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회주의 정치를 위한 활동가 모임 새물'에서 기고한 입장이다.]
역대급이다. 대통령이 연설문, 국무회의 문건, 외교 회담 시나리오, 행사 보고, 심지어 휴가 계획에 이르기까지 온갖 활동에 대한 정보를 최순실에게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일일이 지도를 받았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대통령이 이를 시인하면서 사태는 단순한 비리나 특혜의 수준을 완전히 넘어섰다. 국가 전체의 운영이 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인의 손에 놀아났다는 사실에 문자 그대로 온 나라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탄핵’ ‘하야’가 실시간 검색어 1, 2위에 올랐으며 퇴진 시위뿐만 아니라 대학별 시국성명, 기습시위 등 날카로운 형태의 분노가 터져나오고 있다. 박근혜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 수준인 10.4%로 떨어졌다. 이 정권이 생명을 유지할 길은 더 이상 없어 보인다.
검찰은 이미 최순실과 그 측근들을 수사하기 시작했으며 정치권에서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특검, 거국중립내각 구성, 탄핵 등의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대책들이 사태에 전혀 걸맞지 않으며, 박근혜가 퇴진하고 새누리당이 이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완전히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파업과 거리 시위를 비롯한 직접 행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그대로 두고는 진상 규명조차 방해받는다.
지금 드러난 사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고, 모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완전히 옳다. 그러나 진상 규명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의 조건에 불과할 뿐더러, 새누리당이 건재하는 한 그것조차 방해받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일고 시민고발이 잇따르자 검찰은 형식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해외로 도피한 최순실을 잡아들이는 데는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최순실이 귀국한 뒤 하루 동안 마음대로 하도록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더블루K등 연루된 단체들에도 수색 전에 증거 인멸할 시간을 넉넉히 주었다. 지금 검찰이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야당들에서는 특검을 요청했고, 많은 사람들이 ‘일단 특검 결과를 지켜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 듯하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특검에 응한 것은 갑자기 없던 도덕심을 찾아서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외양으로만 특검을 수용해놓고 실질적으로 협력하지 않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미 대통령은 수사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새누리당 스스로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앞으로도 사사건건 이런 식으로 조사의 발목을 잡으면서 시간을 끄는 식으로 나올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특조위에 대한 갖은 비협조, 방해 공작들에서 이들의 수법을 이미 보았다.
박근혜를 쫓아내기 위해 지금 특검 결과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미 밝혀진 것만으로도 박근혜는 탄핵을 넘어 형사처벌감이며, 실질적으로 더 이상 직무수행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게 할 이유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짓을 하고도 쫓겨나지 않고 심지어 정권 재창출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 자체가 후대에 두고두고 해가 될 것이다.
둘째, 새누리당과 기업들은 사태의 공범이며, 이들을 놔두고서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한낱 자연인이었다면 나라를 이렇게 쥐고 흔들 수 없었다. 그들이 지금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은 새누리당과 기업들을 비롯한 많은 공범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범죄자들은 지금 박근혜와 최순실 뒤에 숨어서 피해자나 심판자 행세를 하며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려 하고 있다.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의 관계에 대한 정보는 이미 예전부터 정치권에 돌고 있었고 이명박계는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를 공격하는 데 이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은 그를 대선 후보로 옹립했다. 그의 정책을 결사 옹위했다. 박근혜의 횡령과 뇌물수수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유언비어’ ‘비방’이라고 펄펄 뛰며 방어했다. 부패하고 무능하며 사익에 휘둘리는 인간이지만 보수를 결집하고 표를 끌어모을 수 있는 ‘제2의 박근혜’가 나온다면, 이들은 또다시 그렇게 할 것이다.
‘강압적으로 돈을 갈취당한 기업’이라는 프레임으로 책임을 면피해보려고 하고 있지만,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에 돈을 출연한 기업들 역시 피해자가 아니라 엄연한 공범이다. 이들은 공공연한 횡령 요구를 기꺼이 응낙했다. 사회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부를 개인의 호주머니에 털어넣었다. 거기에 대해서 반성조차 없다. 돈을 좀 쥐어주면 요구하는 대로 나라를 움직여줄 ‘제2의 최순실’이 나온다면, 이들은 또다시 그렇게 할 것이다.
박근혜와 최순실만 잘라내고 새누리당과 기업들은 보존하는 ‘거국중립내각’ 같은 수습안으로는 제2의 박근혜, 최순실이 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사태에 일조한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지고 처벌받게 만들어야 한다. 새누리당이 여전히 정국을 주도하고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셋째, 박근혜와 최순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이 끼친 사회적 피해를 해결할 수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유착관계는 수십 년간의 민주화 투쟁 끝에 가까스로 쟁취한 직선제 헌법을 웃음거리로 만들었고 사회적 부를 유용하여 최순실의 자식과 주변인들에게 온갖 특혜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끼친 사회적 피해는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전경련과 기업들이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에 출연금을 낼 당시 SK, CJ 그룹 총수의 사면·복권(CJ 회장은 사면됐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성공했다), 두산의 면세사업 진출(성공했다), 대림산업·GS건설·부영건설의 비자금 조성 및 조세포탈 수사 등 기업들이 정권에 청탁할 만한 사안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지적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반해고 허용,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 파견제·기간제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하는 소위 ‘노동개혁 5법’, 기업의 인수합병·주식교환 규제를 완화하는 ‘원샷법(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 의료법인에 영리자회사 설립을 통한 이윤추구를 허용하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전사회적 영향을 끼칠 법안들이 국회에 걸려 있었다.
이것들은 재벌기업들의 숙원사업이지만 사회적인 피해가 커 저항에 직면했던 법안들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이 백남기 농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노골적인 국가 폭력을 동원하여 밀어붙이려고 했던 바로 그 정책들이기도 하다. 이 정권이 그간에 보여준 무도함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가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청탁은 발각되었지만 결과는 뒤집히지 않았다. 결과를 뒤집으려면 박근혜와 최순실을 감옥에 집어넣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회적 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국회의원들, 특히 박근혜를 탄핵하는 데조차 소극적인 원내 야당들에게만 기대고 있어서는 안된다.
넷째,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구조와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의 수반을 누가 할지뿐만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할지까지 인민이 개입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공익을 배반할 경우 언제든 소환할 수 있는 정치 제도에서는 애초에 이렇게 들키지 않고 권력을 유용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부가 대기업 이사와 임원들의 전제에 맡겨져 있지 않고 출처와 용처가 명확하게 공개되는 가운데 작업장, 지역, 학교 등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민중에 의해 통제된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횡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소수의 엘리트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소수의 자본가가 사회적 부를 사적으로 소유하는 구조 하에서 양자의 결탁과 부정은 필연적이다. 아무 직책 없는 사인을 내세워 이렇게 공공연하게 뇌물을 수뢰하고 심지어 국정 운영을 지도받기까지 한 것은 정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보다 세련된 방식의 정경유착은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할 정도로 만연해 있다.
박근혜가 '헌법정신'을 유린하고 '민주공화국'을 망가뜨렸다는 비난은, 한국의 헌법과 정치제도가 제한적으로나마 보장했던 공직자에 대한 통제와 인민주권 원리를 훼손했다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소수 지배계급이 정치권력과 사회적 부를 독점하는 구조를 공고화하고 떠받쳐온 것이 바로 그 헌법과 공화국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모순적이고 한계적이기도 하다.
이 사태에 대한 분노가 ‘최소한 무당에게는 지배받기 싫다’는 수준의 자존심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에 대한 바람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헌법과 현 정치제도의 숭고함을 재확인하고 그것들을 복원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법치’라는 외피 아래 보호하고 육성해왔던 소수의 계급지배를 폭로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자신들이 집권했던 10년간 정리해고를 도입하고 비정규직을 대폭 증가시켰으며 민영화를 추진하고 삼성의 보고서들을 고스란히 정책에 반영했던 민주당, 그런 민주당보다 더 보수적인 정당을 표방하는 국민의당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우리 스스로가 광장에 모여 이 나라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어떤 곳인지, 그것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를 묻고 행해야 한다.
지금 일부가 하는 것처럼 박근혜와 최순실에 대해 여성혐오 발언들을 내뱉으며 조롱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은폐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태의 사회적 의미를 직시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박근혜뿐만 아니라 새누리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들과 결탁했던 기업들을 처벌하고, 그들이 사주했던 정책들을 되돌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해온 소수의 계급지배를 흔들고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지금 디뎌야 할 첫걸음은 박근혜는 퇴진하고 새누리당은 더 이상 이 문제에 손대지 않을 것을 요구하면서 거리에 나가는 것이다.
가자!
(기사 등록 201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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