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팍스 아메리카나, 즉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용광로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반파쇼"라는 코드는 미 당국과 좌파의 공통의 분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절에는 미 국가나 미군의 일부 관계자들은 바로 공산주의자나, 공산당과 친화성이 있는 좌파들이었습니다. 미 공산당원인 현 앨리스가 미군 구성원으로서 해방된 남한에 온 사실이 유명한데, 사실 그녀만도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최근 영화를 통해 "미국의 프로메티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다시 화제가 되었지만, 그야말로 2차 대전 시절에 미국 좌파가 해낸 역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념적으로 좌파에 가깝고 애인이 공산당원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전쟁 그 당시에 최고의 전략 프로젝트인 핵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된 것이죠. 말하자면 국제적 레벨에서 미-소 양국이 동맹국이 된 것처럼 국내적으로 미국의 급진 좌파가 미 국가가 "짧지만 너무나 짙은 밀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밀월은 약 1947-48년, 즉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끝나게 됩니다. 소련은 - 장기적으로 필연히 오래 가기 힘든 - 그만의 "작은 세계 체제"인 동구권이라는 독자 권역을 만들게 되고, 미국은 냉전형 영구 무장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미-소 적대적 공생은 양쪽에 생명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소련 당국자들에게는 "미제"의 존재란 소비 억제를 기반으로 한 내부 동원형 경제의 지속적 가동의 명분이 되었는가 하면, 미국 당국자들에게 소련이라는 "전체주의적 적"의 존재는 영구 무장 경제, 즉 무기 생산을 통해 불경기 등을 극복할 수 있는 경제의 명분이 된 것입니다.
미-소의 적대적 공존은, 한반도에서는 나중에 남북의 적대적 공존의 모델이 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적대적인 공존의 상황에서는 미-소 양국의 당국에는 반대쪽의 허를 찌를 만한 "이데올로기"가 요청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체주의"가 왜 무섭고, 불완전하다 해도 "자유의 미국"이 왜 그래도 상대적으로 나은 것인지 설명해야 했는가 하면, 소련에서는 전시의 동맹국이 이제 다시 "적 미제"가 된 내역 등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상대방을 겨냥하는 냉전 초기 이데올로기의 성립이라는 과제를, 솔직히 미국이 소련보다 훨씬 잘 수행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초기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대체로 재능 좋은 "비판적 좌파"들이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볼셰비키라는 운동이 1917년 이후에 국가가 되고, 나중에 혁명 국가가 보수화되어 가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좌파들이 소련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좌절했습니다.
일찌감치 1921년에, 레닌과 트로츠키가 크론슈타드에서 볼셰비키에 등을 돌려 반기를 든 크론슈타드의 소비에트의 운동을 유혈 진압한 뒤에는 전세계의 아나키스트들부터 소련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1927년 이후 트로츠키를 따르는 급진파는 스탈린을 따르는 보수파에 가면 갈수록 더 강력하게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스페인 내전의 과정에서 소련 비밀 경찰 요원들이 벌인 아나키스트나 "트로츠키주의자"로 지목된 POUM 등 비주류 좌파 조직에 대한 피의 숙청은 더더욱더 그 골을 깊은 걸로 만들었습니다.
제2차 대전 때에는 구미권의 사민주의자들이 대체로 친소비에트적인 경향으로 돌어섰지만, 폴란드나 동독에서의 공산당과 사민당의 강제 합당,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공산당의 편법적 권력 장악 등이 그들도 스탈린의 국가를 가면 갈수록 "위협"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아나키스트와 트로츠키 등의 반스탈린 비판에 영향을 받은 독립 좌파, 그리고 사민주의자 등 여러 종류의 "비판적 좌파"들은, 초기 냉전의 반공 이데올로기 성립에 거의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초기 냉전 반공주의의 "바이블"은 1949년에 출판된 오웰의 <1984>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때에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한 바르셀로나에서의 아나키스트들의 숙청에 일대 충격을 받고, 그 뒤에 트로츠키 등의 소련 비판에 영향을 받은 오웰은, <1984>에서 "엠마뉴엘 골드슈타인"이란 이름으로 트로츠키를 연상케 하는 캐릭터를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골드슈타인"이 쓴 <서열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천>이라는 "반대파의 기본 텍스트"를, 주인공이 읽고 존재하지도 않은 지하 야당에 가입했다가 비밀 경찰의 손에 넘어갑니다.
<서열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천>의 일부 내용은 소설에서 길게 논급되는데, 그 내용은 트로츠키의 <배반 당한 혁명> (1937)을 그대로 방불케 합니다. <1984>의 힘이라면 그 비판성이 꼭 소련만을 겨냥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철저한 사회주의자인 오웰은, 서로간에 영구적인 전쟁을 벌이는 세 개의 강대국의 합종연횡을 묘사하면서 사실 미국의 영구적인 무장 경제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오웰의 자본주의적 대중 문화 비판은, 아도르노나 마르쿠제를 그 기반으로 합니다. "자기 편"도 비판하면서 반대편을 비판하는, 이런 자세는, 사실 비판의 신뢰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권의 반공의 바이블은, 한국에서도 수 차례 국역, 출판된 빅토르 크라브첸코의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 (1947)이었습니다. 체제에 실망한 오웰 소설의 주인공을 닮은 것 같기도 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크라브첸코는, 대숙청과 우크라이나에서의 기아 사태 (홀로도모르), 소련 관료층의 특권, 스탈린의 탈이념화된 실력 정치 등에 실망한 "진지한 사회주의자"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를 혐오하게 된 이유는 스탈린의 정치가 "혁명의 이상"을 배반했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그 비판 의식을 그에게 더더욱더 키운 것은, 그가 미국에 파견돼 거기에서 만난 사민주의자 (러시아의 망명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주의자이었습니다. 그는 소련 만큼 미국에 비판적이었으며, 시장에서 실패한 그의 두번째 비판서는 바로 자본주의와 미국을 겨냥했습니다. 역시 이와 같은 "내부로부터의 비판"이야말로 신뢰성 얻기가 쉬웠습니다.
오웰이나 크라브첸코의 명작에 걸맞는, 재미있고 사람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미국 비판서는 소련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사실 바로 이거야말로 소련 체제의 약점이었죠.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나 아나키스트 등 비주류 좌파까지도 필요할 때에 그 작품을 활용하고, 체제에 어느 정도 편입시킬 수 있었습니다.
훨씬 더 경직되고 이데올로기화된 소련 체제에서는 비주류들에 대한 이와 같은 활용과 편입은 훨씬 더 힘들었던 것입니다. 1940년대말-1950년대초에 소련에서도 "반미 소설"이라는 장르가 생기고 작품들이 나오지만, 읽기가 거북스러울 정도로 "주문 생산" 표시가 나는, 품질 좋지 않은 작품들이었죠. 사실 이 초기 이데올로기 경쟁에서의 이와 같은 패배는, 소련 체제의 하나의 큰 약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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