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한
민주당의 우왕좌왕, 헛발질이 계속되고 있다. 추미애 대표가 박근혜에게 영수회담을 제안했던 것이 정점이었다. 민주당이 국민들의 ‘영수’를 자처하며, 감옥에 가야 할 박근혜를 협상장에 모시려던 돌발행동은 큰 비난만 낳았다.
‘거국중립내각’, ‘2선후퇴’ 등으로 어물거리던 민주당은 100만 촛불을 직접 보고서야 ‘퇴진’ 당론을 내놓았다. 새누리당의 비주류에서조차 ‘탄핵’과 ‘새누리당 해체’ 입장이 나온 때였다. 퇴진에 부정적이었던 문재인은 거대한 거리의 물결을 목격하고서 ‘조건없는 퇴진’으로 선회했다. ‘개, 돼지’ 취급받던 평범한 사람들의 거대한 목소리는 이렇게 매 주말 정치권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당은 민심의 꽁무니조차 제대로 쫓지 못하고 있다. 바로 야당들이 박근혜를 퇴진시키겠다며 내놓은 ‘특검’과 ‘탄핵’에 문제와 위험이 있다. 특검에서 민주당은 박근혜와 세월호 7시간을 수사대상으로 명시하지 말자는 새누리당과 타협했다. 권한과 기간도 너무 짧다고 지적된다. 그런데 짧다고 해도 4개월로, 국민들이 바라는 즉각 퇴진과 모순된다.
이 모순은 결국 수사대상인 박근혜에게 검사 선택권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특별검사로 민변 변호사들이나 이정희 전 진보당대표 등은 배제됐는데, 대신 재벌들을 고객으로 둔 대형로펌 출신들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특검이 재벌과의 뇌물죄를 밝혀야 하는데 말이다.
탄핵 역시 국회 의결과 헌재 판결을 거치는 등 장애물이 많고 오래 걸리긴 마찬가지다. 야당들은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를 겪거나 아니면 탄핵대상인 박근혜와 새누리의 동의를 얻어 총리를 선임해야 하는 딜레마를 겪고 있다. 보수적인 헌재가 탄핵을 결정하지 않을 위험도 있다. 그래서 박근혜가 “차라리 탄핵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국회 주도의 탄핵은 지난한 과정과 타협의 산물이 될 수밖에 없다.
촛불의 분노는 박근혜 개인을 넘어 쉬운해고와 최저임금, 학자금 대출, 국정교과서와 사드배치, 위안부 합의 등으로 헬조선을 만든 박근혜와 재벌체제로 점차 향하고 있다. 그런데 국회가 주도하는 탄핵은 이런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국민들을 주체가 아닌 수동적 방관자로 만들기 쉽다. 박근혜 꼬리자르기로 정권 재창출을 노리는 조선일보와 비박 정치인들, 그리고 순조로운 정권교체 외에는 관심 없는 민주당이 바로 이것을 꿈꿀 것이다.
민주당의 소리 없는 배신도 진행되고 있다. ‘최순실 법’인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과 규제프리존법 추진 과정에 국민의당과 함께 새누리를 돕고 있다. 전경련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돈을 갖다 바치며 청부한 법안으로 노동개악법과 함께 재벌들이 원하는 핵심 법안이다. 사회공공서비스 전체를 민영화하고 규제완화하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팔아 기업의 돈벌이 기회를 열어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두 재단에 기업들이 입금을 완료하자 각각 그 다음 날 대통령이 연설에서 법안들을 언급하고 추진한 것이 박근혜-최순실-재벌기업의 거래였다.
삼성을 위한 국민연금의 배임행위가 알려지는 등 재벌이 삥뜯긴 피해자가 아니라 뇌물을 주고 받은 범죄의 몸통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 야당들은 재벌의 청부법안 통과에 힘을 싣고 있다. 민심이 박근혜 즉각 퇴진, 새누리당 해체, 재벌에 대한 조사와 처벌로 향하는 것과 반대로, 민주당은 즉각퇴진을 부담스러워 하고, 새누리를 해체하긴커녕 협상에 나서주며, 재벌을 처벌하긴커녕 도와주는 법안들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이 답답한 걸음만 떼거나 뒤통수를 치는 모습은 많은 촛불 시민들을 갑갑하게 만들고 있다. 민주당은 ‘제대로 된 야당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러나 민주당이 가진 근본적 한계 때문에 그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 같다.
멀리 내다볼 것 없이 김대중, 노무현의 10년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민주당 정부가 걸어온 길은 이명박근혜 10년과 같은 노동시장 유연화, 구조조정, 민영화의 신자유주의 노선이었다.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이르는 지금의 열악한 노동현실은 이 두 ‘민주정부’가 토대를 만든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만든 정리해고제와 파견법,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악법이 바로 박근혜의 ‘쉬운해고, 평생 비정규직’의 뿌리가 됐다.
민영화를 시작한 것도 바로 IMF 이후 집권한 김대중 정부였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온갖 대형 공기업들이 사기업에 넘겨졌다. 의료민영화도 이 때 시작됐다. 경제자유구역 영리병원,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등이 추진됐고 이것은 삼성생명이 전국민건강보험을 대체하겠다는 계획 그대로였다. 한미 FTA 추진, 이라크 파병 등도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과 바람을 거스르는 정책이었다. 그 동안 빈부격차와 양극화는 크게 늘었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라도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이었다는 평가도 수긍하기 어렵다. 이들 정부도 친기업 반서민 정책들에 대한 민중의 반발을 공권력을 이용한 탄압으로 억눌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구속 노동자 수는 이명박 정권보다 많았다. 박근혜의 물대포가 백남기 농민을 쓰러뜨린 것처럼 노무현의 곤봉과 방패는 전용철, 홍덕표 농민을 쓰러뜨렸다.
주요도로 행진을 금지하는 등 집시법을 개악하고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진보정당을 향해 ‘일심회’ 마녀사냥을 저지른 것도 민주정부였다. 이런 10년의 배신이 낳은 것이 이명박 정권이었다. 미국에서 민주당에 실망한 사람들이 트럼프를 백악관에 앉혔듯이 말이다.
민주당에 기대어 수많은 시민들이 꾸었던 꿈이 좌초된 이유는 민주당도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돈·인력·자원이 기업주들과 부자들로부터 충원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기업에 더 기반이 있는 새누리당과 달리, 민주당은 일부 시민단체 지도자들, 노동조합 상층 지도자들의 기반도 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 하지만 기업인 출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의 직업정치인들 대부분은 그들의 주된 기반인 기업주들의 압력 때문에 ‘시장말고 대안은 없다’는 관점과 친기업 반서민적 정책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주당도 박근혜와 마찬가지로 ‘국정 혼란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국정’이 바로 지금도 밀실에서 체결된 한일군사협정과 곧 발표될 국정교과서 등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15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촛불집회를 주최하고 있는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박근혜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즉각 퇴진하라”고 주장한 것이야말로 옳다. 반면 민주당은 ‘질서 있는 퇴진’, 심지어 ‘명예로운 퇴진’ 운운하며, 촛불시민들과 같은 편에서 박근혜의 성과연봉제에 맞서 60일 가까이 싸우고 있는 철도노조에 파업을 접으라고 요구했다.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정의당이 그 요구에 함께한 것은 매우 아쉽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게이트의 대안으로 민주당의 문재인, 이재명, 박원순을 떠올리고, 일부 시민사회단체들도 운동이 확대될수록 민주당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온 힘은 제도권 야당이 아니라 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직접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4.19 혁명과 87년 6월 항쟁은 거리와 직장에서 저항에 나선 시민들이 만들어 냈고, 반면 그 운동이 결국 제도권으로 수렴되어간 결과는 한계와 부분적 패배를 낳았다. 물론 사안별로, 한시적으로 민주당이 올바른 주장과 실천에 참여한다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지금 거리로 나온 야당 지지자들을 배척하거나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퇴진행동’이 조직에 민주당을 받아들여 함께하지는 않는 것으로 결정한 것은 옳고, 촛불 시민들 역시 민주당의 배신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충분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대안은 촛불이 더 뜨겁게 타올라 횃불이 되는 것이고, 지금 준비되고 있는 노동자 총파업과 학생들의 동맹휴업이 결합되어 그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이며, 농민들은 함께 농기구를 내려놓고, 영세상인들도 일손을 놓으며 진실과 정의를 요구하는 저항의 물결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대단한 능력과 도덕성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능력하고 비윤리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반면 평범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수많은 창조적인 생각과 행동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람들이 5년에 한 번 선거를 하는 것으로 제한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적 시스템에서 이 사회를 운영하고 결정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도권 야당에 기대하다가 또다시 실망과 좌절을 겪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우리의 삶을 점차 옥죄는 헬조선을 함께 바꿔나갈 때다.
(기사 등록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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