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프로젝트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인터뷰

 


11년 전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라는 책을 썼고 이 책은 지금 해당 주제에 대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책들 중 하나이다. 그 이후 몇 년간 새로운 경제 위기 및 금융 위기도 있었지만, 새로운 저항의 물결 역시 있었고 이런 물결들은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종종 신자유주의를 표적으로 삼았다.

 

코넬 웨스트(Cornel West)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신자유주의 권력에 대한 고발이라고 이야기했다. 휴고 차베스는 신자유주의를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작업장 투쟁이 일어나는 보다 큰 배경을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점점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주류 언론 역시 신자유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그 용어를 익혀서 쓰게 됐다.

 

하지만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유용한 표적일까? 그리고 20세기 말에 발생한 이래로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오르후스(Aarhus) 대학의 사상의 철학과 역사학부에서 박사과정 연구원인 Bjarke Skærlund Risager가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성격, 신자유주의가 저항의 양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왜 좌파가 여전히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에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있는지 데이비드 하비를 인터뷰했다.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16/07/david-harvey-neoliberalism-capitalism-labor-crisis-resistance/

 

데이비드 하비(왼쪽)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널리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말을 쓸 때 무엇을 지칭하는지 종종 불분명합니다. 가장 체계적으로 사용할 때 이는 어떤 이론, 어떤 일련의 사상들, 어떤 정치 전략, 혹은 어떤 역사적 시기를 지칭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신자유주의를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시작해도 될까요?

 

저는 신자유주의를 항상, 자본가 계급 집단이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력하게 위협을 느꼈던 것에 대응해 추진한 정치적 프로젝트로 여겨 왔습니다. 그들은 노동의 힘을 억제할 정치적 프로젝트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많은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는 반혁명적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시 개발도상국의 많은 부분(모잠비크, 앙골라, 중국 등)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명적 운동과 이탈리아와 프랑스 같은 국가에서의 공산주의 영향력의 증대, 그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스페인에서 그런 물결이 다시 살아날 것 같은 위협의 싹을 잘라 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노동조합들은 그 의도에 있어서 상당히 급진적이었던 민주당 의회를 만들어냈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그들은 다른 사회운동과 더불어 많은 기업적 개혁들과 계획들을 관철시켰습니다: 환경보호청, 직업안전위생관리국, 소비자 보호,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노동의 힘을 북돋아 주는 많은 것들을요.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자본가계급 집단의 힘에 대한 전지구적 위협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고 그들의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였습니다. 지배계급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기들이 싸워야 할 전선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전선, 정치적 전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동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고자 하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 및 정치적 전선과 노동에 대한 공격에 대해 더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이데올로기적 전선은 루이스 파웰(Lewis Powell)이라는 사람의 충고를 따르는 것에 해당했습니다. 그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고, 자본에게 집단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메모를 썼습니다. 이 메모는 상공회의소와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역자: 미국 200대 대기업 최고경영자로 구성된 협의체)을 움직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전선에서는 사상 역시 중요했습니다. 당시 내려졌던 판단은 학생운동이 너무 강하고 교수진이 너무 진보적이어서 대학은 조직화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맨해튼 연구소, 헤리티지 재단, 올린 재단같은 싱크탱크들을 세웠습니다. 이 싱크탱크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만과 공급 중시 경제학의 사상을 들여왔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이 싱크탱크들로 하여금 진지한 연구를 하도록 하려는 것이었고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예를 들어 전국경제조사국은 매우 대단하고 꼼꼼한 연구를 하는, 민간에서 자금을 받는 연구소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런 연구를 독립적으로 출간했고, 이것은 언론에 영향력을 미쳤고, 슬금슬금 대학을 포위했고 침투했습니다.

 

이 과정은 오래 걸렸고, 이제는 제 생각에 더 이상 헤리티지 재단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지점에 우리가 다다른 것 같습니다. 대학은 그것들을 둘러싼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에 상당 부분 잠식당했습니다.

 

노동에 대해서는, 국내 노동을 전 세계 노동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이민을 열어 주는 것이죠. 예컨대 1960년대에 독일인들은 터키 노동력을 수입했고, 프랑스인들은 마그레브 노동력을, 영국인들은 식민지 노동력을 수입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커다란 불만과 불안정을 창출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저임금 노동력이 있는 곳으로 자본을 이동시키는 것을요. 그런데 세계화가 작동하려면 관세를 낮추어야 하고 금융자본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금융자본이 가장 이동하기 좋은 자본 형태니까요. 그래서 금융자본과 변동환율제가 노동을 억제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사유화하고 탈규제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들은 실업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본국에서의 실업, 일자리를 해외로 빼내는 외주화, 그리고 세 번째 요소가 있었습니다: 자동화와 로봇화를 통한 기술적 변화 및 탈산업화. 이것이 노동을 짓누르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공격이었지만 동시에 경제적 공격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게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이것은 그 정치적 프로젝트였고, 부르주아지 즉 자본가계급 집단은 조금씩 조금씩 이것을 실행해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하이에크나 그런 것을 읽고 시작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직관적으로 노동을 억눌러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이론이, 그것을 지지해줄 이론이 있음을 찾아낸 것입니다.

 

2005<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의 출간 이래로 이 개념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크게 두 진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사에 무엇보다 관심이 있는 학자들과 실제 존재하는 신자유주의를 관심사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저는 그런 경향을 거부하고자 하는데, 사회과학 내에는 무언가에 대해 한 가지로 다 설명하는 이론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진영이 있고 그들은 그것에 대해 관념적 역사를 쓰는 것이지요.

 

그것의 한 버전이 신자유주의화하는 경향이 이미 18세기에 있었다고 보는 푸코의 통치성 논의입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그저 한 사상이나 통치성으로 제한된 일련의 실천들로 보려 한다면, 이미 그렇게 본 사람들은 많습니다.

 

여기서 빠져 있는 것은 자본가계급이 1970년대~1980년대 초에 그들의 활동을 조직화한 방식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튼 영어권에서는) 자본가 계급 집단이 상당히 단결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게 공정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진짜 대변할 정치세력의 필요성과 같은 많은 것들에 대해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공화당에 대한 장악과, 민주당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1970년대부터 연방대법원은 자본가 계급 집단이 과거보다 더 쉽게 선거에서 정치인들을 매수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많은 결정들을 내렸습니다.

 

예컨대 선거 캠페인에 대한 기부를 표현의 자유의 일종으로 여기는 선거자금 조달 개혁이 있었습니다. 자본가 계급 집단이 선거를 매수하는 것은 미국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부패의 형태로 물밑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합법화가 된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저는 이 시기가 많은 전선들에 걸친 광범위한 운동으로 정의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광범위한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가 계급 집단 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연대를 인식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자본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심각하게 침식되어 왔던 그 경제적 부와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한 절박한 노력 속에서 그 권력을 재조직했습니다.

 

2007년 이래로 숱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개념은 그 위기들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나요?

 

1945년에서 1973년 사이에는 위기가 거의 없었습니다. 심각한 순간들은 있었지만 주요 위기는 없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정치로의 선회는 1970년대 위기의 한복판에서 발생했고, 그 이후로는 체제 전체가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위기는 미래에 다가올 위기의 조건을 마련하죠.

 

1982년에서 1985년 사이에 멕시코, 브라질, 에콰도르, 그리고 폴란드를 비롯해서 기본적으로 모든 개발도상국에서 부채 위기가 있었습니다. 1987년에서 1988년에는 미국 저축 대부 기관에서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1990년에 스웨덴에서 광범위한 위기가 하나 있었고 모든 은행들이 국유화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그러고 나서 1997~1998년에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 위기가 있었고, 그 다음에 위기는 러시아, 다음은 브라질로 옮겨 가서 2001년에서 2002년에 아르헨티나를 강타했습니다. 2001년에는 미국에 문제가 생겼지만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꺼내서 부동산 시장에 쏟아 붓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결국 2007~8년에 미국 부동산 시장이 붕괴되었고 여기서 위기가 생겼습니다. 세계 지도를 보시면 위기 경향이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생각하면 이런 경향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자유주의화의 큰 움직임들 중 하나는 1982년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서 케인스주의자들을 쫓아낸 것이었습니다. 케인스주의적 관점을 가진 경제 고문들을 완전히 일소한 것입니다. 신고전학파 공급중시 이론가들이 그들을 대체했고, 이들이 처음 한 것은 그때부터 어디에서든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IMF 구조조정 정책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1982년에 멕시코에서 부채 위기가 있었습니다. IMF우리가 당신들을 구제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한 것은 뉴욕 투자은행들을 구제하고 긴축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멕시코 대중은 IMF의 구조조정 정책의 결과 1982년부터 4년 후에 생활수준의 거의 25%가 하락했습니다. 그 이래로 멕시코는 대략 네 번의 구조조정을 거쳤습니다. 많은 다른 국가들도 두 번 이상을 했습니다. 이것이 표준적인 관행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리스에서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더 치밀할 뿐, 1982년에 멕시코에서 한 일과 거의 똑같습니다. 이는 2007~8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은행을 구제했고 긴축정책을 통해 인민이 그 비용을 지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최근의 위기들과 지배계급들이 그것을 관리한 방식에서 당신의 신자유주의 이론을 재고해보도록 한 지점이 있었나요?

 

글쎄요, 오늘날의 자본가계급 연대가 과거와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은 19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사태를 지배할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국가 체제 속에서 전지구적 권력 구조의 지역화를 보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독일,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같은 지역적 패권국을요.

 

당연히 미국은 전지구적 지위를 여전히 갖고 있지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오바마는 G20에 가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앙겔라 메르켈은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에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래서 지정학적 상황은 보다 지역화되었고, 보다 많은 자율성이 존재합니다. 부분적으로는 냉전 종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독일과 같은 국가는 더 이상 보호를 위해 미국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빌 게이츠, 아마존, 그리고 실리콘 밸리와 같이 새로운 자본가계급이라고 불린 이들은 전통적인 석유 및 에너지와 다른 정치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예컨대 에너지와 금융, 그리고 에너지와 실리콘밸리 집단 등등 사이에 국지적인 각축이 많이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와 같은 사안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심한 분열들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핵심적인 또 한 가지는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 공세가 강력한 저항 없이 그대로 지나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노동계, 유럽의 공산당들, 기타 등등으로부터 거대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그 전투에서 우리가 졌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항이 사라진 정도만큼, 노동이 과거에 한때 가졌던 힘을 갖고 있지 못한 정도만큼, 지배계급 내 연대가 더 이상 필수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더 이상 위협이 없기 때문에 지배계급이 함께 모여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대해 뭔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배계급은 그 어떤 것도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우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가계급은 아주 잘 하고 있는 반면에 자본주의는 다소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이윤율은 회복되었지만 재투자율이 충격적일 정도로 낮아서, 다량의 화폐가 생산으로 다시 투입되지 못하고 토지 수용과 자산 조달로 대신 흘러가고 있습니다.

 

저항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쓴 책에서 (적어도 북반구에서는) 개인적 자유를 위한 신사회운동에 밀려 계급투쟁이 쇠퇴한 것과 신자유주의적 맹공격이 나란히 이루어졌다는, 얼핏 보기에 역설적 현상을 지적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특정한 저항 방식을 생겨나게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를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깊이 생각해야 할 명제가 있습니다. 모든 지배적 생산양식이, 그 고유한 정치적 지형과 함께, 그 자체의 거울 이미지로서의 저항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생산과정이 포드주의적으로 조직되던 시기에, 거울 이미지는 대규모의 중앙집중화된 노동조합 운동과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따르는 정당들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생산과정의 재조직과 유연한 축적으로의 선회는 좌파 내에서도 여러 측면에서 그 거울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탈중심화된, 위계적이지 않은 거울 이미지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거울 이미지는 어느 정도, 자기가 파괴하려고 하는 그것을 강화합니다. 저는 결국 노동조합 운동이 포드주의를 뒷받침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자율주의적이고 무정부적인 지금 좌파의 상당수가 사실은 신자유주의의 최종 단계를 보강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좌파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듣기를 싫어하지만요.

 

하지만 물론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거울 이미지가 아닌 것을 조직할 방법이 있는가? 우리가 거울을 깨버리고, 신자유주의의 손에 놀아나지 않는 어떤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 저작에서 저는 가치가 실현되는 지점 역시 긴장이 존재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가치는 노동과정에서 생산되며, 이는 계급투쟁의 매우 중요한 측면입니다. 하지만 가치는 판매를 통해 시장에서 실현되며, 여기에도 정치적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본 축적에 대한 많은 저항은 생산의 지점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와 가치 실현을 통해서도 일어납니다.

 

자동차 공장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큰 공장들은 25천 명 정도를 고용하곤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기술이 노동자에 대한 필요성을 감소시켰기 때문에 5천 명을 고용합니다. 그러니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생산 영역에서 쫓겨나서 점점 더 도시 생활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동학 내 불만의 주요 중심은 점점 더 가치의 실현을 둘러싼, 도시의 일상 속의 정치에 대한 투쟁으로 옮겨 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노동자들은 중요하고 노동자들 사이에 핵심적인 쟁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의 선전(深圳)에 있다면 노동과정을 둘러싼 투쟁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우리는 예를 들어 버라이즌(Verizon) 파업을 지지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일상 생활의 질을 둘러싼 투쟁이 지배적입니다. 지난 10년에서 15년간의 대규모 투쟁을 보세요. 이스탄불의 게지(Gezi) 공원 투쟁같은 것은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 일상 속의 정치적 문제, 민주주의의 결여,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2013년 브라질 도시에서 일어난 봉기에서도 역시 일상 속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교통, 발전 가능성에 대한, 그리고 학교, 병원, 저렴한 주택에는 돈을 쓰지 않으면서 거대한 경기장에만 그 많은 돈을 쓰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런던, 파리, 스톡홀름에서 우리가 보는 봉기는 노동과정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 속 정치적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정치는 생산의 지점에 존재하는 정치와는 사뭇 다릅니다. 생산의 지점에서는 자본 대 노동입니다. 도시 생활의 질을 둘러싼 투쟁은 계급 배치에 있어서 보다 덜 분명합니다. 생산에 대한 이해에서 주로 도출되는 명확한 계급 정치는 그것이 보다 현실에 다가갈수록 이론적으로 애매해집니다. 이는 계급 문제이지만 고전적인 의미의 계급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하고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너무 이야기를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두 용어 각각을 언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그리고 둘을 섞는 데 수반되는 위험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많은 진보주의자들(liberals)신자유주의가 소득 불평등의 측면에서 너무 멀리 나갔고, 이 모든 사유화가 너무 멀리 나갔고, 그리고 환경처럼 우리가 지켜야 할 공공재가 많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매우 자본화되고 매우 착취적인 것으로 드러난 공유경제처럼요.

 

윤리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훔치지 말고 적당히 정직해지는 것에 대한 개념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니까 몇몇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어떤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로 일종의 개혁을 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크게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너무나 깊고 강력한 반자본주의 운동 없이 우리가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반신자유주의의 언어로 설명하기보다는 반자본주의의 언어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반신자유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위험한 점은, 어떤 형태든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이 없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반신자유주의는 끝없는 복합적 성장의 거시적 문제(생태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합니다. 래서 저는 반신자유주의보다는 반자본주의를 말하고자 합니다


(기사 등록 201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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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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