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근대의 틀이 어느 정도 완성된 20세기 초반에는, 근대적 세계의 주된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이 딱 세 가지라는 사실이 판명됐습니다. 바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죠. 민족주의는 "특수"의 이념으로서 특정 국가 내지 인민/민족의 이해를 전경화시키는가 하면, "보편"의 이념인 자유주의는 이론상 만국, 만민에 해당될 수 있는 "룰"을 강조합니다.
사회주의도 애당초에 어디에도 적용이 가능한 탈시장, 탈자본의 "대안적 근대"를 내세오는 보편의 이념이죠. 물론 실질적으로는 지난 100여년 동안 이 세 가지 큰 패러다임들이 계속해서 서로 중첩되고 뒤섞이고 혼종화되곤 했습니다.
예컨대 남북한만 놓고 봐도 북한의 사회주의란 이미 극도로 "민족화"된 것이죠. 또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에는 또 수많은 변종들이 있습니다. 한국만 해도 박정희의 극우적 민족주의와 예컨대 박현채 선생 류의 좌파적인 민족주의 색채의 "민족경제론"은 서로 극과 극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결국 사상사의 차원에서 본다면 약 1917년 이후의 세계사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의 상호 경쟁과 상호 중첩, 혼합화, 그리고 이념적 패권 교체의 역사입니다. 1917-1945년 사이에 - 소련에서 스탈린화되어 궁극적으로 상당히 민족화된 - 사회주의와 구미권의 자유주의는 파시즘이라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상대로 해서 일대의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 사투는 1945년에 완승에 가까운 결말을 낳아, 2010년대 이전까지는 적어도 구미권은 민족주의보다는 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경합과 상호 침투, 혼종화의 무대였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는 민족주의의 파도는 계속 일어났지만, 그 민족주의 역시 - 북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 상당 부분 좌파적이었습니다.
구미권에서는 서구의 자유주의에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가미됐는가 하면, 동구의 (스탈린화된) "사회주의" 진영에는 가면 갈수록 자유주의 지향의 세력들이 집권 정당 안에서 그 힘을 키웠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에서 그 세력들이 집권하여 결국에는 1990년대에는 러시아를 포함하여 구미권 전체는 아예 자유주의 일색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당위의 차원에서 말입니다.
자유주의의 이런 완승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감동을 받아 "역사의 종언"까지 언급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한데 1989년의 "자유주의의 완승"의 기반은 생각보다 아주 허약했습니다. 1990년대식 자유주의를 받침하는 두 "다리"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이었습니다. 한데 노동 인구의 다수를 경향적으로 빈민화시키는 신자유주의는 결국 노동자들의 상당수를 신자유주의 체제를 수용한 좌파로부터 떼어내 민족주의적 우파의 지지자로 만들었습니다.
한편 세계화는 궁극적으로 제조업의 대부분을 이양 받은 구미권 밖의 강력한 민족 국가들에게 유리했습니다. 세계화의 가장 큰 승자는 바로 "사회주의적" 색채에다가 민족주의적 본질을 겸비하는 중국이었죠. 결국 1990-2010년대의 자유주의적 세계의 안팎에서는 민족주의 세력들이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상층과 고학력 중산층 이외의 대부분의 사회적 계층에서 민족주의 우파의 영향력이 커져가고, 밖에서는 세계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아온 건 민족주의적 당국가인 중국과 걸프 지역의 절대 왕권 국가들, 그리고 사실상의 당국가인 싱가포르 같이 자유주의와 아주 무관한 세력들이었습니다. 이런 세계는 결국 내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내파의 순간은 지금 온 것입니다.
미국에서 트럼프2기가 시작되고 있지만, 사실 극우파의 영향력은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네덜란드부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까지 일련의 유럽 부자나라에서도 극우파는 이미 집권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큰 트럼프와 각국의 작은 트럼프들은 이제 "콤비"를 이루는 것이죠.
트럼프의 작업 방식을 아직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언으로 봐서는 추격형 개발을 선택한 국가들과 같은 보호주의 정책 (관세 장벽 등등)과 푸틴을 방불케 하는 영토 제국주의 (그린란드 등을 향한 영토적 야심 )를 겸비할 듯합니다. 그렇게 되면...세계의 4대 열강이라고 할 미-중-러-인도는 공히 민족주의의 이념과 정책으로 무장하여 서로 합종연횡과 경합, 협력을 벌일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념의 차원에서는 푸틴의 러시아나, 트럼프의 미국이나 습근평의 중국이나 모디의 인도나 다 똑같이 강경 내지 초강경 민족주의일 것입니다. 1989년에 구미권이 자유주의로 일색화됐다면 2025년에 전세계의 열강들은 민족주의로 일색화되고 말았습니다.
좀 암울해 보이죠? 한데 비관은 금물입니다. 1989년의 모멘텀도 사실 오래 가지 않았지만, 2025년의 민족주의 모멘텀도 오래 갈 수 없을 겁니다. 푸틴이든 트럼프든,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의 말기적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풀어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지금 LA를 불바다로 만든 기후문제도 그렇고, 사실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문제도 그렇습니다.
보호 관세를 부과해도 그만큼 물가 인플레이만 커질 터이니 트럼프의 보호주의는 미국의 노동계급을 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중산 계층의 지속적인 위축과 사회의 빈곤화, 기후 재앙과 각종의 전쟁, 갈등 속에서 좌파는 다시 한 번 그 세를 회복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기후 문제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이념은 아무래도 민족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사회주의일 것입니다. 저는 이 차원에서는 당분간의 세계에 대해 비관해도 장기적으로 세계사의 전개를 낙관적으로 봅니다.
(기사 등록 20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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