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 즉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는 이제 그 말기적인 쇠락의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달러 패권이나 미군 기지 등을 통한 지구에 대한 공간적 통제 등은 얼마 더 가긴 가겠지만, 2020년대에는 이미 "포스트-아메리칸" 시대의 윤곽이 점차 잡히는 것입니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고통스럽게 그 말기적 단계를 향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초기를 한 번 다시 기억해보는 것이 다소 의미 있는 일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팍스 아메리카나가 지금도 보이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은 이미 그 초창기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실물 경제 같은 영역에서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논하는 것도 좀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세계적 실물 경제의 중심은 이미 중국이죠. 중국은 미국보다 2배 이상 더 많은 전기를 발전하는가 하면 전세계 제조업 상품의 약 30%를 만들어 팝니다.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의 미국의 비중은 이미 그것보다 약 2배 작은 편이죠.
미국의 제조업 장악 시대는 이미 간 것이고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습니다. 한데 1945-1955년간은 바로 미국 제조업의 둘이 없는 "최고의 호황기"이며 세계 장악의 시기이었습니다. 한국 전쟁이 시작한 1950년에는, 미국이 전세계 제조업 생산의 60%나 갖고 있었고, 전세계 제조업 제품의 29%를 수출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의 세계 제조업 장악은, 오늘날 세계 제조업에 있어서의 중국의 지배적 위치보다 두 배나 더 철저했던 셈이죠. 바로 이와 같은 세계 제조업 장악은 미국의 그 당시 세계적 패권 확립의 튼튼한 "기반"이었습니다. 그런 기반이 없는 이상 세계 패권의 유지 자체도 힘든 일이죠.
미국의 제조업을 이와 같은 글로벌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결정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경쟁국인 독일, 일본, 영국 등이 전쟁으로 심한 타격을 받고, 독일이나 일본처럼 폐허 되기도 했지만, 미국은 반대로 전시 특수로 생산력을 훨씬 더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일단 군소 공업이 기술 개발 등의 차원에서 제조업 전체를 이끌고 있다는 점을, 이미 전후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군수 공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보장할 수 있었던 새로운 "특수"란 바로 1947-8년부터 본격화된 냉전이었습니다. 냉전은 군비의 증가가 주도하는 경제 발전 모델의 지속을 의미했습니다. 미 정부 냉전 전략의 중심에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비밀해제된, 1950년4월14일에 채택된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제68호 (NSC-68)이었습니다. 이 전략 문건은 소련을 "전세계 패권을 노리는 적대 국가"로 지정하여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을 "차단"시키는 방식으로서 (고립주의나 선제 공격이 아닌) 미국 무장의 증강을 선택한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적대적 공생"을 하기 시작한 것처럼, 세계적 차원에서도 이제 소련과 미국의 적대적 공생은 미국의 영구 무장 경제의 "무한 재생산"을 보장해야만 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반은 제조업에 있어서의 미국의 패권이었으며, 미국의 제조업은 제1,2차 대전의 시기를 지나 "영구한 전쟁을 위한 경제"로서의 특징을 나타낸 것입니다.
패권의 또 하나의 조건은 바로 "노동 계급의 순치, 포섭"입니다. 지금 새로운 패권 국가로 도약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에는 사실 세계에서 파업이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동계급에 대한 "순치 작업"도 계속 진행되는 사회입니다. 이 순치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실질 (인플레이 감안한) 임금의 인상과 이에 따르는 소비력의 강화죠.
2006-2016년간, 10년 동안 중국 제조업 노동자의 평균 실질 임금은 2배나 올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식" 노조에 대한 당의 장악입니다. 중국의 공식 노조인 중화전국총공회 (中華全國總工會)는 3억2천 만명이 가입한 세계 최대 노총인데, 공산당이 이를 철저하게 "영도", 즉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1945-55년간 그 당시 신흥 패권 세력인 미국에서의 노동계급 순치 작업도 대체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한국 전쟁 특수 등 세계 각처의 냉전 속 열전 등으로 미국 제조업이 지속적 호황을 누리고, 그 만큼 1950년대의 미국은 "전례 없는 소비 붐"을 경험했습니다.
지금의 중국도 그렇듯이, 그 당시 미국의 소비 붐은 상당수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들에게도 "중산 계급"과 비슷한 것 같은 소비력을 잠시나마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1955년에 상당수 육체 노동자를 포함한 미국 가구의 70%나 이미 자가용을 소유했습니다. 같은 해에는 동서안 사이에 여행할 때에 비행기를 타는 미국인의 수는 열차 승객 수보다 더 커진 것입니다.
자가용을 타고, 휴가를 비행기로 가고, 호텔에서 묵고, 1-2층 자기 주택을 소유하는 "잘 사는 노동자"들은 다수는 아니었다 해도, 노조 관료 상층부는 대체로 이 "잘 사는 노동자"들의 보수적 세계관이나 이해관계를 표방했습니다. 미국의 노총인 AFL-CIO의 장기 의장 (1955-1979년)인 George Meany는 대체로 이런 "잘 사는 노동자"와 보수적 노조 관료를 대표한 것인데, 거의 초기 냉전의 주도 세력인 민주당과 유착된 상태이었습니다.
1975년의 남베트남 완패의 그 날까지 베트남전을 옹호한 보기 드문 미국의 정치인은 바로 George Meany이었죠. 물론 "베트남전 특수"가 미 제조업의 번영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어느 정도 논리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좌우간 냉전 초-중기의 미국의 노총 관료들은 펜타곤 이상의 반공주의적 열정을 보였습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노총을 관리하고 미국에서 민주당과 노총 관료들이 유착됐지만, 좌우간 패권 국가에서의 조직 노동의 "포섭"이라는 것은 그 공통점입니다.
주류 종족(중국에서는 한족, 미국에서는 백인)에 속하는 노동자까지도 "호황"의 시기에는 포섭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마이너리티는 패권 주기의 초기에는 '포섭'보다 '배제'를 당할 확률은 더 높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예컨대 강제 수용과 강압적인, 종종 고문에 해당되는 "재교육"을 받는 위구르인들은 바로 '배제'와 함께 강제 동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950년대의 미국이라면 여전히 흑인과 아시아인 등 "유색 인종"을 합법적으로 차별하는 국가이었습니다. 1952년의 미국 이민국적법은 여전히 아시아인들의 미국 이민을 철저하게 차단시키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미 남부의 상당수 주들은 여전히 인종간 결혼 금지법 (Anti-miscegenation laws)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백인과 한국 이민자의 결혼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이런 법률들에 대해 한나 아렌트 선생처럼 히틀러의 인종 청소 정책을 피해 미국에 이민 온 유럽의 유대인 지식인들이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1958년만 해도 94%의 미국 응답자들은 한 여론조서에서 인종간의 결혼의 불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여겼습니다.
1963년에 이런 법률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전직 대통령 트루먼은 "당신이 당신의 딸이 흑인과 결혼하기를 바라겠느냐? 그녀는 그녀와 피부색이 같은 이가 아니라면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냉전 초기 미국의 국시는 "소련 전체주의와의 투쟁"이었지만, 진작 바로 그 미국에서는 인종주의는 거의 전체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향력을 여전히 미치고 있었습니다.
비록 - 당국가인 중국과 달리 - 1950년대 초반의 미국은 다원주의적 민주 국가이었지만, 패권 초기 미국의 사회는 많은 면에서 여전히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낙태권이나 동노동에 대한 남성과의 동임금, 이혼권 등은 아직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징병제 국가이었으며, 징병 내지 참전 거부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급진적 반대파 - 예컨대 급진적 평화주의나 사회주의자 등 - 는, 감옥행은 아니더라도 취직 등에 있어서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 초반의 미국의 가장 유명한 동아시아 전문가 중의 한 명은 Owen Lattimore이었는데, 그가 한 때에 "공산주의에 친화적이었다"고 하여 미 국회 반미활동위 조사를 받고, 결국 미국 학계에서 더이상 발을 못붙이게 되어 영국의 리드스 대학 중국학과로 가야 했습니다.
비록 형식상 민주 국가라 하더라도 미국은 주류와 크게 다른 의견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정상적 캐리어를 허용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나 1950년대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적 법률 (인종간 결혼 금지 등)이야 이미 수정된 지 오래 됐습니다. 한데 "전쟁 특수"를 필요로 하는 제조업의 구조, 즉 군수 공업의 비대화라든지, 비교적 보수적 노총 관료,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의 개입과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세계 전략의 구조 등은, 지금도 여전히 미국의 당면한 현실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의 패권은 경향적으로 약화되어 간다 해도, 이 문제들은 결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사 등록 202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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