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한
재벌 청문회는 화만 돋웠다. 재벌들은 줄곧 ‘모른다’, ‘기억이 안난다’며 바보연기를 펼쳤다. ‘더 잘 알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에게 경영권을 넘기시라’는 일갈이 시원했고, ‘고(故) 황유미 씨에게 500만원 내밀고, 정유라 씨에게 300억원 내민 게 삼성’이란 질타가 반가웠지만 결국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이미 비리의 온상으로 낙인찍힌 재벌의 사조직 전경련 해체 가능성을 큰 성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공손한 척 바보인 척 가면은 청문회장을 조금만 벗어나자 맨얼굴을 드러냈다. 이재용, 정몽구는 국회에 출입하면서 용역깡패를 준비했고,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과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준비한 팻말과 고인의 영정을 빼앗아 부수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 앞 농성장과 자신의 공장에서 하던 짓을 온 국민이 지켜보는 날에도 벌이길 서슴지 않았다.
재벌들은 피해자인 척 하지만 이제 이 말을 믿는 국민은 없다. 광장에선 이미 ‘박근혜 구속, 재벌도 공범’이 인기 있는 구호가 됐다. 박근혜를 거의 끌어내린 촛불혁명은 이제 그 공범들을 향하고 있다. 그들이 바로 박근혜와 함께 헬조선 ‘박근혜 체제’를 함께 만든 자들이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박근혜-최순실에게 뇌물을 주고 청탁한 것은 노동개악법과 규제완화·민영화였다. 재벌들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입금을 완료하면 바로 다음 날 대통령이 연설에서 이 정책들을 언급하고 추진하는 식이었다. 박근혜는 이 법들을 통과시켜야 한다며 직접 대국민 서명운동까지 했다.
노동개악법은 전 국민 비정규직화 시도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장그래 양산법’이었고, 파견 대상자를 55세 이상자와 전문직·고소득 노동자, 그리고 제조업까지 허용하려는 것이었다. 불법파견을 자행하는 현대차 같은 대기업에겐 면죄부였다.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고, 노동자 동의 없이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할 수 있게도 했다.
현대차 정몽구는 대통령과 독대할 때 돈을 내는 대신 ‘불법 노동행위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을 요구했다고 털어놨다. 뇌물의 대가로 노동탄압의 뒤를 봐달란 것이었다. 현대차는 하청업체인 유성기업 노조를 파괴하려고 전문업체를 동원해 욕설과 폭력, 징계, 고소고발 등으로 괴롭힌 끝에 한광호 열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기업이기도 하다. 노조파괴 작전명은 ‘생지옥 프로젝트’였다. 재벌의 뇌물값은 노동자의 생지옥이었다.
재벌들은 민영화·규제완화도 요구했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사회공공서비스 민영화법’이다. 재벌들은 의료, 교육, 철도, 전기, 가스 등 공공 영역을 ‘산업’으로 정의하고 규제완화, 민영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되면 공공요금은 폭등하고 서비스의 질은 떨어지고 안전을 위협받으며, 노동조건도 악화될 것이다.
규제프리존법도 비슷하다. ‘네거티브 규제’ 즉 박근혜식 표현대로 "모두 물에 빠뜨려 꼭 살릴 규제만 살리고 전면 재검토"하자는 요구다. 서민들의 생명, 안전, 인권을 위해 필요한 규제는 재벌기업에겐 “쳐부술 원수”이자 “암덩어리”였다. 또 기업 스스로 자사 상품의 안전성을 판단하도록 해달란 요구도 담겼다. 시민단체들이 ‘제 2의 가습기 살균제 법’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원격의료도 뇌물 값에 포함돼 있었다. 안전과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지만 박근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를 추진했다. 원격의료기기 특허를 대거 보유한 삼성과 SK, KT, LG 등 통신기업들이 군침을 흘리기 때문이다. 민간의료보험사가 병원을 지배하는 미국식 의료제도를 향한 요구도 포함됐다. 국민건강보험을 무너뜨리고 삼성생명의 시장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삼성을 위한 특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문형표가 국민연금을 압박해 삼성 합병을 챙겨준 시기는 삼성병원이 전국으로 메르스를 퍼뜨리고 있을 때였다. 보건복지부는 메르스를 잡아야 할 때 이재용 승계를 돌봐주고 삼성병원 이름을 숨기며 재앙을 키우고 있었다.
재벌들이 비선실세에 푼돈을 바치며 우리 삶을 농락하는 동안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서민들은 더 빈곤해졌다. 한국의 상위 10%의 소득은 전체의 45%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고, 상위 10%의 자산은 66%에 이르게 됐다. 재벌들이 쌓아놓은 사내유보금은 750조원으로 삼성 215조, 현대차 112조 등 갈수록 늘고 있다.
반면 월 89만원 이하로 사는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16.5%에 이르게 됐다. 노인 둘 중 한명이 빈곤층이고, 노인자살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청년실업률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고, 300만 명의 노동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 쌀값 폭락으로 농민들은 논을 갈아엎고 있다. 장애인, 이주민, 소수자 등의 처지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 저항하던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로 쏘아죽이고, 한상균 위원장을 가두고, 진보당을 해산한 것이 이 정부였다. 저항의 입을 막고자 테러방지법을 추진했고, 박정희와 재벌 미화 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다. 그 정점인 세월호는 이윤과 안전을 맞바꾸고 진실을 은폐하며 침몰하는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사실 언제나 이 사회를 좌지우지해온 진정한 비선실세는 재벌기업들이었다. 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임기도 없다. 이 재벌기업들은 늘 국가권력을 동원해 노동자와 서민을 쥐어짜고 언론과 사상도 지배·통제해왔다. 이번에는 이 권력과 재벌기업 사이에 최순실이 있었단 게 유별난 점이었다. 박근혜-최순실을 끌어내려도 이재용, 정몽구 등이 남는다면 ‘국정농단’은 끝날지 몰라도 우리 삶은 계속 농단당할 것이다.
박근혜 퇴진이 박근혜와 함께 이 사회를 지배해온 재벌기업, 새누리당, 보수언론의 꼬리 자르기가 되지 않으려면 탄핵이 가결됐더라도 우리는 촛불을 계속 들어야 한다. 또한 이 와중에도 새누리당과 재벌 눈치를 살피는 야당에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 ‘이제 그만 국회 절차와 헌재 판결을 기다리며 촛불을 내려놓고 경제와 안보를 돌봐야 한다’는 주장에 속지 말아야 한다. 촛불혁명은 운동을 한계 짓고 제한하려는 자들의 손을 벗어나 박근혜와 함께 우리의 삶을 공격해온 진정한 몸통들을 향해 계속 타올라야 한다.
(기사 등록 201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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