것이며, 결국 다른 고용 부문들과 대치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최근에 세를 모으고 있는 이런 식의 생각이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주장과 상충될 뿐 만 아니라, 투쟁과 실천의 양 측면에서도 불가피하게 분열적이고 비생산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점이다.
사회적 계급(social class)으로서의 불안정성(precariousness)
불안정 노동자들을 새로운 계급 집단으로 선언하는 분석의 선두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투쟁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예를 들어 스탠딩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노동과 생활의 재구조화 속에서 ‘프레카리아트는 가장 앞줄에 있지만, 자신의 의제를 전면에 내세울 목소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 이들은 “끼어 있는 중간층”이나 “최하층 계급”이나 “보다 하층의 노동계급”이 아니다. 그에 반해 이들은 고유한 일련의 불안정한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의 고유한 일련의 요구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분화된 계급 구성으로 이루어진 위계질서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위계질서 속에서 새로운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는, 과거 공장에 기반한 축적이라는 낡고 단조로운 포드주의 체제와 부분적으로 노동조합의 보호 속에 관리되던 지속적인 노동관계로 정의되는 9시~5시 근무 시간 체계로서의 통상적인 고용 개념 모두를 영구히 파괴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안정적인 노동계급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착취와 억압의 사회관계를 변혁할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힘이라는 관념이 이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된 ‘계급으로부터의 후퇴’라는 주장의 이 새로운 버전이 주장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은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낡은 계급구조와 요인들이 새로운 것들로 대체되고 있는데, 이들의 계급 구성은 기존의 계급적 위치라는 구조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정의되며, 이들이 겪고 있는 수많은 불안정들도 이들 새롭고 불안정한 계급을 기존의 모든 노동계급 정체성의 기준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스탠딩은 현 사회의 하층 계급들을 뚜렷이 구분되는 요소들로 배열하는 계층 사다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육체노동자 계급과 실업자들, 그리고 완전히 주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 사회적 부적응자.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프레카리아트.
스탠딩의 베버/로이드 워너(역자: 윌리엄 로이드 워너는 미국의 사회구조를 연구한 기능주의 사회인류학자라고 한다) 식의 지적인 분류 체계를 따라가다 보면 정치적 함의가 사라지게 된다. 거기에는 죽은 것(finis)으로 치부된 어떤 과거가 내포한 가능성들이 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탠딩에 따르면 경직된 노동당 정치는 오늘날에는 그저 낡은 것, 지겨운 사회민주주의의 잔해에 불과하며, 죽어가는 노동운동과 노동당의 연계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 이상이 되지 못한다.
청년들이 주도하는 하나의 독립된 계급세력으로서 프레카리아트가 등장하면서, 스탠딩은 이들 프레카리아트가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같은 더 오래전에 쓰인 명령을 쓸모없는 장애물로 폐기시킬 수 있는 적합한 슬로건과 투쟁들을 창출하면서 새로운 운동(mobilization)의 정점에 오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레카리아트가 이제 진정으로 위험한 계급이자, 무질서를 위협하며, ‘데니즌들이여, 단결하라!’라는 플래카드 아래 연합한 유목민들의 집단이다. (역자: 1980년대부터 유럽 국가들은 일정기간 거주한 외국인에게 영주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데니즌[denizen]'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프레시안에 실린 기사 참고.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54085)
공공부문의 해체, 날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암시장 그리고 후한 연금 등의 국가보조금으로 살아가는 노년 세대에 불만을 나타내는 청년들과 연관된 세대 간의 긴장과 함께 프레카리아트는 독특하고 고유한 계급 실체라고 주장하면서, 그는 이 강력한 세력에게 유토피아주의로 선회하라고 촉구하면서, 동시에 생각이 제대로 박힌 모든 다문화주의 지지자들을 향해서는 마치 거의 자연 선택의 문제인 양, 이들의 깃발 아래 결집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프레카리아트는 희생자도 아니고, 악당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다.’라고 그는 썼다. ‘그들은 그저 많고 많은 우리들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의 위기, 수탈의 강화, 노동계급에게 제공되는 각종 지원 혜택의 해체, 그리고 임금노동 내에서 증대되는 불안정성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노동계급의 물질적 복리에 대한 공격(이것들 모두는 물론이고 그 외 것들이 다시 재개된 위로부터 계급전쟁을 구성한다)에 대해 스탠딩이 내놓는 답변은 순전히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다. 물론 그가 젊고,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새로운 저항운동의 기반으로 단순화하여 동일시한 것은 호소력이 있다.
이처럼 세계 노동자계급 가운데 점점 더 유동화 되어가는 부문이 느낄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경우, 결국 수탈당한 자들이 단결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을 파편화하게 된다. 그것은 계급의 한 분견대인 이들이 동맹을 맺어 반자본주의 세력들을 약화시킬 수도 있는 다른 모든 구성요소들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이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계급, 그 구성과 전략적 중요성이 최근에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했다는 주장은 그런 현상에 대한 창조적인 답변이라기보다는 파편화로 후퇴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또한 근본적으로 몰역사적인 주장이다. 노동이란 늘 빼앗길 위기 속에 처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삶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레카리아트 계급이라는 주장은 세상을 그저 해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세상을 바꾸고자하는 욕구를 고취했던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총체적인’ 거대서사를 거부하면서 1980년대 이래 주변성(marginality)을 둘러싼 연구에서 인기를 끌었던 ‘포스트 맑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비극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매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정확히 기존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너무나 경직화되어 과거 노동운동을 고무했던 바로 그 감수성을 되살리지 못하기 때문인데, 즉, ‘한 명이 다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거의 빈사 상태인 혁명적 좌파들이 새로운 조직과 당, 그리고 반대파 조직들을 만드는데 있어서 계급을 규합하는 디딤돌로 환영을 받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인민의 호민관’이자 광범위한 사회주의적 의제를 제시하면서 자본주의가 잠식해 들어오는 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조직들 말이다.
대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예처럼, 주변적인 부문에 속해 있거나 임시직 혹은 불완전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노동계급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40%에 육박)이 커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두 나라의 경우는 바로 이러한 현실이 조직적 차원의 주도권(Precari@s Inflexiveis 운동이 만들어진 예)으로 표현된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와 같이 불안정하게 고용된 사람들의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계급내의 모든 집단들이 이륙하는 강력한 단결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노동계급을 구성하는 모든 집단들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 속에서 단결해야 하고, 인류의 사회적 필요보다 자본의 편의를 위해 추진되는 분열을 거부하는 데 있어서 확고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급 구성으로서의 불안정성(precariousness as class formation)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역사유물론의 원래 이론적 기초로 되돌아가, 강탈(이것으로부터 임금관계에서의 모든 형태의 불확실성과 모든 형태의 불안정함이 흘러나온다)이 어느 정도까지 현재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계급(사회주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의제를 제기하는)의 물질적 기반이 되는지,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느 정도나 계급 구성의 근본적인 특성이었던 것인지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사회적 계급으로서의 강탈: 역사유물론의 기원
1873년에 나온 <자본론> 독일어 제2판의 맺음말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에 내재한 모순들은 현대 산업이 거치는, 그리고 그 정점이 일반적 공황인 주기적 순환을 통해 실제 부르주아에게 명확하게 알려진다. 그 공황은 비록 아직은 그 초기단계에 있지만 또다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전면성과 그 작용의 강도에 의해 졸부들의 머릿속까지 변증법을 새겨 넣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진보는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파괴를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맑스는 그룬트리세(Grundrisse)에서 ‘사회의 생산적 발전과 그 전까지 존재하던 생산관계 사이의 증대되는 양립불가능성은 첨예한 모순, 공황, 발작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라고 쓰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즉, ‘외부에 있는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 스스로의 자기보존의 조건으로 인한 자본의 폭력적인 파괴는 자본에게, 없어져서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생산에게 자리를 내주라는 충고가 주어지는 가장 강력한 형태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윤체제가 창조해 낸 ‘부를 담고 있기에는 너무 협소한’ 그 스스로의 파괴적인 논리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사회주의는 필수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면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이런 공황들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들을 강제로 파괴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들을 획득함과 동시에 옛 시장들을 더욱 철저히 착취한다. 즉 더 전면적이며 더 강력한 공황들을 준비하고, 그 공황들을 예방할 수단을 감소시키면서 말이다.
맑스가 상대적으로 적게 글을 쓴 주제인 계급 구성은 이처럼 그가 자본주의를 공황으로서 이해했다는 점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전 시기에 사회는 ‘여러 신분들과 갖가지 등급으로 나뉜 사회적 지위들, 예컨대 귀족(patricians), 기사, 평민(plebeians), 노예 ... 봉건 영주, 가신(vassals), 장인, 직인, 도제, 농노들’로 파편화되어 있었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계급 적대를 단순화했다.’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혁명적 추동력으로 인해 시민 사회는 ‘두 개의 커다란 적대적 진영들로, 서로 직접 대립하는 두 개의 커다란 계급들,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분열되었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이것은 자본주의하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가지는 기본적인 사회정치적 실상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들이(그 당시에 사람들은 이 단어를 복수형으로 표현했다) 국적, 종교, 도덕과 지위라는 정체성에 따라 파편화된 만큼, 전체 민중들 가운데 이전에 존재한 모든 계급들로부터 모인 프롤레타리아들이 결국에는 그들이 공통으로 갖지 못한 것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데 모여 단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바로 재산(property)이었다.
강탈로 일반화된(가끔은 몇 세대에 걸쳐) 초기의 수탈은 인류의 다수를 나면서부터 유산자들과 힘 있는 소수에 맞서는 이들로 만들었기에, 고되게 일하는 이들은 고립을 벗어나 결국 ‘혁명적 결합’으로 향할 것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는 그들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주장했던 것에 근본적인 것인데, 그것은 한때 단단했던 모든 것이 공기 중으로 녹아내리면서 산출되는 과정으로서, 사람들이 마침내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진짜 조건’을 ‘냉정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계급구성이라는 역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맑스와 엥겔스는 특정한 시점, 즉 그 이전에는 봉건적 관계가 해체되었고, 그 이후에는 점차로 구조화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강화되던 때로서, 이 당시엔 이전과는 다른 차별화된 노동시장이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확실히 계급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은 부득이하게 가치와 잉여의 추출, 그리고 축적 체제에 대해 다루게 되지만, 그보다 더 앞서며(그리고 항상 역사적으로 진행 중인) 이 모든 것들이 전제하고 있는 과정은 늘 수탈,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지속적인 강탈에 있다.
그러므로 <자본론>의 제23장에서 맑스는 단순재생산과 영주와 농노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면서, ‘만일 영주가 어느 날 갑자기 농민의 경지, 역축, 종자, 한마디로 말해 생산수단을 수탈한다면, 그때부터 농민은 자신의 노동력을 영주에게 판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한편,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을 다룬 제25장에서는 프레데릭 모턴 이든 경(Sir Fredrick Morton Eden)의 책 <빈민의 상태, 다시 말해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1797)를 비판하며 인용했다. 산업 생산을 통제하며 부상하고 있던 자본가들이 ‘문명과 질서’ 덕분에 노동으로부터 면제되었다는 이든의 관점에 맞서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력은 자본의 가치증식 수단으로 끊임없이 자본에 결합되어야 하며, 노동력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본에 대한 노동력의 예속은 오직 스스로를 여러 명의 서로 다른 개별 자본가들에게 판다는 사실로 인해서만 은폐되는데, 이러한 노동력의 재생산은 사실 자본 자체의 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이기도 하다.
맑스는 ‘[생활수단에 대한] 소유가 잘 보장되고 있는 곳에서는 빈곤없이 생활하기보다 화폐 없이 생활하기가 쉬울 것이다. 사실 누가 노동을 하겠는가?’라고 지적한 18세기의 풍자가이자 철학자이며 정치경제학자인 베르나르 드 맨더빌(Bernard de Mandeville)을 인용했다. 그렇다면 강탈은 축적을 명령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화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강탈/축적/공황/혼란으로 이루어지는 악순환을 끝장낼 수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악순환을 부분적으로나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한 차례 폭력적 강탈을 해야만 할 것이다.
사회적 계급으로서의 강탈: 과거에도 불안정했다
이든이 모은 증거들과 다른 자료들에 바탕을 둔 맑스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화는 역사적으로 생성되어 온 것으로, 고대에는 작은 물줄기로 시작되었지만, 17세기에는 하나의 물결로 성장한 것이었다.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1640년대에 땅 파는 사람들(Digger)과 수평파(Leveller) 운동이라는 돌격분대를 창출해 낸 방랑 대중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들 ‘과잉 인구’를 통해 자본가계급과 결합될 수 있는 잉여가 만들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숲을 무단으로 점유하는 사람들, 떠돌이 장인들, 건설 노동자들, 일거리를 찾고 있는 실업자 남녀들, 유랑극단들과 마술사들, 행상인들과 돌팔이 의사들, 떠돌이들, 부랑자들의 들끓는 이동: 특히 대도시에 모여 들었을 뿐 아니라, 교구 조직의 통제를 벗어나 새롭게 점유된 곳이나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많은 구 점유지도 발판으로 삼았다.
이러한 ‘지하 세계’로부터 선원들과 군인들이 모집되었고, 신대륙(the New World)을 채운 이주민 정착지도 만들어졌다. 19세기 중반까지 이처럼 쉴 새 없이 진행되는 격렬한 강탈 과정에서 계급이 구성되었고,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던 인클로저와 전쟁, 수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기술적 배제( technological displacement), 그리고 기타 수탈과 배제 등으로 인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사실은 당시에 그저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었던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을 마치 성숙한 과정으로 보았던 것에 대해 맑스와 엥겔스는 아마도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계급 구성은 공고화하게 되어, 확실히 고착화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극도로 불균등한 프로젝트였고, ‘안정화’와 비슷한 그 어떤 것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강탈과정은 항상 무질서했다. 즉, 낡은 것이 새로운 것과 각축을 벌였고, 다양한 노동 계층들이 외관상 모순적인 위치들로 구조화되었으며, 그들의 호칭은 귀족적인 것(the black-coated worker, 검은 코트를 입은 노동자)에서 경멸적인 것(위험한 계급들이나 찌꺼기 등)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면에서 끊이지 않는 측면, 즉 공황으로 인한 강력한 붕괴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계급 형성과 재형성의 경험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역주 - the black-coated worker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20631&cid=42121&categoryId=42121)
이렇듯 강탈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인식된 노동계급은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2013년에 출판 50주년을 맞은 E.P. Thompson의 기념비적인 저작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도 중심적이었다. 실제로 톰슨은 이전에는 분화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서 다양한 종류의 직업 노동으로 진화했던 수많은 취업인구가 투쟁과 공황을 거치면서 어떻게 하나의 노동계급이 되었는지를 강조함으로써 1790-1830년대 도가니 속에서 형성 중이던 영국의 노동계급을 탐구했다.
그들은 헨리 메이휴(Henry Mayhew)의 저작에 의존했는데, 그가 런던의 노동자들과 빈민들에 대해 다뤘던 책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관련된 언급을 하던 시기와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메이휴는 그의 책들을 통해 자본주의 고용 시장이 얼마나 제멋대로 구조화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고용시장은 계절에 따라서만 할 수 있는 일에 의존하거나 유행이나 우연에 영향을 받았는데, 임금이 싼 업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일들은 날림으로 이루어지거나 초과노동이 만연하고 있었다.
또한 이런 일들은 임금을 억제할 목적으로 여성과 아동이 특정 수작업에 투입되면서 발생하는 노동희석([역자] the dilution of skills - 숙련이 필요 없는 일에 임시로 비숙련공이 투입되는 일)현상으로 인해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기계와 관리상의 혁신으로 인해 재구조화되었다. 토지에 기반을 둔 관계가 해체되고 마을 수공업이 파괴되면서 대도시로 몰려든 임금노동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 극심한 한계 속에서 요동치는 노동시장의 비인간적 규율과 싸워야 했다.
따라서 메이휴는 안정된 고용은 대략 150만 노동자들에게만 가능했을 뿐이고, 추가적인 150만 명은 반일제 일자리만 얻을 수 있었고, 나머지 150만 명은 완전히 실업상태이거나 특정한 일을 자기 전문이라고 여겼던 누군가를 대체하는 경우에만 가끔씩 일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한 묶음의 불연속적인 현상들”을 “노동계급들”이라고 묶어서 지칭하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톰슨은 산업혁명과 유산자들이 주도한 반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의 노동계급이라고 주장했다.
두 역사적 과정들 모두 부르주아지에 의해 강제되거나 실제로 부르주아지가 시작한 것이었으며, 둘 다 재산을 강탈당하거나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의존하거나 그런 사람들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계급은 “무척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달성한 성취도에 따른 … 이해관계의 동질성”을 이루며, 이 모든 요소들을 “일종의 기계”처럼 만들려는 시도에 맞서 저항하면서 만들어졌다.
만약 계급이 숱한 강탈의 경험을 겪은 다양한 부문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면, 맑스와 엥겔스의 설명과 톰슨의 설명은 모두 하나로 수렴된다. 즉, 계급 구조를 이루는 이 모든 층들은 하나로 합쳐지는데, 이는 그들이 절대적인 동일성에서 왔거나 절대적인 동일성 속에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의 삶의 경로를 결정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유사한 과정들과 결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풍부한 역사적 사료들에서도 드러났고, 톰슨의 책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도 원산업화(proto-industrialization)와 하청인들(outworkers), 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쇠퇴하는 수공업 기술자들, ‘교회와 국왕파(Church and King mobs)’(역자: Oxford Dictionaries에 따르면 18세기 말의 反자코뱅을 표방한 왕당파 반동들의 집단이라고 한다), 기계파괴자들의 비밀스런 단체들, ‘사탄의 요새들(Satan’s Strongholds)’에 사는 이들과 대도시 장인들을 다룬 설명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요점은 계급 경험의 파편화라는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계급은 언제나 내부적 분화, 불안(insecurity), 그리고 불안정성(precariousness)을 수반해 왔다. 역사적으로 불안정성을 계급 구성과 분리할 수 없듯이, 겉보기에 지속적인 고용과 안정적인 봉급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일자리와 임금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쟁탈전을 벌여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는 듯한 분화현상은 변함없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수탈이란 매우 이질적인 경험이 되는 셈인데, 그 누구도 다른 사람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강탈당할 수 없고, 그러한 물질적 소외 과정을 다른 사람과 정확히 똑같이 겪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탈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화를 규정한다. 즉, 강탈은 고용 수준, 임금 수준, 지위, 임금을 받는 일자리인가 혹은 무보수의 정도를 막론하고 모든 노동자들에게 새겨진 은유적인 카인의 표식이다.
이는 많은 맑스주의 분석의 전제가 되어 왔는데, 예컨대 1960년대 미국 노동계급을 다룬 마틴 글레이버만(Martin Glaberman)의 (확실히 젠더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글 제목 ‘그의 보수가 높든 낮든(Be His Payment High or Low)’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수십 년 전에 글레이버만은 ‘산업이 교체되는 과정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동화된 기계에 의해 대체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쫓겨나고, 다른 사람들이 이동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산업노동계급과 노동과정의 재조직화되어 유입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20세기에 벌어진 노동의 질 저하에 대해 해리 브레이버만(Harry Braverman)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끊임없는 재구조화였다. 물론 브레이버만이 말한 대로 생산관계에서의 변화 과정은 독점의 시대인 20세기에 강화되긴 했지만, 이미 그 이전 수십 년 동안 존재했던 것이었다. 이는 심지어 아담 스미스가 말한 ‘도덕 경제’의 의미가 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초기 자본가들에게조차도 놀라운 것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의 한 인간적인 고용주는 ‘그가 존재한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 즉 10만 명의 직공들이 15만 명 몫의 일을 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그의 책을 읽는 것은 헛수고다’라고 썼다. 그는 ‘매뉴팩처에서 거두는 이윤은 가난한 사람들이 힘들게 번 수입을 다른 경쟁 고용주들보다 더 쥐어 짜내는데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몰락하고 말았다. 자본주의적 공황이 새로운 계급 구성을 둘러싼 모든 종류의 이론적 사색들이 출발한 근원지가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자본주의 공황으로 인해 부르주아지들이 새로운 계급투쟁을 시작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이로 인해 노동계급은 이에 맞서 종종 새로운 전술과 전략적 재평가를 강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현대 노동에 나타나는 불안정성이 극적일 만큼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확고한 계급론 모두를 재검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몰역사적인 주장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오늘날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계급이 구성되는 추세에서 나타나는 불안정성의 정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강탈당한 자들끼리의 단결이 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개념과 정치로부터 단절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인류를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잉여, 불안정성 그리고 빈곤화
안정적인 노동계급 정체성이냐, 아니면 불안정한 정체성이냐하는 양자택일, 즉 하나는 프롤레타리아라고 지칭되고 다른 하나는 프레카리아트라고 정의되는 것은 계급적 차이의 본질적인 특징이 아니다. 그보단 강탈 그 자체가 본질의 깊은 구조상 근본적인 것이고, 역사적으로 착취와 억압을 끊임없이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해 왔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적 풍요가 ‘노동계급의 다른 일부가 과잉노동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실업 상태에 놓이게 된 다른 노동 계급의 일부가 지닌 불만’을 전제로 하며, ‘사회적 축적이 진전되는 것에 상응하는 규모로 산업예비군의 생산’을 가속화하기도 한다고 언급하면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모든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임금노동을 받느냐의 여부보다는, 맑스가 ‘유동적, 잠재적, 정체적’이라고 이름붙인 과잉인구의 다양한 형태들에 따라서 범주화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이 노동의 축적이기는 하지만, 맬서스적인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늘어나는 것이 반드시 노동계급 전체가 임금노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걸 뜻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최하층은 구호 빈민의 영역이다. … 구호 빈민의 수는 공황 때마다 증가한다. … 구호 빈민은 현역 노동자군의 폐인수용소이며 산업 예비군의 고정 구성원이다. 구호 빈민이 양산되면 상대적 과잉인구도 양산되며, 전자는 필연적으로 후자로 이어진다. 구호 빈민은 상대적 과잉인구와 함께 부의 자본주의적 생산 및 발전의 전제조건을 이룬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별 지출 비용(faux frais)가운데 일부를 이룬다.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와 로버트 W. 맥체스니(Robert W. McChesney) 그리고 R. 자밀 조나(R. Jamil Jonna)가 최근에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에 지적했다시피, 맑스는 현대 제국주의와 전 세계적 규모로 가차 없이 진행 중인 자본 축적이 계급 구성에서 전 지구적 산업예비군의 양적 확대와 질적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러한 시각은 그가 살던 시대를 한참 앞선 것이었다.
자본은 축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자양분을 이 거대한 산업 예비군으로부터 추출하는데, 이 거대한 산업 예비군은 이제 규모가 수 십 억 명이 달하게 되었으며, 맑스가 예측했다시피, 강탈당한 이들이 겪는 궁핍함의 차원 역시도 그만큼 확대되었다. 얀 브레먼(Jan Breman)은 인도에서 벌어진 착취와 수탈과 배제에 대해 쓰면서, ‘노동과정에 편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예비군이 영구적으로 필요 없는 과잉 집단이자 과중한 짐으로 낙인찍혀 지금은 물론 미래에도 경제와 사회에 편입될 수 없게 될 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이러한 변형이야말로 세계 자본주의가 처한 진정한 위기라고 본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계급 구성에 관한 역사 기록들을 분석적으로 다룰 때는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화를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마이클 데닝(Michael Denning)이 노동자들의 무보수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마이크 데이비스가 슬럼화에 대해 따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역사학자들은 노동에 관한 연구를 하는데 있어 자본의 승인 논리를 그 중심에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급은 임금을 받는 정도에 비례해서만 가시성을 얻고 정치적 유의미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탈은 늘 진행되고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수탈이 이루어지는 격심한 고통 속에서도 일자리는, 그것이 보수를 지불받든 아니든, 혹은 어떤 식으로 보수를 지불받든 상관없이 인류의 절대 다수에게 꼭 필요하다. 실제로 페미니스트들이 부불 재생산노동을 설명하면서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처럼, 계급 구성을 오직 임금에 의해서만 경계 지어지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불가피하게 모든 방면에서 우리의 시야를 좁히게 된다.
불안정성과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적 소속(affiliation)을 둘러싼 정치학
하지만 독립된 사회적 계급으로서 프레카리아트에 접근하는 스탠딩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단들에서도, 비록 겉보기에는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맑스가 불안정성(precariousness)에 대해 대놓고 경멸한 것에 대해선 모두들 관심이 있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맑스의 논평들에서 도드라지듯이 말이다. 물론, 맑스가 빅토리아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글을 쓰면서, 종종 강탈당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변화 되었으며, 많은 경우 범죄화된 하위문화에 대해 도덕주의적 판단에 빠졌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로 이루어진 중심부 자본주의 경제에서 멀어질수록 많은 경우, 그만큼 더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주변화된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위문화들을 중심으로 계급 구성도 구조화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진다. 즉, 영세 자영농 경제(penny capitalism) 전후로의 이행과 범죄, 그리고 소농의 생계(peasant subsistence)와 일시적 프롤레타리아화가 한데 엉켜 혼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전 세계적 규모에서 이루어지는 계급 구성,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황이 지닌 중요성에 관심 있는 역사학자들은, 맑스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며 폄하하곤 했던 노동 계급내의 한 계층을 언급한 논평들에서 엿보이는 편견과 불가피하게 직면했다. 물론 맑스(와 엥겔스)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언급했던 논평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처럼 욕설에 가까운 언급이 특정한 맥락 속에 위치해 있으며, 계급 용어상으로 강탈당한 자들 가운데 일부를 꼭 다른 이들로부터 분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맑스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를 엄격하게 정의한 분석적 범주보다는 은유적인 비유로 만들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맑스가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로부터 유리된 채 범죄자 취급받는 자들과 빈곤한 자들을 프롤레타리아트에서 배제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주장은 아마도 과장일 것이다. 실제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 전체를 꼼꼼하게 읽어 보면 다음의 네 가지가 드러난다.
첫 번째로, 맑스와 엥겔스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를 강탈당한 이들 가운데 분명 반동과 계급적 특권을 복원시키려는 계획에 지지를 보내던 부문을 경멸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던 1840년대의 정치 관련 저작들에서조차도, 룸펜이라는 접두사는 고정된 계급적 위치라기보다는 타락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는 맑스가 보나파르트 본인에 대해 룸펜프롤레타리아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을 봐도 명백하다. 보나파르트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맑스의 주된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맑스는 보나파르트를 두고 고귀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수장’, ‘온갖 종류의 계급적 쓰레기들에게 인정받는 불한당이자, 그러한 집단들에게만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라며 은유적인 방식으로 공격했다. 한 문예 이론가는 ‘맑스는 1848년부터 1852년까지의 프랑스 역사(혁명이 후퇴하던)를 막히고 있던 변기와 가장 닮은 것으로 경험했음이 틀림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오늘날의 학자들이 룸펜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용어가 만들어진 과정을 평가하는 방식을 완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용어는 정말이지 혁명적 가능성이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사라지던 당시에 세상에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할 드레이퍼(Hal Draper)가 제시했듯이, 맑스가 접두사 ‘룸펜’을 사용할 때, 그것은 어떤 사람이나 사회 집단을 악당 같다거나 역겹다고 칭하는 방식이었고, 따라서 나는 이 용어가 분석에 입각해 어떤 실체를 엄격하게 분류한 것이라기보다는 독설을 위한 형용사였다고 생각한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금융 귀족의 특정한 유형, 즉, 부르주아 사회의 방탕한 계층에 대해 맑스가 조롱했을 때 드러났는데, 그에 따르면, 이들은 남들 위에서 명령하는 기생적인 지위에 올라 남들이 생산한 부를 게걸스럽게 먹고 ‘해롭고 방종한 식욕을 무절제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한 귀족 계층의 특징은 쾌락이 방탕(crapuleux)으로 발전하는 것인데, 여기서 ‘금과 먼지와 피가 합류한다.’ 맑스가 보기에 이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꼭대기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활한 것과 다름없었다.’
두 번째로, 맑스가 이들을 이렇게 낮게 평가했던 것은 1848~51년에 노동계급 혁명이 패배하면서 발생한 격분 속에서 강탈당한 자들 가운데 일부가 어떻게 해서 돈과 권력의 특권에 맞서기보다는 그것들을 보위하는 방식으로 투쟁하려 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서였단 점을 봐야 한다. 그렇게 보면,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문제에 접근할 때 고려해야할 핵심적인 쟁점은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매 시기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프란츠 파농은 ‘포주들과 불량배들, 실업자들, 그리고 경범죄자들’을 혁명의 분견대로 인정했는데, 이는 맑스가 이들에 대해 덜 호의적으로 접근했던 것과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파농조차도 식민지 당국이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무지와 몰이해를 이용하는 데 극도로 능숙’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파농은 혁명적 활동가들이 룸펜프롤레타리아트들을 조직화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반동의 군대와 ‘나란히 용병으로 싸우게 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고, 정확히 이런 일이 일어났던 곳으로 앙골라와 콩고의 경우를 사례로 들었다.
세 번째로, 심지어 맑스가 1848~51년 프랑스와 관련된 글에서처럼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반동 세력으로 비난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는 강탈당한 자들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분리된 고유한 계급으로 행동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그 방향으로 이끌린 개인들일 수 있다고 시사하고 있다. 맑스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임시정부가 편성한 이동 경비대 24개 대대가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어쨌든) ‘상당 부분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 속했던’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청년들로 구성되었다고 썼을 때, 그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필요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고 말문을 열면서 당시의 역사적 사태 발전을 이해하려고 했다.
1848년에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노동계급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장애물’들을 만들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실패하자 ‘그 결과 출구는 하나 밖에 없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부분을 앞세워 다른 부분에 맞서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 맑스가 룸펜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서로 화해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똑같이 강탈당하고 있으며 서로 연결된 계급의 일부로 생각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결론이다.
하지만 계급적 위치/이해관계에 관한 의식은 결코 단순히 저절로 주어지는 기정 사실(a fait accompli)같은 것은 아니다. 이런 의식은 구축되어야 하고, 사회주의자들을 탄생시켜서 사회주의를 창출하고자 하는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치열한 투쟁의 시기에는 사람들이 계급 전선을 가로질러 자기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맞붙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시기에 이들을 향한 적대적인 언어는, ‘파업 배반자(scab)’라는 지칭에서 드러나듯이, 종종 상당히 날카롭다.
네 번째로, 맑스가 ‘노동’에 대한 결정적인 책을 쓰면서 룸펜 프롤레타리아화의 의미에 대해 명료하진 않지만 최소한 다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맑스의 관점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확실히 중요하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그의 평가는 분명 소위 ‘12월 10일 협회’(the so-called Society of December 10)가 진두지휘한 보나파르트의 쿠테타와 함께 최하점에 도달했다. 맑스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부르주아지 가운데 파멸된 모험주의적인 분파 … 떠돌아다니는 자들, 퇴역 군인들, 출소한 상습 전과자, 탈출한 갤리선 노예들, 협잡꾼들, 사기꾼들, 부랑자들, 소매치기들, 야바위꾼들, 도박꾼들, 포주들(maquereaus), 짐꾼들, 글쟁이들, 거리 악사들, 넝마주이들, 칼 가는 사람들, 땜장이들, 거지들 … 짧게 말하면 프랑스어에서는 la boheme(집시, 방랑자)이라고 부르는, 여기저기로 흩어진 무정형의 파편화된 군중
이러한 혐오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1848~51년 당시 맑스가 즉각적으로 보여준 정치적 실망감으로부터 다소 거리감을 회복한 초기와 후기의 저작들 가운데는 보다 분석적인 설명을 보여주는 구절들이 등장한다.
피터 헤인즈(Peter Haynes)가 시사했듯이, 맑스는 빈곤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들고 처벌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본주의에 의해 이들이 어떻게 희생양이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후기 저작에서 맑스는 토마스 모어에게 직접적으로 의존하면서, 예컨대 <자본론>을 쓰는 과정에서 모어가 쓴 <유토피아(Utopia)>를 활용했는데, 모어는 강탈당한 자들을 두고 ‘너무나 절실한 나머지 처음에는 절도를 범하다가, 그 다음에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맑스와 엥겔스가 이후에 ‘최하층 계급’이라고 불릴 이들에 대해 쓸 때, 당대에 사용된 경멸적인 언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와 엥겔스 역시도 자신들이 사회주의를 위한 희망의 근거로 삼았던 충실한 프롤레타리아들과 이 ‘나머지 잔류물(residuum)’들이 어떻게 상호 호혜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모르고 있지 않았다.
엥겔스는 <1844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상당히 많은 도덕주의적 비난을 가하고 있는데, 특히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들과 관련하여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짓밟힌 부문이 노동계급으로부터 구제불능일 정도로 분리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1844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1892년 판 서문에서 엥겔스는 과거 룸펜프롤레타리아화의 요새였던 런던의 이스트 엔드(East End)에서조차도 상황이 나아지고 있을 정도로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진전을 보이고 있다며 상당히 낙관적으로 바라봤다. “그 거대한 비참함의 소굴은 더 이상 6년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이 정체된 고인 물이 아니.”며, 계속해서 “무기력한 절망을 떨쳐내고, 다시 생명력을 찾았으며, 신노조주의(New Unionism), 다시 말해 ‘비숙련’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대중이 조직화되는 근거지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마이클 대닝(Michael Denning)이 최근에 지적했듯이, 맑스는 다음과 같은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정치경제학은 … 실업자나 노동자(workingman)가 이런 노동관계 외부에 있는 한 그를 인식하지 못한다. 건달, 사기꾼, 거지, 실업자, 기아에 시달리고 비참한 범죄자인 노동자들 - 이들은 정치경제학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의사, 판사, 묏자리 파는 사람, 그리고 집달관의 눈에만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은 정치경제학 밖에 존재하는 유령들인 것이다.
물론 맑스는 강탈당한 자들에게 가해지던 일들에 대해 상당한 동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구호 빈민들을 대하는 야만성’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나 ‘빈곤을 처벌하는 곳’이라고 그가 이름붙인 ‘구빈원에서 이들이 노예로 살며 겪고 있는 날로 커지는 처참함’을 인식했다는 것에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1842~1843년 목재 절도와 관련된 법을 둘러싸고 독일에서 벌어진 논쟁에 대해 <라인 신문 Rheinische Zeitung>에 쓴 기사를 통해 충분히 드러난 것은 맑스가 자본주의의 사회-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강탈당한 빈민들이 생존하는데 그 자체로 필수적인 행동들이 더 폭넓게 범죄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강탈당한 자들은 처음에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다음에는 시민사회의 제도화된 보호로부터 내쫓기는 것이다.
맑스가 보기에 국가 형성은 이런 기초 위에서 진행되었다. 즉, 그러한 국가 권력의 목표에 부응하는 지배계급의 권력과 제도들을 통해, 법은 강탈을 확장시키는 추동력이 되며, 통치기구들은 기득권의 무력으로 전환된다. 1970년대 중반에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가 지적했듯이, 목재 절도에 관해 맑스가 쓴 글은 맑스주의가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이해하고 있는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분석하면서 계급 구성 논의로 도약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한다. 이 용어는 ‘역사적 구체성(historical specification)이라는 원칙’과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 분석에서 핵심적일 때만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숲에 저절로 쓰러진 나무에 대한 사용권이라는 쟁점을 다루면서, 맑스는 ‘부자들이 거리에서 나눠주는 빈민 구호품을 두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맞지 않은 것처럼, 그것은 자연이라는 구호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고, 보편적인 ‘빈민의 관습법적 권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 계급 형성의 도가니에서는 이런 것 가운데 아무 것도 실현되지 않았기에, 맑스는 국가가 재산권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화를 이중적 과정으로 다루었는데, ‘자유로움’ 과 동시에 범죄화된(outlawed) 노동력의 창조가 그것이다. 하지만 일부 도둑들이 명예심이 있다고 해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경계 밖에 위치하게 된 사람들 모두가 그런 존경할 만한 자질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맑스는 개과천선할 수 없을 지경으로 내몰린 사회의 일부 계층을 낭만화하는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극단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된 강탈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가 충분히 정치적으로 퇴보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이들이 반동의 부속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이 문제는 영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이자 전국 실업자 운동(National Unemployed Workers’ Movement)의 조직자이기도 했던 월 해빙턴(Wal Hannington)과 같은 레프트 북 클럽(Left Book Club)의 작가들과 활동가들이 ‘실업자들 사이에서 파시즘의 위험이 존재하는가?’라며 걱정스레 묻던 1930년대까지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었다.
룸펜프롤레타리아화를 둘러싼 논의는 불안정성(precariousness)과 마찬가지로 강탈당한 자들 내부에서 지위가 분화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노동계급의 다양한 부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정치학이라는 지평에서 의식적 동일성이 가지는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수탈당한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탐욕스런 개인주의라는 지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체계로 편입되는 탓에 이들을 단결시키기가 어렵다고 해서, 이것이 강탈당한 자들 내의 여러 층위들을 고유한 계급들로 분리시키는 물질적 기반이 될 수는 없다.
계급정치와 불안정성
수탈 그 자체가 인류의 진전을 가져다 줄 실천들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수탈, 착취와 억압이 아닌 모든 사람의 편익과 혜택을 목적으로 한 집단적 생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질서를 실현하고, 의미 있는 진보를 위한 유일한 가능성을 이룰 수 있는 투쟁 속에서 강탈당한 자들을 단결시키는 과정에서 성취할 수 있다.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강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공황으로 점철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수탈을 강화하고 궁핍화의 경계를 확장한다. 이처럼 점점 더 빠르게 가속화되는 물질적 소외에 맞서 집단적 대응을 조직화해야 할 필요성이 가장 시급하지만, 오늘날 유행하는 분석적 사상은 노동계급을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전세계 모든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호민관으로 만들기 보다는 모든 수준에서(in all its gradations) 노동계급을 무력화하는 파편화와 분열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가장 대중적이자 명확하게 그런 사상을 표명한 사람은 가이 스탠딩인데, 그는 프레카리아트라는 한 무리의 독특한 계급 세력을 강조한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 구성을 다룰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세계적 프롤레타리아트 형성 과정에서 주변화가 지닌 중요성을 인지한 급진적인 수정주의자들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단절시키고, 평등한 포괄성(inclusivity)을 전제로 한 계급의식을 만들지 못한 맑스의 실패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맑스가 내놓은 통찰력 가운데 일부를 외면하였다.
이러한 발전들은 지금 시점에서는 주로 이론적 논의와 학문적 논문들에 국한되어 있지만, 계급정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실제 현실에서는 노동계급 내 각 부분들의 구조적 그리고 제도적 분리가 심화되는 것과 상응한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조직할 능력의 측면에서나 임금노동자라는 특정한 직업적 영역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추는 실리적 노동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의 한계를 넘어서는 계급정치에 대한 의지의 측면 모두에서 쇠퇴하고 있다.
혁명적 좌파는 지난 세기에 지금만큼 약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날의 계급 관계에서는 비극적이리만치 축소되어 있다. 비판적 정치 발언의 측면에서도 좌파는, 분할하여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파편화를 재생산하며 정체성에 의해 추동되는 사회운동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그리고 노동계급은 점점 더 단절되며, 서로 맞서며 분열하고 있고, 저항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물질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불안정한 조건들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도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나란히 상응하는 궤도에서 볼 수 있는 일련의 비극을 이해하면서, 사회주의 좌파(노동조합과 사회운동, 그리고 수탈당한 자들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자본과 국가에 도전한다고 자임하는 모든 종류의 캠페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는 맑스주의 전통 가운데 가장 확고한 것을 재차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강탈당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인 필요의 측면에서는 하나라고 역설하는 것을 통해, 인류의 진보에 대해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계급 정치학이다. 그리고 임금을 받는 사람들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적 힘(제아무리 겉보기에 차이가 있어 보인다고 해도)을 조직하고 활용해서 모든 생산과 보수체계, 그리고 각종 금지(prohibition)에 담긴 착취적 성격은 물론이고, 불안정성이 초래하는 결과인 무력화에 대해서도 주장해야 한다.
강제적인데다가 궁극적으로는 허위적인(artificial)것에 불과한 이러한 차이를 뛰어넘는 것은,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집단성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들의 종속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고립상태로 그들을 계속 묶어 두는 사슬을 부수는 데 핵심적이다. 동유럽의 반체제 인사인 G.M 타마스(G.M. Tamás)가 최근에 말한 것처럼 말이다. ‘다양성 만세라고? 아니다. 코뮌 만세다!(Vive la difference? No. Vive la Commune!)’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불안정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고, 일터에서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제약받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이거나 이 강탈당한 계급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단 이해하자. 그러면 분명히 오늘날의 계급투쟁에 기반한 더 효과적인 정치가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혁신적인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궁극적인 기반은 정말이지 여전히 계급투쟁에 존재한다. 수탈에 뿌리박고 있으며, 점점 요동치는 자본주의 공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계급투쟁 말이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anotherworld.kr/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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