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tinyurl.com/23ux8b7h)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1991년에, 한국에 처음 갔을 때에 저는 한국의 상황을 저의 상식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 적은 있었습니다. 일면으로는 한국이 미 제국의 통제 하에 있다는 건 분명했습니다. 용산의 옛 일본군 병영이 이제 미군 기지가 되고, 서울 이북의 동두촌부터 서울 이남의 오산까지 미군 기지들이 포진돼 있고,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느라 미군 방송을 시청하는 걸 봐도, 이 나라를 누가 콘트롤하는지 분명했습니다.
한데 또 일면으로는, 미국이 도대체 한국을 "왜" 돈을 써가면서 지배하는 것인지, 저는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공부한 서울의 한 "명문대"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열심히 학습했고, 저 역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를 이미 고교 시절에 통독했지만, 그게 한국 상황에 잘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레닌이 본 제국주의란 원자재 제공 지대 및 완제품 판매 시장을 확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데 저는 한국에서는 "미제"가 필요로 하는 무슨 원자재가 있는지 도저히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본 한국의 유일한 자원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완제품 시장? 미제 자동차 하나, 미제 가전 제품 하나 거의 볼 수 없었던 서울의 거리나 가정집에서는 그것도 현실성이 없는 이론으로밖에 안보였습니다. 소련의 보호국인 북한과 미 제국이 "경쟁"하고 있다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이 경우에는 다음의 문제는 제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대북 관계에 있어서는 소련으로서의 "득"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문제였죠.
제가 잘 알았던 1980년대말의 소련은 북한산 마그네사이트 등 일부 매장 자원을 수입하긴 했는데, 비교적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굳이 "원재료"를 이야기하자면 소련이 북한에 훨씬 더 많은 석유와 석탄 등을 내다 팔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소련의 1990년 대북 수출은 약 20억달러 어치였는데, 대부분은 에너지 자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걸 소련이 북한에 "형제 국가 가격", 즉 세계시장의 가격보다 훨씬 더 싸게 팔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북한은 1985-90년 사이에 소련으로부터 수입한 에너지 자원의 국제 시장 가격과 실제 가격 사이의 약 4억 달러 정도의 차액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는 소련은 북한에 무기 등을 지원했는데, 그건 상당부분은 외상 거래, 즉 북한의 대소련 채무를 늘리는 방식의 대금 지불 없는 거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약 110억 달러에 달하는 북한의 대소련 채무를 러시아가 1991년 이후 인수했는데, 그 채무를 푸틴이 2012년에 그냥 손실처리하여 탕감하고 말았습니다. 뭐,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1971년 그 당시 기준으로 약 140억달러에 달하는 1948년 이후의 미국의 대한국 원조액보다 훨씬 작은 규모긴 하지요. 일단 달러 가치 자체는 1971년에 비해 현재로서 약 7배나 떨어졌으니까요.
결국 미국도 소련도 그 한반도에서의 피후견 국가들을 콘트롤 내지 지원한다고 해서 레닌 제국주의론이 이야기하는 "이윤 창출"을 그다지 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순전히 "현금" 차원에서는 계속해서 "소득"보다 "지출"은 훨씬 컸습니다. 지금 트럼프와 트럼프주의자들이 한국 같은 국가들에 대해 "무임승차"를 운운하면서 "부담금을 대폭 올리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배경은 대체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소 양 제국이 굳이 한반도에 "돈을 써가면서" 계속 관여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통 이 질문에 우리 연구자들은 "지정학적인 고려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일단 경제적으로 계속 손실이 발생돼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대에 후국/피후견 국가 하나쯤 가지는 게 글로벌 제국으로서는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물론 틀리지 않습니다. 제국으로서 후국이란 그 쓰임새는 아주 다양합니다.
1964-1973년 사이에 한국이라는 후국은 미 제국의 베트남 전쟁에 30만 명 이상의 "병력 자원"을 제공했는가 하면, 지금 북한 역시 같은 전철을 이미 밟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경우 한국은 또 하나의 후국이 되려 하는 우크라이나에 우회적으로 포탄을 제공하고 있는가 하면, 북한 역시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내부 식민지 내지 후국으로 만들려 하는 러시아에 또 포탄 등을 지원합니다.
그러니 푸틴이 김정은 즉위 초기에 북한의 누적 채무를 다 탕감해준 것은 "공짜로" 해주는 "은혜"라기보다는, 차후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북한 병사들의 목숨까지 빼앗는 양국간의 "거래"로의 초대였던 것입니다. 러시아든 미국이든 제국은 "공짜로" 뭘 해주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이 후견/피후견 관계에 있어서의 "무기 생산"과 "무기 거래"의 역할입니다. 무기류는 미국 제조업 생산의 약 10% 정도를 차지하지만, 유관 업체까지 합산하면 미국 제조업의 약 50-60%는 직간접적으로 군수 복합체와 연결돼 있다는 것입니다. 군수복합체는 미국의 경제와 사회에서 사실상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군수복합체와 이런저런 연결 줄이 닿아 있지 않는 사회적 부문이란 없습니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주 연금기금 (CalPERS)이나 대부분의 투신들 (Vanguard, American Funds, Fidelity), 그리고 하버드대를 비롯한 대학 재단들은 다 군수 기업의 주식이나 증권에 투자를 해서 소득을 벌어들이는 것입니다. 펜타곤이 연간 배분하는 약 천억 달러 어치의 연구개발비는 미국의 연구계, 학계로서 주요 지원 출처 중의 하나입니다.
인터넷 등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주요 발명들을, 펜타곤의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이 한 것입니다. 미국의 무기 수출은 미국 총국민생산에서는 0.8% 정도 차지하고 있지만 (2023년 통계), 미국의 무기 생산이 미국 경제 전체를 이끌어주고 있는 상황에서는 미국의 군수 복합체를 살찌워주고 있는 무기 수출은 미국의 절대적인 국익에 해당될 것입니다.
한국과 같은 "부유한 후국"들은 일단 미국의 무기 산업의 가장 중요한 "항상적인 고객"이기에, 결국 미국이 1971년 이전까지 한국에 "투자"한 140억달러 정도의 그 원조액에 대한 "이윤"을 너무나 잘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경우 소련제 무기를 "외상"으로 사들이고 나중에 채무 탕감을 받았다 해도, 북한에 의한 소련 무기의 구매는 국제 무기 시장에 있어서의 소련 무기의 위치를 끌어올리면서 궁극적으로 소련/러시아 군수복합체에 득이 된 것이죠.
결국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보호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무기 수출 등으로 생기는 "이익"만을 최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는 "보호가 결여돼 있는 이윤 갈취"만은 더 이상 한국의 지배층을 만족시켜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시점에서는 어쩌면 후국과 제국의 관계는 현재보다 소원해질 수도 있는데, 일단 트럼프 2기 대한국 정책의 "파괴성"이 어느 정도인지 먼저 봐야 그 시점이 언제쯤 올 것인가를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사 등록 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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