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영원한 패권 제국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근대 제국들의 경우에는, 일단 어느 정도 이상 그 영토가 확장되고 나서는 '제국의 과도 팽창'이라는 문제가 발생되곤 했습니다. 새로이 편입된 영토와 인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새로운 정복 전쟁을 수행할 만한 인적, 행정적, 재정적 자원들이 떨어지고 결국 행정의 부실화 등은 제국의 위기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 전형적인 사례죠.
아니면 19세기의 청나라처럼 인구 팽창이 앞서고, 그 만큼의 농지나 행정 자원이 없어 결국 상당수 농민들의 빈곤화는 대량적인 민란의 폭발로 이어져 제국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었습니다. 근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패권국의 경우, 일단 제조업의 이윤율이 떨어지고, 그렇게 해서 큰 돈들이 생산 부문이 아닌 부동산/주식 투기 내지 금융 부문으로 퍼부어지고, 또 도전 국가들과의 대립 등으로 인한 군비 지출의 과다로 인해 국채 발행 및 그 이자 부담이 적정 수준을 넘고 그러다 보면 제국이 위기에 빠집니다.
1914-45년간 대영제국이나 1970년대 이후 미국의 경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미 제국의 말기적 증상과 지리멸렬, 대외 영향력 쇠락 등등은, 크게 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한데 1980년대 이후 미 집권층이 내린 몇 가지의 아주 문제적 결정들, 즉 저들의 일종의 "자충수"들은 미 제국의 위기를 가일층 심화시킨 측면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첫째, 제조업의 포기는 비록 레이건 이후 신자유주의적 축적 전략으로서 논리적이었지만, "제국의 전략" 차원에서는 분명 자충수이었습니다. 미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함으로서 신자유주의 도입의 문을 활짝 열어준 1971년만 해도, 미국의 고용 구조는 오늘날 중국과 비교될 만했습니다. 즉 약 23%의 미국 피고용자들은 제조업 부문에서 일했던 것입니다.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밀린 소련이 망하게 된 1991년에는, 미국의 고용 구조는 오늘날 한국과 비슷했습니다. 즉 전체 피고용자들의 15% 정도 제조업에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한데 트럼프가 취임하여 신보호주의 정책으로 선회한 2016년에는, 미국 경제의 전체 고용에서는 제조업은 불과 8%밖에 안됐습니다. 트럼프와 바이든 시기의 <반도체법> 등 신보호주의 정책들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해 지금 이 비율은 다시 10%에 근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30-40년 동안 제조업 포기 정책의 후과들을, 빠른 시일 내에 되돌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 등지로의 반도체 생산의 외주화가 시작되기 전인 1990년에는, 미국은 전략 제품인 반도체의 세계 생산의 37%나 담당했습니다. 한데 2021년에 이르러 그 비율은 12%로 떨어졌습니다. 지금 국가 주도로 반도체 생산을 다시 국산화시키고 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잃어버린 생산 능력의 회복이란 그렇게 쉬운 과제는 아닙니다.
둘째, 지금 미국 당국자들이 "중국 위협" 타령을 하고 있지만, 오늘날 자본 대국, 생산 대국으로서의 중국을 1980년대 이후에 키운 것은 사실 미국의 투자와 미국 교육 수출 등입니다. 2000년 이후만 해도 미국 회사들이 중국에 투자한 총금액은 1260억 달러 정도 될 것입니다. 이 숫자는 사실 예컨대 슬로바키아의 총국민생산 (GDP) 정도 되는, 어머어마한 숫자입니다.
1979년 이후 미국에서 공부한 중국 공민들의 숫자만 해도 약 3백만 명에 이릅니다. 이건 예컨대 리투아니아 같은 유럽 소국의 총인구보다 더 큰 숫자입니다. 물론 이 미국의 대중국 투자들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논리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저임금 노동력과 커다란 시장은 중국에의 제조업 투자의 매력 포인트이었고, 중국 유학생들의 등록금은 미 대학들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정도의 대대적인 투자를 결행하고 중국을 자본 대국으로 이 정도 "육성" (?)했다면, 미국 지배자들은 차후 중국과의 패권의 공유 등에 대한 "마음의 준비" 정도 하든지, 아니면 기존의 미국 중심의 패권 구도에 중국 지배자들이 만족하도록 그들에게 모종의 "당근"을 제시하든지 좌우간 본인들이 가능케 만든 중국의 단기간내 "대국 굴기"에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한데 2000년대의 미국 지배자들은 이라크 침략 등 저들에게도 백해무익의 침략 전쟁을 수행하느라 바빴고 중국의 초고속 성장을 사실상 "놓친" 셈이 됩니다. 이것도 제국 논리 차원에선 일종의 자충수죠.
셋째, 미국은 1991년 이후 러시아를 방치했습니다. 사실 1990년대 초반의 러시아 이상으로 친미적인 사회도 없었습니다. 한데 1990년대의 미국, 즉 클린턴의 미국은 서구의 경제 식민지가 된 동유럽을 점차 나토 등으로 흡수하면서 러시아 지배자들에게 미 중심의 안보 체제에서의 그 어떤 편입의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옐친도 초기의 푸틴도 계속해서 클린턴에게 "러시아의 나토 가입의 가능성"을 타진해 왔는데, 미국은 이 움직임들을 무시해 왔습니다.
러시아의 나토 가입의 경우 나토 내부의 어마어마한 무기 시장도 러시아 업체에 개방했어야 했는데, 그건 미국의 무기 수출 업체들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라크에서의 미국의 패배를 목격한 푸틴이 미국이 "쇠락하고 있다"고 판단해, "뜨고 있는" 중국과의 일종의 준동맹을 체결해 무력을 통한 유럽 판도의 "재편"에 지금 착수한 것입니다. 물론 무력을 사용한 것, 즉 세계 평화를 깬 것은 푸틴의 범죄임에 틀림없습니다. 한데 미국 역시 러시아를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시킬 기회를 1990년대나 2000년대 초기에 놓친 것이고, 이건 미 지배자들의 자충수라면 자충수입니다.
제국은 한꺼번에 몰락하지 않습니다. 영국이 세계 철강 생산에 있어서의 1위를 독일에 빼앗긴 건, 즉 생산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본격적으로 상실하게 된 것은 1913년인가 하면, 영국 외무성이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이익 등을 포기해야 한다고 내부적 판단을 내린 것은 1960년입니다. 즉, 영국의 패권 상실 과정은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진 거고, 미국의 경우도 이 정도나 그 이상 걸릴 겁니다. 한데 이 과정이 지금 진행중에 있다는 것도 틀림 없는 사실이고, 이 패권 상실에 미 지배자들의 각종 자충수들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기사 등록 202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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