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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미 제국의 위기 대처법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4. 8. 17.

닉슨이 트럼프의 '모델'이 될 것인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지금과 같은 미국 패권의 위기는, 사실 이미 역사적 전례 하나 있습니다. 바로 1970년대 초반의 대대적인 "미국의 위기"입니다. 오늘날의 위기는 패권의 몰락으로 이어질지도 모르지만, 1970년대 초반의 위기는 결국 - 간신히 - 모면됐습니다. 한데 그 당시 닉슨 대통령의 위기 대처법은, 어쩌면 이번에 트럼프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 정도를 예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패권 제국이 위기에 부딪치면 취할 수 있는 정책의 "메뉴"는 이미 그 당시에 어느 정도 확인이 된 것이죠. 그래서 한 번 그 당시의 정책 '메뉴'를 반추해보도록 해보죠. 1970년대 초반 미국의 위기는 국내 경제적, 지경적, 지정학적인 3중의 위기이었습니다. 국내 경제적으로 전후 황금기는 이미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존슨 대통령 시기의 베트남 전쟁 비용과 복지 지출 강화 비용 등으로 인플레이가 솟아올랐습니다.

인플레이 문제는, 그 때와 지금 위기의 하나의 관통하는 "코드". 지경학적으로는 전후 북구가 완료된 서독과 일본이 미국의 제조업에 두려울 만한 "경쟁자"가 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이 가면 갈수록 미국이 재정 지출하는 사이에 일본 기업들의 "벌이"만이 커져 갔습니다. 지정학적으로는 미국의 제국 과도 팽창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에서 30만 명의 대군 (1968년 당시)을 주둔시키면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중남미에서 반공 정권 유지 정책을 쓰고, 동아시아에서 남베트남, 대만, 한국 등 위성 국가들을 유지시키고.... 시스템이 과부하되고, 특히 베트남 전쟁이 가면 갈수록 인기를 잃어 미 제국의 대외 정책이 재정적 부담뿐만 아니라 "연성 권력" 실추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단 제국의 retrenchment, 즉 경비삭감/긴축이 요구됐던 국면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미 제국의 상황과 거의 그대로 오버랩되는 상태이었지요. 닉슨이 이런 retrenchment을 단행할 수 있는 적임자이었습니다. 트럼프가 반공주의에 젖은 미국 "애국주의자"로 알려져 있듯이, 닉슨은 매커시즘 시대부터 반공주의 마녀 사냥에의 참여로 악명이 나 있었던 골수 반공주의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극우 반공주의자야말로 retrenchment을 위해 미국의 국외 "전략 자산", 즉 이제 이용가치가 떨어진 "동맹국" 등을 보다 쉽게 처분할 수 있습니다.

좌파는 물론이고 자유주의와도 거리 먼 닉슨/트럼프 같은 타이프의 국가주의자에 대해, 보수 유권자들이 "배신자"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립주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공화당 정통의 "미국 제일주의", 닉슨의 경제 정책의 하나의 배경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단 그는, 미국 국내 인플레이를 억제하기 위해 1971년에 금본위제를 폐지해 한 순간에 여태까지 자본주의 세계 질서의 골간이었던 브레턴 우즈 체제를 붕괴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이 국가의 높아진 재정 지출을 커버하기 위해 통화량 팽창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고, 국채 발행 등에 대한 제한을 없애 자국 경제에의 유동성 조달을 극대화시켰습니다. 한데 동시에 이 조치는 세계 무역을 일시에 혼란에 빠뜨리고 장기적으로는 1974-80년 사이 세계GDP 대비 수출액 감소의 원인이 되었는데, 닉슨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무역보다 국내 시장의 비중이 훨씬 더 큰 미국으로서 그게 큰 문제가 아니었으며, 그가 미국 제일주의자이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의 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전례"인 셈이죠. Retrenchment의 골간은 세계 각처 "전략 자산"들의 일부 처분이었습니다. 일단 주적으로 간주됐던 소련에 대응하기 위한, 28만 명 정도의 유럽에서의 미군 주둔은 대체로 유지됐습니다. 비용 전략 등 차원에서 닉슨이 소련을 두 번 방문하여 데탕트 정책을 추구했는데도 말입니다.

"핵심 자산"인 유럽에서의 기지는 크게 감축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핵심 산유 지대인 중동에서의 미국 영향력 유지 차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도 강력하게 추진됐습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막바지에는 미국이 "핵전쟁 준비 태세"를 갖추면서까지 아랍 국가들의 "보호자"가 된 소련과 이스라엘을 위해 아슬아슬한 벼랑끝 외교를 펼쳤습니다. 1962년 이후 세계가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간 것은 바로 그 때죠.

"핵심 자산"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위치는 아마도 트럼프 밑에서도 유지될 듯합니다. 한데 그 당시로서는 "2차적인 전장"으로 여겨졌던 극동에서의 retrenchment는 엄청 대규모적이었습니다. 전쟁의 피크이었던 1969년에, 베트남 주둔의 미군은 아예 50만 명 넘었습니다. 그 커다란 주둔군은 1973년에 거의 다 철수됐습니다 (적어도 전투 부대에 한해서요). 남베트남 자체는 1975년에 그 종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외부에서 미국의 패배로 여겨졌지만, 사실 닉슨 등 미국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자산을 처분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72년 이후 대중국 협상에서는 대만 주둔 미군의 철수도 약속돼, 그 철수는 1979년에 완결됐습니다. 한 때에 태국에서도 다수의 미군이 주둔했는데, 1973년 이후 거의 다 가버리고, 1968년에 62천이었던 주한 미군의 숫자도 1971년에 4만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에 "2차적 전장"이라고 여겨졌던 아태 지역에서 미국이 이처럼 "군살빼기"에 나섰던 것이죠.

"불필요한 자산 처분"은 그 당시로서는 국외적으로 상당한 충격파를 일으켰습니다. 1975,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을 공격해 파죽지세로 사이공을 향해 진격해 가고 있었을 때에 남베트남의 응엔반티에우 (阮文紹)1973년 파리 협정을 근거로 미국에 협정상 약속된 "지원"을 요청했는데, 돌아온 것은 매정한 ""이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이미 척척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남베트남의 "이용가치"가 제로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광경을 본 박정희가 "다음은 우리가 아닌가?" 싶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이죠. 지금 같은 경우에는, 미국의 주적은 더이상 소련/러시아가 아닌 중국입니다. 그러니까 극동이 "1차 전장"이 된 이상 주한미군 주둔 비용 인상 등의 조치가 있을 수 있어도 한국에 대한 "용도폐기"는 아마도 없을 듯합니다.

, 극동이 1차 전장이 되고, 중동/이스라엘이 그 다음 우선 순위가 되는 상황에서는 미국의 전략 계획상 "동유럽"의 위치가 - 1970년대 초반 때의 극동처럼 - 문제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포기"의 역사를 걱정에 찬 눈으로 다시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지도층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

Retrenchment에 따른 것은 1970년대 중후반 미국의 전반적인 패권의 위기이었습니다. 1974년 에티오피아 혁명, 1978 아프간의 4월 혁명, 1979년의 니카라과 혁명과 이란 혁명... 특히 1970년대 후반에는 전세계적으로 친미 정권의 "위기"가 퍼졌는데, 그 하나의 징후는 바로 박정희 독재의 붕괴이었습니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축적 양식을 들고 나온 레이건 정권은, 한 손으로 군비 확충 정책을 펴고 또 한 손으로 1970년대에 생긴 혁명 정권들 (이란,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아프간 등)에 대한 압살 정책을 펴는 등 궁극적으로 미 패권의 "사수"에 성공했습니다.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주적 소련이 이미 흔들흔들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오늘날의 주적인 중국은 세계 경제에는 미국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하면, 1970-80년대의 소련과 달리 침체 국면이 아닌 강력한 개발주의적 드라이브/중앙집권화/대외 팽창 국면입니다. 그러니까 트럼프가 닉슨의 정책 "메뉴"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펴겠지만, 독점적 패권의 유지는 어려울 듯하고 결국 미-중 양극제로 세계질서가 재편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 이 양극 체제가 성립돼 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저는 소름 끼칩니다. 이번 패권의 위기를 수반하는 유혈극은, 1970년대보다 더 크면 더 클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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